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2년 7월 22일, 프랑스 제1제정의 마지막 황제 나폴레옹 2세 (Napoléon II, 1811 ~ 1832) 타계
나폴레옹 2세 (프: Napoléon II, 1811년 3월 20일 ~ 1832년 7월 22일)은 프랑스 제1제정의 황태자이자 마지막 황제 (재위 1815년 6월 22일 ~ 1815년 7월 7일), 로마왕이다.

– 나폴레옹 2세 (Napoléon II)
.이름: 휘나폴레옹 프랑수아 조제프 샤를 보나파르트
.출생: 1811년 3월 20일, 프랑스 제국 파리 튈르리 궁전
.사망: 1832년 7월 22일(21세), 오스트리아 제국 빈 쇤부른 궁전
.매장지: 프랑스 파리 앵발리드
.가문: 보나파르트 왕가
.부모: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 오스트리아의 마리루이즈
.종교: 로마 가톨릭
*프랑스 황제
.재위: 1815년 6월 22일 ~ 1815년 7월 7일
.전임: 나폴레옹 1세 / 후임: 루이 18세
*프랑스의 황태자
.재위: 1811년 3월 20일 ~ 1814년 4월 8일 / 1815년 2월 ~ 1815년 6월 22일
.전임: 루이 17세 (간접적으로) / 후임: 루이앙투안 다르투아 (왕세자)
*로마 왕
.재위: 1811년 3월 20일 ~ 1814년 4월 8일 / 1815년 2월 ~ 1815년 6월 22일
.전임: 프란츠 2세 / 후임: 작위 폐지
나폴레옹 1세의 유일한 적자이며, 오스트리아의 마리 루이즈의 소생이다. 본명은 나폴레오네 프란체스코 주세페 카를로 부오나파르테 (Napoleone Francesco Giuseppe Carlo Bonaparte)이다.
나폴레옹 2세는 비운의 황제로 평가받는다. 아버지 나폴레옹 1세의 퇴위로 어린 나이에 제위를 물려받았으나, 실제 통치권은 행사하지 못한 채 오스트리아에서 유폐와 다름없는 삶을 살았다. 뛰어난 군사적 재능과 잠재력을 갖췄음에도 21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 역사의 희생양으로 기억된다
나폴레옹 2세는 21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 뒤, 처음에는 오스트리아 빈의 합스부르크 왕가 묘역에 안장되었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0년 12월, 파리를 점령했던 아돌프 히틀러의 지시로 유해가 프랑스로 이장되어 아버지 나폴레옹 1세의 묘역 옆에 안치되었다.

○ 생애 및 활동
프랑스 제1제국의 로마왕 (Roi de Rome/King of Rome), 황태자 (Prince Imperial of France), 이탈리아 왕국의 왕세자 (Prince Royal of Italy), 오스트리아 제국의 라이히슈타트 공작.
나폴레옹 1세 (독: Napoleon Bonaparte, 1769년 8월 15일 ~ 1821년 5월 5일)의 유일한 적자이자 나폴레옹 1세가 42세라는 늦은 나이에 본 늦둥이다.
- 출생과 황태자 책봉
1811년 3월 20일에 파리의 튈르리 궁전에서 태어났다.
당시 나폴레옹 1세에게는 많은 아이들이 있었으나, 모두 애인들에게서 난 서자였고, 정비였던 조제핀 황후와의 사이에서도 아이가 없자, 1810년에 나폴레옹은 그녀와 이혼하고, 오스트리아의 여대공 마리아 루이사와 재혼하여 나폴레옹 샤를을 얻게 된다.
태어나자마자 황태자의 작위인 로마왕에 책봉되고, 나폴레옹은 그의 곁을 거의 한시도 떠나지 않고 지켰다고 한다.
그러나 대외적으로 나폴레옹과 프랑스는 계속된 침략으로 유럽 각국에게 미움을 받아 고립되어 있었다.
그리되어 고립된 프랑스는 전쟁에서 계속 졌고 급기야 1814년 4월 8일, 나폴레옹 1세가 퇴위당하고 엘바 섬에 유폐되었다.

- 오스트리아 생활
마리아 루이사는 아버지인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1세에게 나폴레옹을 도와달라 청하였으나, 나폴레옹으로 인해 신성 로마 제국이 멸망되어 원한이 맺힌 프란츠 1세와 메테르니히는 도와주기는 커녕 그를 공격하였다.
얼마 뒤, 마리아 루이사와 나폴레옹 샤를은 영국 · 오스트리아 · 러시아 등에 의해 오스트리아로 신병이 넘겨졌고, 그들은 빈의 궁전에서 지내게 된다.
- 나폴레옹 2세 즉위
1815년 2월, 나폴레옹 1세가 엘바를 탈출하고 황제에 복위하자, 나폴레옹은 마리아 루이사와 샤를을 데려오길 원했으나, 마리아 루이사는 오스트리아의 장군인 나이페르크 백작과 불륜 관계에 있어 프랑스로 돌아가길 거부하였다.
이로 인해 어린 나폴레옹 샤를은 어머니를 거의 보지 못하게 된다.
4개월 뒤에 나폴레옹 1세가 워털루 전투에서 지고 세인트헬레나섬으로 귀양가자, 6월 22일에 칙명을 내려 로마왕인 나폴레옹 샤를을 나폴레옹 2세로 선포하고 제위를 승계받게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7월 7일에 연합군이 파리를 점령하고 부르봉 왕가의 루이 18세를 왕으로 추대하여 불과 15일의 재위기간은 나폴레옹 2세가 제대로 프랑스에서 황위에 앉아보지도 못한 채 허무하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 2차 오스트리아 생활
1818년 외조부 프란츠 2세는 나폴레옹 2세에게 라이히슈타트 (Reichstaht) 공작의 작위를 내리고, 그의 이름 중 나폴레옹을 빼고 대신 ‘프란츠’ (Franz)를 집어넣었다.
1821년 5월 5일, 나폴레옹 1세가 51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나폴레옹 2세는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였다.
나폴레옹 2세는 점점 자랄수록 아버지를 닮아, 명석하였고 잘생긴 외모를 지녔다고 한다.
매우 영리한 그는 프란츠 2세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메테르니히는 그에게 프랑스어를 쓰지 못하게 하고 독일어만 쓰게 강조하여 감수성이 예민한 그에게 우울증이란 지병을 만들었다.
하지만 나폴레옹 2세는 끊임없이 조국인 프랑스와 아버지를 탐구하였다.
1828년, 나폴레옹 2세는 티롤 연대의 대위로 군대에 입대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와 같이 천재적 군사 전략가는 아니었다.
1830년에 7월 혁명으로 프랑스가 샤를 10세를 폐위시키자, 후임자로 과거의 영광을 이끈 나폴레옹 황제의 아들인 로마왕 나폴레옹 2세를 모시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나폴레옹 2세를 오스트리아의 대공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 성사되지 못했다.
1832년 7월 22일, 나폴레옹 2세는 오한과 고질적인 폐렴에 시달리다가 어머니 마리아 루이사가 지켜보지 못한 채, 21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 사후
비록 죽어서이지만 이들 부자의 상봉은 훗날 2차대전때 파리를 점령한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이루어졌다.
젊은 시절부터 나폴레옹에 대해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히틀러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전용 묘지에 있던 나폴레옹 2세의 유해를 파리로 가져와 나폴레옹 1세의 무덤 옆에 이장해 주었다.
그는 생전에 프란츠 카를 폰 외스터라이히 대공의 아내였던, 조피 프레데리케 폰 바이에른 왕녀와 친하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그와 조피 대공비가 자주 만났을 때, 조피 대공비가 임신을 하여서, 훗날 멕시코 황제가 되는 막시밀리아노 1세가 그와 조피 대공비의 아들이었다는 소문도 있으나, 밝혀진 바가 없다.
.외로운 빈에서의 삶: 프랑스 제1제정이 몰락한 후 외가인 오스트리아로 보내져 ‘라이히슈타트 공작’으로 불렸으며, 사실상의 감금 생활 속에서 프랑스 황제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억압당하며 살았다.
.결핵으로 인한 사망: 1832년 오스트리아 빈의 쇤브룬 궁전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파리로의 이장: “히틀러의 목표는 프랑스와 독일과의 협력을 증진하는 것이었다.”며, “나폴레옹 2세의 유해를 파리로 가져와 나폴레옹 1세의 무덤 옆에 이장해 주었다.”고 한다.
.최종 안식처: 현재 그의 유해는 파리 앵발리드 돔 내부 나폴레옹 1세의 묘역 근처에 안치되어 있다.

○ 주요생애 및 평가
- 주요생애
나폴레옹 2세 (1811 ~ 1832)는 나폴레옹 1세와 오스트리아 마리 루이즈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프랑스 제1제정의 황태자이자 마지막 황제 (재위 1815년 6월 22일 ~ 1815년 7월 7일)”로, 어린 나이에 짧은 재위 기간을 가졌으나 평생을 오스트리아 빈에서 감시 속에 살다 21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그의 생애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로마왕(Roi de Rome): 출생 직후 나폴레옹 1세에 의해 ‘로마왕’이자 제국의 후계자로 임명되었다.
짧은 재위: 1815년 워털루 전투 패배 후, 나폴레옹 1세가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며 ‘나폴레옹 2세’로 즉위했으나 2주 만에 퇴위당했다.
비운의 생애: 이후 어머니의 고향인 오스트리아로 보내져 ‘라이히슈타트 공작’으로 불리며 정치적 도구로 이용당하는 것을 경계한 빈 체제의 감시 아래 외롭게 살다가 1832년 결핵으로 사망했다.
- 평가
이름뿐인 황제와 정치적 도구: “1815년 6월 워털루 전투 이후 나폴레옹 1세가…” 퇴위하면서 제위 계승을 선언했으나, 연합국에 의해 인정받지 못해 사실상 2주간 재위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이후 어머니의 고향인 오스트리아로 보내져 황태자라는 지위를 박탈당했다.
철저한 감시와 단절된 삶: 오스트리아 제국 궁정에서 ‘라이히슈타트 공작 (Duke of Reichstadt)’이라는 작위를 받았지만,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의 철저한 감시 아래 자신의 아버지가 프랑스 황제였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도록 차단된 채 성장했다.
군사적 재능과 아버지에 대한 동경: “약간의 재능이 있었던 것 같아. 읽어보니까 군사 문제에 대한 걱정스러운 재능을 보였고, 아버지의 판박이 같아서”라는 평가처럼, 성인이 된 후 자신의 출생과 아버지의 위업을 알게 되면서 군인으로서의 열망을 품었으나 병약한 몸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낭만주의의 상징: 에드몽 로스탕의 희곡 《독수리 (L’Aiglon)》 등에서 묘사되듯, 자유를 잃고 오스트리아 궁정에 갇혀 살다 요절한 비극적 운명의 아이콘으로 대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