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성경과 오디세이 (마 25:40, 히 13:2)
한 사람의 인격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때는 언제일까요?
사람의 됨됨이는 강한 사람을 대하는 태도보다 약한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힘 있는 사람에게 친절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성공한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주기도 어렵지 않습니다. 언젠가 그 사람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대가를 기대할 수 없는 사람, 낯선 사람, 나보다 약한 사람에게 잘해주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약자를 대하는 태도가 우리의 진짜 모습입니다.
나그네에게, 가난한 사람에게, 고아와 과부에게, 외국인에게, 병든 사람에게, 외로운 사람에게, 그리고 아무런 힘도 없는 사람에게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는지가 우리의 진짜 모습을 보여줍니다.
지난주 딸의 생일을 맞아 평소 자주 가지 않던 조금 먼 곳의 한식당을 찾아갔습니다. 한국 분이 열심히 운영하는 식당이었습니다. 음식 가격도 적당했고 맛도 좋았습니다. 주인도 우리에게 무척 친절했습니다.
그런데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주방 안에서 주인이 종업원을 심하게 꾸짖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종업원이 무언가를 조금 잘못했던 것 같습니다. 앉아 있기가 불편하여 계산을 하고 나오는데, 이번에는 종업원이 계산을 잘못하자 주인이 입에 담기 어려운 욕설까지 하며 야단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먹은 음식보다 다른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였습니다. 손님에게는 친절하면서 자기보다 약한 종업원에게 함부로 한다면, 그 친절이 과연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다시는 이 식당에 오지 말아야겠다.”
그런데 동시에 또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혹시 교회에도 이런 일이 있지 않을까?” 누군가 예배를 드리고 교회를 나서면서 마음 속으로 “다시는 이 교회에 나오지 않을 거야.” 말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설교를 못해서도 아니고, 찬양이 은혜가 없어서도 아니고, 기도가 너무 길어서도 아니고, 사람을 환대하지 않고, 약한 자를 무시하는 사람들의 태도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인격은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납니다. 한 사회의 품격은 사회적 약자를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납니다.
그리고 한 교회의 신앙은 지극히 작은 자를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납니다.
이런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남루한 옷을 입은 한 사람이 어느 교회에 들어가려 했지만 환영받지 못하고 교회 밖에 앉아 울고 있었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옆에 앉아 말했습니다.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나도 저 교회에 오래전부터 노력했지만 들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눈을 들어보니 예수님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저는 ‘성경과 오디세이’라는 제목으로 ‘환대’에 대해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크세니아(Xenia)
얼마 전에 영화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오디세이’를 보았습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는 단순한 문학작품을 넘어, 고대 그리스 문명 전체의 기초를 형성한 역사적 전환점으로 평가됩니다. 두 서사시는 서양 문학·철학·종교·교육의 뿌리를 이루며, 이후 2,800년 동안 지속적으로 서양 문화의 중심에 자리해 왔습니다.
호메로스의 두 서사시는 서로 다른 방향에서 인간을 비추지만, 함께 놓으면 인간 존재 전체를 보여주는 하나의 큰 이야기로 읽힙니다.
‘일리아드’는 트로이 전쟁을 배경으로 아킬레우스의 분노와 그로 인한 비극을 중심에 놓습니다. 인간은 명예를 위해 싸우지만 결국 죽음 앞에서 무력해지고, 분노는 자신과 타인을 파괴합니다. 이 작품은 전쟁의 영광보다 인간의 상처와 운명, 그리고 상실을 드러내며 비극적 인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반면 ‘오디세이아’는 전쟁 이후 집으로 돌아가는 오디세우스의 긴 여정을 따라간다. 그는 힘보다 지혜와 인내로 위기를 넘기며, 여러 장소에서 자신의 이름을 숨기거나 드러내면서 정체성을 탐구한다. 그의 여정은 귀향과 회복을 향한 순례이며, 가정과 관계가 다시 제자리를 찾는 과정입니다.
두 작품은 하나는 파괴와 상실을, 다른 하나는 귀향과 회복을 노래합니다. 그래서 ‘일리아드’는 인간의 비극을, ‘오디세이’는 인간의 귀향을 보여주며, 함께 읽을 때 인간 존재의 전체 지도를 그려냅니다.
‘오디세이’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윤리적 원리 가운데 하나가 바로 크세니아(Xenia), 곧 낯선 손님을 존중하는 ‘환대의 법칙’입니다. 영화에서는 10번 이상 ‘Zeus’ Law’라고 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지형을 보면 크세니아가 왜 중요했는지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 국토의 80% 이상이 산악지대였고, 여러 지역이 자연스럽게 분리되면서 수많은 도시국가가 형성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자기 도시를 떠나는 순간 그는 곧 나그네가 되었습니다.
오늘날처럼 호텔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여행자 보험도 없었고, 휴대전화도 없었으며, 경찰의 보호를 기대하기도 어려웠습니다. 낯선 땅에 들어선 사람은 그 지역 사람들의 선의에 자신의 생명과 안전을 맡겨야 했습니다.
그래서 고대 세계에서 나그네는 가장 취약한 사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구약성경에도 사회적 약자의 대표적인 계층으로 고아, 과부, 그리고 나그네가 있습니다.
환대의 법칙은 일방적인 것이 아닙니다. 주인에게는 주인의 의무가 있고, 손님에게는 손님의 의무가 있습니다. 손님을 보호해야 합니다. 음식을 제공해야 합니다. 잠자리를 제공해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선물도 주고 여행길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손님은 주인의 친절을 악용해서는 안 됩니다. 주인의 호의를 감사로 받아야지, 자기의 욕심을 위해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이 점에서 ‘오디세이’에 등장하는 구혼자들의 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페넬로페’에게 청혼한 것만이 아닙니다. 오디세우스가 없는 동안 그의 집을 점거하고, 그의 음식을 먹고, 그의 재산을 낭비하며, 주인의 환대를 권리처럼 이용했습니다.
그래서 주인공 오디세우스가 돌아와 구혼자들을 심판하는 장면은 개인적인 복수의 의미도 있지만, 작품 전체의 관점에서는 파괴된 크세니아의 질서를 회복하는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호의가 계속되면 자신의 권리라고 착각하고, 은혜가 계속되면 당연히 받아야 할 상이라고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환대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주는 사람에게는 사랑이 필요하고, 받는 사람에게는 감사가 필요합니다. 감사는 누가 할 수 있습니까? 자신이 누리는 모든 것이 자신의 노력으로 받는 상이 아니라, 자격 없는 자에게 조건 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임을 아는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탈무드에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모든 것을 통해서 배우는 사람이고,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자기를 이기는 사람이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인생을 선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늘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다. 옆에 사람과 인사합시다. 행복하게 삽시다. 감사하며 삽시다.
2. 아브라함과 롯의 환대
크세니아가 인간 사회를 지키는 환대의 윤리라면, 성경은 환대를 훨씬 더 깊은 영적인 차원으로 이끌어갑니다.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은 자기 장막 앞에 나타난 세 사람을 처음부터 하나님의 사자라고 알아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그들은 그저 길을 지나가는 나그네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들을 보는 순간 달려나가 맞이했습니다. 발을 씻을 물을 준비하고, 쉬도록 자리를 마련하고, 좋은 음식을 정성껏 대접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누구인지 확인한 후에 환대했다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라가 임신할 것이라는 좋은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창세기 19장의 롯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돔 성문에 앉아 있던 롯은 낯선 두 사람을 발견하자 자신의 집으로 모셔 들였습니다. 음식을 제공하고 잠자리를 마련하며 위험한 상황에서도 그들을 보호하려고 했습니다. 나중에야 그들이 평범한 여행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천사들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할 것이니 이곳에서 탈출하라는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이 두 이야기를 생각나게 하는 말씀이 히브리서 13장 2절입니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 13:2) 이것이 성경적 환대의 신비입니다.
우리가 나그네에게 문을 열었는데 그 문을 통하여 천사가 들어올 수 있습니다.
3. 예수님의 환대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 40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이것이 기독교적 환대의 절정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은 우리에게 심각한 질문을 던집니다. 마태복음 24장은 마지막 때와 주님의 재림을 말씀하고, 마태복음 25장은 그 재림을 어떻게 준비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열 처녀의 비유는 말합니다. “깨어 준비하라.” 달란트의 비유는 말합니다. “맡겨진 것을 충성스럽게 사용하라.”
그리고 양과 염소의 심판 장면에서는 말합니다. 놀라운 사실은 의인은 자신들이 언제 예수님을 대접했는지 몰랐다는 것입니다. 악인들도 자신들이 언제 예수님을 대접하지 않았는지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한 사람의 인격도, 한 사회의 품격도, 한 신앙인의 믿음도 가장 약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에서 드러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3장 5절에서 말씀합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우리는 무엇으로 우리의 믿음을 점검할 수 있을까요?
얼마나 오래 교회에 다녔는지도 중요합니다. 성경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도 중요합니다. 기도를 얼마나 하는지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매우 실제적인 기준 하나를 주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우리 안에 작은 자를 향한 ‘환대’가 있는지,
그 기준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점검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말씀 앞에서 우리의 믿음을 다시 살펴봅니다.
오래 교회에 다닌 것도, 성경을 많이 아는 것도, 기도를 오래 하는 것도
주님 앞에서는 온전한 기준이 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한 가지 기준,
“지극히 작은 자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그 말씀 앞에 우리 마음을 겸손히 세웁니다.
주님, 우리 안에 작은 자를 향한 환대의 마음을 회복하게 하소서.
낯선 이에게 문을 열어주는 용기,
연약한 이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따뜻함,
소외된 이에게 먼저 다가가는 사랑을 우리 안에 심어 주소서.
우리의 말과 행동 속에서
주님의 마음이 드러나게 하시고,
작은 자를 향한 환대가
우리 믿음의 열매가 되게 하소서.
주님,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우리의 믿음을 점검하게 하시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랑의 길로
다시 걸어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시계 속의 시간과 마음 속의 시간 (히브리서 5:12, 고린도후서 6:2, 에베소서 5:16 )
어제 새로 출간한 책 한 권을 카카오톡으로 소개했습니다. 그동안 제가 크리스찬리뷰에 기고했던 글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었습니다. 책의 제목은 “우리는 영원한 오늘에 산다”입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이런 문장을 덧붙였습니다. “어제는 지나간 오늘이고, 내일은 다가올 오늘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는 언제나 오늘의 자리에서 어제를 돌아보고, 오늘의 자리에서 내일을 바라봅니다. 오늘 행복한 사람은 어제를 돌아보면서도 행복의 이유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내일을 바라보면서도 소망을 품습니다. 반대로 오늘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어제를 생각할 때도 아픈 기억을 먼저 떠올리고,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생각하면서도 걱정과 두려움을 앞세우기 쉽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오늘을 살아갑니다. 어제는 지나간 오늘이고, 내일은 다가올 오늘입니다. 오늘 행복한 사람은 어제도 행복했고, 내일도 행복할 것입니다. 오늘 불행한 사람은 어제도 불행했고 내일도 불행할 것입니다.
행복은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입니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은 환경이 흔들려도 삶의 중심을 잃지 않습니다. 오늘이 행복하면 어제는 감사가 되고 내일은 소망이 됩니다. 행복한 사람은 좋은 환경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책에는 모두 120편의 글이 실려 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한 편 한 편 썼던 글들을 다시 읽어 보니 참 흥미로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글에는 그때는 알고 있었는데 지금은 잊고 있었던 내용이 있었습니다. 반대로 어떤 글은 그때는 미처 알지 못하고 썼는데 지금에 와서야 그 의미를 깨닫게 된 내용도 있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지식도 달라지고, 생각도 달라지고, 사람을 바라보는 눈도 달라집니다. 같은 글을 읽어도 그때의 내가 읽는 것과 지금의 내가 읽는 것은 다릅니다. 글은 그대로 있지만 그것을 읽는 사람은 시간 속에서 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120편의 글 가운데 오늘 설교의 제목으로 삼은 글이 하나 있습니다. “시계 속의 시간과 마음 속의 시간”입니다.
두 종류의 시간이 있습니다. 하나는 시계 속의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 속의 시간입니다.
시계 속의 시간은 크로노스(Chronos)이고, 마음 속의 시간은 카이로스(Kairos)입니다.
1. 시계 속의 시간 – 크로노스
크로노스는 시계로 측정할 수 있는 객관적인 시간입니다.
1년 365일, 하루 24시간처럼 반복되는 시간이며, 달력의 날짜와 시계의 바늘을 따라 흘러가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을 기준으로 계획을 세우고, 약속을 정하고, 일정을 관리합니다. 학기 계획을 세우고, 업무 일정을 정하며, 중요한 모임이나 기념일을 달력에 기록하는 모든 일은 크로노스의 시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크로노스는 반복과 규칙성을 통해 우리의 삶에 안정감을 줍니다. 그러나 동시에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의 흐름 속으로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시계의 바늘은 멈추지 않습니다. 달력의 페이지는 계속 넘어갑니다. 시간이 흐르면 나이가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크로노스는 우리에게 인생의 유한성을 깨닫게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시간이 얼마나 많이 흘렀느냐가 아닙니다.
히브리서 5장 12절은 말씀합니다.
“때가 오래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여기에서 “때가 오래되었으므로”라는 것은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뜻입니다. 신앙생활의 크로노스는 길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연수가 길다고 해서 반드시 성숙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은 크로노스의 광산에서 카이로스의 광맥을 캐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를 30년 다녔다고 해서 반드시 성숙한 신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어도 여전히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에 머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나는 얼마나 오래 믿었습니까?”가 아니라 “나는 얼마나 성숙했습니까?”
크로노스는 저절로 흘러가지만, 성숙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란 광고가 있습니다. 광고 카피라이터(Copywriter)이자 작가인 ‘박웅현’의 카피입니다. 그는 유학 시절 교수같이 나이 드신 분이 자기 옆에 앉아 수업을 듣고, 학생같이 젊은 교수가 강의하는 것을 보고 “그래,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는 문구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2. 마음 속의 시간 – 카이로스
카이로스는 시계로 측정할 수 없는 마음의 시간이며, 의미의 시간입니다.
크로노스가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객관적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각자에게 다른 의미로 적용되는 주관적 시간입니다. 시간을 크로노스로 받아들이면 수동적인 삶을 살지만, 카이로스로 받아들이면 능동적인 삶을 삽니다. 크로노스란 던져졌기 때문에 받은 것이고, 주어졌기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존재와 실존은 다릅니다. 존재는 있는 것이고 실존은 있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존재의 의미를 하나님에게서 찾으면 유신론적인 실존주의자이고, 그 의미를 세상에서 찾으면 무신론적인 실존주의자입니다.
카이로스에서는 몇 분이 지났는가, 몇 년이 흘렀는가보다 그 순간이 내 삶과 영혼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사랑을 깨달은 순간, 용서를 결심한 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한 순간, 새로운 길을 선택한 순간이 모두 카이로스가 될 수 있습니다.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여기서 “때”는 단순히 시계가 흘러가는 크로노스(Chronos)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시고 부르시는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입니다. 특별히 바울은 “보라, 지금은”이라는 말을 반복합니다. 어제는 이미 지나갔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응답할 수 있는 시간은 언제나 오늘, 바로 지금입니다. 신앙은 ‘here and now’이지 ‘there and then’이 아닙니다.
크로노스가 객관적인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주관적인 시간입니다.
크로노스가 양적인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질적인 시간입니다.
크로노스가 수평적인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수직적인 시간입니다.
크로노스가 땅의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하늘의 시간입니다.
같은 세월을 살아도 사람은 다르게 변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익어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늙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발효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패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르신이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단지 노인이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3. 크로노스를 카이로스로
바울은 에베소서 5장 16절에서 말씀합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이 말씀은 단순히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뜻에 그치지 않습니다. NIV 영어 성경에는 ‘Opportunity’라고 번역했습니다.
지나가는 크로노스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 곧 카이로스를 붙잡으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은 크로노스를 버리고 특별한 순간만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불행은 짧은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것을 너무 늦게 깨닫는 데 있습니다.
우리의 어리석음은 지나고 나서야 뒤늦게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헤어지고 나서야 그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옆에 사람과 인사합시다. 있을 때 잘합시다.
같은 예배도 어떤 사람에게는 의미 없이 흘러가는 크로노스일 수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만나는 카이로스가 될 수 있습니다.
같은 고난도 어떤 사람에게는 그저 힘든 세월로 끝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믿음이 깊어지고 인생의 방향이 바뀌는 카이로스가 됩니다.
같은 사람을 만나도 어떤 사람에게는 평범한 만남으로 지나가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사랑하고 섬길 수 있는 하나님의 기회가 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시간이 주어졌느냐가 아니라 그 시간에 어떤 의미를 심느냐입니다.
포도는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좋은 포도주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대로 숙성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이 흐른다고 저절로 성숙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목표는 구원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성숙해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화라고 합니다. 성화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고, 그에게까지 자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 깊어져야 합니다. 소망을 통해 높아져야 합니다. 사랑을 통해 넓어져야 합니다. 용서를 통해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순종을 통해 성숙해야 합니다.
성경과 함께, 성령과 함께, 성숙한 성도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우리 길을 밝혀 주실 것이고, 성령은 우리 길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귀환과 페르시아의 네 왕
성경에서 말하는 ‘바사’는 오늘날 이란입니다. 오랫동안 사용하던 ‘페르시아’라는 명칭은 1935년부터 공식적으로 ‘이란’으로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고대 바사와 유다 민족의 관계는 오늘날 이란과 이스라엘의 관계와 매우 대조적입니다.
고레스 왕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있던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하도록 허락했습니다. 이 때문에 유대인의 역사적 기억 속에서 고레스는 자신들을 해방하고 예루살렘의 회복을 도운 특별한 왕으로 남아 있습니다.
현대에 들어서도 처음부터 이란과 이스라엘이 원수였던 것은 아닙니다. 팔레비 왕조가 이란을 통치하던 1948년부터 1979년까지 두 나라는 공식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경제, 정보, 군사 분야에서 상당히 가까운 협력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러나 1979년 이란 이슬람혁명으로 팔레비 왕조가 무너지고 호메이니가 이끄는 ‘이슬람 공화국’이 세워지면서 관계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란 정부는 이스라엘을 인정하지 않았고,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헤즈볼라와 여러 무장세력을 지원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 개발, 탄도미사일, 지역 무장세력 지원을 국가안보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 간주했습니다. 두 나라는 오랫동안 직접 전쟁보다 정보전, 사이버전, 암살, 공습, 대리세력을 통한 이른바 ‘그림자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림자 전쟁은 결국 직접적인 군사충돌로 확대되었습니다. 2025년 6월 이스라엘과 이란은 12일 동안 직접 충돌했고, 2026년 2월 28일에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대규모 이란 공격과 이란의 보복으로 전쟁이 다시 확대되었습니다. 2026년 8월 현재 분쟁의 중심에는 미국과 이란의 전쟁, 이란의 핵과 미사일 문제, 호르무즈해협, 이란이 지원하는 지역 무장세력 문제가 놓여 있습니다.
이란과 이스라엘은 어제는 친구였지만, 오늘은 적이 되었습니다.
성경의 이스라엘 백성의 포로 귀환 역사를 이해하려면 당시 세계를 통치하던 바사 왕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바벨론은 유다를 멸망시키고 백성을 포로로 끌고 갔지만, 바사 제국은 포로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종교와 문화를 회복하도록 ‘관용정책’을 펼쳤습니다. 포로귀환과 관련된 4명의 왕이 있습니다. 고레스 대왕과 아닥사스다 왕은 직접적으로 도와주었고, 다리오 왕과 아하수에로 왕은 간접적으로 도와주었습니다.
오늘 본문 에스라 1:1-3절의 말씀은 바벨론 포로에 있던 유대인의 3차례 귀환의 서막을 여는 이야기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후 오랜 세월 고향을 떠나 살아야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졌고, 성벽은 파괴되었으며, 나라를 잃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끝난 자리에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세 차례의 포로 귀환을 이해하려면,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바사 제국의 4명의 왕들을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1. 고레스 왕: 제1차 귀환의 문을 열었습니다
주전 539년경 바사 왕 고레스는 바벨론을 정복하였습니다. 바벨론 제국이 무너지면서 유다 백성을 지배하는 새로운 왕이 되었습니다.
고레스는 정복지의 민족들이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가 종교와 문화를 회복하도록 허락하는 ‘관용정책’을 시행하였습니다. 이러한 정책 속에서 유다 백성에게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고레스는 세계사와 성경에서 동시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입니다. 성경은 그를 하나님이 직접 사용하신 도구로 묘사하고, 세계사는 그를 뛰어난 통치자로 기록합니다.
사진은 시드니 올림픽 팍 공원에 있는 고레스 대왕의 기념비입니다. Cyrus The Great, King of Persia.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 대왕. 그는 인류 역사에서 인권의 개념을 가장 먼저 제시한 통치자이고, 인류 역사의 최초로 가장 큰 다민족 사회를 만든 사람입니다. 세계사에게 대왕으로 불리는 인물은 몇 명 없습니다.
이사야는 고레스가 태어나기도 오래 전에 그에 관하여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네 기초가 놓여지리라 하는 자니라.”(사 44:28).
심지어 하나님은 고레스를 가리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고레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사 45:1)
에스라 1장은 고레스 칙령으로 인한 유대인들의 귀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라 1:1-2)
본문은 먼저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라고 말씀합니다. 예레미야는 유다가 바벨론에서 영원히 포로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렘 29:10)
고레스가 조서를 내렸지만, 그의 마음을 감동시키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왕은 명령을 내렸지만, 역사를 움직이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고레스는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
고레스의 조서로 스룹바벨과 예수아를 중심으로 한 제1차 귀환이 시작되었습니다. 고레스는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빼앗아 온 성전 기물도 돌려주었습니다.
고레스 왕은 귀환의 문을 연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전이 고레스 시대에 곧바로 완성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백성은 주변 민족의 방해를 받았고, 성전 공사는 오랫동안 중단되었습니다.

2. 다리오 왕: 중단된 성전 재건을 다시 허락했습니다
고레스 이후 여러 정치적 변화가 있은 뒤, 다리오 1세가 바사 제국의 왕이 되었습니다.
다리오 1세는 페르시아 제국의 힘을 그리스까지 확장하려는 야심을 품고 군대를 보냈습니다. 그는 이오니아 반란을 지원한 아테네를 징벌하고자 대군을 파견했지만, 그리스의 마라톤 평원에서 뜻밖의 패배를 맞았습니다. 페르시아군은 수적으로 우세했지만, 그리스 중장보병의 밀집 전술 앞에서 무너졌고, 다리오의 첫 번째 그리스 원정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이 패배는 페르시아에게 큰 충격이었고, 다리오는 그리스 정복을 다시 준비하던 중 세상을 떠났습니다.
다리오 시대에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는 중단된 성전 재건을 다시 시작하라고 백성을 격려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변의 관리들은 유다 백성에게 누가 성전 재건을 허락했는지 질문하며 공사를 문제 삼았습니다.
그들은 다리오 왕에게 편지를 보내 고레스가 실제로 성전 재건을 허락했는지 확인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다리오 왕은 왕실의 문서 보관소를 조사하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고레스 왕이 내렸던 조서가 발견되었습니다. 다리오는 고레스의 명령을 인정하고 성전 재건을 계속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성전 공사를 방해하지 말라고 명령하였고, 왕실의 재정으로 성전 재건에 필요한 비용을 지원하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 성전은 주전 516년경, 다리오 왕 시대에 완성되었습니다.
고레스가 성전 재건을 시작하도록 문을 열었다면, 다리오는 중단된 성전이 완성되도록 보호하고 지원한 왕이었습니다.
따라서 제1차 귀환과 성전 재건에는 두 왕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고레스는 귀환과 성전 재건을 허락하였습니다. 다리오는 고레스의 조서를 확인하고 성전 재건을 끝까지 지원하였습니다.
사람의 방해로 하나님의 일이 잠시 중단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계획 자체가 무너지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전 왕이 내린 조서를 다음 왕을 통하여 다시 확인하게 하셨고, 마침내 성전이 완성되게 하셨습니다.

3. 아하수에로 왕: 에스더를 통하여 유다 백성을 보호했습니다
다리오 1세 다음에 바사 제국을 다스린 왕은 아하수에로입니다. 일반 역사에서는 크세르크세스 1세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버지인 다리오의 뜻을 이어받은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 1세)는 훨씬 더 거대한 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그리스를 침공했습니다. 그는 헬레스폰트에 다리를 놓고, 수십만의 병력과 거대한 함대를 동원해 유럽으로 진격했습니다. 테르모필레에서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와 300 용사가 끝까지 저항했지만 결국 페르시아군이 돌파했습니다.
그러나 살라미스 해전에서 상황은 뒤집혔습니다. 그리스 함대는 좁은 해협으로 페르시아 대함대를 유인해 기동력을 제한했고, 결국 페르시아는 큰 패배를 당했습니다. 이 패배는 전쟁의 흐름을 바꾸었고, 아하수에로의 그리스 정복 계획은 좌절되었습니다. 이후 페르시아군은 플라타이아 전투에서도 패배하며 그리스 원정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세 차례의 귀환과 직접 관련된 왕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통치 기간은 제1차 귀환과 제2차 귀환 사이에 해당합니다.
이 시대에 바사 제국 곳곳에 흩어져 살던 유다 백성은 하만의 계략으로 모두 죽임을 당할 위기에 놓였습니다. 하만은 모르드개에게 절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모르드개뿐 아니라 바사 제국 안의 모든 유다 백성을 멸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에스더를 왕비가 되게 하셨고, 모르드개를 준비하셨습니다. 에스더는 죽음을 각오하고 아하수에로 왕 앞에 나아갔습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 (스 4:16)
에스더의 용기와 모르드개의 지혜를 통하여 하만의 음모가 드러났고, 유다 백성은 멸망의 위기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귀환 조서를 내린 왕은 아니었지만, 그의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바사 제국에 남아 있던 유다 백성을 보호하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백성만 하나님의 보호를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직 바사 제국 곳곳에 흩어져 살던 유다인들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보호를 받았습니다.
에스더의 이야기가 없었다면, 이후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의 회복도 큰 위기를 맞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귀환한 백성을 회복시키셨을 뿐 아니라 흩어져 있던 백성도 보존하셨습니다.

4. 아닥사스다 왕: 제2차와 제3차 귀환을 허락했습니다
아하수에로 다음에 왕이 된 사람은 그의 아들 아닥사스다 1세입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귀환은 모두 아닥사스다 왕 시대에 이루어졌습니다.
아닥사스다는 에스라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는 권한을 주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과 레위인 가운데 자원하여 예루살렘으로 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에스라와 함께 갈 수 있다고 조서를 내렸습니다.
“너희 중에 이스라엘 백성과 그들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중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뜻이 있는 자는 누구든지 너와 함께 갈지어다.” (라 7:13)
아닥사스다는 에스라에게 단순한 여행 허가만 준 것이 아닙니다. 성전 예배에 필요한 은과 금과 제물을 제공하게 하였고, 하나님의 율법을 아는 재판관과 관리들을 세우도록 권한을 주었습니다.
에스라는 아닥사스다의 도움을 받았지만, 그 모든 일의 근원을 하나님의 은혜로 고백하였습니다.
“내 하나님 여호와의 손이 내 위에 있으므로 내가 힘을 얻어.” (라 7:28)
제2차 귀환으로부터 약 13년 후, 아닥사스다는 다시 느헤미야의 요청을 받아들였습니다.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의 술 관원이었습니다. 어느 날 왕은 느헤미야의 얼굴에 수심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조상들의 성읍 예루살렘이 황폐하고 성문들이 불탔기 때문에 슬퍼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왕에게 자신을 예루살렘으로 보내 성을 재건하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또한 안전한 여행을 위한 조서와 성벽 재건에 필요한 목재도 요청하였습니다.
왕은 느헤미야의 요청을 허락하였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이것도 자신의 설득력이나 왕의 호의 때문이라고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시므로 왕이 허락하고.” 느헤미야 2장 8절
아닥사스다는 제2차 귀환을 통하여 에스라가 말씀을 가르칠 수 있도록 길을 열었습니다. 또한 제3차 귀환을 통하여 느헤미야가 성벽과 공동체를 재건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습니다.

바사 왕들과 세 차례의 귀환
세 차례의 귀환과 바사 왕들의 관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1차 귀환은 고레스 왕의 조서로 시작되었습니다.
스룹바벨과 예수아가 귀환하여 제단과 성전을 재건하였습니다. 성전은 다리오 1세 시대에 완성되었습니다.
제1차와 제2차 귀환 사이에는 아하수에로 왕 시대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더와 모르드개를 사용하여 바사 제국에 흩어진 유다 백성을 멸망의 위기에서 보호하셨습니다.
제2차 귀환은 아닥사스다 1세의 허락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에스라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고 준행하며 백성에게 가르쳤습니다.
제3차 귀환도 아닥사스다 1세의 허락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고 공동체의 질서를 회복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세 차례 포로 귀환은 바사 제국의 역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사 왕들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은 아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정치적 결정과 왕권을 사용하여 예루살렘의 회복을 이루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교회와 믿는 사람들만 사용하시는 분이 아니라, 세상의 왕과 나라와 제도까지 주권적으로 다스리시며 사용하시는 분임을 보여 줍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인간의 생사화복과 역사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악한 이스라엘을 더 악한 바벨론을 통해 징계하시기도 하시고, 바사의 선한 이방 왕을 통해 회복하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기 위해 선한 사람도 사용하시고, 악한 사람도 사용합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그것까지라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환경을 탓하거나 사람을 원망하기보다 오직 하나님의 선하시고 신실하심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와 같이,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며 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채스우드한인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