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은퇴설교 (37년 3개월, 시편 37:3절의 고백)
(2026년 9월 27일 2시, 채스우드 구세군 교회, 은퇴 예배)
오늘 참석해 주신 모든 선후배 목사님들과 성도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늘 이 자리에 말씀을 잘 전하시는 목사님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런데도 제가 직접 설교를 맡은 데에는 아주 현실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님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이미 예배를 드리고 오셨을 것입니다. 말씀의 은혜도 충분히 받고 오셨을 텐데, 다른 목사님에게 설교를 부탁했다가 설교가 길어지면 참석한 분들에게 결례가 될 것 같아 오늘은 제가 직접, 아주 짧게 설교하기로 했습니다.
한 가지 더 이유가 있습니다. 지난번 우리 교회 청년의 결혼식을 집례했습니다. 한 청년이 은혜를 받았다면서 자기 결혼식도 주례해 달라고 했습니다. 어느 부분에서 은혜를 받았냐고 물으니 주례사가 너무 짧아서 은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혹시 오늘 설교를 짧게 하면, 은퇴하고라도 초청할 목사님이 계시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갖고 짧게 하겠습니다.
오늘은 저의 소박한 꿈이 이루어진 날이기도 합니다. 작년 1월 1일, 구세군 채스우스 교회로 이전했습니다. 좌석이 200석 정도 됩니다. 은퇴하기 전에 언젠가 교회를 꽉 채우고 예배를 드리고 싶었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이 되었습니다. 제 꿈을 이루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한국에서 동기생 대표 3분이 오셨고, 울릉공에서도 오셨고, 브리스번에서도 오셨습니다.
저는 1989년 6월 11일, 미국 시카고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구세군 사관으로 임관과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날부터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임관 후 한국에서 8년 6개월 동안 사역하였고, 1997년 12월 1일자로 새로운 사역지인 호주 시드니로 옮겨 왔습니다. 낯선 땅과 문화 속에서 다시 사역을 시작한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호주에서 총 37년 3개월 동안 구세군 사관으로 봉직했습니다.
지나온 세월은 길지만, 오늘 전하고 싶은 고백은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셨고, 여러분께서 함께해 주셨기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제 은퇴를 앞두고 ‘37년 3개월’이라는 시간을 묵상하다가 시편 37편 3절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게 되었습니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을지어다.”
‘37년 3개월’이 ‘시편 37편 3절’과 연결된다는 사실은 저에게 매우 특별한 의미로 다가옵니다.
이 말씀은 지난 사역을 돌아보게 할 뿐만 아니라, 은퇴 이후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첫째,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는 말씀에는 신앙의 뿌리와 열매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여호와를 의뢰하는 것이 신앙이라면, 선을 행하는 것은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이 뿌리라면, 이웃에게 베푸는 선한 행동은 그 뿌리에서 맺히는 열매입니다.
구세군의 모토인 “마음은 하나님께, 손길은 이웃에게”는 이 말씀과 참 잘 어울립니다.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여호와를 의뢰하라”는 말씀에 대한 응답이고, 손길을 이웃에게 내미는 것은 “선을 행하라”는 말씀에 대한 실천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나타날 때, 우리의 신앙은 삶 속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저는 이것을 “신앙은 수동태이고, 신앙생활은 능동태이다”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신앙이 수동태라는 것은 신앙의 출발이 나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는 뜻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붙잡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나를 붙잡으셨고, 내가 하나님을 찾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나를 찾아오셨습니다.
사랑도 하나님께서 먼저 시작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계시도 하나님께서 먼저 시작하셨습니다. 우리가 지혜와 노력으로 하나님을 알아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알려 주셨습니다. 용서도 하나님께서 먼저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용서받을 자격을 갖추기 전에,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먼저 내밀어 주신 하나님의 손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나의 능력을 의지하던 자리에서 내려와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은 사람은 그 은혜에 응답하며 살아갑니다. 사랑받았기에 사랑하고, 용서받았기에 용서하며, 주님께서 나를 섬겨 주셨기에 나도 이웃을 섬깁니다. 이것이 능동적인 신앙생활입니다. 선을 행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사랑에 감사하여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둘째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
먹을 거리는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고 오늘을 살아갈 힘을 줍니다. 어제 먹었다고 오늘 먹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날마다 먹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먹을 거리로 삼는다는 것은, 날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하며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성실하심은 하나님께서 부지런하시다는 뜻에 머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저버리지 않으시고, 자신의 백성을 향한 사랑과 돌보심을 끝까지 지키신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흔들려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형편은 달라져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3장 8절은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어제 우리를 붙드신 주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하시며, 내일도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미래를 다 알기 때문에 평안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미래를 붙드시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기에 평안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꽃 같은 눈으로 우리의 형편을 살피시며, 자기 백성을 눈동자처럼 귀하게 지키십니다. 우리가 미처 말하지 못한 아픔도 아시고,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눈물도 보십니다. 때로는 위험에서 건져 주시고, 때로는 고난을 견딜 힘을 주시며, 우리가 길을 찾지 못할 때에도 우리를 버리지 않고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보호는 우리에게 어려움이 전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확실한 내일을 염려하는 대신, 오늘도 변함없이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 지난 37년 3개월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듯이, 앞으로의 날들도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먹을거리로 삼으며 살아가겠습니다.
맺는말
오늘 저는 현직 사관으로서의 공식적인 직무에서 물러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까지 내려놓는 것은 아닙니다. 직책에서는 은퇴하지만, 사명에서는 은퇴하지 않겠습니다. 맡았던 책임은 다음 사역자에게 넘겨드리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는 일은 계속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저를 붙드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앞으로도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자리에서 계속해서 믿음의 길을 걷겠습니다. 마음은 하나님께 드리고, 손길은 이웃을 향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여러분과 함께한 시간은 제 삶의 큰 기쁨이었고,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여러분 모두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올려 드립니다.

감사인사
저희 부부의 은퇴감사예배에 함께해 주신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바쁘신 가운데 귀한 걸음을 해 주신 선후배 사관님들과 목사님들, 성도님들, 그리고 멀리서 기도와 축하의 마음을 보내 주신 모든 분의 사랑을 깊이 간직하겠습니다.
37년 3개월의 사역을 돌아보니 모든 순간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부족한 저희를 부르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또한 기쁠 때 함께 웃고, 어려울 때 곁을 지켜 주신 여러분 덕분에 맡겨진 길을 걸어올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은퇴감사예배를 정성껏 준비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고해 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이 전해 주신 따뜻한 말씀과 기도, 꽃다발에 담긴 사랑은 오래도록 저희 마음에 남을 것입니다.
이제 구세군 사관으로서의 공식적인 직무에서는 물러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은 계속됩니다. 앞으로도 “마음은 하나님께, 손길은 이웃에게”라는 고백을 품고, 주어진 자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섬기겠습니다.
지나온 시간에는 감사가 깊어지고, 오늘에는 기쁨이 충만하며, 다가올 시간에는 소망이 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사역 위에 하나님의 평안과 은총이 늘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We extend our heartfelt thanks to everyone who joined us for our retirement appreciation service. We will deeply cherish the love shown by the fellow officers, pastors, and congregation members who took the time out of their busy schedules to attend, as well as by those who sent their prayers and congratulations from afar.
Looking back on our 37 years and three months of ministry, every moment was a testament to God’s grace. We give glory to God, who called us—despite our shortcomings—and guided us this far. We were able to walk the path entrusted to us thanks to all of you who shared in our laughter during times of joy and stood by our side during times of hardship.
We are especially grateful to everyone who devoted themselves to preparing the service and worked tirelessly behind the scenes. The love conveyed through your warm words, prayers, and beautiful flowers will remain in our hearts for a long time.
Although we are stepping down from our official duties as Salvation Army officers, the mission God has given us continues. Moving forward, holding fast to the conviction of “Heart to God, Hand to Man,” we will continue to love God and serve our neighbors wherever we are.
We pray that gratitude deepens for the time past, joy fills the present, and hope blossoms in the days to come. May God’s peace and grace always be with you and your families.
We love you all and thank you sincerely.
Majors Hwan ki Kim and Eun ryo Kim
신실하신 주님,
주님을 의뢰하는 믿음은 주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손을 내미신 은혜의 자리이며, 선을 행하는 삶은 그 은혜에 응답하여 우리가 이웃에게 손을 내미는 사랑의 실천임을 고백합니다. 오늘도 주님을 의뢰하고 선을 행하며 살게 하시고, 우리가 축복의 창고가 아니라 축복의 통로임을 알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을지어다(시 37:3)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는 말씀에는 신앙의 뿌리와 열매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여호와를 의뢰하는 것은 신앙이고, 선을 행하는 것은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은 수동태이고, 신앙생활은 능동태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손을 내밀었고, 신앙생활은 우리가 먼저 이웃에게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마음은 하나님께, 손길은 이웃에게’
빛과 생명의 주님,
9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어두운 사막에 수많은 빛이 피어나듯 우리의 삶에도 주님의 빛을 비추어 주심에 감사합니다. 때로 인생의 밤이 깊어 앞길이 보이지 않을 때에도 어둠보다 빛이 강하다는 사실을 믿게 하소서. 우리가 세상의 모든 어둠을 없애려고 하기보다 주님께서 맡겨 주신 자리에서 작은 빛 하나를 밝히게 하소서. 빛 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울룰루의 해가 지면 광활한 사막은 어둠에 잠깁니다. 그러나 잠시 후 땅에서 하나둘 작은 빛들이 깨어납니다. 처음에는 작은 점처럼 보이던 빛들이 수만 개가 되어 마침내 어두운 사막 전체를 빛의 들판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Field of Light’를 바라보며 신앙도 이와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 사람이 빛나면 하나의 등불이 되지만, 함께 빛나면 세상이 빛의 들판이 됩니다.
— 울룰루에서 —
울룰루는 ‘호주의 배꼽’이라고 불립니다. 울룰루(Uluru)는 “세계에서 가장 큰 단일 바위(monolith)”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울룰루는 기본적으로 사암(sandstone)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암석 지형입니다. 특히 이 사암을 아르코스(arkose)라고 하는데, 일반 사암보다 장석(feldspar)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래전, 주변 산맥에서 침식되어 내려온 모래와 자갈이 쌓이고 굳어진 뒤 지각운동으로 거의 수직에 가깝게 기울어지고, 오랜 침식을 거쳐 오늘날의 모습이 드러났습니다.
울룰루가 붉게 보이는 이유도 흥미롭습니다. 암석 자체가 원래부터 짙은 붉은색인 것이 아니라, 표면에 포함된 철 성분이 산소와 반응하여 산화철, 쉽게 말해 녹과 비슷한 물질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햇빛의 각도에 따라 주황색, 붉은색, 자주색 등으로 다양하게 보입니다.
또한 우리가 지상에서 보는 울룰루는 전체 지질 구조의 일부입니다. 높이는 주변 평원에서 약 348m, 둘레는 약 9.4km이며, 상당한 암석 구조가 지하로 이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흔히 말하는 “땅 위에 놓여 있는 거대한 돌덩어리”라기보다는 땅속 지층과 연결된 거대한 사암층이 침식되어 드러난 지질 구조라고 이해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그리고 울룰루는 지질학적인 바위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이곳은 Uluru이며, 아난구(Anangu) 원주민에게 오랜 세월 신성한 장소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래서 울룰루를 바라볼 때는 자연의 역사와 원주민의 문화·영성이 함께 새겨진 바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26년 10월 01일(목)
10월의 첫 태양이 떠오릅니다. 어제의 후회에 붙잡히지 않게 하시고,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염려하지 않게 하시며, 오늘이라는 하나님의 선물에 감사하며 살게 하소서. 오늘 떠오른 태양이 세상을 밝히듯, 우리도 주님께 받은 빛을 이웃에게 비추며 살아가게 하소서. 새로운 달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사 43:19)
태양은 어둠과 구름을 없앤 다음에 떠오르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하늘에는 짙은 구름이 남아 있지만, 그 아래에서 빛은 이미 시작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야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염려가 남아 있고, 풀리지 않은 문제가 있고, 앞날을 알 수 없어도 하나님의 은혜는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됩니다.
— 울룰루에서 —
킹스 캐니언(Kings Canyon)은 호주 노던테리토리의 와타르카 국립공원(Watarrka National Park)에 있는 거대한 붉은 사암 협곡입니다.
킹스 캐니언의 가장 인상적인 특징은 수직으로 깎인 붉은 사암 절벽입니다.
상부의 절벽은 오래전에 형성된 Mereenie Sandstone이고, 그 아래에는 Carmichael Sandstone이 자리합니다. 오랜 세월 물과 풍화 작용이 상대적으로 약한 부분을 깎아내면서 오늘날의 깊은 협곡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울룰루가 하나의 거대한 암석 덩어리라는 느낌이라면, 킹스 캐니언은 물이 대지를 파내고 시간에 의해 조각된 거대한 계곡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킹스 캐니언을 제대로 경험하는 대표적인 방법은 Kings Canyon Rim Walk입니다.
6km 순환 코스이며 보통 3–4시간 정도 걸립니다. 처음부터 상당히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중간 이상의 체력이 필요합니다.
정상에 오르면 절벽 가장자리를 따라 걸으며 협곡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습니다.
특히 첫 오르막은 상당히 가파르기 때문에 흔히 방문객들이 “Heart Attack Hill”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Rim Walk 중간에는 Garden of Eden, ‘에덴동산’이라는 이름의 깊은 골짜기가 있습니다.
사방이 붉은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아래에는 물웅덩이와 녹색 식물이 자라고 있습니다. 건조한 사막 한가운데서 갑자기 푸른 식물이 나타나기 때문에 정말로 작은 오아시스처럼 보입니다.
이곳에는 MacDonnell Ranges Cycad 같은 식물들도 살아갑니다. 물웅덩이는 지역 원주민에게도 중요한 장소이며 자연 보호를 위해 수영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Rim Walk를 걷다 보면 둥근 지붕처럼 생긴 사암 바위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곳이 나타납니다.
이를 흔히 Lost City, ‘잃어버린 도시’라고 부릅니다. 멀리서 바라보면 고대 도시의 건물들이 폐허가 되어 남아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사암층에 생긴 균열과 오랜 침식 작용으로 만들어진 자연 지형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
10월의 둘째 날입니다. 동방박사들이 먼 길을 걸어 베들레헴의 아기 예수님을 찾아갔던 것처럼 오늘도 주님을 찾는 마음을 주소서. 우리의 지식이 교만이 아니라 경배가 되고, 우리의 여행이 방황이 아니라 순례가 되며, 우리의 길이 성경과 성령의 인도를 받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마 2:2)
북쪽 하늘에는 북극성이 있고, 남쪽 하늘에는 남십자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하늘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별이 여행자의 길을 알려 주듯, 말씀은 인생의 길을 인도합니다.
— 울룰루에서 —

울룰루에서 킹스캐니언으로 여행하다 보면 Kings Creek Station이라는 곳을 만나게 됩니다.
이곳은 킹스캐니언에서 약 36km 떨어진 아웃백 스테이션으로 1981년에 설립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오래전부터 유명한 음식은 Camel Burger입니다.
낙타고기는 비교적 지방이 적고 소고기와 비슷하면서도 조금 더 담백한 육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햄버거 패티로 만들면 처음 먹는 사람도 비교적 부담 없이 경험할 수 있습니다.
“낙타는 호주 내륙을 개척한 일꾼에서 야생동물이 되었고, 오늘날에는 환경관리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관광과 낙타버거 같은 아웃백 문화의 한 부분이 되었다.”
울룰루에서 낙타를 타고, 킹스캐니언에서 낙타버거를 맛본다면 이것은 단순한 관광 체험 두 가지가 아니라, 150년이 넘는 호주 아웃백의 역사를 ‘타고’ 또 ‘맛보는’ 경험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호주의 야생낙타(feral camels)는 원래 호주에 살던 동물이 아닙니다. 19세기 호주 내륙의 탐험과 운송을 위해 들여온 낙타들이 자동차와 철도가 발달하면서 필요가 줄어들자 일부가 야생으로 풀려났고, 이후 중앙 호주의 건조한 환경에 잘 적응하면서 큰 개체군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현재 야생낙타는 호주 본토의 약 37% 이상 지역에서 발견되며, 특히 노던테리토리에서는 전체 면적의 40% 이상에 분포합니다. NT 정부 자료는 호주 전역에 100만 마리 이상의 야생낙타가 있을 수 있으며, 관리하지 않을 경우 개체수가 약 9년마다 두 배로 증가할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울룰루와 앨리스스프링스가 있는 중앙 호주(Central Australia)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 지역에는 낙타를 위협하는 천적이 거의 없고, 낙타 자체가 물 부족과 높은 기온에 매우 잘 적응하기 때문에 야생에서 번성했습니다. 국가 야생낙타 관리계획에서도 호주의 야생낙타는 사람을 제외하면 사실상 뚜렷한 천적이 거의 없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개체수가 너무 많아지면 문제가 생깁니다. 낙타는 중앙 호주에서 자라는 식물의 80% 이상을 먹을 수 있으며, 물웅덩이와 염호 주변을 훼손하고 토착 식물과 Aboriginal 공동체가 이용하는 전통 식물자원에도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울타리와 목축용 급수시설도 파손하기 때문에 호주에서는 야생낙타를 단순한 야생동물이 아니라 관리가 필요한 침입종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는 일부 야생낙타를 포획하여 가축화하거나 관광용으로 사용하고, 상업적으로 판매하기도 하며, 환경 피해가 심한 곳에서는 개체 수 조절도 실시합니다. 호주 정부는 야생낙타를 국가적으로 관리해야 할 주요 유해동물 가운데 하나로 분류해 관리계획을 두고 있습니다.
울룰루에서 관광객이 타는 낙타들도 이러한 호주 아웃백의 낙타 역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울룰루의 낙타는 단순한 관광동물이 아니라, 호주 내륙 개척의 역사 → 야생화 → 오늘날 관광·산업과 환경관리라는 독특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호주 중부의 붉은 대지를 달리다 보면, 끝없이 펼쳐진 평원 위로 거대한 바위산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앨리스스프링스에서 울루루로 향하는 길이라면 처음 보는 사람은 거의 틀림없이 이렇게 말하게 된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 보면 그것은 울루루가 아니라 마운트 코너(Mount Conner)이다. 그래서 마운트 코너에는 재미있는 별명도 있다. 여행자들이 울루루로 착각한다고 해서 흔히 ‘가짜 울루루(Fool-uru)’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마운트 코너를 단순히 ‘가짜 울루루’라고 부르기에는 이 산이 가진 모습과 이야기가 너무도 독특하다. 울루루와 마운트 코너는 같은 붉은 대지 위에 서 있지만, 자세히 바라보면 전혀 다른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울루루는 둥글다. 마치 오랜 세월 동안 바람과 비가 다듬어 놓은 거대한 조각품처럼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있다. 반면 마운트 코너는 정상부가 평평하다. 거대한 탁자를 사막 한가운데 올려놓은 것 같은 모습이다. 멀리서 보면 미국 서부의 메사(mesa)를 떠올리게 한다.
울루루는 주변 평원에서 약 348미터 솟아 있으며, 주로 장석이 풍부한 **아르코스 사암(arkose sandstone)**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늘날 우리가 바라보는 울루루는 수억 년에 걸친 퇴적과 지각 운동, 침식의 결과이다.
하지만 울루루는 단순한 지질학적 명소가 아니다. 이곳은 전통적 주인인 아낭구(Anangu) 사람들의 문화와 영성이 살아 있는 장소이다. 아낭구에게 울루루와 주변 땅은 조상들의 이야기와 법, 관계와 삶이 연결되어 있는 공간이다.
유럽인의 기록으로는 1873년 William Gosse가 이 지역에 도착하여 당시 남호주 수석장관 Henry Ayers의 이름을 따서 ‘Ayers Rock’이라고 불렀지만, 이 땅에는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아낭구 사람들이 살아왔다. 그래서 울루루 앞에 서면 단지 큰 바위를 바라본다는 느낌을 넘어선다.
아침 햇살이 비치면 갈색에서 주황색으로, 석양이 내려앉으면 붉은색에서 짙은 자주색으로 바위의 표정이 끊임없이 변한다. 바위가 색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빛이 바뀌는 것인데,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울루루 자체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반면 마운트 코너는 울루루로 가는 길목에서 여행자를 먼저 맞이한다.
현재 마운트 코너가 있는 지역은 Curtin Springs Station과 연결되어 있으며, 이 목장은 원래 Mt Conner Station으로 알려져 있었다. 1930년대에 설립되었으며 1956년부터 Severin 가족이 운영해 왔다.
두 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흥미로운 생각이 든다. 멀리서 보면 닮았지만, 가까이 가면 전혀 다르다. 사람도 그러하다. 우리는 멀리서 사람을 바라보고 쉽게 판단한다. 외모와 직업, 지위와 몇 마디 말만 듣고 그 사람을 다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 그의 삶의 역사와 상처와 이야기를 들어 보면 전혀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마운트 코너를 울루루라고 착각했던 여행자가 가까이 다가가면서 비로소 두 산의 차이를 발견하는 것처럼, 사람도 가까이 다가가야 제대로 보인다. 그리고 또 하나의 교훈이 있다.
마운트 코너는 울루루가 될 필요가 없다. 울루루가 유명하다고 해서 마운트 코너의 가치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울루루에는 울루루의 아름다움이 있고, 마운트 코너에는 마운트 코너만의 아름다움이 있다. 하나는 둥근 거대한 바위로 서 있고, 다른 하나는 평평한 정상의 웅장한 산으로 서 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때때로 다른 사람을 바라보며 “왜 나는 저 사람과 같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똑같은 모습으로 만들지 않으셨다. 울루루를 울루루답게 하셨고, 마운트 코너를 마운트 코너답게 하셨듯이, 우리에게도 각자의 자리와 모습과 이야기를 주셨다.
그래서 호주의 붉은 대지 위에 서 있는 두 거대한 바위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비교하지 말고, 자신의 모습으로 서 있으라.”
울루루는 수억 년 동안 울루루의 자리를 지켜 왔고, 마운트 코너 역시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서 있다. 사람들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유명하든 유명하지 않든 그것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변함없이 존재한다.
끝없이 펼쳐진 호주의 아웃백을 달리다가 마운트 코너를 지나 울루루에 이르면, 여행은 단순히 두 개의 바위를 보는 여행에서 하나의 인생 묵상으로 바뀐다.
멀리서 보면 비슷하지만 가까이 보면 다르고, 서로 다르지만 각각 아름답다. 어쩌면 울루루와 마운트 코너가 붉은 대지 위에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가장 깊은 이야기는 이것인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처럼 되려고 애쓰지 말라. 당신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당신답게 서 있으라.”
울루루가 울루루이기에 아름답고, 마운트 코너가 마운트 코너이기에 아름답듯이 우리의 삶도 하나님께서 주신 모습으로 살아갈 때 가장 아름답다.
울룰루는 한 번 보았다고 해서 다 본 것이 아니다. 같은 바위이지만 빛이 달라지면 표정이 달라지고, 바라보는 위치가 달라지면 의미도 달라진다.
나는 울룰루를 세 가지 방법으로 바라보았다. 일출 속에서, 일몰 속에서, 그리고 헬리콥터를 타고 하늘에서 바라보았다. 같은 울룰루였지만 세 번 모두 전혀 다른 울룰루였다.
새벽의 사막은 조용하다.
아직 해가 떠오르기 전, 울룰루는 어둠 속에서 거대한 실루엣으로 서 있다. 모든 색을 내려놓은 채 검고 묵직한 모습으로 새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다 동쪽 하늘이 서서히 밝아진다. 짙은 남색의 하늘이 보랏빛으로 변하고, 다시 붉은빛과 주황빛이 수평선 위로 번져 간다. 그 순간 첫 햇살이 울룰루의 표면에 닿는다.
처음에는 어두운 갈색이던 바위가 붉어지고, 조금 뒤에는 주황빛과 황금빛을 품는다. 밤새 침묵하던 거대한 바위가 마치 숨을 쉬기 시작하는 듯하다.
그러나 빛이 달라지자 전혀 다른 울룰루가 나타난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삶도 그러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둠 속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이 빛이 비추면 보이기 시작한다. 절망 속에서는 끝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아침이 오면 새로운 시작이 되기도 한다.
밤은 언제까지나 계속되지 않는다. 울룰루의 일출은 침묵으로 말한다.
일출의 울룰루가 조용히 깨어나는 모습이라면, 일몰의 울룰루는 하루의 마지막 순간에 가장 화려하게 자신을 드러낸다.
오후의 햇살이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면 울룰루의 색이 다시 변한다. 낮 동안 뜨거운 태양 아래 서 있던 붉은 바위가 점점 짙어진다.
주황빛이 붉은빛으로 변하고, 붉은빛은 어느 순간 불타는 듯한 강렬한 색으로 변한다.
하지만 울룰루는 스스로 빛나는 것이 아니다.
태양의 빛을 받아 빛나는 것이다.
우리의 삶도 그러하지 않을까.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내 안에서 만들어진 것처럼 생각하지만, 돌이켜 보면 참 많은 것들이 누군가에게 받은 것이다.
사랑을 받았고, 도움을 받았고, 기회를 받았고, 용서를 받았고, 기다려 주는 사람들을 만났다. 받은 빛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존재한다.
해가 점점 낮아지면서 울룰루의 색도 서서히 어두워진다. 마지막 햇빛이 바위 표면을 스치고 지나가면 조금 전까지 붉게 타오르던 울룰루는 다시 조용한 실루엣으로 돌아간다.
그 장면 앞에서는 이상하게 말을 줄이게 된다. 하루가 끝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지나온 시간을 돌아본다. 오늘 무엇을 이루었는가보다, 오늘 무엇을 받았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땅에서 바라보는 울룰루는 압도적이다. 가까이 서 있으면 그 거대한 벽 때문에 다른 것이 잘 보이지 않는다. 눈앞에는 오직 울룰루뿐이다.
그러나 헬리콥터가 이륙하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조금씩 고도가 높아질수록 방금 전까지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던 울룰루가 하나의 형태로 보이기 시작한다. 위에서 바라보면 울룰루의 전체 모습이 드러난다.
길게 이어진 능선, 깊게 패인 골짜기, 빗물이 흘러내리며 만들어 놓은 흔적, 수많은 주름과 굴곡이 한눈에 들어온다.
헬리콥터가 울룰루 주변을 돌 때마다 바위의 얼굴도 달라진다. 어느 방향에서는 둥글고 온화하게 보이다가, 다른 방향에서는 거칠고 가파르게 보인다.
그때 하나의 깨달음이 찾아온다. 한쪽에서 본 것이 전부가 아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너무 가까이 있을 때는 문제가 세상의 전부처럼 보인다. 한 번의 실패가 인생 전체처럼 느껴지고, 한 사람과의 갈등이 모든 관계를 덮어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조금 거리를 두면 다른 모습이 보인다. 더 높은 곳에서 보면 작은 사건들이 더 큰 이야기 속에 자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땅에서는 세상의 중심처럼 거대했던 울룰루가 끝없이 펼쳐진 붉은 대지 속 하나의 존재로 보인다. 광대한 사막, 멀리 이어지는 지평선, 그 한가운데 자리한 울룰루.
그 장면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든다. 가까이에서는 너무 커 보였던 것도 멀리서 보면 전체의 한 부분일 뿐이다.
울룰루 여행은 단순히 거대한 바위를 보는 여행이 아니다. 빛을 보는 여행이고, 시간을 보는 여행이며, 나 자신을 다시 보는 여행이었다.
울룰루가 하나의 거대한 바위라면, 카타추타는 여러 개의 거대한 돔이 모여 하나의 장엄한 풍경을 이루는 곳이다. 멀리서 바라보면 둥근 바위 봉우리들이 서로 어깨를 맞대고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 보면 각각의 돔은 독립된 하나의 세계처럼 느껴진다.
카타추타라는 이름이 ‘많은 머리들’을 뜻한다는 설명을 들었을 때는 단순히 지형을 묘사한 이름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그곳에 서 보니 그 이름이 훨씬 더 생생하게 다가왔다.
오후에 카타추타를 찾았다. 해는 아직 높이 떠 있었지만, 한낮의 거친 빛은 조금씩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붉은 대지 위로 거대한 돔들이 나타났고,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규모는 더욱 압도적으로 느껴졌다.
사진이나 화면으로 보았던 것보다 훨씬 크고, 훨씬 깊었다. 멀리서는 둥글고 부드러운 곡선처럼 보이던 바위가 가까이에서는 수많은 홈과 갈라짐, 침식의 흔적을 품고 있었다.
나는 ‘Valley of the Winds’, 바람의 계곡으로 들어갔다.
이름부터 인상적이었다. 바람의 계곡. 실제로 돔 사이를 걷기 시작하자 바람이 계속해서 몸을 스쳐 지나갔다. 뜨거운 공기 속에서도 바위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은 잠시 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양쪽으로 솟아 있는 거대한 암벽 사이를 걷다 보면, 사람은 자연스럽게 작아진다. 내가 바위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거대한 시간 앞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카타추타의 바위는 울루루와 또 달랐다. 울루루가 한 덩어리의 거대한 존재감으로 사람을 압도한다면, 카타추타는 수많은 돔과 골짜기와 틈새가 이어지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장면을 보여 주었다.
한 굽이를 돌면 다른 바위가 나타났고, 또 한참을 걸으면 전혀 다른 계곡의 풍경이 펼쳐졌다. 그래서 카타추타는 바라보는 장소라기보다 안으로 들어가 경험하는 장소처럼 느껴졌다.
걷는 동안 자꾸 하늘을 올려다보게 되었다. 거대한 돔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넓으면서도 좁았다. 광야 전체로 보면 끝없이 열린 하늘인데, 바위 사이에서는 한 조각의 푸른 천처럼 보였다. 그 장면이 참 묘했다. 넓은 세상 안에서 잠시 좁은 길을 걷고 있는 느낌이었다.
멀리서 바라보면 한 사람의 삶은 하나의 큰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 보면 수많은 골짜기와 굴곡이 있다. 평탄한 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좁은 길도 있고, 바람이 거세게 부는 때도 있고,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순간도 있다. 그러나 계곡을 걷다 보면 결국 길은 계속 이어진다. 굽이를 돌 때마다 또 다른 풍경이 나타난다.
카타추타의 바위 사이에는 의외로 많은 식물이 자라고 있었다. 붉은 바위와 메마른 땅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살지 못할 것 같지만, 곳곳에 초록의 관목과 풀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척박한 곳에서도 생명은 살아가고 있었다.
좋은 조건에서만 자라는 것이 생명은 아니었다. 오히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찾아 뿌리를 내리는 모습이 더 강인하게 느껴졌다.
바람의 계곡을 걷는 동안 몸은 조금 지쳤지만 마음은 오히려 맑아졌다. 자연 속에서는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것이 있었고, 해석하지 않아도 마음에 남는 장면이 있었다.
바람의 계곡을 걷고 나온 뒤 우리는 카타추타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동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자 낮 동안 보았던 카타추타가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 처음에는 붉은 갈색이었던 바위가 노란빛을 띠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주황색으로, 다시 더욱 깊은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눈앞에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바위는 움직이지 않았다. 카타추타는 처음부터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변한 것은 빛이었다.
우리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 어떤 상황 자체가 갑자기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바라보는 빛이 달라질 때 전혀 다른 의미가 보이기도 한다. 과거에는 실패라고 생각했던 일이 시간이 흐른 뒤에는 새로운 시작이었음을 깨닫기도 한다.
나는 신앙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신앙은 언제나 상황을 바꾸는 능력이 아닐 수도 있다. 때로는 상황은 그대로 남아 있다. 문제도 그대로 있고, 상처도 남아 있으며, 해결되지 않은 일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은 그 모든 것을 바라보는 빛을 바꾸어 준다.
절망만 보이던 곳에서 소망을 보게 하고, 실패 속에서 배움을 발견하게 하고, 상실 속에서도 감사할 이유를 찾게 한다.
해가 더 낮아지자 카타추타는 하루 중 가장 아름다운 색을 드러냈다. 붉은빛이 바위 전체를 감싸고, 구름은 금빛과 회색을 오가며 하늘을 덮었다. 붉은 대지와 초록의 관목, 주황빛 바위, 푸른 하늘이 한 화면 안에 어우러졌다.
자연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는 설명보다 침묵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너무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는 말을 찾으려 할수록 오히려 말이 부족해진다.
우리는 대개 떠오르는 태양을 희망과 시작으로 생각한다. 반대로 지는 해는 끝과 사라짐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카타추타의 일몰은 그 생각을 바꾸어 놓았다.
젊음의 아침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인생의 오후에도 아름다움이 있고, 저녁에도 저녁만의 색깔이 있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단순히 무엇인가를 잃어 가는 일이 아니라, 다른 깊이와 다른 빛깔을 얻어 가는 과정일 수 있다.
낮에는 볼 수 없었던 색이 저녁이 되어야 비로소 드러나는 것처럼, 사람도 시간이 지나야 드러나는 아름다움이 있다. 경험에서 오는 여유, 실패를 통과한 겸손, 상처를 지나온 공감, 긴 시간을 견딘 사람만이 가진 깊이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일몰은 끝이 아니라 완성에 가까웠다.
주님,
오늘은 대한민국의 개천절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하늘을 향해 열리게 하시고, 우리의 생각도 열리게 하시며, 우리의 손도 이웃을 향해 열리게 하소서. 이 땅에 평화와 화해를 허락하시고,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며 약한 이들을 돌보는 사회가 되게 하소서. 우리 각자의 삶에도 새로운 하늘을 열어 주시고, 막힌 길에는 길을 내시며, 메마른 마음에는 생명의 물을 흐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사 40:4)
하늘이 열리면 길이 보이고, 하늘을 바라보면 소망이 생기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메마른 땅에서도 생명이 자랍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민족이 평화와 정의를 이루며, 서로를 존중하고 이웃을 섬기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개인의 삶에서도 닫힌 마음이 열리고, 막힌 관계가 회복되며, 새로운 길이 열리기를 소망합니다.
— 울룰루에서 —
개천절(하늘이 열린 날)
카타추타에서 바라본 새벽,
붉은 대지 끝에 울룰루가 검은 실루엣으로 고요히 서 있다.
그 곁으로 태양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며 새로운 하루를 연다.
밤새 어둠에 잠겨 있던 하늘은 황금빛으로 물들고, 구름은 불꽃처럼 붉게 타오른다.
떠오르는 태양은 대지를 깨우고, 울룰루는 말없이 그 새날을 맞이한다.
빛이 어둠을 밀어내고 광야가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아무 말 없는 침묵이 오히려 가장 깊은 언어가 된다.
오래된 바위와 새롭게 떠오르는 태양이 마주하는 그 풍경 속에서, 어제와 오늘이 만나고 끝과 시작이 하나가 된다.
2026년 10월 4일(주일)
울룰루 여행을 마무리하며 현지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붉은 대지와 거대한 바위, 광야의 일출과 일몰을 바라보며 창조의 경이로움을 느꼈던 여행이었다. 그 여정의 끝에서 그 땅에 살아가는 이들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게 된 것은 또 하나의 특별한 만남이었다. 마침 교회에서는 부흥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예배는 성찬식으로 시작되었다. 떡과 포도즙을 나누며 우리를 위해 몸을 내어 주시고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했다.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이었지만, 같은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한자리에 앉아 있었다. 낯선 곳에서 처음 만난 이들과 나누는 성찬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했다.
처음에는 원주민 성도 열 명가량과 백인 두 명이 함께했고, 예배 중간에 백인 가정이 들어오면서 말씀을 듣는 사람은 열다섯 명 안팎이 되었다. 많은 성도는 아니었지만 찬양에는 기쁨이 넘쳤다. 성도들은 온몸으로 찬양하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표현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기뻐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생각했다. 찬양의 가사가 목소리와 몸짓을 통해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담임목사는 현직 경찰이면서 교회를 섬기고 있었다. 지역사회의 안전을 지키는 일과 성도들을 돌보는 일을 함께 감당하는 목회자였다. 삶의 현장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다시 예배의 자리에서 그들과 함께 하나님을 바라보는 그의 사역이 인상 깊었다. 예배 가운데 사람들을 살피며 섬기는 한 여성의 모습에서도 지혜로움이 느껴졌다. 한 사람의 설교와 찬양뿐 아니라, 곳곳에서 이루어지는 섬김이 그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부흥강사는 창세기 1장 1절과 요한복음 1장 1절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태초에”, 곧 “In the beginning”이라는 말로 설교를 풀어 갔다. 창세기는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선포하고, 요한복음은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을 증언한다. 강사는 그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창조와 구원의 이야기를 연결했다.
이어 골로새서 1장 15절 이하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와 만물의 관계를 설명했다. 만물보다 먼저 계신 분, 만물이 그를 통하여 창조되게 하신 분, 그리고 만물이 그를 위하여 존재하게 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었다. ‘먼저 계심’, ‘그를 통하여’, ‘그를 위하여’라는 흐름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과 온 피조세계의 중심이심을 강조했다.
울룰루의 광활한 풍경을 돌아본 뒤라 그 말씀이 더욱 가깝게 다가왔다. 며칠 동안 바라보았던 붉은 바위와 끝없이 펼쳐진 대지, 밤하늘의 별들이 말씀을 듣는 동안 마음속에 다시 떠올랐다. 그 모든 것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셨다는 사실이 창조의 감동을 구원의 감사로 이어 주었다.
설교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이 있었다. 강사는 자신의 가정 이야기를 간증하며 그리스도의 은혜를 전했다. 성경의 말씀이 한 가정의 삶과 만나는 이야기를 들으며, 보혈의 능력은 우리가 설명하는 교리인 동시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은혜임을 생각했다. 예배를 시작하며 나누었던 성찬의 의미도 그 말씀을 통해 더욱 깊어졌다.
예배가 끝난 뒤, 교회 사람들은 저녁에 열리는 부흥회 마지막 시간에 다시 만나자고 했다. 함께 예배를 드린 낯선 여행자에게 건네는 따뜻한 초대였다. 더 머물며 그들과 찬양하고 말씀을 듣고 싶었지만, 우리는 오후 1시 30분 비행기로 시드니로 돌아가야 했다. 아쉬운 마음으로 사정을 설명하고, 감사의 마음을 담은 헌금을 따로 전한 뒤 공항으로 향했다.
울룰루에서 마음에 담은 것은 웅장한 자연만이 아니었다. 온몸으로 하나님을 기뻐하던 성도들, 경찰로 일하며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 지혜롭게 사람들을 돌보던 손길, 그리고 함께 나눈 떡과 잔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붉은 대지에서 창조의 경이로움을 보았고, 예배 공동체 안에서 구원의 은혜를 되새겼다. 그렇게 울룰루 여행의 마지막에는 풍경과 함께 사람들의 얼굴이, 감탄과 함께 감사의 기도가 마음에 남았다.
Worship at Uluru
As I wrapped up my trip to Uluru, I attended a service at a local church. It had been a journey where I marveled at the wonders of creation—the red earth, the massive rock formations, and the sunrises and sunsets across the wilderness. At the end of that journey, worshipping God alongside the people who call this land home was yet another special encounter. A revival meeting happened to be taking place at the church at the time.
The service began with Holy Communion. As we shared the bread and the cup, we remembered Jesus Christ, who gave His body and shed His blood for us. Although we came from different languages and cultures, we sat together, united in remembering the grace of the same Lord. Sharing Communion with people I had just met in an unfamiliar place made me realize anew that we are one body in Christ.
Initially, the congregation consisted of about ten Indigenous believers and two white individuals; as a white family joined midway through, the total number of attendees rose to around fifteen. Though the congregation was small, the praise was overflowing with joy. The believers expressed their love for God through wholehearted worship, engaging their entire bodies in praise. Watching them, I reflected on what it truly means to rejoice in God; the lyrics of the hymns seemed to come alive through their voices and gestures.
The senior pastor served the church while also working as a police officer—a minister who balanced the duties of protecting the community with the care of the congregation. His ministry, which involved meeting people in the everyday world and then looking toward God together with them in worship, left a deep impression on me. I also sensed wisdom in a woman who attentively served the people throughout the service. It was not just the sermon or the music that defined the community, but the acts of service taking place all around. The revival speaker began the sermon by focusing on the phrase “In the beginning”—words that appear in both Genesis 1:1 and John 1:1. While Genesis proclaims God as the Creator of the heavens and the earth “in the beginning,” the Gospel of John testifies to the Word who existed “in the beginning.” Centering the message on Jesus Christ—who is that very Word—the speaker wove together the narratives of creation and salvation.
He went on to explain the relationship between Christ and all of creation, drawing from Colossians 1:15 and the verses that follow. He highlighted that Jesus Christ is the One who existed before all things, the One through whom all things were created, and the One for whom all things exist. By tracing the progression of “before all things,” “through Him,” and “for Him,” he emphasized that Jesus Christ stands at the center of both our lives and the entire created order.
Having just taken in the vast landscapes of Uluru, the message resonated with me even more deeply. As I listened, the images of the red rock, the endless expanse of land, and the starry night sky—sights I had gazed upon for days—flooded back into my mind. The realization that the God who fashioned all these things had drawn near to us through Jesus Christ transformed the awe of creation into profound gratitude for salvation.
At the heart of the sermon lay the power of Jesus Christ’s precious blood. The speaker shared a personal testimony about his own family to convey the grace of Christ. Hearing how the Word of God intersected with the life of a family, I reflected on how the power of the blood is not merely a doctrine to be explained, but a grace upon which we rely in our daily lives. The message also deepened my understanding of the Communion we had shared at the start of the service.
After the service concluded, members of the congregation suggested meeting again that evening for the final session of the revival gathering. It was a warm invitation extended to a stranger who had joined them in worship. Although I wished to stay longer to sing praises and hear the Word with them, we had to return to Sydney on a 1:30 PM flight. With a sense of regret, I explained our situation, offered a donation as a token of my gratitude, and headed to the airport.
It was not just the majestic nature of Uluru that left a mark on my heart. The memory of the congregation rejoicing in God with their whole beings, the pastor who served the church while working as a police officer, the hands that cared for others with wisdom, and the bread and cup we shared together—these, too, will long remain in my memory.
Amidst the red earth, I witnessed the wonders of creation, and within the worship community, I reflected deeply on the grace of salvation. Thus, as the journey to Uluru drew to a close, what remained in my heart alongside the landscapes were the faces of the people, and alongside the sense of awe, a prayer of gratitude.
울룰루를 떠나며
오늘은 울룰루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다. 새벽 4시에 눈을 떴다. 마지막으로 울룰루의 일출을 보기 위해서였다.
지난 며칠 동안 일출과 일몰을 따라 움직였던 몸이 이제는 알람이 울리기 전에도 먼저 깨어나는 것 같다.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 휴대폰에는 새벽 4시라고 되어 있는데, 밖은 너무도 깊은 밤이었다. 알고 보니 실제 시간은 새벽 3시였다.
오늘부터 호주의 대부분 지역에서 Daylight Saving, 즉 서머타임이 시작되었다.
시드니가 있는 뉴사우스웨일스를 비롯한 여러 주에서는 시계를 한 시간 앞으로 돌렸지만, 울룰루가 있는 노던 테리토리는 Daylight Saving을 실시하지 않는다.
그런데 내 휴대폰은 내가 있는 곳을 잠시 잊어버린 듯 혼자 한 시간을 앞서가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예정했던 것보다 한 시간 일찍 일어났다. 시간은 때때로 참 재미있다.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과 내가 실제로 서 있는 곳의 시간이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오늘 새벽 새삼 경험했다.
인간은 시간을 재고 시계를 만들었지만, 결국 시간 속을 살아가는 존재이다.
울룰루의 붉은 대지 위로 조용히 비가 떨어지고 있었다. 일기예보를 확인해 보니 일출 시간이 될 때까지 계속 비가 내릴 것이라고 했다.
며칠 동안 새벽마다 기다렸던 일출을 마지막 날에도 보고 싶었지만, 오늘은 쉽지 않을 것 같다.
울룰루에서의 마지막 일출은 포기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반드시 태양이 떠오르는 모습을 보아야만 아침이 오는 것은 아니다. 구름 뒤에서도 태양은 떠오르고, 비가 내리는 날에도 새로운 하루는 시작된다. 내가 보지 못한다고 해서 해가 뜨지 않는 것은 아니다.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시고, 느끼지 못하는 순간에도 은혜는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종종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확인하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넓고 깊다.
오전 10시에는 호텔에서 걸어서 약 15분 떨어진 곳에 가서 예배를 드릴 예정이다.
지난 며칠 동안 나는 울룰루와 카타추타, 킹스 캐니언과 광야를 바라보았다. 해가 뜨는 모습을 보았고, 해가 지는 모습을 보았다.
땅에서 울룰루를 바라보았고, 하늘에서도 바라보았다. 붉은 대지를 걸었고, 바람이 지나가는 협곡에 서 보기도 했다.
그러나 여행의 마지막 아침에는 다시 예배의 자리로 돌아간다.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보는 것도 은혜이지만, 그 모든 자연을 지으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더 큰 은혜이다.
예배를 마친 후에는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이동한다. 오후 1시 30분 비행기로 시드니로 돌아갈 예정이다. 몇 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시드니에 도착하면 저녁 6시경이 될 것이다.
돌이켜보면 이번 여행에는 정말 쉴 틈이 없었다.
새벽에는 일출을 보기 위해 어둠 속에서 길을 나섰고, 낮에는 뜨거운 햇빛 아래 붉은 대지를 걸었다. 카타추타의 거대한 돔 사이를 걸었고, 킹스 캐니언의 웅장한 풍경을 만났다. 저녁이면 다시 일몰을 보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밤이 되면 광야의 별과 은하수를 바라보았다.
이번 여행을 돌아보며 마음속에 한 문장이 남는다.
‘이곳의 모든 것은 은혜였고, 모든 시간들이 은혜였다.’
울룰루의 붉은 바위도 은혜였고,
카타추타의 바람도 은혜였다.
킹스 캐니언의 깊은 협곡도 은혜였고,
광야 위에 쏟아지던 별빛도 은혜였다.
일출을 기다리던 새벽도 은혜였고,
일몰을 바라보던 저녁도 은혜였다.
뜨거운 햇빛도 은혜였고,
오늘 아침 내리는 비도 은혜이다.
계획대로 된 것도 은혜였고,
계획대로 되지 않은 것도 은혜였다.
광야에서 만난 침묵,
바위가 품고 있는 시간,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
별이 가득한 밤하늘,
그리고 그 모든 순간 속에서 조용히 다가왔던 하나님의 은혜.
그러나 시간의 길이는 시계로만 측정되는 것이 아니다. 얼마나 깊이 바라보았는지, 얼마나 많이 느꼈는지, 얼마나 감사했는지에 따라 시간의 깊이는 달라진다.
새벽부터 밤까지 하루가 길었고,
한 장면 한 장면이 마음속에 깊이 새겨졌다.
하지만 울룰루를 떠난다고 해서 이곳에서 받은 은혜까지 떠나는 것은 아니다. 사진은 카메라에 남고, 풍경은 기억에 남으며, 은혜는 마음에 남는다.
여행은 장소를 떠나는 것으로 끝나지만, 여행이 남긴 의미는 그때부터 다시 시작된다.
시드니로 돌아가면 다시 일상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익숙한 거리와 사람들, 해야 할 일과 새로운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번 여행에서 배운 한 가지를 잊지 않고 싶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는 것. 세상에 같은 것은 없다는 것.
떠오르는 태양도,
내리는 비도,
걸을 수 있는 두 발도,
바라볼 수 있는 눈도,
느낄 수 있는 마음도,
함께할 수 있는 사람도 모두 선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여행의 마지막 아침, 비 내리는 울룰루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보았던 것도 은혜였고,
보지 못했던 것도 은혜였다.
만났던 사람도 은혜였고,
지나온 길도 은혜였다.
그리고 5박 6일 동안 내게 주어진 모든 시간들이 은혜였다.
오늘 마지막 일출을 보지 못하더라도 아침은 온다.
구름 뒤에서 태양은 떠오르고,
비가 그친 뒤 다시 빛이 찾아온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새로운 날은 계속 찾아온다.
그러나 이곳에서 받은 은혜를 마음에 품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울룰루의 붉은 대지는 뒤에 남지만,
그곳에서 만난 감사와 은혜는 나와 함께 시드니로 돌아간다.
5박 6일의 울룰루 여행을 마치고 시드니로 돌아오는 길, 비행기 창밖으로 익숙한 도시가 한눈에 들어왔다. 하버브리지와 오페라하우스, 바다와 빌딩들이 저녁 햇살을 받아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며칠 전 이곳을 떠날 때와 같은 시드니였지만, 돌아오는 내 마음은 조금 달라져 있었다.
울룰루의 붉은 대지와 카타추타의 바람, 킹스 캐니언의 깊은 골짜기, 광야 위로 떠오르던 태양과 지는 해, 밤하늘을 수놓았던 별들이 아직도 마음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 광활한 자연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느꼈고, 동시에 그 작은 존재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깊은지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비행기 창밖으로 펼쳐진 시드니의 모습이 이번 여행의 마지막 사진을 완성했다.
여행은 새로운 곳을 보는 일이지만, 결국은 익숙한 곳으로 돌아오는 일이다. 그러나 돌아올 때 우리는 떠날 때와 똑같은 사람이 아니다. 새로운 풍경을 보고, 새로운 생각을 품고, 조금 더 깊어진 마음으로 다시 일상에 들어선다.
어쩌면 여행의 의미는 멀리 떠나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익숙했던 일상을 새롭게 바라보는 눈을 얻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떠나기 전에는 당연하게 보였던 풍경이 돌아오는 길에는 감사로 다가오고, 평범했던 일상이 다시 소중하게 느껴진다.
울룰루에서 보낸 5박 6일은 끝났지만, 그곳에서 받은 감동과 은혜까지 끝난 것은 아니다. 붉은 대지의 침묵과 광야의 바람, 일출의 소망과 일몰의 아름다움, 별빛 아래서 느꼈던 경외감은 이제 다시 살아갈 일상 속으로 함께 돌아왔다.
2026년 10월 05일(월)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는 주님,
오늘도 성경과 함께 성령과 함께 동행하는 날이 되게 하소서. 급변하는 외부의 환경에 흔들리지 말고, 신실하신 주님을 의지하며 길을 걷게 하소서. 익숙한 것을 내려놓아야 할 때에는 용기를 주시고, 새로운 걸음을 시작할 때에는 지혜를 주소서. 잠시 쉬어야 할 때에는 평안을 주시며, 다시 걸어야 할 때에는 힘을 더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5-6)
먼 길을 염려하느라 발밑의 은혜를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길가의 작은 풀을 바라볼 여유를 갖고, 함께 걷는 사람의 안부를 물으며, 하나님께 내일의 길을 맡겨 봅니다. 믿음은 길의 끝을 다 아는 것이 아니라, 함께 걸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오늘의 한 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여정 속에서 기다림을 가르치시고, 만남을 허락하시며, 우리를 축복의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 October 5, 2026 (Monday) ♡
Lord, who guides our path,
May we walk with Your Word and Your Spirit today. Help us not to be shaken by the rapidly changing world around us, but to walk in trust in You, our faithful Lord. When we must let go of what is familiar, grant us courage. When we begin something new, grant us wisdom. When it is time to pause and rest, give us peace, and when it is time to walk again, renew our strength. In Jesus’ name we pray. Amen.
“Trust in the LORD with all your heart and lean not on your own understanding; in all your ways acknowledge Him, and He will guide your paths.” (Proverbs 3:5–6)
May we not become so anxious about the long road ahead that we miss the grace beneath our feet. May we take time to notice the little plants along the roadside, ask how our fellow travelers are doing, and entrust tomorrow’s path to God. Faith means taking today’s step, trusting the God who walks beside us, even when we cannot see where the road will end. Along the journey, God will teach us to wait, bring people into our lives, and lead us along a path of blessing.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채스우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