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0년 7월 29일, 조선 23대 국왕 순조 (純祖, 1790 ~ 1834) 출생
순조 (純祖, 1790년 7월 29일 / 음력 6월 18일 ~ 1834년 12월 13일 / 음력 11월 13일)는 조선의 제23대 국왕 (재위: 1800년 8월 23일 / 음력 7월 4일 ~ 1834년 12월 13일 / 음력 11월 13일)이며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이다.

– 순조 (純祖)
.출생: 1790년 7월 29일, (음력 정조 14년 6월 18일), 한성부 창경궁 집복헌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즉위: 1800년 8월 23일 (10세), (음력 정조 24년 7월 4일), 한성부 창덕궁 인정문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사망: 1834년 12월 13일 (44세), (음력 순조 34년 11월 13일), 한성부 경희궁 회상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45)
.능묘: 인릉(仁陵)
*조선 제23대 국왕
.재위: 1800년 8월 23일 ~ 1834년 12월 13일 (음력 순조 즉위년 7월 4일 ~ 순조 34년 11월 13일)
*조선 왕세자
.재위: 1800년 1월 25일 ~ 8월 23일 (음력 정조 24년 1월 1일 ~ 7월 4일)
순조 (1790 ~ 1834, 재위 1800 ~ 1834)는 조선의 제23대 국왕이자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이다.
정조의 차남으로 11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으며, 재위 기간 동안 안동 김씨 등의 세도 정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홍경래의 난 등 사회적 혼란이 겹친 비운의 왕이었다

○ 생애 및 활동
1800년 (정조 24) 정월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이 해 6월 정조가 승하하자, 7월 11세의 어린 나이로 창덕궁 인정문 (仁政門)에서 즉위했다. 대왕대비 정순왕후 (貞純王后)가 수렴청정하였다. 1802년 (순조 2) 10월 영안부원군 (永安府院君) 김조순 (金祖淳)의 딸을 왕비 (王妃)로 맞았다.
1801년 대왕대비는 궁방 (宮房)과 관아 (官衙)에 예속되어 있던 공노비 (公奴婢)를 혁파하고 서얼 유통 (庶蘖流通)을 시행했다. 한편 정조 때부터 집권해 온 시파 (時派)에게 보복하기 위해, 사교 (邪敎) 금압을 명분으로 200여 명의 천주교신자들을 학살한 신유박해 (辛酉迫害) 때 시파를 모두 숙청하였다.
1804년 12월 대왕대비가 물러나고 순조는 친정을 시작했다. 그 뒤에도 천주교 탄압은 계속되어, 1815년에는 을해박해 (乙亥迫害)로 경상 · 충청 · 강원도의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 죽였다. 1827년에도 충청 · 전라도의 교인들을 검거해 혹독한 탄압을 가했다.
순조의 친정 뒤에는, 정조의 유탁 (遺託)을 받고 정치에 관여하게 된 국구 (國舅) 김조순의 일문 안동김씨의 세도정권이 확립되었다.
김이익 (金履翼) · 김이도 (金履度) · 김달순 (金達淳) · 김희순 (金羲淳) · 김명순 (金明淳) 등이 조정의 요직을 모두 차지하고 전횡(專橫)과 뇌물을 받는 행위를 일삼았다. 이로써 인사제도의 기본인 과거제도가 문란해지는 등 정치기강이 무너졌다.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각종 비기 (秘記)와 참설 (讖說)이 유행하는 등 사회혼란이 일어났다. 이를 틈타 1811년 평안도 용강 (龍岡) 사람인 홍경래 (洪景來)와 그 무리가 반란을 일으켜 평안도 일대를 점령한 뒤 관군과 대결했다.
그러나 이듬해 4월 정주성 (定州城)이 함락됨으로써 난은 평정되었다. 그러나 이 해 한성에 도적과 거지떼가 들끓었고, 1813년 제주도의 토호 양제해 (梁濟海)와 1815년 용인의 이응길 (李應吉)이 민란을 일으켰다.
1817년에는 유칠재 (柳七在) · 홍찬모 (洪燦謨) 등의 흉서사건 (凶書事件)이 발생했다. 또 1819년에는 액예 (掖隷)와 원예 (院隷)의 작당 모반운동 (謀叛運動)이 일어났다. 1826년에는 청주에서 괘서사건 (掛書事件)이 일어났다.
급기야 1821년에는 서부지방에 전염병이 크게 번져 10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렇게 순조 재위 34년 중 19년에 걸쳐 수재(水災)가 일어나는 등 크고 작은 천재지변이 잇달아 발생했다.
한편 왕은 『양현전심록 (兩賢傳心錄)』 · 『사부수권 (四部手圈)』 · 『대학유의 (大學類義)』 · 『정조어정홍재전서 (正祖御定弘齋全書)』 · 『서운관지 (書雲觀志)』 · 『동문휘고 (同文彙考)』 등을 간행하게 했다. 그리고,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는 등의 치적이 있었다.
풍은부원군 (豊恩府院君) 조만영 (趙萬永)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아 풍양조씨(豊壤趙氏) 일문을 중용했다. 1827년에는 세자 (世子)에게 대리청정 (代理聽政)하게 함으로써 안동김씨의 세도를 견제하려 했으나, 1830년 세자가 일찍 죽음으로써 실패했다.
1834년 (순조 34) 11월 45세로 승하했다.
– 상훈과 추모
수용 (睟容) 4본이 있어 경모궁망묘루 (景慕宮望廟樓) · 경우궁성일헌 (景祐宮誠一軒) · 선원전 (璿源殿) · 영희전 (永禧殿)에 각각 봉안되었다.
시호는 연덕현도경인순희문안무정헌경성효대왕 (淵德顯道景仁純禧文安武靖憲敬成孝大王)이다. 묘호는 순조(純祖)이다. 능호는 인릉 (仁陵)으로 서울 서초구 내곡동 산13의 1에 있다.

○ 주요생애 및 특징
순조 (1790 ~ 1834, 재위 1800 ~ 1834)는 조선의 제23대 국왕이자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이다. 정조의 차남으로 11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으며, 재위 기간 동안 안동 김씨 등의 세도 정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홍경래의 난 등 사회적 혼란이 겹친 비운의 왕이었다.
- 즉위와 초기 (정순왕후 수렴청정)
어린 나이 즉위: 1800년 정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만 10세(11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정순왕후 수렴청정: 나이가 너무 어려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대신 나라 일을 돌보았다. 이 시기 천주교 박해(신유박해) 등이 일어났다.세도 정치의 전개와 혼란
안동 김씨 득세: 친위 세력을 키우려 했으나 장인인 김조순을 비롯한 안동 김씨 가문이 권력을 장악했다.
홍경래의 난: 1812년 평안도 지역에서 차별에 반발하여 일어난 대규모 농민 봉기로 통치에 큰 타격을 입었다.
-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왕권 회복 노력: 총명했던 아들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겨 세도 정치를 견제하고 왕실 중심의 정치를 도모하려 했다.
비극적 마무: 효명세자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22세의 젊은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순조는 다시 실낙과 깊은 슬픔에 빠졌다.
- 말년
효명세자의 죽음: 왕실의 개혁을 이끌며 기대를 모았던 아들 효명세자가 1830년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국왕의 든든한 정치적 후원자이자 정국 타개책이 사라졌다.
안동 김씨 세도 강화 및 숙청: 장인 김조순 사후 안동 김씨 가문은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였고, 순조 말년에는 정국 주도권을 잡기 위해 노론 벽파 등 반대 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삼정의 문란과 민생 파탄: 홍경래의 난 (1811년) 이후에도 탐관오리의 수탈과 삼정 (전정·환곡·군정)의 문란이 극에 달해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고 전국 각지에서 소요가 끊이지 않았다.
어린 손자 헌종의 즉위 기반: 순조 자신도 잦은 병치레와 무력감 속에 시달리다가 1834년, 여덟 살의 손자 (헌종)에게 왕위를 넘기기 직전 혹은 그 무렵 서거하며 세도정치의 기반을 완전히 다져주고 말았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