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보내는 경고 신호
준비된 인생은 아름답다
저 언덕 넘어에는?
가을볕이 채 영글기도 전인 새벽, 사위가 푸르스름하게 잠들어 있는 안개 속에서 어머니의 부스럭거리는 손길이 시작되었다. 방 한구석, 눅눅한 아랫목의 냉기를 밀어내며 어머니는 하얗고 둥근 누에고치들을 조심스럽게 무명 보자기 속으로 쓸어 담고 계셨다.
사흘 밤낮으로 불을 지피며 정성껏 키워낸 고치들이었다. 그 하얗고 보드라운 고치들 위에는 우리 가족의 가을 밥숟가락이, 그리고 헐벗은 누이야들의 옷가지가 고스란히 얹혀 있었다.
“어머니, 저도 장에 갈래요.”
이불 속에서 몸을 벌떡 일으키며 내가 조르듯 말했다. 초등학교 3학년의 가을이었다. 학교 가는 신작로 끝을 지나면 늘 저 너머에는 어떤 세상이 펼쳐져 있을까 가슴이 뛰곤 했다.
어머니는 봇짐을 매만지다 말고 기가 차다는 듯 나를 돌아보았다.
“거긴 30리 길이다. 코 흘리개 네가 거길 어딜 따라와. 어서 학교나 갈 준비 해라.”
“아니에요, 같이 갈 수 있어요. 저 정말 잘 걸을 수 있어요!”
완고하게 버티는 내 고집에 어머니는 결국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방구석에서 색색 잠에서 깨어난 지 막 돌이 지난 막내 여동생을 가리켰다.
“정 가고 싶거든, 이 녀석을 등에 업고 가라. 가다 힘들어 울어도 나는 모른다.”
어머니의 그 서슬 퍼런 농담 반 진담 반의 말에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포대기를 가져와 앙증맞게 따뜻한 동생의 몸을 내 등에 칭칭 동여맸다. 묵직한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지만, 내 마음은 이미 학교 울타리를 넘어 신작로 너머의 미지의 세계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어린 나를 태운 첫 번째 거대한 세상으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신작로에 들어서자마자 가을 햇살은 맹렬하게 대지를 달구기 시작했다. 학교 아래에 사는 내 친구들이, “야 빙근이 너 어디가노”라고 물었지만 나는 친구들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꾸벅꾸벅 자꾸 장으로 향했다. 내 마음속에는 나는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는 아침 햇살 같은 모습으로 희망에 차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의 작은 보폭으로 성큼성큼 걷는 어미의 뒤를 쫓기란 벅찬 일이었고, 등 뒤에는 돌이 지난 막내 여동생이 포대기에 묶여 단단히 밀착되어 있었다.
“엄마, 다리가 아파요.”
칭얼거림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어머니의 굽은 등 뒤에서 전해져 오는 묵직한 체온이 내 입을 막아 세웠다. 어머니는 봇짐을 고쳐 메며 뒤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무심히 말했다.
“거봐라. 업고 가지 말자고 했잖냐. 힘들면 지금이라도 집으로 돌아가거라.”
돌아갈 수 없었다. 아니,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학교 가는 길 끝, 늘 나를 유혹하던 저 너머의 세계가 바로 이 길 끝에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나는 이를 악물고 동생의 엉덩이를 토닥이며 걸음을 재촉했다.
“아니에요. 잘 업고 갈 수 있어요.”
길가에는 이름 모를 들꽃들이 피어 있었고, 논타작이 끝난 들판 너머로 바람이 황금빛 물결을 일으키며 스쳐 지나갔다. 고단함 속에서도 가슴 한구석에서는 묘한 설렘이 피어올랐다. 세상은 내가 아는 교실과 마을보다 훨씬 더 넓고, 거대하게 펼쳐져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고 종아리가 퉁퉁 부어올라 감각이 사라져 갈 때쯤, 저 멀리 시끌벅적한 소음과 함께 장터의 왁자지껄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의 흥정하는 소리, 뻥튀기 아저씨의 귀를 찢는 듯한 경보음, 그리고 국밥 부뚜막에서 피어오르는 구수한 육수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어머니는 장터 어귀에 자리를 잡고 조심스럽게 무명 보자기 풀었다. 그 하얗고 보드라운 누에고치들이 세상의 빛을 보자, 농협 누예 공판장에서 검사관은, “수등” 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양이 너무 적어 손에 쥔 돈은 얼마 되지 않았다.
어머니의 주름진 손이 고치를 판매하는 동안, 나는 등 뒤에서 깨어난 동생을 내려놓고 장터 바닥을 두리번거렸다. 누예를 팔아 손에 쥔 몇 푼의 동전으로 어머니가 사 준 투박한 엿가락 하나. 입안에서 달콤하게 녹아내리는 그 맛은, 30리 길의 고단함을 단번에 씻어내 주는 세상에서 가장 찬란한 축제였다.
나는 그곳에서 보았다. 좁은 울타리를 넘어, 수많은 사람들이 부딪치며 살아가고 있는 이 거대하고 뜨거운 세상을!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장다리 길, 다시 30리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낮보다 훨씬 멀고 험했다. 퉁퉁 부어 터질 것 같은 종아리마다 묵직한 통증이 밀려왔고, 등 뒤의 동생은 고단함에 잠투정을 부렸다. 하지만 어머니의 지친 등 뒤로 따라 걷던 내 걸음은 더 이상 어린아이의 투정 섞인 발걸음이 아니었다. 이미 어두움은 찾아오고, 집으로 돌아오는 신작로 위에서, 나는 문득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빛나고 있었다. 가난이라는 그늘은 여전히 우리 집을 감싸 안고 있었지만, 내 눈에 비친 밤하늘의 별들은 낮에 장터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의 눈빛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나도 커서 이 넓은 세상으로 나갈 거야. 저 멀리, 더 큰 세상의 빛을 향해 달릴 거야.’
어느덧 강산이 여섯 번이나 바뀌고도 남을 64년의 세월이 흘러온 지금, 시드니의 푸른 바람 속에서 학자의 서재에 앉아 문득 그때 그 초등학교 3학년의 소년을 돌아본다. 어느덧 74살의 나이가 되었지만, 나는 아직도 상담 대학의 학장으로 후학을 가르치며 오늘도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꿈을 멈추지 않고 있다. 다가오는 다음 달, 세계적인 석학들이 모이는 컨퍼런스에서의 발표를 준비하는 내 손끝에는, 그날 밤 30리 길의 신작로 위에서 반짝이던 별빛이 여전히 뜨겁게 살아 숨 쉬고 있다. 돌 지난 동생을 업고 30리 장길을 걸었던 그날의 어린 소년은, 오늘날 수많은 상처 입은 영혼들의 길을 비추는 따뜻한 치유자의 모습으로 그 의연한 발걸음을 마침내 완성해 나가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는 유난히 아래 성경 구절이 가슴에 울림을 주고 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15:10).
언약 백성이 누리는 특권
우리는 철저한 ‘계약 (Contract)’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네가 이것을 주면, 나는 저것을 주겠다”는 조건부 거래가 일상과 관계의 기본 바탕이 되었습니다. 손해와 이익을 예민하게 따지고, 상호 합의된 조건이 충족되지 않거나 이익이 훼손되면 언제든 그 관계는 차갑게 파기됩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전혀 다른 토대 위에 서 있습니다. 성경은 이를 ‘언약 (Covenant)’이라고 부릅니다.
언약은 이해관계를 따지는 거래가 아니라, 생명을 나누는 ‘관계’입니다. 서류에 도장을 찍고 끝나는 계약과 달리, 고대 사회의 언약식은 짐승을 쪼개고 그 사이를 지나가며 자신의 생명을 거는 철저한 헌신을 의미했습니다. 계약이 정해진 기한이나 조건의 불이행으로 쉽게 무효화된다면, 언약은 한쪽이 신실하지 못할지라도 다른 한쪽이 끝까지 약속을 지켜내는 무조건적이고 영원한 성격을 띱니다. 우리가 실패하고 넘어질 때, 법적인 제재나 파기를 선언하는 대신 가슴 아파하며 우리를 다시 회복의 자리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 즉 ‘헤세드 (Hesed)’가 바로 이 언약을 지탱하는 강력한 힘입니다.
그렇다면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계약’이 아닌 예수를 믿어 (요1:12)’언약’을 맺은 백성으로서, 우리는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가장 먼저, 우리의 신앙생활은 두려움이나 의무감이 아닌 ‘은혜에 대한 감사의 반응’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계약 관계에 익숙한 우리는 종종 신앙마저도 “내가 헌신하지 않고 규칙을 어기면 벌을 받거나 축복에서 제외될 것”이라는 두려움 속에서 유지하려 합니다. 하지만 언약의 백성에게 순종은 하나님의 사랑을 얻어내기 위한 조건이 아닙니다. 나를 조건 없이 사랑하시고 자녀 삼아주신 그 크신 은혜에 감격하여, 기쁨과 자발성으로 그분의 말씀을 따라가는 사랑의 발걸음입니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자연스럽게 율법과 규칙의 준수보다 ‘관계의 친밀함’을 삶의 최우선 순위에 두게 만듭니다. 신앙은 내가 도덕적 채점표를 얼마나 잘 채워가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종교적 의무가 아닙니다. 매일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 기도로 나의 마음을 쏟아놓으며 하나님과 깊고 내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 자체가 우리 삶의 가장 큰 목적이자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연약하기에 삶의 자리에서 수없이 넘어지고 실패합니다. 만약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계약 관계였다면, 우리는 이미 수백 번도 더 해고를 당하거나 계약 파기 통보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를 지을 때마다 본능적으로 수치심을 느끼고 아담처럼 하나님을 피해 어두운 곳으로 숨으려 합니다. 그러나 언약은 다릅니다. 넘어지고 부서진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절망하여 숨는 대신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언약을 신뢰해야 합니다. 나의 어떠함이 아니라 나를 붙드시는 십자가의 은혜를 의지하여, 즉시 회개하고 다시금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는 용기가 바로 언약 백성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더 나아가, 수직적으로 맺어진 이 십자가의 언약은 우리의 수평적인 삶을 통해 이웃에게로 흘러가야 합니다. 세상은 여전히 ‘준 만큼 받는’ 냉정한 거래의 원칙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대우하지만, 언약 백성은 달라야 합니다. 하나님께 거저 받은 그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서의 마음으로 무장하여, 우리의 가정과 일터, 그리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조건 없는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세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우리의 삶의 방식을 통해 바라보고 평가합니다. 우리가 억울한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정직과 신실함을 지키고, 조건 없이 이웃을 품어내며 용서할 때, 세상은 비로소 “저들이 믿는 하나님은 참으로 신실하고 사랑이 많으신 분이구나”를 깨닫게 됩니다.
결국, 언약 백성으로 산다는 것은 흠결 없는 완벽한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나를 완벽하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변함없는 약속의 품 안에 머물며, 오늘 하루도 그 사랑에 기대어 조금씩, 그러나 분명하게 그분을 닮아가는 가슴 벅찬 여정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31:33).
모두 주안에서 행복한 주일 하루 되세요.

김병근 목사
엠마오상담대학 학장, 시드니성시화운동 직전대표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