인문학과 신학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의 신학 사상
그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를 중심으로
주교재와 참고도서
1) Moral man and Immoral Society, 1932년 발행,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이한우 옮김, 문예출판사, 2015년 제2판.
2) The Nature and Destiny of Man, 1943년 발행, 인간의 본성과 운명(1, 2), 오희천 옮김, 종문화사, 1권 2013, 2권 2015.
3) An Interpretation of Christian Ethics, 1935년 발행, 기독교 윤리학, (단행본 번역이 않되어 있음).
4) The Children of Light and the Children of Darkness: A vindication of Democracy and Critique of its Traditional Defenders, 1944년 발행, 빛의 자녀들과 어둠의 자녀들, 오성형 옮김, 종문화사, 2017.
들어가는 말
오늘의 key words들은 인간, 사회, 구조, 구조악, 정의, 기독교 현실주의, 사회적 약자, 사회구원, 통전적 구원, 사회적 영성과 같은 개념들입니다.
핵심적 질문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기독교는 죽은 다음에 천당가는 문제 즉 흔히 말하는 죽은 다음 구원받는 문제만 다루면 된다고 생각하는가?’ ‘기독교는 우리 자신의 일상적 삶을 포함하여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제반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해도 되는가?’ ‘기독교는 현실문제에 대하여 어디까지 어떤 수단과 방법을 통하여 개입하고 참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예수를 주님으로 영접해 드리고 신앙을 고백하는 것 만으로도 이미 그리스도인으로써의 사명을 다 했다고 생각하는가?’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은 함께 가야 온전한 총체적 구원을 이루게 되는 것이 아닌가?’ 라인홀드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를 읽고 그의 중심사상을 공부하려는 이들에게 제기되는 가장 근본적 질문입니다.
오늘 저는 니버의 신학적 사상을 이야기하기에 앞서서 여러분들이 잘 알고 계시는 ‘라인홀드 니버의 기도문’을 소개하고 같이 읽는 것으로 이 강의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주님, 우리가 도저히 바꿀 수 없는 일들은 평온한 마음으로 받아드리게 해 주소서. 하오나 우리가 마땅히 바꿀 수 있는 일들에 대해서는 변화를 추구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시옵소서. 그리고 진정 우리가 어떤 것은 바꿀 수 있고 또 어떤 것은 바꿀 수 없는지 그 둘을 구별해 낼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여기고, 주시는 순간순간을 기쁨으로 살아가게 해 주소서. 모든 고통이란 결국은 평안으로 가는 오솔길임을 알게 해 주소서. 죄로 가득한 이 땅에서 제가 원하는 것들만 받아드리지 말고 주님이 하셨던 것처럼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그냥 받아드릴 줄도 알게 해 주소서. 모든 것을 주님의 뜻에 맡기면 마침내는 주께서 모든 것을 잘되게 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해 주소서. 이 땅에서는 분수에 맞는 적당한 행복을 누리게 하시고 그 나라에서는 주님과 더불어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해 주소서. 아멘”
(영문 – God, grant me the serenity to accept the things I cannot change, The courage to change the things I can, And the wisdom to know the difference. / Living one day at a time, Enjoying one moment at a time, Accepting hardship as a pathway to peace, Taking, as Jesus did, This sinful world as it is, Not as I would have it, Trusting that You will make all things right, If I surrender to Your will, So that I may be reasonably happy in this world, And supremely happy with You forever in the next. Amen. 현재 전해지는 그의 영문기도문에는 약간 차이가 있는 몇 가지 다른 version들도 있습니다).
라인홀드 니버(Karl Paul Reinhold Niebuhr, 1892-1971)
그의 인물과 삶의 경험, 신학과 윤리적 사상, 저서의 시대적 배경, 핵심 사상 등을 살펴보려 한다.
1) 그의 인물과 삶의 경험
이 책을 지은 라인홀드 니버는 1892년 미주리주의 라이트(Wright)에서 독일 선교사인 Gustav Niebuhr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친은 복음주의 개혁교회(Evangelical and Reformed Church)의 목사였고 그의 동생도 유명한 신학자 리챠드 니버(Helmut Richard Niebuhr 1894-1962, 예일대 기독교윤리학교수, Karl Barth와 Paul Tillich 등과 함께 신정통주의를 대표하는 신학자, 대표적 저서 ‘그리스도와 문화’[Christ and Culture] 김재준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1998) 였습니다. 그는 일리노이주의 Elmhurst대학을 거쳐 이든 신학교(Eden Seminary)와 예일대학에서 학사와 석사 과정을 공부한 다음 1915년 목사로 안수를 받고 목회자와 교수로써 평생을 산 기독교 사회윤리학자입니다.
목사가 된 후 그는 처음 독일 복음주의 선교부(The German Evangelical Mission Board)의 파송을 받아 13년 동안 미국 중북부의 대표적인 공업도시인 디트로이트에서 목회자로 일했습니다. 제레드 다이아몬드가 그의 ‘총 균 쇠’에서도 말했듯이 한 시대의 문명과 문화는 결국 그 시대의 환경이 만들어준다고 봅니다. 모든 텍스트는 콘텍스트의 산물입니다. 모든 텍스트는 Sitz im Leben(삶의 자리)에서 읽고 해석해야 합니다(사람들이 하는 말이나 글은 모두 그 말과 글을 하게 된 시대적 혹은 공간적 배경의 산물이고 따라서 그 배경의 이해가 없이는 그 말과 글의 의미를 올바로 알 수가 없습니다. 다른 일반 문학이나 철학도 그렇지만 특히 구약의 창세기를 비롯한 5경은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읽을 줄 알아야 하고 신약의 복음서들도 그 복음서 기자들이 살았던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입장에서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20세기 초 니버가 목회했던 디트로이트란 어떤 곳인가요? 산업화의 상징이며 도시화의 대표성을 지닌 곳이었습니다. 자동차 산업으로 산업화, 공업화는 가속되어 갔고 인구 증가와 도시 팽창에 따른 빈부의 격차, 범죄의 증가는 물론이고 반복되는 고용과 해고, 노조에 대한 탄압과 투쟁은 끊일 줄을 몰랐습니다. 처음 목회를 시작할 즈음에는 신도들의 숫자가 60여명 정도였으나 1928년 유니온 신학교로 이임할 때는 700명 이상으로 늘어났습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당시 미국사회가 전반적으로 이민자들이 급증한 데도 원인이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디트로이트에서는 포드 자동차공장이 확장되면서 갑작스럽게 노동인구가 유입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에서 그는 산업화에 따른 빈부격차와 노동자들의 비인간적인 처우와 사용자들의 부도덕적인 회사 운영을 목도하면서 Henry Ford를 비판하고, 노동조합을 조직하도록 돕고, 설교와 여러가지 글들을 통하여 노동자들의 현실을 고발하고, 노동 현장의 잘못과 그릇된 관행들을 비판했습니다(마치 1960-70년대 구로공단에서의 공돌이들과 공순이들을 생각나게 하고 ‘도시산업선교회’의 출발과 활동 경험을 되새겨보게 해 줍니다).
당시 디트로이트는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를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유럽으로부터의 이민자는 하루가 다르게 증가했고 그들은 기득권자들로부터 부당한 차별과 가혹한 냉대 속에서 온갖 차별을 받았습니다. 사회적 부의 총량은 늘어나고 있었지만 개인에 대한 부당한 억압과 대량 생산에 따른 부의 편증, 자연계와 생태계의 파괴, 점증한 사회악은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니버는 한 지역교회의 목회자였지만 정부와 사용자를 대항하여 노동자들의 권익을 옹호하고 노조의 결성을 지원하고 파업을 선동하고 파업 기금을 지원하기 까지 했습니다. 그는 부유한 계층을 비판하고 주식을 조작하여 부를 축적하는 행위를 악으로 규정하고 그런 형태로 벌어들인 돈을 교회에다 헌금하는 행위를 죄라고 설교했습니다(노동자들의 임금을 착취해서 벌어드린 돈의 십일조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헌금이 아니다). 거기에다 흑백 사이의 긴장은 끊이질 않았고 KKK(Ku Klux Klan, 미국에서 남북전쟁 이후 생겨난 극우 비밀결사단체로써 흰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면서 백인우월주의, 반유대주의, 인종차별주의를 표방한다. 노예해방을 반대하고 이민과 유대인들과 기독교를 반대한다) 같은 조직적이고 폭력적인 단체의 활동이 강화 되면서 새로운 이민자들과 흑인들에 대한 차별은 디트로이트 전체를 더욱 더 무섭고 어둡게 만들어 갔습니다.
니버는 이런 사회적 부조리에 대하여 목회적 및 신학적으로 대립했습니다. 그러나 이 싸움은 정말 어렵고 긴 투쟁의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니버의 사회복음적 신학사상은 주로 디트로이트에서 경험했던 그의 초기 목회현장에서 부터 나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후 그는 1960년 은퇴할 때까지 뉴욕 유니온신학교에서 기독교윤리학 교수로 봉직했습니다. 1, 2차 세계대전을 치루고 자신의 조국 독일이 나찌의 손에 넘어가는 ‘무서운 악의 구조’ 속에서 그의 신학사상은 Dietrich Bonhoeffer나 한나 아렌트 등과 더불어 오늘 우리 시대 기독교 사상의 또 다른 큰 축을 형성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는 옥스포드와 글래스고 대학을 비롯하여 하바드, 콜럼비아, 예일, 프린스톤 등 유수한 여러 대학에서 명예 학위를 받았습니다.
1939년에는 영국 에딘바라대학이 주관하는 ‘기포드 강연’(Gifford Lectures)에서 ‘The Nature and Destiny of Man: A Christian Interpretation’(인간의 본성과 운명)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으며 후에 이 강연은 두 권의 단행본으로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은 그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와 함께 니버의 대표적 저서입니다(기포드 강연회와 여기에서 강연한 유명 인사들).
2) 그의 신학과 윤리적 사상
니버 신학 사상의 핵심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기독교 현실주의’(Christian Realism), 혹은 ‘기독교 사회주의’(Christian Socialism)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니버가 주장한 기독교 현실주의란 ‘기독교가 참된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삶의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 문제에 대해서 침묵을 하거나 눈을 감아서는 않된다’는 것입니다. 이 사상은 “기독교는 인간 삶의 현실에서 벌어지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고 연구, 분석하고, 현실에 참여하고 대안을 제시하여 보다 더 성서적이고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려는 데 두어야한다”는 신념이 있었습니다.
그는 기독교 신앙과 신학은 죽은 다음에 가는 천국에다 강조점을 두는 미래적이며 내세지향적 성격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Here and Now) 우리가 현실적으로 살아가는 삶의 현실에서 사랑과 정의를 구현하는 현실주의적 종교가 되어야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오늘의 기독교가 영향력을 상실하고 타락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교회와 신학이 시간성과 역사성을 ‘영원이라는 영적 차원’에다 묶어둔 것으로부터 기인된 것이라고 진단하고 교회는 잃어버린 예언자적 변증법을 회복해내야한다고 역설했습니다. 니버는 도덕적 예언자의 이상주의가 인간 삶의 모든 현실과 연계되지 않는다면 이런 기독교는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예언자적 도덕적 이상이란 바로 ‘정의’(Justice)이며 ‘정의로운 사회’(Social Justice)를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사랑만 가지고서는 결코 도덕적 이상사회를 만들 수는 없다’고 주장한 니버는 그 대안으로 ‘정의’를 제시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착하고 선한 개인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 넘치는 선한 개인들도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에 들어가면 그들의 그 선한 성품을 이어가지 못하고 악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착한 사람들이 사는 악한 세상’이 되고 ‘선한 인간들이 만드는 악한 세상’을 보게 됩니다. 도대체 왜, 어떻게 이런 부조리와 부조화와 불균형한 일이 생기는 것일까요? ‘착한 사람’들이 사는 이 ‘악한 현실’ 속에 니버를 비롯한 기독교 현실주의자들은 ‘성서가 가르치는 개인적 사랑이란 사회적 정의와 분리해서는 않된다. 이 둘은 서로 하나가 되어야하고 연합되어야한다’는 신념에서 사회참여, 사회개혁, 더 나아가서는 사회혁명적 성격까지도 내포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인간의 선한 의지만 믿고 개인의 회심을 통하여 예수의 사랑과 가르침(이를테면 산상수훈 같은 것들)을 넉넉히 실천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것은 인간과 사회가 지닌 근본적 악에 대하여 눈을 감는 ‘순진한 악’이요 ‘천박한 낙관주의’라고 규정했습니다. 니버에 앞서서 이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Walter Rauschenbusch였으며 동 시대의 John Bennett, John Murray, Paul Ramsey Michael Novak 등도 그와 함께 했습니다. 니버는 철저하게 ‘기독교는 현실적 질문과 문제에 대하여 대답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믿었으며 ‘현장과 접목되지 않는 진리는 참된 진리가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개인의 도덕은 사랑이지만 집단의 도덕은 정의’라는 기본적 이해 위에서 이 둘 사이의 변증법적 지향을 시도했습니다.
이와 더불어 니버는 ‘인간이란 무엇인가?’하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을 보는 눈에는 3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고전적 인간’(The Classical View of Man) 이해입니다. 이것은 ‘인간을 합리적이며 이성적 존재’라고 보는 입장입니다. 전통적인 그리스 철학적 인간 이해, 곧 Hellenism적 인간관입니다. 그런데 니버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직접 1, 2차 세계대전과 나치의 폭정을 경험하면서 ‘인간이란 더 이상 이성적 존재가 아니라’고 본 것입니다. 니버 시대에 이르러 전통적 인간이해는 불가능해 졌습니다.
두 번째는 ‘근대적 인간’(The Modern View of Man) 이해입니다. 이는 인간을 ‘개인’(Individual)으로만 보려는 시각입니다. 르네상스 이후 근세철학과 20세기 이후 더욱 크게 강화된 개인의 자유와 지나친 개인주의 사상은 인간 개개인을 모든 것의 중심이요 범접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인간의 ‘개체성’(individuality) 만 강조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개체적 인간이해는 결국 모든 인간을 이기주의적 존재로 전락시키는 함정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에서 그는 세 번째로 ‘성서적이며 기독교적 인간’The Christian View of Man) 이해를 시도합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이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진 자기초월성을 지닌 존재’이면서 동시에 악으로 물든 유한한 존재요, 의존된 존재요, 유한한 존재입니다. 인간이란 ‘빛의 자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두움의 자녀’이기도 하다는 논리입니다. 그래서 그는 창세기 1장에 나타나는 인간과 2장에서 그려지는 인간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봅니다. 전체와 부분, 선과 악, 빛과 어두움, 이성과 감성, 사랑과 정의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인간을 통시적으로 보기를 요청합니다. 특히 니버는 그의 ‘빛의 자녀들과 어두움의 자녀들’에서 인간이란 한 편에서는 자기초월의 능력을 지니고 있는 도덕적 존재요 빛의 자녀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인간이란 이기적이고 탐욕과 교만에 젖어든 어두움의 자녀라는 양면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처음부터 한계가 분명하게 드러난 인간의 사랑과 정의는 끊임없는 교육과 영적 각성도 필요하지만 제도적으로 만들어지고 향상 발전되어가는 사회적 구조와 끊임없는 사회적 투쟁도 동시에 필요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3) 이 책이 쓰여진 시대적 배경
19세기 유럽에서는 영국에서의 산업혁명으로 부터 시작하여 계몽주의가 꽃피어지고 민주정치를 향한 시민의식의 점증되었습니다. 그러나 1918년 제 1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사회적 혼란은 세상을 겉잡을 수가 없을 정도의 비극적 상황으로 몰고 갔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앞서 니버의 삶의 경험에서 말씀드렸기 때문에 간단히 줄여서 말씀드립니다. 1920년대 미국은 지속적인 경제적 번영의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국민 총생산은 년 3.2%를 넘었습니다. 산업화는 급속하게 전진했고 1924년에 만들어진 이민법으로 인하여 남부와 동부 유럽으로 부터는 수많은 이민자들이 몰려왔고 폭발적으로 인구가 증가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시대 미국은 (1) 산업화와 공업화(Industrialization)가 급격하게 증가했습니다. (2) 그에 따라 도시화(Urbanization)의 물결이 넘쳐났습니다. (3) 이에 대한 부작용으로 사회적 양극화(Polarization / Extremitization)의 현상이 도드라지기 시작했습니다. (4) 사회적 범죄는 증가했으며 갈수록 포악해 졌습니다. (5) 공해문제는 점점 심각해 졌으며, (6) 건국 초기의 청교도적 윤리의식은 갈수록 희미해졌으며 자유, 평등, 박애 같은 초기건국 이념은 퇴색해 갔습니다. (7) 결국 ‘돈이 최고다’하는 자본주의적 황금만능 사상이 점점 팽배해졌습니다. (8) 그 시대의 경제적 번영은 결정적으로 인간을 인간이 되지 못하게 하는 비인간화 혹은 동물화(Dehumanization / Beastialization) 현상을 가져오고야 말았습니다.
4) ‘도덕적 인간과 부도덕적 사회’의 줄거리와 핵심 사상
흔히 이 책은 20세기 기독교 신학에서 칼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에 버금 갈 정도로 크고 넓게 영향을 끼친 고전으로 평가 됩니다.
신학적으로 아직 기초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읽고 이해하기가 많이 어려운 책입니다. 니버 자신이 글을 쓰는 필법도 쉽지는 않지만 성서와 기독교 신학에 대한 깊은 통찰력도 요구되고 더 나아가 서양 철학사와 철학적 개념들에 대한 훈련과 전이해가 없이는 읽고 이해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1932년 초판 서문과 1960년에 추가한 서문을 제외하면 모두 10개의 chapter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 인간과 사회: 함께 살아가는 법. (2) 사회생활을 위한 개인의 합리적 원천들. (3) 사회생활을 위한 개인의 종교적 원천들. (4) 여러 민족의 도덕성. (5) 특권 계급의 윤리적 태도. (6)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윤리적 태도. (7) 혁명을 통한 정의. (8) 정치적 힘에 의한 정의. (9) 정치에서 도덕적 가치의 보존. (10) 개인의 도덕과 사회의 도덕 사이의 갈등.
‘도덕적 인간과 부도덕적 사회’라는 책 이름만 읽으면 오해가 생길 소지가 있습니다. 니버는 모든 인간을 도덕적 존재로 보고 사회는 부도덕적이라고 단정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도덕적이고 사회는 부도덕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인간이란 도덕적으로 이미 파산된 ‘죄인’이라고 봅니다. 인간이란 죄와 교만과 탐욕으로 물들어서 불안해하는 존재입니다. 그가 인간을 ‘도덕적’이라고 표현한 것은 ‘인간이란 어떤 행위를 할 때 비교적 집단적 사회보다는 타인을 배려하기도하고 다른 사람의 이익을 존중할 줄도 안다’는 면에서 ‘도덕적(Moral)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에 반하여 ‘집단적 사회는 언제 어디서나 개인보다 훨씬 더 이기적이고 잔인하다’는 것이 니버가 보는 사회입니다.
그는 개인과 사회는 그 죄성과 부도덕에서 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그에 의하면 이 둘은 상대적입니다. 인간 개개인은 개인들의 집합체인 사회에 비하여 ‘비교적’ ‘상대적으로’ ‘약간은’ 도덕적이라는 경험을 전제하고 사용한 개념이라 하겠습니다. 그에 의하면 개인은 사회 보다는 근본적으로 덜 악하고 좀 더 도덕적이라기 보다는 인간 개개인들은 사회 보다는 자신의 악과 불의를 좀 더 잘 발견하거나 깨닫고 고쳐나갈 가능성이 훨씬 크다는 각도에서 ‘도덕적 인간’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개인이 사회 보다는 개선의 가능성이 좀 더 높다’고 본 것입니다. 니버가 추구하려는 목표는 개인과 사회를 ‘도덕적인 것과 비도덕적인 것’으로 이분화하여 그 둘을 구분하려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실은 이 둘 사이의 변증법적 협력과 보완을 기대했다고 보겠습니다.
이 책은 개인적 도덕과 사회적 도덕을 구분하고 개인의 도덕에는 사랑의 원리가 적용되지만 사회적 도덕에는 정의의 원리가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Individual Relationship with God에는 사랑의 원리가 적합 하지만 Collective Relationship with God에는 정의의 원칙이 적용되어야한다는 주장이 이 책의 밑바탕에 깔려있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책은 사랑과 정의, 이 두개의 개념을 개인과 사회를 포함하는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포괄적으로 적용해 나가게 하려고 시도합니다.
먼저 니버가 말하는 사랑은 무엇일까요? 그에 의하면 사랑은 모든 정의의 규범적 원천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용서의 교리’로 표현됩니다. 그는 ‘기독교 윤리학의 왕관은 용서의 교리’(the Crown of Christian doctrine is forgiveness)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용서는 도덕적으로 가장 이루어내기 어렵고 힘든 것으로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니버는 사랑으로써의 용서가 가능한 것은 그 불가능성을 깨달을 때부터 시작된다고 하면서 ‘불가능한 가능성’이라는 용어를 씁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사랑이던 용서이던 이런 윤리적 행위는 어디 까지나 개인 윤리의 범주 안에 있다는 점 입니다. 개인은 개인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윤리에서 개인은 집단을, 혹은 집단은 집단을 사랑하거나 용서할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정의로운 심판이 곧 사랑이고 용서입니다. 니버에 의하면 사랑의 근사치는 정의입니다. ‘인간 사회에 대한 항구적인 사랑과 평화는 환상이다. 실현될 수 없는 꿈이다.’
그럼 니버가 말하는 정의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내용이 상당히 어렵고 복잡하게 전개됩니다만 한 마디로 하면 평등입니다. 정의로운 사회는 평등한 사회입니다. ‘평등은 정의를 구체화한 것이다. 평등한 정의는 불완전한 세상에서 가장 사랑의 법에 근사치로 접근한다’ 니버가 말하는 평등은 두 가지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첫째는 사회적 평등이고, 둘째는 분배적 평등입니다. 인종적 및 계급적으로 불평등한 사회를 몸으로 체험한 니버에게 있어서 무엇 보다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라는 인식이었습니다. 인종, 언어, 문화, 전통, 습관, 출신, 남녀와 노소, 유무식을 초월하는 ‘인간으로써의 평등함’이 그가 추구한 사회적으로 정의로운 세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 보다 더 강력하게 추구한 평등은 분배의 평등이었습니다. ‘평등은 인간의 실존을 초월하는 자연법이다. 그리고 그것은 경제적 문제와 관계되는 분배의 정의다’ 니버는 디트로이트에서 부익부, 빈익빈의 현실을 체감하면서 뼈가 시리도록 이를 실감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경제적으로 불평등한 사회는 결코 정의롭지 못한 사회다’라는 신념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니버는 인간 사회가 지닌 사회적 불평등이나 경제적 불평등과 투쟁하는 것 자체를 정의라고 보았습니다(Justice is Struggle to the Kingdom of Evil). 그리고 이런 악의 구조와 싸우기 위해서는 정치적 힘(political force)의 사용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책에서 니버는 사랑과 정의의 관계를 변증법적으로 설명합니다. ‘사랑과 정의는 상호 배타적이지도 않고 모순이 되지도 않지만 그러나 대결을 통하여 지향한다. 이 둘은 역동적이다. 사랑은 정의의 부정이며 동시에 성취이고 정의 또한 사랑의 부정이며 성취이다’ ‘사랑은 정의를 요구하고 정의는 사랑을 요구한다(Love demands Justice, Justice demands Love). 사랑은 정의를 부정하고 정의는 사랑을 부정한다(Love negates Justice, Justice negates Love). 사랑은 정의를 성취하고 정의는 사랑을 성취한다(Love fulfils Justice, Justice fulfils Love)’ 사랑과 정의, 이 두 가지는 서로를 요구하며 부정하고 동시에 성취하는 관계로써 서로 분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 없는 정의는 정의이기를 포기한 것이고, 정의없는 사랑은 사랑이기를 포기한 것이라고 봅니다. 사랑 없는 정의는 권력의 변형에 지나지 않고, 정의 없는 사랑은 감상주의에 지나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니버는 ‘우리가 성서적 사랑을 실천 할 수만 있다면 이 세상은 얼마든지 보다 더 아름다워질 수 있다’고 믿는 순진한 평화주의자들에게는 ‘그것이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경고를 보냅니다. 이런 사람들은 도덕적 낭만주의자들이며 비현실주의자들로써 자기도취에 빠진 위선자들이라고 공격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오늘날 미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주의적 악(니버가 가르치는 뉴욕주는 이미 Empire State가 되어있었습니다)의 구조와 인종적 편견으로 가득 찬 불의를 무시해 버리고, 더 나아가 유대인들을 진멸해 버리고 세계를 전쟁으로 몰고 가는 히틀러의 악의 축을 간과하는 범죄자라는 것입니다. 니버는 이렇게 ‘사랑으로만’으로도 넉넉히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잔인한 평화주의자’라고 일갈했습니다. 결국 그는 ‘정의의 보완’ 혹은 ‘정의와 함께하는 사랑’을 제시합니다만 그러나 그 동안 기독교 역사에서 지나치게 한 쪽으로 기울어졌던 ‘사랑 일변도의 경향성’을 바로 잡고 이를 중도로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보다 더 크고 강력하게 ‘정의’가 강조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책에서 니버는 자주 이렇게 말합니다. ‘집단으로써의 사회는 그 목적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개인보다 훨씬 오만하고 위선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잔인하다. 개인적 도덕과 사회적 도덕 사이에는 피할 수 없는 도덕적 긴장이 있다’ ‘이런 윤리적 갈등과 모순은 이중적 성격으로 나타나게 되고 우리의 내면적 삶과 사회적 삶 사이에서 괴리를 가져 온다’ 서문에서부터 니버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를 간단하게, 혹은 단순하게 보려는 위험성을 경고합니다. ‘우리는 개인적 양심과 사회적 요구 사이에서 화합하기 어려운 모순과 갈등을 지니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개인의 도덕적 삶과 사회가 요구하는 도덕적 행동 사이에는 갈등, 모순, 대립, 충돌이 이어진다고 보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살아가는 이 사회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인보다 훨씬 더 충동적이고 억제하기가 어렵고 이성적이질 못하고 자기극복의 능력이 부족하고 타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고 다른 사람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니버가 보는 집단과 사회는 개인보다 더 사악합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집단은 야수적이다’ ‘집단은 비이성적이다’ ‘집단은 이기주의적이다’
여기에서 니버가 제시하는 대안이 바로 ‘사회정의’(Social Justice) 입니다. 그는 이미 구약의 예언자들과 신약에서 예수가 선포했던 ‘정의로운 세상’이 바로 개인적 ‘사랑의 윤리와 함께 가야 할 길’이라고 봅니다. ‘사랑만으로는 않된다’ ‘정의가 뒷받침되지 않는 사랑은 허구다. 너무 안일하게 보지 말아라. 너무 나이브하게 사람들을 가르치고 끌고 가서는 않된다’ ‘개인은 사랑의 도덕으로 살 수 있지만 사회와 집단은 정의의 도덕률 위에 서야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그리고 이 정의로운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존의 제도와 구조를 개혁해야하고 이를 위해서는 오늘날의 민주주의적 제도가 최선은 아닐지라도 현실적 대안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민주주의가 과연 정의로운 민주주의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니버는 정의로운 민주사회를 위한 ‘힘’ ‘힘의 사용’ ‘권력의 균형’을 부르짖으면서 혁명의 가능성까지 거론합니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저는 니버가 주장하는 기독교 현실주의에서 사회정의를 구현해 나가는 구체적 프로써스를 제 방식으로 정리해 봅니다. (1) 관심(Concern), (2) 탐구, 조사, 연구(Study & Investigation), (3) 조직(Organization), (4) 행동, 참여, 나눔(Participation, Involvement & Sharing), (4) 연대와 일치(Solidarity, Unity), (5) 혁명(Revolution). 물론 니버도 정의로운 민주사회를 위한 시민혁명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만 그의 다른 글들에 의하면 후에 그의 이런 사회 혁명을 지지하는 듯한 사상은 변화를 가져온 듯합니다.
참고
니버의 기독교 윤리 사상과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를 이해하는데 보탬이 되게 하려는 생각에서 다음 몇 가지 참고 자료를 덧붙입니다.
1) 월터 라우센부쉬(Walter Rauschenbusch, 1861-1918)도 라인홀드 니버와 같이 1858년 독일에서 파송된 루터교 선교사의 아들로써 1861년 뉴욕에서 태어나 독일 침례교회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보수적이며 경건한 신앙 전통 속에서 낳고 성장하였습니다. 그는 로체스터 대학과 신학교에서 공부 한 후 목사로 안수 받은 다음 뉴욕에 있던 독일 노동자들의 침례교회에서 11년 동안 목회하는 것으로 그의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목회지는 당시 ‘지옥의 부엌’이라고 불리우는 최빈민촌 뉴욕이었습니다. 여기에서 그는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위로를 받지 못하는 그의 교우들과 함께 ‘투쟁과 단결’ 만이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기쁨에 이르게 한다고 설교했습니다. 19세기 후반부터는 영국에서 시작된 요한 웨슬리의 부흥운동과 그를 이어 미국에서 퍼져나간 D. L. Moody의 ‘대각성운동’과 ‘개인의 회심’ 및 개인 심령 구원운동이 거의 대부분의 미국교회를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라우센부쉬는 뉴욕에서 목회를 하면서 자기 교회 교인들의 현실적인 삶으로부터 도전을 받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이 방직공장 직공들과 그들의 가족들이었던 교우들의 삶은 비참하기가 그지 없었습니다. 하루 평균 15시간 씩 일하고도 겨우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저임금 노동자들을 보면서 그는 주일을 지켜라, 예배에 나와라, 기도를 드려라, 성경을 읽으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이 악으로 가득찬 사회 자체를 바로 잡지 않고서는 교회나 종교나 영성생활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아 알게 됩니다. 그는 사회개혁 운동에 참여하기로 결심합니다. 1902년 로체스터 신학교 교수로 자리를 옮긴 라우센부쉬는 인간 개인의 구원에만 관심하면서 개인의 영적 측면만 강조하는 기독교 신학과 신앙운동에 반기를 듭니다. 그는 정치적 권력, 경제적 불평등, 사회적 불의로 만연된 이 사회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결코 인간은 구원을 얻을 수가 없다고 선언합니다. ‘사회가 구원을 받아야한다’ 여기에서 그의 유명한 ‘사회 복음’(Social Gospel) ‘사회 구원’(Social Salvation)이란 개념이 나옵니다. ‘기독교의 근본 목표는 인간들이 살고 있는 그 사회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회로 변화 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란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의로운 사회를 말한다’ 그는 기독교 신학의 촛점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 ‘네 이웃을 네 몸 처럼 사랑 하는 것’으로 옮기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구체적으로 우리 곁에 있는 이웃을 섬기는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교회의 사회적 책임’ ‘사회와 연대하는 교회’를 부르짖으면서 라우센부쉬는 ‘사회정의가 이루어지지 아니하는 곳에는 결단코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지 않는다’고 외쳤습니다. 1917년에 출판한 ‘The Theology for the Social Gospel’(사회복음의 신학)은 그의 신학 사상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사회를 구원하지 못하는 기독교는 예수의 가르침을 잊어버린 사이비 종교다’ ‘교회는 사회조직을 복음으로 바꾸는데 앞장을 서야한다’ ‘정치만이 아니라 회사와 공장을 포함하는 모든 산업 현장이 민주화 되어야한다’ ‘경제적 민주화가 되지 못하면 정치적 민주화란 부도수표가 된다’(참고문헌 ‘월터 라우센부쉬와 그의 사회복음신학’ 신학사상 152권, 183-215쪽, 2011년 3월, 한국신학연구소).
2) 본 훼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는 독일 루터교회의 목사요 신학자입니다. 그는 반나치운동에 앞장 섯던 사람으로 독일고백교회를 설립한 주요 멤버 중 하나입니다. 히틀러를 암살하려는 계획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어 1945년 4월 9일 플로센뷔르크 수용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했습니다. 오늘 본 훼퍼의 삶과 사상에 대한 소개는 시간이 허락된다면 ‘호주 디아스포라 목회와 신학’(홍길복 지음, 2014, 한국장로교출판사)에 나오는 ‘디트리히 본훼퍼의 신학’(pp 182-199)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3) 누가복음서에 대한 사회복음적 해석에 대해서는 홍길복의 석사학위논문인 ‘누가의 사회복음 연구’(!979년 7월,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4) 개념 연구
‘구원의 의미’ – 죄, 죽음, 용서, 생명, 건짐, 해방, 자유
‘개인구원’ ‘사회구원’ ‘통전적구원’
‘구약에서의 구원’ ‘신약에서의 구원’ ‘현대 사회에서의 구원’
‘사회적 영성’
토의 문제
1) 당신은 오늘의 시대를 어떻게 진단하는가? (세계, 한국사회, 가정, 개인, 등)
2) 사회적 구조악들과 싸우는 방법들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