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택 목사의 신학논단 : 천로역정강해 (제13강의)

십자가의 자유와 이민자 순례자의 정체성 – John Bunyan의 『천로역정』을 중심으로
들어가는 말
『천로역정』은 기독교 고전 중의 고전이다. 존 번연은 (John Bunyan, 1628 ~ 1688)은 17세기 영국의 비국교도 설교자이며, 『The Pilgrim’s Progress』 제1부를 1678년에 출간하였다. 존 번연은 기독도의 순례 여정을 통하여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문학적이고 상징적인 방식으로 탁월하게 표현한 책이며 성경 다음으로 기역되고 사랑받는 고전중에 고전이다. 이 책은 17세기 영국의 종교적 박해 상황 속에서 탄생하였다. 영국 국교회의 질서 아래에서 비국교도 설교자들의 설교와 예배가 제한되던 시기에, Bunyan은 자신의 신앙과 양심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 결과 약 12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바로 이러한 고난의 자리에서 『천로역정』은 쓰였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단순한 경건 문학이 아니라, 억압과 박해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과 십자가의 은혜를 붙들고 살아간 한 신앙인의 증언이기도 하다.
『천로역정』에 나타난 순례자의 여정은 이민자의 정체성을 성찰하는 데에도 중요한 신학적 가능성을 제공한다. 이민자는 떠남과 상실, 낯선 길과 새로운 소속의 경험 속에서 자신을 다시 해석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본 글에서 Paul Ricoeur, Harvey Cox, J. Moltmann, Andrew Walls 등 현대 학자들의 통찰을 함께 참고하여 『천로역정』의 신학적 의미를 확장하고자 한다.
1. 이민자와 십자가가 주는 자유
『천로역정』에서 기독도는 장망성을 떠날 때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길을 걷는다. 이 짐은 전통적으로 죄와 죄책의 무게를 상징한다. 그러나 이민자 순례 신학의 관점에서 이 짐은 더 넓게 해석될 수 있다. 이민자도 고향을 떠날 때 빈손으로 떠나지 않는다. 그는 가족에 대한 책임, 자녀의 미래에 대한 압박, 언어의 불안, 새 사회에서 성공해야 한다는 부담, 고향을 떠났다는 죄책감, 사회적 지위 상실의 수치, 문화적 낯섦의 두려움을 함께 지고 떠난다. 그러므로 기독도의 짐은 이민자가 지고 가는 보이지 않는 내면의 짐을 상징하는 신학적 이미지가 될 수 있다.
기독도는 그 짐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다. 그는 장망성을 떠났지만 짐은 여전히 그의 등에 있다. 그는 길을 걷고, 좁은 문을 통과하고, 해석(Interpreter)의 집에서 가르침을 받지만, 그 짐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이것은 이민자의 현실과 닮아 있다. 이민자는 새 땅에 도착해도 곧바로 자유로워지지 않는다. 비자를 얻고, 집을 구하고, 직장을 찾고, 자녀를 학교에 보내도 마음의 짐은 남아 있다. “나는 잘하고 있는가?” “나는 실패한 사람인가?” “내 자녀가 내 언어와 신앙을 잃으면 어떻게 되는가?” “나는 이곳에서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이민자의 마음속에서 계속 무겁게 남는다.
그러나 『천로역정』에서 결정적 사건은 십자가 앞에서 일어난다. 기독도가 십자가에 이르렀을 때, 그의 등에 있던 짐이 풀려 떨어지고, 아래로 굴러가 무덤 안으로 들어가 다시 보이지 않게 된다 (Bunyan 2014, 40). 이 장면은 순례자의 자유가 자기 노력이나 도덕적 성취에서 오지 않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온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기독도는 자신의 짐을 스스로 벗긴 것이 아니다. 십자가가 그 짐을 벗겨 준다. 이것이 복음의 자유이다.
이 십자가의 자유는 이민자에게도 깊은 의미를 준다. 이민자의 짐은 단순히 외적 조건이 좋아진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안정되어도 수치심이 남을 수 있고, 영어를 배워도 정체성의 불안이 남을 수 있으며, 자녀가 성공해도 세대 간 거리가 남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민자 교회는 이민자의 문제를 단순히 정착, 직업, 언어, 교육의 문제로만 다루는것은 신학의 제한성을 가진다. 이민자에게는 더 깊은 영적 짐이 있다. 십자가는 바로 그 짐을 다루는 장소이다.
십자가가 주는 자유는 먼저 정죄로부터의 자유이다. 이민자는 때로 자신을 실패자로 느낀다. 고국에서 가졌던 지위가 사라지고, 새 땅에서 다시 시작해야 할 때 그는 자신을 작게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십자가는 인간의 가치를 성취나 성공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에서 이민자는 “나는 실패한 사람”이라는 정죄에서 자유로워진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다시 이름 지어진다. 그는 단순한 정착민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향해 걸어가는 순례자이다.
둘째, 십자가는 수치로부터의 자유를 준다. 이민자는 언어가 부족할 때, 직업이 낮아졌을 때, 자녀 앞에서 권위를 잃었다고 느낄 때 수치를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십자가는 인간의 약함을 부끄러움으로만 보지 않는다. 십자가는 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는 장소이다. 그러므로 이민자의 언어적 약함, 사회적 약함, 문화적 낯섦은 더 이상 정체성을 파괴하는 수치가 아니라, 겸손과 배움과 의존의 자리로 변화될 수 있다.
셋째, 십자가는 과거의 무거운 짐으로로부터 자유를 준다. 이민자는 고향의 기억을 품고 살아간다. 그 기억은 때로 감사가 되지만, 때로는 후회와 향수와 죄책의 짓누르는 무게가 된다. 그러나 십자가 아래에서 과거는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해석된다. 기독도의 짐이 무덤 안으로 굴러 들어갔다는 것은 과거의 죄책과 짓누르는 무게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새 의미를 얻었다는 것을 상징한다. 이민자의 과거도 마찬가지이다. 고향의 상처와 떠남의 아픔은 더 이상 그를 묶어 두는 무게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순례를 깊게 하는 기억이 될 수 있다.성경에서 야곱을 괴롭힌 것은 과거 형으로부터 장자권의 축복을 빼앗아 달아난 후 그 무거운 짐이 얍복강의 기도에서 벗어지기 까지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는 얍복강의 경험에서 새 이름 이스라엘로 다시 태어난다. 십자가는 이민자에게 마음에 짐을 벗겨주는 자유의 현장 얍복강의 경험의 현장이다.
넷째, 십자가는 자기 증명으로부터의 자유를 준다. 이민 사회에서는 성공해야 한다는 압박이 크다. 좋은 직장, 좋은 집, 자녀의 성취, 사회적 인정이 이민자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십자가는 인간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을 무너뜨린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은 이미 은혜로 받아들여진 존재이다. 그러므로 이민자는 성공을 통해 자신을 증명하려는 무거운 짐에서 자유로워지고, 감사와 소명 안에서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십자가의 자유는 책임없는 자유가 아니다. 기독도는 십자가 아래에서 짐이 벗겨진 뒤에도 순례를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더 자유로운 사람으로 길을 계속 간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십자가는 이민자의 책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짐을 벗기고 참된 책임을 가능하게 한다. 죄책감 때문에 가족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돌보게 하고, 수치심 때문에 성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소명 안에서 일하게 하며, 두려움 때문에 교회에 숨는 것이 아니라 은혜 안에서 세상으로 나아가게 한다.
따라서 십자가가 주는 자유는 이민자 순례 신학의 중심이다. 이민자는 십자가 아래에서 “나는 짐 진 사람”이라는 정체성으로부터 해방된다. 그러나 그는 책임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은혜 안에서 새롭게 형성된 순례자가 된다. 그의 짐은 정죄와 수치의 무게로 남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향한 소명과 책임으로 변화된다. 이민자 교회는 바로 이 십자가의 자유를 선포해야 한다. “당신의 짐은 당신의 정체성이 아닙니다. 십자가 안에서 당신은 다시 길을 걸을 수 있는 순례자입니다.”
2. 토착화 원리와 순례자 원리
선교신학자 Andrew Walls의 관점에서 볼 때, 복음은 언제나 특정 문화 안으로 들어가 그 문화의 언어와 상징을 입는다. 이것이 복음의 토착화 원리이다. 그러나 복음은 결코 한 문화 안에 갇히지 않는다. 복음은 그 문화를 새롭게 하고, 비판하며, 필요할 때 그 문화로부터 우리를 다시 길 위로 부른다. 이것이 앤드르 월스가 말하는 복음의 순례자 원리이다 (Walls 1996, 7–9).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에게 어떤 특정 문화의 옷을 절대적으로 입힐 필요가 없다. 예수는 한국 문화 안에도 계시고, 이민자의 경험 안에도 계시며, 동양의 정서와 언어 안에서도 자신을 드러내신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는 그 모든 문화를 초월하시는 분이다. 예수는 유럽의 기준 안에 갇혀 있지 않으며, 서구 신학의 언어만으로 제한되지도 않는다. 그는 어느 한 민족, 어느 한 문명, 어느 한 전통의 소유물이 아니다.
예수는 문화 안에 내주하시는 분이면서 동시에 문화를 넘어 우리를 부르시는 초월자이시다. 그는 이민자의 상처와 기억과 언어 안으로 들어오시지만, 이민자가 자기 문화와 정착의 안전함 안에 머물러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그는 우리를 끊임없이 갱신하시고, 닫힌 정체성으로부터 탈출하게 하시며, 하나님 나라를 향한 새로운 순례로 초대하신다.
따라서 이민자 교회는 복음을 자기 문화 안에 번역해야 하지만, 그 문화를 절대화해서는 안된다. 한국어 예배, 가족 중심의 정서, 공동체적 돌봄, 이민자의 기억은 모두 복음이 입을 수 있는 소중한 옷이다. 그러나 그 옷이 복음 자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 복음은 한국 문화 안에 들어오지만, 동시에 한국 문화를 새롭게 하고, 그 한계를 넘어 더 넓은 하나님 나라의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는 이민자의 문화 안에 계시면서도 그 문화를 초월하시는 주님이시다. 그는 정착의 안정에서 우리를 불러내어 창조 세계 전체와 이웃과 다음 세대를 향한 책임의 자리로 보내신다. 그러므로 이민자 순례 신학은 단순히 예수에게 이민자의 옷을 입히는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이민자의 삶 속에 이미 함께하시는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문화의 경계와 정착의 안락함을 넘어 하나님 나라의 순례로 부르신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신학이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떨기나무에는 불이 붙어 있었지만 그 나무는 타지 않았다. 이 장면은 하나님의 임재와 초월성을 동시에 보여준다. 하나님은 떨기나무 가운데 자신을 나타내셨지만, 떨기나무에 갇히거나 매이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피조 세계 안으로 들어오셔서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시지만, 동시에 그 모든 피조 세계를 초월하시는 분이시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출애굽기 3:2)
이 신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깊이 드러난다. 하나님은 시간과 역사 안으로 들어오셔서 인간이 되셨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참 인간이시면서 동시에 인간을 초월하시는 참 하나님이시다. 그는 한 시대, 한 장소, 한 문화 안에 오셨지만, 그 시대와 장소와 문화에 갇히지 않으셨다. 그리고 상황과 시대와 사람을 갱신하신다.
3. 이민자와 새로운 정체성 (Identity)의 형성: 폴 리쾨르 (Paul Ricoeu)의 이야기적 정체성
이민자 순례 신학에서 중요한 질문 중 하나는 “이민자는 낯선 땅에서 어떤 정체감으로 새롭게 형성되는가?”이다. 이민자는 고향을 떠났다고 해서 과거의 기억을 완전히 버리는 사람이 아니며, 새 땅에 도착했다고 해서 즉시 새로운 사회에 완전히 동화되는 사람도 아니다. 그는 과거와 현재, 고향과 새 땅, 모국어와 새 언어,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 사이에서 자신을 새롭게 이해해야 한다. 이 지점에서 폴 리쾨르 (Paul Ricoeur)의 이야기적 정체성 이론은 이민자의 새로운 정체감 형성을 설명하는 데 중요한 철학적·신학적 자원을 제공한다. 폴 리쾨르 (Paul Ricoeur,1913–2005)는 엄밀히 말하면 신학자라기보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해석학자이다.
리쾨르는 그의 책 『Oneself as Another』에서 정체성을 단순히 변하지 않는 본질로 이해하지 않는다. 그는 정체성을 이듬 (idem)과 잎스 (ipse)로 구분한다. Idem은 “같음”의 정체성, 곧 시간이 지나도 지속되는 성격, 습관, 이름, 기억, 문화적 연속성을 의미한다. 반면 ipse는 변화 속에서도 약속과 책임을 통해 유지되는 “자기성”의 정체성을 뜻한다 (Ricoeur 1992, 118–119).
리쾨르에 의하면 정체성을 i두단어 idem과 ipse로 구분한 것이다. idem은 시간 속에서도 동일하게 남아 있는 “동일성 (sameness)”의 정체성을 가리키는 반면, ipse는 변화 속에서도 자기 자신으로 남는 “자기성 (selfhood)”의 정체성을 가리킨다. 여기서 ipse는 고정된 성격이나 변하지 않는 속성의 지속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변화하는 시간 속에서도 약속을 지키고 책임을 감당하는 신실한 응답을 통해 유지되는 자기-일관성을 뜻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인 것이 아니라, 변화 속에서도 자신의 약속과 책임에 응답함으로써 자기 자신으로 남는다 (Ricoeur 1992, 118–119).
이 구분은 이민자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데 매우 유익하다. 이민자는 고향의 언어, 가족 이야기, 신앙 전통, 문화적 기억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그의 idem 정체성이다. 그러나 그는 새 땅에서 새로운 관계, 새로운 언어, 새로운 사회적 책임, 새로운 신앙의 과제를 만나며 자신을 다시 형성한다. 이것은 그의 ipse 정체성이다.
따라서 이민자의 정체감은 “나는 여전히 한국인인가, 아니면 이제 호주인이 되어야 하는가?” 라는 이분법으로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이민자의 정체성은 고정된 민족적 본질도 아니고, 완전한 동화도 아니다. 그것은 과거의 기억을 품고 새로운 부르심에 응답하는 이야기적 정체성이다. 리쾨르 에게 인간은 자신의 삶을 이야기로 이해하는 존재이다. 사람은 단순히 사건들을 겪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들을 하나의 이야기 안에서 해석하고, 그 이야기 안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한다 (Ricoeur 1992, 140–168). 그러므로 이민자는 고향을 떠난 사건, 언어의 상실, 직업의 변화, 자녀 세대와의 갈등, 새 땅에서의 신앙 경험을 각각 분리된 사건으로만 보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향한 하나의 순례 이야기 안에서 다시 해석할 수 있다.
리쾨르의 이중 정체성 개념은 『천로역정』의 기독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Ricoeur에게 idem은 시간 속에서도 동일하게 남아 있는 “동일성”의 정체성을 뜻하고, ipse는 변화 속에서도 약속과 책임을 통해 유지되는 “자기성”의 정체성을 뜻한다. 이 구분을 기독도에게 적용하면, 그의 정체성은 단순히 과거의 출신이나 고정된 성격으로만 설명될 수 없다. 기독도는 장망성에서 온 사람이지만, 그의 이야기는 장망성의 사람이라는 idem 정체성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말씀의 부름을 듣고 길을 떠나며,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하고, 순례의 길 위에서 새로운 자기성, 곧 ipse 정체성으로 형성되어 간다.
먼저 기독도의 idem 정체성은 그의 과거와 출신, 그리고 그가 지니고 있던 무거운 짐과 관련된다. 그는 장망성의 사람이다. 장망성은 멸망을 향해 가는 옛 세계를 상징하며, 그곳에서 기독도는 불안과 두려움, 죄책감과 심판의식 속에서 살아간다. 그의 등에 있는 무거운 짐은 그의 과거가 단순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그는 “떠난 사람”이 되었지만, 여전히 장망성의 기억과 죄의 무게를 지니고 있다. 이 점에서 기독도의 idem 정체성은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 무엇을 짊어지고 있었는지, 어떤 세계에 속해 있었는지를 보여 준다.
그러나 기독도의 정체성은 idem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는 과거에 의해 완전히 규정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말씀의 부름에 응답하여 길을 떠나고, 좁은 문을 통과하며, 해석자 (Interpreter)의 집에서 새로운 영적 언어와 분별을 배운다. 특별히 십자가 아래에서 그의 짐이 벗겨지는 사건은 그의 정체성을 결정적으로 새롭게 해석한다. 그의 과거가 삭제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된다. 죄책의 짐은 은혜의 자리에서 해방의 기억으로 바뀌고, 장망성에서 온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향해 걷는 순례자로 새롭게 이해된다.
이것이 바로 기독도의 ipse 정체성이다. Ipse 정체성은 변하지 않는 성격이나 고정된 속성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변화하는 삶의 여정 속에서도 부름에 응답하고, 약속을 붙들며, 책임 있게 길을 계속 걸어가는 자기성이다. 기독도는 길 위에서 계속 흔들리고 시험을 받는다. 그는 절망의 늪에 빠지고, 세속 지혜자의 유혹을 받으며, 허화시장 (Vanity Fair)에서 조롱과 박해를 당하고, 의심의성 (Doubting Castle)에서 절망의 위협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는 완전히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말씀과 은혜와 공동체의 도움 속에서 다시 일어나 길을 걷는다. 이처럼 기독도의 ipse 정체성은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순례의 길 위에서 계속 형성되는 신실한 응답의 정체성이다.
따라서 기독도의 이야기적 정체성은 idem과 ipse의 긴장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Idem은 그가 장망성에서 온 사람이며, 죄와 두려움과 무거운 짐을 가진 존재였음을 보여 준다. 반면 ipse는 그가 그 과거에 갇히지 않고, 하나님의 부름과 십자가의 은혜 안에서 새로운 순례자로 살아가게 되었음을 보여 준다. 그는 과거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새로운 사람이 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과거는 십자가 안에서 새롭게 해석되고, 그의 현재는 순례의 길 위에서 새롭게 형성되며, 그의 미래는 천성을 향한 소망 안에서 열리게 된다.
이 점에서 『천로역정』의 기독도는 리쾨르가 말한 이야기적 정체성의 좋은 예가 된다. 인간은 단순히 과거의 동일성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또한 순간적인 변화만으로 새로운 정체성을 얻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 안에서 다시 해석하고, 현재의 부름에 응답하며, 미래의 소망을 향해 책임 있게 걸어갈 때 자기 자신으로 형성된다. 기독도는 바로 이러한 인간 이해를 문학적이고 신학적으로 보여 주는 순례자이다. 그는 장망성에서 온 사람이지만, 장망성에 의해 최종적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그는 십자가의 은혜 안에서 과거를 새롭게 이해하고, 하나님 나라를 향해 걷는 순례자로 자기 자신을 다시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이민자도 이와 같다. 이민자는 고향의 풍경을 몸에 지닌 채 새 땅의 풍경 안으로 들어간다. 그는 한국어의 정서, 가족의 기대, 고향 교회의 신앙 기억, 부모 세대의 희생을 가지고 있다. 동시에 그는 영어, 다문화 사회, 호주의 법과 제도, 자녀 세대의 질문, 새로운 자연환경과 도시 생활 속에서 살아간다. 이 두 세계의 만남은 때로 갈등을 낳지만, 동시에 새로운 정체감을 형성하는 창조적 공간이 될 수 있다. Ricoeur의 관점에서 보면, 이민자의 정체감은 두 세계 중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두 세계의 기억과 책임을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 안에서 새롭게 구성하는 문제이다.
이 점에서 이민자 교회는 정체감 형성의 중요한 관계적 풍경이 된다. 교회는 이민자에게 단순히 고향의 언어를 보존하게 하는 장소가 아니다. 그것은 이민자가 자신의 삶을 다시 이야기할 수 있는 공동체이다. 부모 세대는 자신들의 희생과 상실을 복음 안에서 다시 말하고, 자녀 세대는 자신들의 질문과 자유에 대한 갈망을 신앙 안에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는 이 두 이야기가 서로 충돌하는 장소이지만, 동시에 복음 안에서 서로를 새롭게 이해하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리쾨르의 이야기적 정체성은 또한 책임의 차원을 포함한다. Ipse 정체성은 단순히 “나는 누구인가?”라는 내면적 질문에 머물지 않고, “나는 누구에게 신실할 것인가?” “나는 어떤 약속과 책임을 감당할 것인가?”라는 윤리적 질문으로 나아간다. 이민자의 새로운 정체감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더 이상 고향을 잃은 사람으로만 자신을 보지 않는다. 그는 새 땅에서 가족, 교회, 이웃, 자연, 다음 세대를 향해 책임 있게 응답하는 순례자가 된다. 그러므로 새로운 정체감은 단순한 심리적 안정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새로운 책임과 사명으로 이어진다.
결국 Ricoeur의 이론을 통해 볼 때, 이민자의 정체성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이야기 속에서 형성되는 순례적 자기 이해이다. 이민자는 과거의 기억을 버리지 않지만, 과거에 갇히지도 않는다. 그는 새 땅의 도전을 받아들이지만, 자기 뿌리를 잃어버리지도 않는다. 그는 고향의 기억과 새 땅의 책임을 복음 안에서 다시 엮어 가는 사람이다. 이민자 교회는 바로 이 새로운 정체감이 형성되는 순례의 집이다. 그곳에서 이민자는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만이 아니라 “나는 하나님 나라를 향해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를 묻게 된다.
성경은 이민자의 정체성을 국적, 언어, 성공, 사회적 지위에 근거하여 이해하지 않는다. 성경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로 이해하며 (창 1:27),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존재로 바라본다 (고후 5:17). 또한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살지만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며 (빌 3:20), 세상 속에서 나그네와 순례자로 부름받은 백성이다 (벧전 2:9–11; 히 11:13–16).
이러한 성경적 관점은 이민자의 삶을 새롭게 해석하게 한다. 이민자는 단순히 한 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에 정착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해 가는 순례자이다. 그의 정체성은 여권이나 언어 능력, 경제적 성공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가 된 사람이고, 하나님 나라를 향해 걸어가는 순례자이다.
여호수아 3장 5절에서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건너기 전 백성에게 말한다.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주어진 준비의 명령이자 약속의 말씀이다. 새로운 땅으로 들어가는 일은 단순한 지리적 이동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새롭게 정돈하는 영적 사건이다.
이민자의 삶도 이와 비슷하다. 낯선 땅으로 들어가는 것은 단순한 정착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소명을 다시 묻는 순례의 과정이다. 그러므로 이민자는 새로운 땅에서 성공만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 안에서 자신을 성결하게 하고, 하나님께서 행하실 새로운 일을 기대하는 신앙의 순례자이다.
4. 천로역정과 도상에 있는 순례자
『천로역정』에서 기독도의 목적지는 천성 (Celestial City)이다. 그러나 천성은 단순히 죽은 후에 가는 사후 세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순례자가 지금의 길 위에서 모든 가치와 관계를 새롭게 판단하게 만드는 하나님 나라의 지평이다. 기독도는 장망성을 떠나고, 허화시장의 유혹을 지나고, 아름다운집 (House Beautiful)에서 쉼과 가르침을 받으며, 죽음의 강을 건너 천성에 이른다. 이 여정은 한 개인의 구원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세상의 가치가 하나님 나라의 빛 안에서 새롭게 해석되는 이야기이다 (Bunyan 2014, 40, 99–107, 148, 280–286).
『천로역정』에서 기독도가 바라본 천국은 단순히 이 세상 저 너머에 있는 먼 세계가 아니다. 물론 Bunyan에게 천국, 곧 천성 (Celestial City)은 순례자가 마지막에 도달해야 할 종말론적 목적지이다. 그러나 그 천국은 현재의 삶과 단절된 도피처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순례자를 움직이게 하는 하나님의 약속이며, 절망과 유혹과 포로 상태로부터 그를 계속 일어나게 하는 소망이다.
기독도가 장망성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현재의 도시가 두려웠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멸망의 도시를 벗어나야 한다는 위기감을 가졌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약속이 가리키는 더 큰 목적지를 바라보았다. 천국은 그에게 아직 완전히 도달하지 않은 미래였지만, 그 미래는 현재의 삶을 이미 변화시키는 능력으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천국은 순례의 끝에만 있는 장소가 아니라, 순례를 시작하게 하고, 계속 걷게 하며, 포기하지 않게 하는 약속의 힘이다.
이 점에서 『천로역정』의 천국 이해는 단순한 내세 신앙이나 현실 도피와 다르다. 천국은 세상을 버리고 도망가는 상상의 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천국의 약속은 이 세상이 절대적인 현실이 아님을 드러낸다. 장망성, 허영의 시장, 의심의 성, 마법의 땅은 모두 순례자를 붙잡고 그가 이 세계 안에 갇혀 살도록 만들려 한다. 그러나 천국의 약속은 순례자에게 말한다. “이 세계가 전부가 아니다. 너는 이 세상의 포로로만 살도록 부름받은 존재가 아니다. 너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걷는 사람이다.” 세속도시의 저자 콕스 (H. Cox) 의 관점에서 보면, 기독도의 순례는 세상의 절대화와 마법화에서 벗어나 하나님 아닌 모든 것을 상대화하고,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참된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성서적 탈마법화의 여정이다 (Cox 2013, 21–45).
기독도가 천성을 향해 걸어가는 것은 단순히 저 너머의 세계를 꿈꾸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현재의 삶을 움직이는 소망의 힘이기 때문이다. 독일신학자 몰트만 (J. Moltmann)에게 기독교 소망은 미래의 위로가 아니라, 현재를 새롭게 움직이며 하나님의 약속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다 (Moltmann 1967, 16).
따라서 천국은 기독도를 현실로부터 도피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포로 상태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그는 세상의 가치와 권력과 유혹을 마지막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허영의 시장이 아무리 화려해도 그것은 천성이 아니며, 의심의 성이 아무리 강해 보여도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보다 강하지 않다. 천국의 소망은 순례자로 하여금 세상의 질서와 욕망을 상대화하게 하고,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새로운 삶의 방향을 붙들게 한다.
그러므로 『천로역정』에서 천국은 미래의 목적지이면서 동시에 현재를 형성하는 힘이다. 그것은 순례자의 발걸음 앞에 놓인 마지막 성이지만, 동시에 그 발걸음을 오늘 가능하게 하는 약속이다. 기독도는 천국을 바라보기 때문에 장망성의 포로로 남지 않는다. 그는 천국의 소망 때문에 길 위의 사람이 되고, 그 약속 때문에 계속 순례자로 살아간다. 이처럼 천국은 순례의 종착점일 뿐 아니라, 순례자를 끊임없이 이 세상의 포로 상태에서 불러내어 하나님 나라를 향해 걷게 하는 구속적 소망이다.
나가는 말
연합교단의 교회합의문서의 마지막 장에 기록된 말씀을 인용하므로 마루리하려고 한다. 결론적으로, 연합교단의 Basis of Union이 말하듯이, 교회는 “약속된 목표를 향해 항상 길 위에 있는 순례하는 백성”이다 (“the people of God on the way to the promised end” – Basis of Union, para. 18). 교회는 이 땅에 영원히 정착한 공동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이에서,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최종 완성을 향해 걸어가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 순례의 길에서 그리스도는 말씀과 성례전으로 교회를 먹이시고, 성령은 교회가 길을 잃지 않도록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이민자 교회도 단순히 낯선 땅에 정착한 민족 공동체가 아니다. 그것은 고향과 새 땅 사이에서, 상실과 희망 사이에서, 기억과 미래 사이에서 하나님 나라를 향해 걷는 순례 공동체이다. 『천로역정』의 기독도가 천성을 향해 걸어갔듯이. 이민자 교회는 단순한 정착 공동체가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짐을 내려놓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약속된 하나님 나라를 향해 길 위에 서 있는 순례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다음호에 계속).
References
Ricoeur, Paul. 1992. Oneself as Another. Translated by Kathleen Blamey.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Bunyan, John. 2014. The Pilgrim’s Progress. Minneapolis: Desiring God.
Cox, Harvey. 1965/2013. The Secular City: Secularization and Urbanization in Theological Perspective.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Moltmann, Jürgen. 1967. Theology of Hope: On the Ground and the Implications of a Christian Eschatology. Translated by James W. Leitch. New York: Harper & Row.
Uniting Church in Australia, Basis of Union
Walls, Andrew F. 1996. The Missionary Movement in Christian History: Studies in the Transmission of Faith. Maryknoll, NY: Orbis Books.

이상택 목사
(아이오나 콜럼바 대학 학장, 신학과 실천신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