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논단
새 시대 포스트모던과 기독교 인간교육
한상진 교수 (총신대학교 기독교교육과)
1. 들어가는 말
2. 새 시대의 현상
2.1 모던
2.2 포스트모던
2.3 삶의 근원으로서의 위기
2.4. 과학주의의 위기
3. 기독교교육의 과제
4. 새 시대를 위한 기독교 인간교육의 방향성
4.1. 창조주로서의 하나님과 피조물로서의 인간
4.2. 죄인으로서의 인간
4.3. 구원의 대상으로서 새롭게 된 인간 – 화목하고 영화로운 인간
4.4. 교육을 필요로 하고 교육이 가능한 인간
4.5. 의사소통에 있어서의 인간 존재
5. 나가는 말
1. 들어가는 말
현대와 같이 급변하는 시대에서 기독교교육의 패러다임의 새로운 변천에 대하여 논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도 난해한 시도이다. 왜냐하면 급변하고 다변하는 사회에도 불구하고 총신대학은 하나님의 주권사상에 입각하여 개혁주의 신학 교육을 실시하고 있는 동시에 그의 주권사상을 사회 전반에 선포하는 메신저인 증인으로서의 과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것은 필자의 개인적 인식의 한계와 절대적인 판단 근거의 난해한 규명성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공통으로 인식하는 테마 역시 여러 가지 방향성으로 분리시킬 수 있는데, 이런 주제 논쟁들은 물음표에서 시작하여 느낌표, 마침표로 대체하기를 원하는 것이 현대 심포지엄의 경향이다. 주제의 다양한 접근방식과 방향설정 하에서 개별적인 결론들이 정당화 되어진다고 단정하는 것은 위험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단정은 새로운 가능성을 차단하는 요소인 동시에, 인간 인식의 한계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주제에 접근하는데 있어서 물음에서부터 -기독교교육이 현대인들이 다변사회 속에서 새롭게 요구하는 삶의 가치와(Wert) 규범(Norm)을 간과하고, 이런 사회현상에 무관심하게 대처하여 온 것을 지적하고- 기독교 신앙 교육적 관점에서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끝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가는 것을 근원으로 하는 기독교교육의 인간이해가 기독교교육의 중요한 테마로서 인식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방향전환이 필요할 것이다. 더욱더 다양한 사고에서 표출된 방향성들이 삶의 보편성 속에 나타나는 한계성과 함께 구체적인 행위들을 새롭게 확대 해석해주는 가능성이 열려져 있기 때문에 이러한 측면에서 현재와 미래의 대안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에 근거한 인간이해를 통하여 기독교교육의 새로운 가치의 장을 실현하고자 한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시대마다 나타나는 각종 위기적인 현상들을 살펴보고, 그런 현상들에 대처한 기독교교육의 필요성과 그 과제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기독교교육은 인간이해에서 출발한 인간교육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인간존재에 대한 성경적 탐구를 통하여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의 관계, 그리고 죄인인 인간을 교육하기 위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함을 피력하고자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고 각종 생물들을 다스리게 하자”고 말씀하시면서 인간을 창조하셨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인간에게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사이의 교육을 행하셨다. 인간만이 교육을 하고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존재로써 교육을 통하여 죄로 파괴된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대로 회복하도록 하는 것이 참된 인간교육이고, 동시에 모든 교육의 근간을 이루어야 함을 본 논문에서는 밝히고자 한다.
2. 새 시대의 현상
21세기 새 천년을 위하여 지구촌 전체가 국경과 민족 종교와 문화의 장벽을 넘어서 인류 전체가 축제분위기였다. Millenium은 라틴어 Mille(천)와 annum(년)의 복합어이다. 이 뜻의 사전적 의미는 세계적 평화와 번영의 황금기이다.
이러한 전 세계의 분위기는 천년의 역사적 전환기와 더불어 미래를 위하여 수많은 계획과 희망을 갖고 있기에, 새로운 세기는 어떠하며, 새로운 천년은 어떠한 것인지 자문자답해 본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대와 희망 가운데서도 어떤 수의 힘이나 에네르기, 그리고 수의 신비성에 대하여 분명히 논의되어야 하는 것은 새 천년 새 시대는 인간이 주체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역사의 주체자로서 그의 세계를 통치해 가신다는 규명성 때문이다. 이런 새 천년, 새 시대, 21세기 등 수에 관한 연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계수 될 것이며, 형성되어 가는 시간의 목표는 죽은 자와 산 자를 심판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희망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이 바로 심판의 주님으로서 인간을 판단하시며 죄악 가운데서 구원하신다는 기쁜 소식인 복음을 이 세상 지구촌 모두에게 전파되는 시간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새로운 천년, 새로운 시대에 바뀌어 질 패러다임이 존재하는가 하면 바뀌어서는 안 될 영원불변한 하나님의 주권통치를 잃어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더욱 더 기독교 교육적인 측면에서 “새 천년”, “새 시대”를 논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또한 기독교교육의 기능과 역할, 내용과 방법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를 왜 시도하려는 것인가를 바르게 이해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적 시각에서 “새 천년”, “새 시대”는 이미 2000년 전 예수의 탄생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새 시대의 맥락은 예수와 함께 시작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21세기가 진정으로 “새 천년”, “새 시대”로 전개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각과 삶이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새 시대의 활동에 상응하는지 스스로 비판 점검할 필요가 있으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법칙의 하나인 새 시대의 기독교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고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70년대와 80년대의 주요담론(Kommunikationen)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좌우 이데올로기의 사상적 형성이었고, 80년대 후반과 90년대의 초반을 거치면서 중심적 담론이 새로운 변화상에 대한 삶의 의미성을 새롭게 부각시키는 현상으로 대체되어지고 있다. 더욱이 대담론들의 약화와 탈중심화와 더불어 공존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현상들에는 대체담론으로서 “포스트모던”, “정보화 시대”,“ 세계화”, “21세기…”, “신 사회 운동”, “새 천년 교육”, “신과학 운동” 등을 들 수 있다.
2.1. 모던(Modern)
모던(Modern)은 라틴어 모데르누스(modernus)에서 파생하였는데, 그 의미는 “현재의”, “고대의 것이 아닌”이란 형용사이다. 모데르누스 용어 자체가 5세기 말 로마 문헌 가운데서 사용되었는데, 그 의미는 “기독교 공인 이후”의 로마와 “공인 이전”의 로마를 구별하기 위한 표현들이었다. 이런 언어의 과정에서 “모던”이란 용어는 한 시대가 그 이전 시대와 구별함으로서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의식을 논할 때 표현되어진 역사적인 언어라 할 수 있다. 모던이라는 개념이 “전” 시대와의 분리보다는 “전”, “후”시대의 구별적인 분류의 의미가 강하다.
우리는 모던이 근대 서구세계의 형성을 뒷받침해 왔을 뿐만 아니라 세계 지구촌을 서구적으로 변용 시킨 시대정신(Zeitgeist)의 뿌리를 근대적인 것(Moderne) 혹은 근대성(Modernität)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런 시대정신의 핵심은 “이성”에 대한 신뢰에 근거하고 있다. 이 시기는 종교개혁,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프랑스 혁명, 산업혁명들을 거치면서 하나님의 법칙이 지배하던 종교 개혁적인 틀이 붕괴되고, 인간 중심의 세계관이 뿌리를 내림에 따라 인간 능력을 본격적으로 개발할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이런 사상은 근대철학의 기초를 놓았던 데카르트에서 발견된다. 그의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는 종교개혁자들의 신앙 명제였던 “하나님 존재하시고 말씀하시므로 인간은 존재한다”와 아이러니한 명제였다. 이런 명제는 삶의 인식적인 뿌리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 인간이 사고할 수 있는 합리적인 이성이었다. 인간의 이성 능력에 대한 신뢰는 인간을 우주와 사물의 중심적 위치에 두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우주와 사물의 중심을 차지하던 하나님께서 통치하시고 초월적인 주권성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모던(modern)의 자연관은 하나님을 세계에서 추방하고 자신을 그 중심에 두고 자연을 대상화했다. 이런 수학적 자연관은 과거에 가졌던 자연에 대한 경외감은 사라지고 자연을 이용 가능한 상대로 대상화했으며 따라서 자연은 그 유용성에 따라 규정되게 만들었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죄악성과 더불어 부패한 세계가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통치 방식들, 그리고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역사인식을 거부하고 인류세계는 자기 가능성을 실현함으로서 미래를 향해 무한히 진보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이런 혁신은 과학기술을 통한 산업사회와 이로 인한 생산력 증대를 통해서 더욱 더 확고해진다.
모던은 몇 가지 기본적이며 중심이 되는 현상들을 가지고 있는데, 예를 들면 분화(Diffrenzierung), 합리화(Rationalisierung), 개인화(Individualisierung), 규율화(Domestizierung), 감성화(Emotionalisierung), 외향화(Aussenorientierung), 성찰화(Reflektierung) 등의 중심적인 발전 원리이다. 이런 현상에 더 첨가한다면 공간의 확대, 거리 격차의 혁명적인 단축, 그리고 시간에 대한 사회인식의 변화 등이다.
분화의 경우 사회가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법, 언론 같은 여러 전문영역으로 나누어지는 것을 말하며, 그 이유는 사회의 생산성과 효율성의 증대에 있다. 사회의 분화가 진전이 되면 될수록 더 복잡하고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분화의 현재 모습은 요즘 논하는 “전문화”현상이다. 개인화는 집단적인 사고방식에서 자유롭게 된 개인적인 영역의 발전과 또한 주관적인 사고 행위의 사회적인 연관성이다. 외향화는 인간의 행동규범의 원칙이 개인적으로 내면화 된 틀을 따르던 것으로부터 개인적인 성찰(Reflektion)이 없이 외부적인 자극에 거울처럼 반응하는 행동의 변화를 말한다. 유행에 민감하다든지 타인의 평판이 자신의 평가보다 중요하다든가 등은 이에 해당된다. Jürgen Habermas의 대표되는 성찰화라는 가치관과 사고방식의 변화를 들 수 있는데, 같은 규범이라도 그 정당성이 과거와는 달리 무조건적으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개인적으로 왜 그런가에 대해서 묻고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분화나 합리론의 과정에 지배적이며 발전적인 근원이 된 사회 부분은 경제, 법, 행정, 교육 등의 분야를 생각할 수 있다. 기독교의 경우도 교리의 조직화, 합리적 운영체계와 행정의 효율성, 부서와 제도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런 분화와 합리화의 과정에 많이 지배되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새 시대와 현대성이 가져온 결과는 기독교적 휴머니즘에 기초한 정치적, 종교적 관용이다. 즉 모던은 종교개혁적인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으로부터 인간 중심의 다양한 세계관으로 변천한 것이다.
2.2. 포스트모던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모더니즘 내부에 새로운 변화가 생겨나게 된다. 이런 변화를 포스트모던이라고 하는데 post의 의미는 그 단어적인 성격이 “후기”, “이후” 또는 “탈”, “해체” 등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렇게 post란 접두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탈 근대사상”, “후기 근대사상”, “후기 산업사회”, “후기 자본주의” 등 다양하게 번역할 수 있으며 이 현상은 모더니즘과의 연속성을 전제로 하는 경향이 있고, “해체” 및 “탈”이라 했을 때에는 단절이나 비판적 극복을 강조한다. 이러한 의미는 모던의 세계관이 가진 한계와 모순을 비판적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사상이다. 그러나 극복하고자 하는 이런 사상을 구체적으로 규명하는 일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이러한 규명은 각각의 입장과 전공분야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post 뒤에 붙는 modern이라는 언어는 대개 17세기 중엽부터 시작된 계몽주의 시대와 함께 프랑스 혁명과 휴머니즘을 거치면서, 현대에는 하나님, 인간, 자연, 세계, 삶과 관련하여 이전과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을 추구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인간 이성과 감성의 조화에 대한 규명이라고 볼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은 첫째, 이성 중심주의가 낙관적으로 상징하고 있는 중심존재와 당위성에 대해 회의를 가지고 있다. 이성에 의해 진리라고 믿어졌던 획일적이고 절대성에 대한 의문들이 다양성과 상대성의 열린 태도를 보인다. 둘째, 독선적인 이데올로기와 이분법적 획일화된 서열제도의 경쟁적인 해체를 주장하면서 다원적인 권력분산과 소외자들에게 관심을 갖는다. 과학주의, 즉 경직되고 왜곡된 기계론적 과학주의 대신 유기적 은유로 대신한다. 셋째, 인간의 이성 외의 다양한 영성(Spirituality)을 강조한다. 포스트모던 사고는 근대 이후 이성과 관념의 세계에 대하여 회의하며, 과학적인 합리성의 절대성을 거부하고 새로운 척도로 세계를 다르게 보는 대안적 이성의 세계를 다양하게 보는 것이다.
포스트모던은 그 자체가 체계적 이론을 거부하는 열린 사유의 개념이기 때문에 긍정과 부정이 교육적인 분야에서 논의된다. 포스트모던 교육은 우리 시대의 정신을 말해주고 사고 방향을 제시하는 개념으로 긍정하는가 하면, 또 다른 실패의 개념(Fehl-Begriff)으로 비판을 받기도 한다. 이런 긍정과 부정의 변증 속에서 공통성은 고도의 정신활동이 요구되는 곳이라면 어느 곳에서나 포스트모던의 개념이 나타나며 동시에 우리의 정신세계를 바쁘고 분주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현상의 공통적 특징은 “나는 생각한다.”(cogito)를 중심으로 흘러온 전통적 논리와 주제에 대한 존재론적 거부이다.
모던 주장과는 달리 포스트모던의 발전 동력은 끝난 것이 아니다. 단지 기술, 과학 같은 한쪽 부분만의 불균형적으로 발전한 것과 전문가 영역의 분리와 그것들의 실제 생활과의 중재 가능성의 사실이 모두 합쳐져서 포스트모던적인 모던이 병든 것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런 극복은 칼빈과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의 계속적인 발전의 프로젝트로서 전개되어야 한다. 현대의 발전이 진전됨에 따른 직업화와 전문성의 증가는 기독교교육의 이론과 실천의 관계성 속에서의 학문적 과제가 교회의 변천과 시대적인 사명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그 유익을 위하여 새롭게 정립될 필요가 있게 되었다.
포스트모던 사상은 철학과 문화, 교육, 종교 등 삶의 전 영역에서 변화를 요구하는 원인들을 내재하고 있다. 첫째로 근대에 일어난 인간 중심의 이성주의는 기독교 신앙을 대체하고 수정하면서 이성의 권위를 자랑하는 과학절대주의 시대를 열었다. 과학은 객관성이 결여된 종교를 분리시켜 삶 속에서 절대 진리의 주체가 되신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게 되었다. 절대 진리의 부정은 자연히 세속적이고 상대주의적인 다원주의의 경향을 나타낸다. 둘째, 근대에 발생한 이성주의 낙관론은 2차 세계대전과 더불어 세계 도처에서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중동전쟁, 유고전쟁 등의 인간의 사악성이 나타나게 되었다. 셋째,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경제주의적 사고에 익숙해지면서 경제 논리가 중심적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경제논리는 과거의 모든 권위로부터 우선하여 사회 전반의 지배적인 경제 가치를 창출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상적 변화는 종교적인 측면에서 새롭게 부각되는 교육적인 한계성과 그 가능성의 중요한 관계를 이룬다. 이성에 기인한 과학문명과 물질문화의 풍요로움이 야기된 문제들이 인간의 종교성을 부인하고 억압한데 기인하였다는 반성과 함께, 보다 더 신앙의 가치를 인정하려는 대중적인 공감대가 형성되기도 한다.
다원적인 분위기 속에서 관용과 타협의 길을 모색하는 종교다원주의 형태는 신학적 독선주의나 교파주의의 극복과 정치적 연합운동의 추구 등으로 표출된다. 우리는 오늘날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종교적인 변화가 바로 이런 포스트모던의 추세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포스트모던 시대의 보편적인 종교현상이라고 규정한다.
2.3. 삶의 패러다임으로서의 위기
우리가 “위기”와 “비판”이라는 언어를 동일하게 비교하면, 그 연관성이 분명해진다. 이 두 단어는 가능한 한 많이 ‘구분하고’, ‘정화한다’는 의미를 지닌 헬라어 크리네인(Krinein)에서 유래한다(위기의 독일어 원어는 Krise이고 비판은 Kritik이다. 그러므로 독일어의 이 두 단어는 Krinein에서 파생된 것이다). 그러나 이 단어들을 개별적으로 분류한다면 이런 연관성은 난해해진다. 왜냐하면 이 단어들은 매우 다양한 의미로 발전하여 “비판적”이라는 형용사만이 이 두 가지 의미들을 그 자체 안에서 합일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전지’(Krisis) 혹은 ‘위기’라는 단어는 인간의 삶의 과정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개인 및 초개인적인 삶의 과정들도 가리킨다. 문화의 위기, 경제의 위기, 생태의 위기, 정신적인 위기 등의 실례에서 살펴본 공통점은 그것들의 일상적인 삶의 과정에서 첨예화되고 위험스럽게 된 성격을 통해 파생되어져 나온 문제의 핵심으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모든 위기는 재난의 위험을 안고 있다. 어쨌든 위기의 극복은 위험의 예방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비록 이런 의미가 안심의 감정과 함께 우선은 전면에 부각되어 있을 수는 있어도- 더 깊이 관찰하면 동시에 일종의 정화, 오래 전에 있었던 갈등 소재들의 제거, 즉 위기를 거침으로서 비로소 도달 가능한 수준을 의미한다.
어떤 경우 위기는 삶의 사건에서 진행된다. 삶의 사건이란 개념은 유기체적 삶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삶도 포괄하는 이중적인 것이다. 이런 문제제기 방식은 인간의 삶 전체와 연관 하여 위기의 의미를 묻는다.
인간은 충동적인 삶의 내적 불안정성 때문에 제도들의 기반을 필요로 한다. 인간이 제도와 그 상황을 거부하는 곳에서는 근원적으로 혼돈에 빠진다. 인간은 모든 순간에서 혼돈으로부터 위협받고 있으며, 또한 모든 순간에서 그 혼돈을 이겨내고 그의 문화 체계를 새롭게 획득해야 한다. 그에 따라 역사적인 과정에서도 더 강하게 표출되는 혼돈과 문화적인 제도들을 통한 많은 편차가 있었다. 위기와 비판은 삶 자체의 본질에 속하는 동시에 잘못된 사항들은 새로운 시작을 위해 다시 회수해 들이는 이중적 활동에서 삶이 향상되는 것이다. 앞의 고찰에서 이런 운동이 나태하면 죄책감으로 빠지고, 과거에 나태하고 태만하였던 것을 만회하기 위해서 새롭게 시작하기를 시도해야 하는 것이 인간적 삶의 본질에 속한다. 서구의 근대문명이 위기에 처했다는 의식은 20세기 초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문명파괴를 직접적으로 가져온 세계 1,2차 대전의 충격 때문이었다. 이런 현상은 지금껏 신뢰한 과학적인 발달과 문화가 삶의 가치를 풍요롭게 창조하기보다는 문명 전체를 어둠 속으로 몰고 가는 근본적인 불안 때문이었다.
모던의 사유는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고, 관찰자(인간)와 관찰대상(피조세계)이 분리되는 이분법적 사고가 지배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는 하나의 자동기계처럼 인식되었고, 관찰자의 주관성은 배제된 채 관찰 대상의 작동원리만을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것을 진리로 규명하였다. 이러한 이분법적, 기계적 이성은 인간의 정서(정)와 의지적 요소(의)를 무가치하거나 진리를 위해 제거되어야 할 것으로 만듦으로서 과학발전은 곧 인간소외와 비인간화를 가져오는 결과가 되었다. 이분법적, 기계적 세계관을 근본으로 추구되는 과학주의는 과학, 도덕, 예술 등의 학문적 분화는 이루어졌으나 다양한 학문을 통한 진리추구라는 통합성을 이루는 데는 미흡하였다.
과학은 지식, 곧 진리를, 도덕은 의지적 결단을, 예술은 정서적 아름다움을 각기 추구하는 것으로 분화됨으로서 지, 정, 의를 포괄하는 진리의 통합성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의 상대성 이론, 하이젠베르크(W.Heisenberg)의 불확정성 원리 등은 인과론적 세계관과 기계론적 세계관의 오류를 밝혀냈다. 그동안 진리처럼 인식되었던 포스트모던적 과학이론들이 모순을 나타내므로, 세계의 질서는 비결정론적이요 기계적이기보다는 유기적이요, 폐쇄적이기보다는 변화를 향해 열려 있음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이런 세계관은 인격적이요 관계적 세계관이다. 이 관계적, 인격적 세계관 속에서는 사유의 주체와 객체가 서로 분류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인식할 때, 이것은 데카르트의 이분법적 사고를 극복하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즘의 모순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모던적인 주체적 결단과 비판적 성찰 외에 초월적 하나님의 실재(존재성)와 계시적 차원을 인정할 때, 비로소 인본주의적 모더니즘으로부터의 탈출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탈출은 인간이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하나님의 존재성을 인정할 때에만 가능하다. 내재적 실재에 대해 일종의 절대성과 상위성을 가진 초월적 실재마저 거부해 버린다면 모순된 오류에서 탈출할 수가 없다.
중재자의 규범과 존재방식, 사역방식 자체가 참된 자유로움과 평등, 나눔에 근거하면서 자체의 삶(Leben)과 행동이 이런 정신의 원형으로서 존재할 때 절대성과 초월성 그리고 상위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 간섭과 섭리를 인정하는 곳에 허무주의의 진정한 극복이 있을 수 있다고 결론짓는다. 포스트모던의 위기의 시대에 있어서도 기독교 개혁주의의 정체성을 강조하면서 축자영감설에 의한 성경무오 사상을 수호하여야 한다.
현대후기(post-modernismus)를 말하려면 현대주의(modernismus)가 어떠한 시대였는가를 이해해야 된다. 현대주의를 가리켜 “기계화”, “산업화” 혹은 “주관주의적 지성화의 시대”라고 개념화된다. 따라서 우리는 “현대적”이라고 말할 때, “현대”란 용어(terminus)가 단순히 시대적 구분에 의한 시간상의 “오늘” 혹은 “최근의 시대”를 뜻하지 않음을 인식할 수 있다. “현대적”이란 꽁트(1798-1857)가 주장한 것처럼 사유의 저편에서 볼 때, 신화적, 형이상학적 그리고 실증주의적 사고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현대적”이라고 표현하는 말은 고대와 중세의 사고 유형과 구별하여 합리주의적, 자연과학적 혹은 계몽주의적이며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사고라고 특징짓는다.
하버마스는 새로운 하이테크로 인한 정보와 기술의 혁신이 정보의 지구적 소통을 원활히 해주는 긍정성도 있지만, 동시에 정보의 파편화 현상으로 말미암아 소수의 고립된 의사소통의 공동체를 증폭시킬 우려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런 변화와 격동의 상황은 비단 과학의 발전에만 있지 않다. 정치, 사회, 문화, 교육, 종교 등 각 분야에서 지금까지의 틀을 깨고 새로운 도전들이 제기되고 있다. 이런 것들을 예측할 때, 현 세기에는 새로운 질서를 향하여 우리의 제반 사회가 급격히 재편되고 있음을 어렵사리 예고하는 것이다. 근대를 마감하고 탈근대적 양상 즉 포스트모던 양상으로 급격하게 재편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구원하신다는 복음은 시대를 초월하여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이 전했던 그 복음은 새 천년 새 시대에도 모순이 없이 그대로 적용된다. 이런 복음은 시․공간성을 초월하여 영원불변 항구적인 것이다. 그러나 변함없는 복음의 영원무궁성과 함께 우리는 시대의 변화 즉 상황의 변화에 대한 가변성을 새 시대에 맞게 사고할 필요가 있다. 복음의 진리는 영원불변하지만 그것이 전달되는 상황(context)은 2000년 전의 그것과 종교개혁 시대의 그것과 우리시대의 것이 결코 같을 수 없다. 스펄전의 일화가 우리에게 교훈 하는 것은 하나님의 복음은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 이래로 결코 폐하거나 소멸되지 않고 흥왕하지만, 그런 상황의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지 못한 교회는 쇠퇴하고 또한 뒤쳐질 수밖에 없다는 평범한 진리라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 지도자들의 교육적인 과제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변하지 않는 복음과 변하고 있는 상황 사이에서 계속적인 연구와 사명감을 가지고 대처해야 하는 것이다.
“근대” 혹은 “현대”를 마감하면서 소위 “현대 이후(postmodern)”의 제반 양상을 가늠하는 논쟁에 있어서 일반철학이나 현상학에서는 주로 “기존 질서의 해체”, “보편 가치로부터 특정 가치로”, “일반적 관심사로부터 개별적 관심”으로의 이행이 중요한 패턴이다. 이런 경향성은 서구의 가치체계가 분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현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유대 기독교전통을 근저에 깔고 있는 서구사회는 사회구조의 다양한 경제, 정치, 문화 등의 부분을 지배하는 통합적인 윤리가 엄연히 존재했었다. 그것의 공통분모는 “삶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종교개혁적 논리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더니즘으로 표현되는 산업사회로 옮겨지게 되자 사회 경제 부분은 도구적 합리성이 지배하는 관료제가 지배하고, 정치부문에서는 평등권을 위해서 사회 세력들이 다투게 되고, 문화 부문에서는 개인들이 자아의 확대와 실현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 자연스런 삶의 목표가 된 사회 분위기를 낳게 되었다.
이런 사회 분위기는 소위 현대 이후에 와서는 극적으로 전환되기에 이른 것이다. 즉 사람들은 자아실현이라는 명분 하에 지금까지 금기로 여겨왔던 전통과 제도를 파괴하고, 본능적이고 쾌락적인 활동 등을 생산하기에 이른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의 사건은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하나의 사건으로 결합된다. 여기서 하나님은 어제도 계셨고 오늘도 계시며 내일도 계신 분으로 인식된다. :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계1:8)
2.4. 과학주의의 위기
오늘날 우리는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 더욱이 위기에 살고 있으면서도 위기라는 것을 잘 인식하지 못함으로서 그 위기의 성격을 더욱더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왜냐하면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삶 자체가 편리해지는 동시에 인류를 파괴할 수 있는 무서운 무기들과 여러 가지 도구들을 생산해 내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지 못하고 그 위기를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위기는 생태학적 위기이다. 산업의 발전이 가져온 공해의 발생과 환경의 변화로 인한 생명의 위협을 말한다. 원래 하나님의 세상에서 모든 생명체들은 상호 의존하면서 생명의 현상을 유지하고 상호 조화하면서 발전하였던 것이다. 종래의 진화론이 생각했던 것처럼 생존경쟁과 이로 인한 승패가 가져올 수 있는 생명체들의 불균형적인 번성이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었다. 삶의 조화를 깨뜨리고 생명체들의 파멸은 일부 동식물들이 떼죽음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형아들이 출산되는 현상을 가져왔다.
두 번째 위기는 이데올로기 대립의 시대가 끝났다고 생각했던 이후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무질서와 혼란, 그리고 대립과 갈등이다. 윤리적인 무질서와 점점 심화되어 가는 계층간의 대립과 국가들 사이의 갈등이다. 공해의 위협과 전쟁의 위협, 무질서의 위협 등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있어 심각한 위기를 바라볼 수밖에 없다.
물론 과학기술의 발전은 공해에 대한 대책도 마련할 수 있지만 새로운 과학이 추구되기 전에는 과학기술의 발전은 시대의 단계마다 심각한 생태학적 문제를 야기 시켰다. 인간복제의 가능성을 예고한 현대 과학을 생각해 보라. 얼마나 심각한 위기의 시대라고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여기에서 인간이 지구촌에서 계속 생존할 수 있기 위하여 중대하고 복잡한 위기를 극복하는 길은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위치’와 ‘자아 회복’을 가져오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이 위기를 겪을 때마다 회개하며 각성을 통해서 위기를 극복한 예를 ‘이스라엘민족’에게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그의 다스리심을 알게 하셨다. 이러한 역사의식은 오늘날 위기 앞에서 살고 있는 인간에게 하나의 교훈이 된다. 하나님의 통치법칙과 그의 다스리시는 주권을 인정하고 삶을 되돌아보는 것이 현세기의 위기를 벗어나는 필수적인 과제이다. 현대인들이 새 시대에 이성과 감성의 조화 속에서 과학적인 데이터를 진리라고 인정하지만 종교와 가치, 생명 존중의 문제 등은 과학의 울타리 속에 들어가 안주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가다머(G. Gadamer)는 그의 저서 “진리와 방법”에서 과학의 무전제성을 부인하면서 자연 과학적인 방법만이 진리라는 것은 허구라고 한다. 모든 과학적인 인식은 일정한 전제에서 출발한다. 지금 논하고 있는 패러다임의 개념도 모든 인식과 이론들이 언제나 일정한 세계관, 일정한 가치관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패러다임의 전환이 요청되는 것은 패러다임의 변화에 따라서 인식과 지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런 새로운 과학의 패러다임이 “신과학 운동”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신과학 운동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은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대상의 지배를 지향”하는 과학적인 연구로부터 “대상의 이해를 지향”하는 과학적인 연구에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런 과학들의 패러다임 전환은 가치관의 문제이며, 상대주의 문제이다 모던과 포스트모던에서는 종교의 절대성을 부인하면서 역사성과 함께 다양한 종교의 교리를 인정하는 상대주의를 인정하였다. 보편타당한 절대적인 진리는 종교적인 상호이해와 정치적인 관계성의 대화를 차단하기 때문에 거부되어진다.
역사의 흐름에 따라 문화적인 환경이 달라지고 그에 따라 윤리적인 가치관의 제도도 변하고 도덕적인 규범도 달라진다는 것이 사실이다. 상대주의가 한편에서는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한 것처럼 인식되지만, 다른 면에서는 진리를 거부하고 도덕적인 삶의 의무를 업신여기는 무책임한 삶의 태도를 근거 지우는 허무주의이기도 하다. 이 시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과학주의와 상대주의를 넘어선 구속력이 있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재정립이 필요하다.
인간존재와 역사적 상황에서 교육은 교사가 자라나는 자들의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질문들을 경청하고 신뢰할만한 질문으로서 성실하게 교사 개인적 답변을 제공할 때 신앙교육에로 이끌어주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살아 움직이는 신앙은 자라나는 학생들을 교육한다. 우월한 자나 열등한 자가 따로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모두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요하게 하시고, 죄로 억압되고 사망에 빠진 비참한 상태에서 그의 앞의 영광에로 부르셨다는 동등한 파트너 의식이다. 이런 신앙의 경험으로부터 본 회퍼는 옥중에서 ‘누가 나약하게 물러서지 않는가?‘란 질문에서 그의 답변은 우리의 단편적인 생각들을 단절시킬 것이다. 자기의 이성, 자기의 원칙과 양심, 자기의 자유로움과 덕망을 최종적인 표준으로 여기지 않고, 신앙과 하나님의 구속 안에서 순종하고 책임 있는 행위에로 부르심을 받을 때, 모든 것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그 삶이 하나님의 질문과 부르심에 대한 대답으로서의 책임 있는 자만이 위기의 선 세상에서 물러서지 않는다고 답변한다.
헤르만 놀은 신앙은 과학 분야에서 지식을 통하여 대체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힘과 의미를 인간에게 현재화시키는 유일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신앙함으로서 존재한다.”는 논리를 피력했다. 야스퍼스는 오도된 모던은 지각하고 인식하려고만 하지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다. 야스퍼스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내가 일생을 바치는 진리는 내가 그 진리 안에서 동일화됨으로서만 존재한다는 방식이다.”
3. 기독교교육의 과제
기독교 교육학은 과거에 주로 주일학교 교육으로 이해되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은 막연히 성경 교육으로서 성경 교수 방법과 교안작성, 교회 학교 관리와 각부 지도 및 상담, 그리고 공과 집필 등이 기독교 교육학의 관심 영역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기독교 교육이 교회의 주일학교 교육과 더불어 가정과 학교, 사회 등의 포괄적인 영역에서 하나님의 창조 세계와 그의 섭리가 미치는 모든 영역으로 확대되었다. 이런 범위의 설정은 새로운 대답을 요하는 기독교 교육학의 철학적인 과제이다.
교육 및 철학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아래서 학문과 삶의 일상적인 관계성을 포괄적으로 탐구하는 것이다. 이런 탐구에서 신앙의 기본 개념들과 더불어 학문의 타당성은 역사적이고 철학적, 논리적으로 규명하고 동시에 상이한 문화권 아래서 시대적 변천을 통하여 인간을 구원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른 실천 학문으로 고유하게 확대하여 나가는 것이다. 더욱더 통합적인 학문으로써 인간의 본질 이해로부터 이론과 실천의 관계, 시대적이고 사회 문화적인 형상, 인접 학문들과의 상호관계들과 다양한 방법론적인 여러 현상을 기독교 교육적 관점 하에서, 기본 개념들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과제를 가진다.
이러한 과제 속에서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올바른 기독교 신앙교육을 수행해야 하는지를 제시해보고자 한다.
첫째, 이런 질문은 “기독교적”이라는 형용사의 모호성을 의식하고 기독교인 존재의 본질을 숙고하게 하는 것이다.
둘째, 교육의 포괄적이고 개별화된 임무를 현재화하고 서로 연계되는 교육의 형태들을 신앙의 의미 안에서 세분화되는 것이다. 즉 교육은 기독교인들을 통하여 어떻게 수행되는가이다.
셋째, 기독교인으로서 존재하는 것은 본인 스스로가 자의적으로 비교하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하나님 앞에서 죄 용서함을 고백할 때 그리스도인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기독교인의 존재(Cristsein)는 하나님의 절대주권 안에서 생명으로 부르시고, 삶을 유지시키면서 죄로부터 의롭다함을 칭하시고, 사망에 빠진 상태에서 건져 내사 새 생명을 주시고 봉사하게 하심으로 그의 구속성 속에서 기독교인 됨이다. 사도 바울의 고백은 이를 증명한다.(빌3:1,2) 그렇다면 기독교적이라는 것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주권으로부터 규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넷째, 신앙은 인간에게 그 본질의 깊이에서뿐만 아니라, 그 전체 존재 안에서 확인하는 것이다. 신앙은 인간으로 하여금 근원자에 대하여 최종적인 것을 향하여 삶을 살도록 능력을 준다. 인간은 세계의 다양한 형태 속에서 자신의 재능을 개발시키면서 그의 본질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통치방식이 미치는 모든 영역 속에서 과제와 문제성을 직시할 수 있도록 깨어있어야 한다.
다섯째, 기독교사는 학생들을 교육하며, 스스로 책임지는 삶 안에서의 교육을 논한다. 교육은 어린 사람들의 다양한 능력들을 개발해 주고, 그를 모든 삶의 영역에서 그 임무를 완수하게 하는 것이다. 교육은 가정과 사회, 국가와 경제, 문화와 교회에서 미래의 사회활동에 대한 책임을 갖도록 신앙적인 전인성을 개발시키는 것이다.
교육의 의미 규정에서 Herman Nohl이나 Martin Buber같은 학자는 기독교인은 종교개혁자들이 전해준 전승을 귀하게 여기라고 강조한다. 놀은 20세기 초엽에 교육학적 개혁 운동들이 “형식적인 요인”들을 극복하지 못한다고 한탄하면서 개인의 자기 책임성, 새로운 공동체, 자만성, 노동의 조화성 등 모든 곳에서 책임을 지고 사회를 형성하고 노동하는 목적들의 통일성을 근거 지우는 내용적 규정이 결핍되었다고 주장한다. 기독교인들은 교육의 내용과 신앙의 내용을 구체화시켜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교육시키는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여섯째, 교육은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서 수행된다는 것을 깨우쳐야 한다. 왜냐하면 교육의 방향설정과 지침은 가르침과 정보를 통해서만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예측할 수 없고 계획할 수 없는 인간 삶과 존재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계획된 교육과정에서만 역사 하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 속에서 인격적으로 역사 하신다.
일곱째, 교육은 하나님 안에서 인간 본인을 되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하나님 앞에서 경건성과 더불어 인간을 구원하신 구원자로서 그에게 경배하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4. 새 시대를 위한 기독교 인간교육의 방향성
기독교 교육을 위하여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인간 이해란 물음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명제로부터 출발한다. 이런 진술의 해석은 성경에 의해 증거를 받는 하나님의 형상(Image Deo)개념(창 1 : 27)에 나타난다. 이 개념은 성경에서 출발하는 인간학의 발단으로 성경적 인간학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이런 언급은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인간에 대하여 언급할 수 없는 내용이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인간이기 위하여 하나님을 필요로 한다. 이와 같은 전승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Der Mensch als Eberbild Gottes)에 따라 창조되었다는 기독교 교육적인 인간 이해들을 논할 수 있다.
4.1. 창조주로서의 하나님과 피조물로서의 인간
(Gott als Schöpfer des Menschen Und Der Mensch als Geschöpf)
피조물로서의 인간 이해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창조주로서, 세계의 주인으로서 인간과 세계를 통치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교육시키시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인간의 세계와의 관계가 드러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세계를 지배하라는 명령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 인간의 세계와의 관계로부터 또한 인간과의 관계와 인간을 향한 행위가 이해되어진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을 믿는다. 창세기 2: 7에서 “여호와는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라고 말하고 있다. 즉, 인간의 존재와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다. 인간은 자신의 저작자가 아니다. 인간의 의미는 생명을 보존하시고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그분의 섭리와 보호하심에 있다. 인간이 자신의 본질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인간학적인 규정이다. 이 규정은 인간이 모든 것을 만들 수 있고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현대인간에게 적용되는 ‘할 수 있음’의 한계성을 제시하는 이해 개념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전도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의미에서건 인간의 창작물이나 어떤 형상이 아니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존재한다는 것이다.
로마서 1 : 23 이하의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는 말씀이 증명하고 있다. 성경은 확실하게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근원적인 관계를 인식하고 있는 바, 이 관계는 전도되어질 수 없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시지만, 인간은 하나님을 인간의 형상에 따라 만드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인간의 정신적인 산물들(문화, 법, 사회, 학문, 과학 등)은 이런 관계성과 함께 판단의 지배를 받는다.
4.2. 죄인으로서의 인간
(Der Mensch als Sünder)
인간이 저지르는 죄악의 뿌리는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켜 스스로를 만물의 척도로 만들고 인간 능력의 무제한성을 신뢰하여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자기의 손안으로 생명도 옮기려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타락에 대한 설명에서 죄의 본질은 인간이 하나님과 같아지는 것, 혹은 같아지려고 유혹받는 데에서 찾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그의 존재 가치를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아야 하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 존재하는 것은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자가 되려고 하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죄의 근원적인 본질, 곧 창조자와 피조물의 혼동 관계는 현대의 과학과 학문을 논하는 과학자와 지도자들에게 무거운 경고의 과제를 제시하는 것이다.
창세기 3장의 ‘인간 타락사’는 죄를 존재와 행위로써 규정한다. 즉, 그의 피조됨에 만족하지 않고 창조자의 위치에 서고자 하는 행위로써 죄인이 된다.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것은 인간 자신의 근원적인 규정성을 부정하면서 본질적인 임무를 위반하는 것으로써 자기 자신과 동료 인간으로부터의 단절과 소외이다. 죄는 인간 존재의 방향성들을 세계 이해 속에서 빗나가게 만드는 것이고, 잘못된 행위이다. 인간은 죄인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죄를 행한다. 죄는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을 실증하는 현상이고 본질이다. 인간의 죄, 곧 죄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생각하면 할수록 죄인으로서 귀착된다(Zurückverwisen). 이런 측면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완전한 죄인이다.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의 피조물로 존재한다는 진리를 인정하는 자는 바울과 같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라······.”(롬 7 : 24)라고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4.3. 구원의 대상으로서 새롭게 된 인간– 화목하고 영화로운 인간 (Der Mensch der Verherrlichung)
타락한 인간이 필요로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다. 이 구원은 인간의 인위적인 교육이나 학문으로 되지 않고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룰 수 있는 것이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상실된 형상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런 형상 개념은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의 인간관계에서 하나님의 은총과 은혜로써만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과 구원을 생각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궁극적인 존재자이시며 초월자와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는 율법의 멍에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새로운 삶으로 이끄셨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화목 가운데서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 : 24)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앞서 논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새롭게 된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하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그의 피조물이 된다(엡 2 : 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이렇게 연결된 가운데 자유롭게 된 인간으로서 그의 피조성으로 되돌아 간 인간이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 : 15 – 17)고 찬양하기도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자들로부터 비참함에 있는 인간을 영원한 생명으로 구출해 내신 분이시다. 바울의 인용에 따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 : 20)하신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두 가지 본질적인 질문들을 논해야 할 것이다. 첫째는 인간에게서의 하나님의 형상성은 무엇으로 이해되어질 수 있는가? 둘째는 하나님의 형상성을 지녔다는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하나님의 형상성은 인간이 피조세계 내에서 창조자의 대변자로서 그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인간은 창조자로부터 유일무이한 존엄성이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은 기능적인 유용가치로서의 인간 본질이 아니라,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존엄성의 존재, 즉 위탁자, 대변자이다. 인간에게 부여된 하나님 형상성은 본질적인 피조물로서 받은 인간의 독특성이다 : 이는 하나님의 형상성으로 창조된 인간이 창조자이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in Ordung) 안에 있다는 점에서 영광과 존엄성이 진술된다. 이런 인간존재는 하나님으로부터 존재하는 것으로써 이 세계에서 하나님의 대리인 직분을 수행하는 인간으로의 존재이다. 이런 하나님의 형상이 죄로 말미암아 상실되어졌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은 여기에서 죄지은 인간, 반란하는 인간, 하나님과 갈등하는 인간, 그리고 사회 속에서 갈등하는 인간으로 이해한다. 창조자로부터 이탈하여 인간적인 공동체와 자신의 이웃과 동료 인간을 파괴하는 노예로서, 타락한 인간의 본질을 보여 준다. 우리는 그 길을 잃어 버렸고, 본질성으로부터 떨어졌으며, 그 존엄과 본질적인 인간 존재를 상실하고 방황하는 인간이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 7 : 18)라고 말씀한다.
여기에서 인간은 자신이 가질 수 있었던 유일한 존엄, 그에게 부여된 유일한 영예, 곧 하나님 앞에서의 영예이다. 요한복음 5 : 44에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라는 말씀은 인간이 되돌릴 수 없이 상실하였다는 것이 분명해 진다.
다른 한편으로는 새사람에 대하여 논하고 있음도 기억해야 된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은 새사람을 입으라”(엡 4 : 24) : 하나님을 따라 하나님에 걸맞게 의와 거룩함의 지으심을 받았다고 말해 주고 있다. 즉, 옛사람은 죄인이며 ‘육신’이고, 하나님의 계명에 대적한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하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의 피조물이 된다(엡 2 : 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연결되고 이렇게 연결된 가운데 자유롭게 된 인간으로서 그의 피조성으로 되돌아간 인간이다.
4.4. 교육을 필요로 하고, 교육이 가능한 인간
(Die Erziehugsbedürftigkeit und Die Erziehbarkeit des Menschen)
인간은 현존하는 사회 규정 속에서 그 사회가 제시하는 가치의 모형 안에서 교육되어지고 형성되어 진다. 우리는 교육이라는 개념을 인위적인 범주들의 규정안에서 인간을 어떤 존재로 만들고 이끄는 행동과학적인 이론들로 규정할 때, 현대 과학과 정치에 인간이 파멸되어지는 현상을 염려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시대의 교육의 문제가 바로 인간에 대한 깊은 불신과 회의에 근거하고 있기도 하다. 모든 교육은 인간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출발하여야 한다.
지금까지 고찰한 결과들은 바로 기독교 교육에 대한 인간 이해의 첫 번째 결과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성과 구속성을 지각하는 자로서, 즉 하나님이 인간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하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인식하는 자이다. 이 점에서 인간 자체에 대해서도 신뢰성을 가질 수 있다.
우리의 전 세대 선배들은 기독교적 전통의 유산으로 말미암아 타인에 대하여 일반적인 낙관론을 가지고 있었으며, 계몽주의적이고 과학적인 낙관론이 기독교에 반영되었다. 이에 대하여 신앙인들은 과학적인 절대성을 비판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통치성과 절대주권성을 신앙 교육에 부각시켜야 한다. 우리는 인간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하여야 한다. 이런 믿음은 인간 모두가 죄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 안에서 독특한 방식으로 주어지는 신앙고백이다. 이런 신앙 고백적인 믿음은 비관주의와 낙관주의에 귀결되지 않는다. 이 믿음은 경험으로부터가 아니라, 우리 인간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zuspruch)으로부터 유래하기 때문에 경험적인 교육으로는 대치될 수 없다. 이 믿음은 교육의 위기와 교사의 낙담을 극복할 수 있는 교육적인 근원이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인간을 관념적인 위기에 몰아넣지 않으시고, 그리스도를 향한 교사처럼 실제적인 참된 삶의 방법을 가르치셨다.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심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디도서 2 : 12 이하)라고 하였다.
세 번째로 성경적이고 기독교 교육학적인 인간은 인간 그 자체, 곧 그의 동인간성(Mitmenschlichkeit)과 그의 세계의 내재성 가운데 있는 존재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하여 이해할 때, 타인이 그 형상을 그 심연 안에 지니고 있어서 타인과의 구체적인 만남 안에서 그 형상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 만일 그렇게 되면 이 관계는 매우 쉽게 상호적이라 생각될 수 있을 것이다 – 하나님의 형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보장되는 하나님의 사역자로서의 신성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마틴 부버의 말을 빌리면 인간 존재에 근거하는 ‘교육학적 연관’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의롭다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 상호 간의 동료 인간의 파트너로서 정하신 창조자의 뜻에 뿌리를 두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 교육은 무엇보다도 먼저 타인을 위한 동료 인간화로서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삶의 세계와도 연관을 가진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사물의 세계는 우리에게 폐쇄된 세계, 중립적인 세계가 아니라, 인간에게 언제나 책임 있는 존재로서 의무를 가지고 있다. 이로부터 수업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 바른 관계의 교육 지침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주로서 인간을 통하여 사물 연관성들을 다스리심과 자신의 세계를 유지하는 방법이다.
이 세계관이란 곧 자연과 문화의 세계, 역사의 세계, 인간 외적인 것과 인간에 연관된 것의 주의 깊은 통일성 가운데 있는 세계이다. 교육은 이런 사물 연관이 없다면 무의미할 것이다. 교육은 이론과 실천의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 관계에 따라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교육이라는 현상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도, 교육을 올바르게 수행하기 위해서도 우리들은 이론과 실천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학문성을 가져야 할 것이다.
네 번째로 교육은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인간 이해와 관련을 맺고 있다. 교육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시고, 그가 인간 본질을 알게 하는 원천임을 소개하는 것이다.
교사는 타인에 대하여 더 나은 지식과 포괄적인 경험과 겸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인간 존재의 상실 가운데서도 더욱더 소망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가지고 학생이 학습을 준비할 수 있도록 권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런 교사는 모든 것을 인내와 감사하는 마음으로 직무를 수행한다. 왜냐하면 이는 그 높은 가운데서도 자신을 미천한 곳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기 때문이다. 끝으로 인간의 본질과 함께 인간의 교육의 필요성은 교사의 허물과 책임성, 학생의 결함과 미숙을 가진 실재적인 교육 행위에 대한 책임성뿐만 아니라 교육발생 전체에 대한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교육 환경과 더불어, 그리고 여러 가지 생활 질서들의 상태에 대한 책임성을 부과하는 과제이다.
인간의 교육 가능성에 대한 질문은 우리의 동인간적인 책임에 대한 문제이다. 그러므로 교육학적 인간학에는 교육학적 책임 자체가 진리-안으로-불려진 존재, 책임-안으로-선택된 존재에 대한 인간성을 이웃과 더불어 공동체 안에서 소명 받은 자로 존중하는 것이다.
4.5. 의사 소통에 있어서의 인간 존재
(Menschlichsein in kommunikaion)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 가운데 “자아(Ich)”를 논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인간이다. 이 자아는 한편으로 인간 자신에 대하여 사고하면서 파악하고 자신을 세계 이해로부터 규정성을 가지는 동시에 자신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떼어놓을 줄 아는 존재를 의미한다.
또 다른 의미에서 자아는 자신을 보는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공유하는 자아 자체이지만, 반복될 수 없는 고유한 특성을 지닌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인식의 대상이 된 인간은 세계 이해와 더불어 현실성의 다차원들을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인간은 자신의 존재가 세계 이해의 여러 양태들에서 깨닫게 되는 바 이 양태들은 부분적으로 인간을 파악할 수 있으나 전체 인간의 본질성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성을 가진다. 인간 이해와 자기 생성은 고립 가운데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동료와 더불어 의사소통 가운데서 미래를 향한 이해 지평이 열려지는 것이다.
인간은 내 이웃, 동료와 연관되어 있으며 내 이웃, 동료 및 타인이 없었다면 인간의 공동 존재는 가능하지 않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존재로서 하나님과 함께 이웃을 향해 동료 인간들과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참된 공동은 타인과 더불어 타인을 위하여 인간 자신이 되고자 원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현실 속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인간의 존재는 인간 이해의 지평선을 넘어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서 선한 일에 책임을 구현할 교육적 과제를 하나님의 매신저로서 실현하여야 한다.
5. 나가는 말
새 천년 새 시대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치하시고 주관하시는 교육의 표상들은 다양한 형태들을 요구하고 있다. 현시대의 기독교교육은 역사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통치법칙과 창조법칙을 이해하고, 동시에 인간의 삶이 시대의 위기상황에서도 희망과 삶의 확신 속에서 책임과 올바른 행위를 할 수 있도록 원동력의 역할을 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기독교교육은 일반 교육학이 책임과 과제를 다 할 수 있도록 방향 설정을 제시해야 한다. 또한 미래를 향한 기독교 교육은 국가. 사회. 교회 등이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시대의 아픈 위기 상황을 치유하는 과제를 수행해야 하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진리 앞에서 존재성을 가지고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그에 대한 열정과 복음의 성숙한 대변자의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바로 아는 지식 추구가 기독교 교육철학의 원천적 뿌리라면 바로 아는 지식은 포스트모던적 신과학의 지식이 아니라, 창조와 부활과 새 창조의 위치를 역사적으로 관철시키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바른 이해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과 더불어 새 시대, 새사람으로서 인간의 마음속에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믿음의 역사를 삶의 중심에 가져야 한다.

한상진 교수 (총신대학교 기독교교육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