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현구 목사의 초대시

아들을 먼저 보낸 한 아버지의 1,440 시간
사람들은 묻는다. “외로우신가요?”
어떤 이는 말한다. “빈둥지증후군이겠지요?.”
또 어떤 이는 조심스럽게 위로한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말도
지금 내 마음의 이름은 될 수 없다.
외로움이라면
사람을 만나면 조금은 옅어질 것이다.
빈둥지라면 자녀가 독립하여 집을 떠난
부모의 자연스러운 삶의 전환일 것이다.
그러나 내게 남겨진 것은
빈집이 아니라, 빈 생명이다.
떠난 것이 아니라, 끊어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아들을 보고 싶은 것이지,
단순히 외로운 것이 아니다.
보고 싶다는 말조차 부족하다.
그리움은 기억을 향하지만,
나는 아직도 현재형으로
아들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아들을 아름다운 동산에 묻던 날,
나는 조용히 약속했다.
“아들아,
아버지에게 힘이 있는 동안은
매주 한 번씩은 꼭 찾아오마.”
그 약속은 죽은 사람과의 약속이 아니다.
살아 있는 아버지가
살아 있는 사랑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하나의 존재 선언이다.
사랑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사랑은 만질 수 없는 존재를 향해서도
계속 걸어가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매주 그 길을 걷는다.
누군가는 그것을 미련이라 부를지 모르지만,
나에게 그것은 사랑의 예배이다.
집으로 돌아오면
아들의 방은 여전히 깨끗하다.
사진 한 장이 책상 위에서 조용히 나를 바라본다.
그 사진은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나는 매일 아들과 대화를 한다.
철학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묻기도 하고,
왜 삶은 이토록 허약한가를 토론하기도 한다.
심리학을 말하기도 하고,
신학을 말하기도 하고,
때로는 아무 말 없이
한참을 사진만 바라보기도 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독백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분명한 대화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죽음보다 기억을 더 오래 붙잡기 때문이다.
철학은 오래전부터 말해 왔다.
인간은 죽음을 아는 존재라고.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들을 먼저 보낸 아버지는
조금 다르게 말하고 싶다.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견디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견디도록 남겨진 존재이다.
내 죽음은
언젠가 나에게 찾아올 사건일 뿐이다.
그러나 아들의 죽음은
오늘도 내 안에서
계속 일어나는 사건이다.
죽음은 한 번이었지만,
상실은 매일 반복된다.
심리학은 이것을
애도(grief)의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부정하고, 분노하고,
후회하고, 슬퍼하고,
조금씩 받아들이는 과정.
그러나 실제 삶은
교과서처럼 진행되지 않는다.
오늘은 평온하다가도,
내일은 무너지고,
웃다가도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시간이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시간을 견디고 있을 뿐이다.
애도는 병이 아니다.
사랑이 계속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후회이다.
아들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아버지, 짜장면 먹으러 가요.”
나는 말했다.
“지금은 바쁘다. 건강에도 좋지 않아.”
그 말이 마지막 거절이 될 줄은 몰랐다.
이번 주 나는
아들의 동산을 다녀오는 길에
짜장면집에서 한 그릇을 주문하고.
따뜻한 향기에 젓가락을 들었지만
그러나 끝내 먹지 못했다.
눈물만 떨어진다.
그 자리에는 짜장면이 아니라
후회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지나간 시간을 다시 살 수 없다.
그래서 후회는 시간을 향한 사랑의 절규이다.
요즘 겨울철
아들의 옷을 입고 다닌다
누군가는 그것을 집착이라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살아 있는 체온을
다시 찾으려는 아버지의 본능이다.
옷에서는
더 이상 아들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기억은 냄새보다 오래 남는다.
옷은 천 조각이지만,
사랑은 여전히 그 안에서 숨 쉬고 있었다.
아들이 자주 걷던 공원을 혼자 걸어본다.
같은 나무, 같은 바람, 같은 길.
달라진 것은 한 사람뿐이다.
그 사람의 부재가
모든 풍경을 바꾸어 놓는다.
풍경은 그대로인데 세상은 더 이상
예전의 세상이 아니다.
상실은 세계를 바꾸는 경험이다.
가끔 스스로 묻는다.
나는 지금 아버지인가?.
아니면 아들을 잃어버린 한 사람인가?.
그 질문에는 정답이 없다.
아버지라는 이름은
아들이 살아 있어서 생기는 호칭이 아니다.
죽어서도 나는 여전히 아버지이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라는 존재를
새롭게 배워 가고 있다.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가 아니라,
아이를 기억하는 아버지로………
이제 집에는 안해와 나만 남았다.
예전에는
세 사람의 긴장된 웃음이 집을 채웠다.
식탁에는 세 개의 그릇이 있었고,
늘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집 안을 오갔다.
이제는 두 개의 그릇만 놓인다.
그 하나의 빈자리는 의자 하나가 아니라
한 우주가 사라진 자리이다.
안해와 나는
이제 다시 서로를 배워야 한다.
건강한 부부가 아니라,
상실을 함께 살아가는 동반자로 살아야 한다.
우리는 서로를 위로하기보다
함께 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눈물을 막아 주는 사람이 아니라,
눈물을 함께 흘려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신앙도 새롭게 태어난다.
목사라는 이름,
설교자라는 이름,
신학자라는 이름을 모두 내려놓고,
나는 한 사람의 아버지로 당신께 묻는다.
“왜입니까?”
그러나 하늘은 쉽게 대답하지 않는다.
아마도 당신은 설명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함께 우시는 분인지도 모르겠다.
십자가 아래에서
아들을 바라보던 마리아처럼,
당신도 아들을 내어주신 슬픔을
누구보다 깊이 아셨을 것이다.
그래서 신앙은
모든 답을 갖는 것이 아니라,
답이 없어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용기인지도 모른다.
상실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품고 살아가는 것이다.
아들은 내 곁에 없지만,
내 존재 안에는 여전히 살아 있다.
나는 앞으로도
매주 아름다운 동산을 찾아갈 것이다.
아들 책상 위에 놓인
사진 앞에서 말을 걸 것이다.
공원을 걸으며
아들의 웃음을 들을 것이다.
가끔은 아들이 좋아하던 음식 앞에서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리고 또 살아갈 것이다.
사랑했기 때문에 슬프고,
슬프기 때문에 살아 있으며,
살아 있기 때문에 사랑은 끝나지 않는다.
아버지란, 자식을 잃어도
끝내 사랑을 멈추지 않는 사람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아버지로 살아간다.
아들을 잃어버린 아버지가 아니라,
아들을 영원히 사랑하는 아버지로……
언젠가 내 생의 마지막 날,
내가 다시 아들을 만난다면
가장 먼저 이렇게 말하고 싶다.
“아들아, 아버지는 약속을 지켰다.
힘이 있는 동안 매주 너를 찾아갔고,
매일 너와 대화했고,
눈물 속에서도 너를 사랑하는 일을
단 하루도 멈추지 않았다.”
그날이 올 때까지 살아갈 것이다.
슬픔을 지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을 끝까지 붙잡기 위해서………
*20260715 교회 서재에서
匍越의 [告解] 중에서

전현구 목사 (시드니조은교회 담임)
*배경음악 / Beethoven – Piano Sonata No. 14 “Moonlight” (1악장) / Piano & Orchestr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