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owsing: 교육논단

서미진 박사의 특별기고 ‘저항’ 에 대하여… 막내딸이 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나갔는데 가고 난 다음 방을 확인해 보았더니 방 바닥에 옷이 잔뜩 늘어져 있었다. 아이가 돌아오자 방을 치우라고 말을 했고 아이는 알겠다고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저녁에 방에 다시 가보니 그대로 치워지지 않은 상태로 있어서 다시 치우라고 말을 했는데 몸을 움직이지 않고 있길래, 왜 치우지 않느냐고 묻게 되었다. 아이의 반응은 “내가 알아서 치울 텐데 엄마가 치우라고 하면 더 하기 싫어져서 그래!” 라는 것이다. 잔소리를 하면 자신의 ‘저항’이 더 심해진다는 결론이다. 아이의 말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표정을 지으며 “알았어, 잔소리를 안할 테니, 알아서 잘 치우렴” 라고 말하며 아이의 방을 떠나왔다. 감사하게도 아침에 일어나 아이의 방을 가보니 방은 치워져 있었다. 언젠가 필자가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던 적이 있었는데 그 중에 학원 원장의 딸이 있었다. 그 아이는 상당히 카리스마가 있는 아이였고 공부를 잘 하는 아이였다. 그런데 학원 원장 딸이 필자가 학원을 그만 둔 다음의 후임 선생님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전의 선생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이들을 선동하고 현재 선생님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 아이는 반 아이들을 다 이끌고 집을 방문해서 잊을 수 없는 선생님이라고 하면서 선물을 사들고와서 존경한다고 말하며 유학을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하고 떠났던 기억이 있다. 그 아이는 일부러 저항을 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인 ‘저항’을 원치 않는 변화에 대해서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 아주머니는 남편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을 하고 상담소에 부부 상담을 요청하였다. 그 분은 자신은 문제가 없다고 생각을 했는데 상담소에서 진행함 검사 결과에서 자신이 변화되어야 할 부분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당황을 하고 바로 상담을 종결해 버렸다. 변화해야 할 사람이 남편이 아닌 자기라고 하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상담을 그만 둘 수 밖에 없었는데 이것도 ‘저항’의 한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아주머니가 정말 원한 것이 부부 관계의 회복이 아니라 어쩌면 남편의 변화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자신이 변화해야 하는 상담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원치 않는 변화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든 ‘저항’을 보이는데 그 저항이 건강하지 못할 때 그것이 성장과 변화를 저해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오타니(Otani, 1989)는 저항의 흔한 형태를 스물 두 가지로 분류했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저항의 형태로 ‘의사소통 하지 않기’, ‘내용을 제한하기’, ‘조작하기’, ’규칙을 어기기’, 를 설명한다. 이것은 상담소에서 고객들이 어떤 저항을 사용하는 지를 연구한 것이긴 하나 일상에서 변화를 촉구하는 쌍방의 관계에서 그것을 원치 않을 때 종종 나타나는 것이라고 이해해 볼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부부 관계나,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 친구와의 관계 등 다양한 관계에서 나타날 수 있다. 의사소통 하지 않기에는 침묵하기, 드물게 반응하기, 최소한으로 반응하기, 끊임없이 이야기 하기가 있다. 의사소통은 상호 연관성이 있어야 하고 주고받기의 공평성이 있을 때 원할하게 진행되어질 수 있고 그것을 통해서 관계가 발전하고 변화를 경험할 수 있다. 그런데, 한쪽에서 이야기를 하는데 반응을 제대로 해 주지 않는 ‘저항’을 보일 때 관계는 발전할 수가 없다. 상담에서도 상담사가 내담자의 변화를 위해 소통을 하려고 하는데 변화를 원치 않는 내담자가 반응을 보이지 않거나 반대로 자신의 이야기만 끊임없이 할때 상담을 잘 진행해 나갈 수가 없다. 가끔 안타까울 때가 있는데 상담 시간 50분 내내 자신의 이야기만 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은 상담 선생님에게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대인 관계에서도 일방적으로 자신의 말만 많이 하고 상대방의 말이나 생각은 잘 들어주지 않는 사람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은 그것으로 인해 종종 힘들어한다. 그것도 무의식적인 변화에 대한 ‘저항’의 형태라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내용을 제한하기에는 잡담하기, 지성화 하기, 반문하기, 집요하게 이야기하기 등이 있다. 변화를 거부하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다루지 않고 다른 이야기만 자꾸 하는 것이다. 과거의 상처가 너무 아프다 보니 관계에서 상처를 이야기하게 하려고 하면 피해버리고 유머로 넘기려 하는 사람들, 또는 아픈 상처를 아무렇지도 않은 듯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무덤덤하게 하는 사람들은 진정으로 아픔을 직면하는 것이 쉽지 않은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상처를 덮어버리는 ‘세련된 저항 방식’으로 인해 상처를 깊이 다루고 치료하는 것이 어렵게 된다. 다음으로 조작하기가 있는데 여기에는 무시하기, 유혹하기, 남 탓하기, 잊어버리기 등이 있다. 가끔 보면 중요한 것인데 너무 쉽게 잊어버렸다고 상황을 넘겨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면, 상담 시간에 과제를 내 주었는데 잊어버려서 못했다고 한 번이 아닌 반복해서 말하는 사람들의 예를 들 수 있겠다. 그 뿐인가? 문제의 원인을 무조건 남에게 돌리며 자신은 피해의식에 사로잡혀서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결국, 사람을 조정함으로 변화를 거부하는 ‘저항’을 보이는 형태라고 생각할 수 있다.마지막으로 규칙을 어기기 저항은 약속을 지키지 않기, 지불을 미루기, 부당한 요구하기, 부적절한 행동 보이기 등이다. 한 아이가 학교만 보내려고 하면 아프다고 하면서 드러 누울 때 꽤병이긴 하지만 그것이 너무나 실제적이다 보니 부모는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와 같은 다양한 ‘저항’들은 어떤 경우는 의식적으로 의도를 가지고 행하지만 많은 경우 어린 시절에 경험한 상처와 아픔으로 인해 무의식적인 자기 방어의 형태로 만들어진 경우가 많다. 건강한 방식으로 소통하는 것이 어렵다 보니 다양한 ‘저항’의 형태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고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그렇기에 ‘저항’이라고 하는 방식을 관계에서 사용하고 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위에서 설명한 다양한 모습을 관계에서 경험하게 되면 ‘왜 그러지?’, ’이해가 안되네!’ 라고 생각하기 보다 무의식적 ‘저항’일 수 있는 것을 생각하고 그것이 주는 의미를 찾아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관계의 문제를 풀어가는데 더 효과적일 것이다. 예를 들어, 아이가 청소를 하라는 것에 ‘저항’적일 때  말을 안듣는다고 쉽게 판단하여 생각하기 보다는  변화에 대한 저항이라고 이해하며,  반복되는 부모의 잔소리 때문인지 아니면 청소를 할 줄 아는 기술의 부족 때문인 지를 찾아보려고 할 때 훨씬 더 문제를 잘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

박광하의 생명과학 이야기 아까시나무의 재평가 (再評價) 노래 “과수원 길”에 나오는 “아카시아꽃”이 잘못된 표기라는 한국임학회의 정정[訂正] 결정이 있었다.  아카시아 나무는 원산지가 호주 동쪽이며 학명이 “Acasia dealbata” 로 노랑 꽃이 피고 나무 모양이나 이파리가 아까시나무 와는 전혀 다르다.  시드니의 nursery에는 여러 종류의 Acasia 묘목을 팔며 잎이며 나무 모양이 한국의 아까시나무 와는 전혀 딴판이다. 아까시나무 1891년 한반도로 이주 아까시나무가 한반도로 이주 해서 넓게 뿌리 내린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아까시나무를 처음 들여온 사람을 검색해 보니 몇 가지 설이 있지만 인천에서 무역회사 지점장으로 있던 사가끼란 일본사람이 1891년에 중국 상해에서 묘목을 구입하여 인천 공원에 심은 이후 한반도에 비로소 아까시나무 세상이 펼쳐지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정설인 것 같다 [박상진 교수의 나무이야기에서]. 미국을 고향으로 하는 이 나무는 그 후 1910년 일제 강점기에 들어오자 심는 양이 많아져 강토의 구석구석을 누비게 되었으며 콩과식물 이기 때문에 토사가 흘러내릴 정도로 황폐해진 민둥산에도 뿌리를 잘 내렸다.  잘라 버려도 금새 싹이 나올 만큼, 강한 생명력과 화력이 좋아 땔나무로서의 역할도 컸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사방공사 (沙防工事) 일제강점기, 6.25전쟁, 무분별한 화전과, 도벌 등으로 거의 전국의 산들이 민둥산이 된 것을 50여년 전 [1960년대 중반]에 주민을 동원하는 거의 반강제적인 방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