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논단
21세기 기독교 인간 교육의 과제로서 양심교육
| 목차 1. 들어가는 말 2. 양심의 의미 1) 양심의 개념 2) 양심의 정의 3. 양심의 기능과 종류 1) 양심의 기능 2) 양심의 종류 4. 양심의 도덕의식 5. 신앙과 양심 1) 아담 안에서의 양심 2) 그리스도 안에서 양심 3) 성경적 양심 이해 6. 기독교교육의 과제로서의 양심교육 1) 양심교육의 필요성 2) 양심교육의 가능성 7. 나가는 말 |
1. 들어가는 말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고대 그리스시대 이래로 다양하게 논의되어 왔다. 인간이란 본래 언어를 가진 존재로서 자기 동료와 함께 유용한 것과 해로운 것, 선과 악에 대해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존재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 가운데 자아를 논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인간이다. 이 자아는 한편으로 인간 자신에 대하여 스스로 사고하고 파악하면서 자신을 세계 이해로부터 규정성을 가진다. 동시에 자신이 다른 동료들과 다름을 인식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자아는 자신을 보는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공유하는 자아 자체이지만, 반복될 수 없는 고유한 특성을 가진 자기 자신의 합목적성을 가진 인간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인간이해는 개별과학들과 더불어 교육과 인간에 대한 철학적이고 해석학적인 관점에서 인간의 전체 본질 속에서 개별 현상들을 탐구하는 의미를 가진다. 동시에 인간은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 종교와 교육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다. 기독교 인간 교육은 성경적인 인간이해에 근거하여 삶의 세계를 형성하는 요인으로서 양심교육의 당위성이 강조된다. 기독교교육의 인간이해는 기독교교육의 핵심으로써 어느 시대에 있어서나 교육의 체계, 목적들 그리고 이 목적을 위한 교육방법의 근원이다. 바른 인간이해로부터 출발하여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고자 하는 양심교육은 이 시대에 새롭게 접근해야 하는 교육적인 과제이다.
특히 불확실한 사회현상 속에서 기독교 인간 교육은 인간 소외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과제로서 인간을 의롭고, 가치 있는 존재로 여기시는 하나님의 교육 안에서 논의되어야한다. 하나님께서 나와 내 이웃을 왜 자기의 형상으로 만드셨으며? 인간이 인간이기 위하여 왜 하나님의 교육을 필요로 하는지 인간본질의 교육적인 당위성을 규명해야 한다.
본 연구에서는 기독교 인간 교육의 과제로서 양심교육의 현상들 즉 기독교 인간 교육과 양심의 의미, 양심의 기능과 종류, 신앙과 양심 그리고 양심이 기독교교육의 과제로서 타당성을 가질 수 있는 필요성과 가능성을 논의하려고 한다. 지금까지 한국 기독교교육학계에 전혀 논의되지 않았던 양심교육의 테마가 이 논문을 통하여 기독교교육학계에 새로운 지평을 확대하고 소외되어진 인간 교육에 새로운 희망의 방향성으로 제시되기를 바란다.
2. 양심의 의미
1) 양심의 개념
성경에는 ‘양심’이란 용어가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양심의 가책’, ‘착한 양심’, ‘깨끗한 양심’, ‘청결한 양심’, ‘화인 맞은 양심’, ‘더러운 양심’ 등의 다양한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양심은 ‘Conscience’인데 이는 라틴어의 ‘Conscientia’로부터 유래되었다. 접두어 ‘con’은 “함께”라는 의미가 있으며, ‘scientia’는 동사 ‘scire’에서 파생된 언어로 “알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 개념은 “함께 알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 다른 측면에서 양심은 ‘con’과 ‘science’의 합성어로서 그 어원은 각각 ‘con’과 ‘scientia’이다. 즉 함께 알고, 함께 생각하고 합의에 의해서 되어지는 계약(Bilateral Agreement)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인간의 양심은 좋건 나쁘건 검사와 변호사의 역할을 동시에 의미하기도 하고, 또한 고발과 변명(변호)을 동시에 행하는 모순성을 지닌 불완전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때로는 선과 악에 대한 판단의 혼란을 초래할 수도 있다. 양심이란 단어의 어원은 “함께 안다”(Know with)는 뜻을 가진 라틴어 동사에서 파생되었는데, 이 라틴어는 ‘Conscientia’, 희랍어 ‘Syneidesis’, 노르웨이어 ‘Samvite’ 그리고 스웨덴어는 ‘Samvete’인데 “함께 안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함께 안다”의 의미는 누구와 함께 알며, 누구에게 동의한다는 뜻인가? 누구와 더불어 본다는 말인가? 그것은 하나님께 즉, 양심은 옳고 그름에 관하여 하나님께 동의한다는 뜻이다. 이 언어는 또한 우리의 전통이나 교육, 조건, 환경 및 문화에 동의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노르웨이의 신학자 O. 할레스비는 “양심이란 개념은 거룩하고 초인간적인 어떤 법에 대한 자각”이라고 말한다. 양심은 우리로 하여금 양심을 통하여 깨달은 마땅히 따라야 하는 거룩하고 초인간적인 법을 자유롭고 강요됨이 없이 따르도록 하는 것이다. 이처럼 양심은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데 있어 기초가 된다. 동시에 양심은 본능이나 동물로 하여금 어떤 행동을 하게 하는 내적 충동과는 다르다. 우리 삶에 있어서 양심이 함께 있다는 것은 인간 자신의 의지나 이성보다는 더 높은 신적인 의지로서의 인간을 다스리고 깨닫게 하는 하나님의 법칙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양심이 하나님의 의지와 함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양심은 인간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어떤 존재인가? 그리고 어떤 존재이어야 하는가를 물어보는 개념이다.
2) 양심의 정의
양심은 모든 인간에게 천부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속성으로서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고자 하는 본능 또는 선악을 판단하는 본능적 속성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런데 양심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양심은 3가지 관점에서 정의하고 있다. 첫째로 양심을 이성의 한 속성, 즉 이성의 실천적 기능이로고 보는 관점, 둘째로 양심을 하나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특수한 기능이 아니라 인간의 지성과, 의지와 전인적의 상호작용의 결과라고 보는 관점, 셋째로 양심을 이성(의지, 느낌)과 구별되는 독립적 속성으로 보는 관점이다. 두 번째 관점은 양심을 이성과 완전히 독립된 어떤 속성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작용에 의해서 생성된 결과물로 보기 때문에 결국에는 야심을 이성의 한 기능, 즉 이성의 실천적 기능으로 보는 첫 번째 관점과 궁극적으로는 같은 입장이다.
(1) 양심을 이성의 한 기능으로 보는 관점
이 관점은 양심을 “하나님의 음성”, “내면의 음성”, “조용하고 작은 음성” 등으로 이해하는 것을 잘못된 판단이라고 말하면서, 양심을 이성의 한 실용적 기능으로 본다. 양심은 이성과 지성의 한 기능으로서 행동의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의 지성적이고 합리적인 현상이다. 그러므로 양심은 지성 자체이며, 인간의 개별적 행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해주는 지성의 특별한 기능이다. 그렇기 때문에 양심이 개인의 행동에 따라서, 그 행동이 선한 것이면 실천에 옮기고, 악한 것이면 실행하지 않도록 하는 이성의 실용적인 판단(the practical judgment of reason)이다. 이런 측면에서 양심은 이성과 동일시된다면, 이성이 잘못된 판단을 내릴 경우 행동에 실수가 나타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양심의 판단이 곧 이성의 판단이며, 틀린 전체를 수용하거나 비합리적인 결론을 이끌어 냄으로 인하여 이성이 오류를 범할 수 있으므로 양심도 정확하거나 틀릴 수가 있다. 양심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실천적 이성이다. 이성은 참과 거짓을 판별하는데 작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작용을 한다. 더욱이 양심이 이성과 분리된 독특한 속성이 아니라, 이성의 한 기능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감정적 반응은 양심이 내린 도덕적 판단이 뒤따르는 것으로 보았다.
(2) 양심을 종합적 판단으로 보는 관점
토마스 아퀴나스, 프로이드, 융 등은 양심을 통합적 판단력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양심을 이성의 실천적 기능으로 보는 견해와 같다. 프로이드(Sigmund Freud)와 융(Carl Gustav Jung)은 양심은 신적 의지나 인권의 진정한 자기표현이 아니고, 인간이 사회 환경과 다른 영향에 의해 나타내는 반응으로 보았다. Freud는 양심이 자아(ego)와 함께 초자아(super-ego)로 구성된다고 보았다. 이 구성은 사회적 교육의 결과로 형성된 초자아, 즉 부모와 사회가 각자에게 규정된 규칙과 표준에 따라 살고 행동하도록 가르친 일체의 의무와 습관으로서 본능적인 원초적 자아의 이기적인 욕구충족을 억제하고 자기가 속해있는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으로 본다. 프로이드는 양심을 후천적으로 형성된 통합적 판단으로 이해한다. 융 역시 양심을 교육과 훈련의 결과물로 보며 결국 통합적 판단력으로 본다. 융은 인간 정신의 무의식적 부분이 개인적 무의식과 집단적 무의식으로 보았다. 인간은 성장해감에 따라서 개인적 무의식과 집단적 무의식에 차례로 부딪치게 되며, 이 과정을 통해서 인격의 새로운 중심이 생겨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의식과 무의식의 접경지대에 나타나게 되는 자아(self)이다. 이 자아가 프로이드의 ego와 같은 역할을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인간의 이성은 사색적일뿐 아니라 실천적이므로, 인간에게는 사색적인 성품과 방황하는 실천적인 성품이 내재되어 있다. 아퀴나스는 이 실천적 성품을 양지양능(synderesis 선은 행하고 악은 피하도록 하는 성품)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성품이 도덕적 형성(moral formation) 과정을 거쳐 행동을 위한 올바른 사고인 “신중함(prudence)”이라는 덕으로 발전한다고 본다. 그리고 이 양심은 이 신중함이 실제적인 상황에서 구체적으로 적용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양지양능과 신중함 그리고 양심이 모두 본능적인 행동원칙들이며 이성의 실천적 기능들이다.
결국 인간의 행동들을 결정지어주는 요소들은 다음과 같다. 모든 판단의 힘이 되는 이성(reason),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도록 해주는 내적 성품인 양지양능(synderesis), 덕성으로서의 신중함(Prudence), 외적 행동 원칙인 자연법(natural law), 초자연적이며 외적행동 원칙인 은혜로움(grace),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종합하여 실제 결정을 내리는 힘으로서 양심(conscience)이다.
(3) 양심을 독립적 속성으로 보는 관점
유대교에 있어서 양심은 선천본능으로서 개인 내부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선을 행해야겠다고 느끼는 개인적 책임의식이다. 구약성경에서 ‘양심’(syneidesis)은 마음(또는 “뱃속”)과 “심장”이다(시26:2, 렘11:20, 17:10, 20:12, 창20:5, 시7:10, 24:4, 렘17:1, 31:33).
구약성경은 양심의 의미가 죄를 범한 사람에 대한 단죄 또는 올바르게 산 사람에 대한 칭찬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 창3:7-10, 동생을 죽인 가인: 창4:9-14, 의인 욥의 행위: 욥22:6, 시17:3, 26:2-3, 139:23-24). 이런 측면에서 구약에서 양심은 궁극적으로 각자의 행위를 질책하거나 칭찬하는 하나님의 심판의 목소리로 이해된다. 바울은 그리스도 이전부터 그 시대의 철학과 윤리학에서 자주 사용되었던 헬라어 ‘syneidesis’(양심)라는 말을 도입하여 사용하였다. 바울은 롬 2:14-15에서 양심이 이성과는 별개의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부여된 보편적 속성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양심이 각각의 행동에 대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증인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롬2:15, 9:1, 고후1:12), 선행적 판단자와 후속적 판단과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고전8:7-13, 10:13-30, 딤전1:15-19, 행23:1, 히13:18, 벧전3:16-21, 행24:16, 딤전3:9, 딤후3:9, 디도서1:15).
빌헬름 어네스트(Wilhelm Ernst)는 “양심은 단순한 이상이나 의지나 느낌 그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심저이며,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고 하나님에 의해서 자신을 궁극적으로 유지시켜가는 인간의 내밀한 중심”이라고 말한다. 패쉬케는 양심이 인위적인 산물이 아니라 원래부터 존재하는 내재적 속성이라고 본다. 즉 자연의 질서나 목적이나 하나님의 계획도 창조의 질서 안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위치와 그가 수행해야할 역할에 대하여 알게 되는 감각이 인간 안에 없다면 실현될 수 없다. 그렇게 때문에 양심 속에 들어있는 옳고 그름에 대한 감각은 목적론적 특성을 지닌 세계의 질서와 하나님 안에 있다. 이러한 개념적 설명과 함께 양심이 일반적 지식이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인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사람이 어떤 사물에 대해서 마음속으로 이해하는 것을 “안다(scire)”고 하며, 여기에서 과학 또는 지식(scientia)이라는 개념이 나타났다. 그리고 더욱이 궁극적 심판자의 법정에서 자신의 죄를 감추지 못하도록 하며 또한 고발을 피하지 못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인식으로 양심(conscientia)이다. 인간을 하나님의 신성한 법정에 세우는 양심은 인간을 감시하기 위해서 어떤 비밀도 어둠 속에 묻혀있지 못하도록 관찰하고 검사하기 위해서 주어졌다.
이런 측면에서 양심이 이성의 한 기능이 아니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속성으로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능이라고 보았다. 양심의 기능은 하나님의 공의를 인식하고 인간의 행동을 감시하며 선을 행하도록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3. 양심의 기능과 종류
1) 양심의 기능
Hallesby는 양심의 기능을 다양한 측면에서 재판석과 함께 비교 설명하고 있다. 재판석은 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법을 검토하고 적용하여 판결을 내리는 자리로 재판석으로서의 양심은 인간의 행위, 말, 생각, 생활 전체를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검토하고 판결을 내리는 것이 양심에 의한 재판 과정이다. 양심은 한 개인이 따르려 하거나 이미 따랐던 구체적 행동 노선의 윤리성과 구체적 상황에서의 윤리의무를 판단할 때 그 기능을 발휘하며, 양심의 기능은 윤리적 인식과 판단 능력을 가지고 선과 악을 구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양심의 기능이 실제로 작용하는 데는 교육과 체험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1) 완전성을 위한 노력의 기능
프로이드는 personality의 구성요소를 id(원본능), ego(자아), superego(초자아)의 세 개의 주요 체계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였다. id는 성격의 생물학적 구성요소이고, ego는 심리학적 구성요소이며, superego는 사회의 전통적 요소라고 한다. 프로이드는 superego가 두 하위체계 즉 이상 자아(ego Ideal)와 양심(conscience)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 이상 자아는 개인으로 하여금 자랑을 느끼게 함으로 보답을 주는 것이고, 양심은 죄책감을 갖게 함으로 벌을 준다. 초자아의 주요기능은 첫째로 성적이거나 공격적인 원본능(id)의 충동을 억제시키고, 둘째로 자아가 현실적인 목표 대신에 도덕적 목표를 갖도록 납득시키는 것이며, 셋째로 완전성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초자아의 하나의 체계라고 할 수 있는 ‘양심’은 끊임없이 도덕적 목표를 완전히 성취하도록 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2) 내적 증인 기능
모든 시대나 문화 사회 속에서 양심은 신적인 기원으로 주어진 생활의 내적원리로서 존재해왔다. 사회나 교육의 정도에 따라서 양심적 행동 양식이라는 것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문화적 상대주의 때문이다.
양심은 시대와 문화를 초월해서 공통된 역할을 한다. 그 역할이란 각 사회와 문화에서 어떤 것이 선한 행동인지 악한 행동인지를 증거한다는 것으로 선한 것은 의무감을 가지고 지켜 행하게 하고 악한 것은 거부하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양심은 인간의 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3) 행동의 규범으로서의 기능
양심은 항상 우리의 행동, 언어, 생각, 느낌이 어떠한가를 말해주며, 또 하나님의 의지에 비추어 우리 자신의 형편이 어떠한지를 말해준다. 양심은 그 스스로를 어떤 때는 행동하기 “전”에, 또는 행동하는 “동안”에, 또는 행동한 “후”에 규범을 제시한다.
행동하는 “동안”에는 대체적으로 양심의 소리를 듣기가 가장 어렵다. 일에 열중하다 보면 결과적으로 양심의 소리는 부분적으로 또는 완전히 질식되고 만다. 행동하기 “전”에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행동을 실천하도록 격려하든지 하지 말라고 권하든지 한다. 행동이 있은 “후”에는 그 일에 찬성하고 흐뭇해하든지, 혹은 반대로 마음을 불안하게 하든지 양심의 소리가 가장 강력하게 들려온다. 이에 대하여 할레스비는 “양심 자체가 좋고 나쁜 것이 아니고, 그것은 마치 기압계가 날씨의 좋고 나쁨을 말해주듯이 양심은 우리의 행동을 그 규범에 맞추어 판단해 줄 뿐이다.”라고 말하였다.
(4) 공동체(사회) 유지의 기능
양심이 사회와 공동체를 형성, 유지한다는 것은 롬 2:15의 양심작용인 “변명”과 “송사”의 형태로 나타나며, “마음에 새겨진 율법의 행위”라는 것은 타락한 불의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알만한 것”이 보이며 그것을 하나님이 보이셨다고 말씀하시는데, 그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인간 속에서 결국 “율법” 같은 것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타락하고 불의한 인간은 그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자기 속에 지니면서도 “하나님이 스스로 그것을 인간에게 보이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양심의 작용도 하나님의 나타내심에 의해 생겨지는 작용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타락한 인간은 자기 스스로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의 스스로 보이심에 힘입어 양심의 작용을 일으키고 그 작용은 남의 잘못을 송사하는 일과 자신의 잘못에 대해 변명하는 일이 된다.
송사와 변명은 양심작용의 한 형태로 사회구성원들 서로를 지키고 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되고 양심작용을 통해 개인의 사회화를 촉진한다.
(5) 심판의 기능
할레스비(O. Hallesby)는 그의 책 “양심”에서 ‘양심의 심판’이라는 주제로 양심을 재판석과 비교한다. 양심은 우리의 행위와 언어 그리고 생각과 전체 생활을 도덕률, 곧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검토한다. 그리고 판결을 내린다. 양심의 심판과정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할레비스는 양심의 재판의 성격을 4가지로 특정 짓고 있다.
첫째, 양심의 심판은 “무조건적”이다. 양심은 이유가 없이 판결을 선포한다. 양심의 하는 일이란 그 행동이 좋은가 나쁜가를 분명하게 선고한다.
둘째, 양심의 심판은 “절대적”이며, 흥정이나 타협은 없다. 만일 내 양심이 그 행위는 좋은 것이라고 판결을 내리면 그대로 해야 하고, 좋지 않다고 판결을 내리면 그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셋째, 양심의 심판은 개인적이다. 양심이 모든 사람에게 마찬가지로 작용하기는 하지만, 그 양심의 판결은 개인에 따라 다르다. 그러므로 개인의 양심의 판단이 타인에게 강요될 수 없다. 다만 그들의 양심을 자극하여 스스로 옳은 길을 찾도록 영향력은 행사할 수 있다.
넷째, 양심의 심판은 상고할 수가 없다. 양심은 ‘최고 법정’이요 그 양심의 심판을 기각시키거나 무효시킬 수 있는 다른 법정은 없다. 그렇지만 양심의 발전에 의해 처음에 내린 심판과 후에 내린 심판의 결과가 달라질 수 있는 여지는 남아있다. 이런 의미에서 양심은 구체적 행동의 윤리성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으로서 선한 것을 행하고 악한 것은 피하라고 하는 명령이다.
양심은 미래의 행동할 내용에 대한 지침을 제공하고 가치판단과 결단에 관여하며, 궁극적으로 개인의 도덕적 완전성을 위해 노력하는 기능을 한다. 동시에 현재의 자신의 행동에 대한 경험과 현재의 자신의 이미지에 대한 느낌을 제공하고 행동의 규범을 제시한다. 또한 양심은 과거의 자신의 행위나 말, 생활전체를 판단하고, 그 결과로서 죄책감과 죄의식을 부여하는 기능을 한다.
양심의 판단 기능은 다음과 같다. ① 그것은 우리의 언어를 판단한다. 우리가 무슨 말을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 판단한다. 우리가 타인과 대화 할 때 진실성과 사랑 친절 등에 판단을 한다. ② 우리의 생각을 판단한다. 양심은 주로 지속적이고 자주 떠오르는 해로운 생각과 및 사고방식에 작용한다. ③ 우리의 태도도 판단을 받는다. 태도에는 사랑, 미움, 동정, 슬픔, 분노, 무관심 등 여러 가지가 있다. 태도란 우리의 생각보다 더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지만, 양심은 이 태도에 쉽게 접근한다. ④ 우리의 동기를 판단한다. 동기란 우리가 어떤 행동을 취하게 되는 직접적이고 근본적인 원인이 된다.
2) 양심의 종류
성경에 나타나는 양심의 종류는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다. 선한양심, 악한 양심, 강한 양심, 약한 양심으로 분류할 수 있다.
(1) 착한 양심과 세심한 양심
기독교인의 생활은 신앙과 선한 양심을 갖고 있느냐에 중요성이 의미를 가진다. 선한 양심은 올바른 믿음이다(딤전1:19-20). 선한 양심은 도덕적이고 문화적인 영역이 아니다. 온전히 인간의 전 존재를 하나님과 관계시킨다. 히브리서의 양심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좇음으로써 얻어지는 순수함 즉 영원한 언약의 피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양심이다.
바울은 “오늘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행23:1)라고 했다. 이것은 바울이 죄를 범했거나 양심을 거스린 적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양심의 소리에 신속하고도 올바르게 반응했다는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다”(딤전1:19)고 했다. 착한 양심을 버리는 것은 우리 믿음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착한 양심은 경건한 양심(딤후1:3), 깨끗한 양심(딤후3:9), 선한 양심(벧전3:21)으로 불리워진다.
(2) 악한 양심과 마비된 양심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10:22)라고 했다. 본 절에서 악한 양심이란 그리스도의 피가 “너희 양심은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된다”(히9:14)고 했다. 따라서 악한 양심이란 자백하여 깨끗케 하심을 받지 않는 죄, 즉 죽은 행실이 있음을 알고도 자백하지 않고 그냥 지내는 양심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히 1:22에 나오는 악한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poneros인데 이는 “수고와 고통 및 슬픔을 가져오는 악”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악한 양심은 깨끗케 됨을 받지 않은 양심이며, 회개하지 않은 죄의 결과로 이런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디모데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 바울은 외식하여 거짓말 하는 자들에 대해 말하면서 그들은 “양심에 화인 맞은 자들”로서 다른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을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게”(딤전4:1-2)한다고 했다. 또 다른 편지에서 그는 불신자들에 대하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한다”(엡4:18-19)고 말했다. 성경의 말씀은 양심이 무감각 해진 사람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동일한 죄를 거듭해서 범할 때, 마비된 양심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된다.
양심은 우리의 몸과 피부와 다르다. 양심은 치료되어 회복될 수 있다. 양심이 감각을 잃어 버렸다면 그 양심은 하나님에 의해 치료, 교육 받아 다시 감각을 회복 받을 수 있다.
이런 교육과 더불어 회복과정은 지금까지 양심이 무디어져 있던 분야에 대한 양심의 소리와 성경말씀과 일치할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우리의 삶 전 영역에서 숨어있는 죄악은 다른 많은 영역에까지 오염시키고 있다. 우리의 양심이 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온전케 되는 양심교육이 필요하다.
(3) 약한 양심과 혼미한 양심
양심은 두 경우 중 하나가 될 때 약하게 될 수 있다. 하나는 미성숙 할 때이며, 다른 하나는 지나치게 예민할 때이다. 미성숙한 양심에 대해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약한 양심은 그 원인이 지식의 부족과 습관에 의함(고전8:7), 또는 다른 사람의 본을 따르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의 결여(고전 8:10)에 있다고 한다. 약한 양심은 연약하여 갈팡질팡하는 마음일 뿐만 아니라 지식을 따라 행동 하는데 필요한 힘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즉 너희 자유 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고전8:9-12).
여기서 약한 양심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다른 그리스도인의 행동을 모방하거나 잘못 해석하여 죄를 짓게 된다는 것이다. 초신자는 신앙인이 아니었을 때 가지고 있던 많은 문화적 또는 종교적 관념들을 계속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가 어떻게 신앙인으로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를 판단 할 때 혼란과 갈등이 일어난다. 그럴 때 성경공부를 통해서 그것을 성경에 적용함으로 양심을 올바르게 계발시켜 나가야 한다.
(4) 더럽혀진 양심과 이완된 양심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및 양심의 인도를 거부하면 양심은 더럽혀지고 타락하게 된다. 바울은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디도서1:15)라고 기록했다. 이런 상태에서 양심은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능력을 상실하며, 사실 타락한 모습을 보일 것이다. 더럽혀졌다는 말은 깨끗한 것과 불결한 것이 섞여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더렵혀진 양심과 마비된 양심은 유사하다. 그러나 마비된 양심은 완전히 무감각한데 비해, 더럽혀진 양심은 옳은 것과 그른 것이 서로 섞여 있어 우리를 잘못 인도한다.
4. 양심의 도덕의식
18세기 임마누엘 칸트(I. Kant)는 “생각 할수록 불가사의하고 두려움을 느끼는 것 두 가지가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하나는 내 머리 위에 있는 수많은 별이 반짝이는 저 하늘이며 또 하나는 내 마음 속에 있는 도덕률이다.”라고 했다.
모든 사람은 양심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주적인 도덕률, 즉 하나님의 도덕률에 반응하는 것이다. 양심은 하나님의 도덕률에 비추어 본 것을 우리 마음에 전달하여 마음으로 하여금 이 양심의 지시에 따르거나 또는 그것을 묵살하도록 하는 것이다.
칸트는 그의 ‘실천이성 비판’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창공의 별과 나의 가슴속에 있는 도덕률에 대한 경이와 경건의 마음은 더욱 새로워지며 더욱 늘어간다.” 칸트가 말하고 있는 바 인간 실존의 실천적이고 도덕적 측면에 대한 인식이란 결과적으로 경탄과 경이로 표현된다. 창공의 별에 대한 경이란 인간으로서 우주와 자연에 대한 경탄이며 이는 동시에 창조주와 맞닿아 있는 인간 존재의 본질임을 시사한다.
칼빈(J. Calvin))은 기독교강요 1장에서 경건과 경외야말로 신의식의 필수적인 요소라고 말했다. 자연에 대한 경탄과 경이는 달리 말하면 창조주 하나님의 솜씨에 대한 찬양과 경탄인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발견하고 경탄하게 된 별과 우주의 경이로움이란 자신의 내면속에 동일하게 자리 잡은 도덕에 대한 숭고한 가치와 비견되는 것이었고 이것이 곧 피조된 인간과 자연이 창조주와 연결되어 있음을 선천적으로 자각케 하는 양심의 역할인 것이다. 따라서 칸트가 경탄해 마지않는 창공의 별과 도덕률에 대한 경이와 경건은 바로 인간의 내면에 있는 보편적 양심의 소리에 대한 반응이며 종교적 씨앗이고 또 하나님 형상의 그림자일 수 있다.
칸트 자신의 가슴 속에 있는 도덕률은 보편적 양심의 자각에 근거한다. 뿐만 아니라 그가 도덕률과 대등한 가치로 삼은 창공의 별에 대한 경건과 경이의 마음이란 창조주와 연결된 양심의 발로임을 부인할 수 없다. 실천이성의 최고의 법정인 양심을 두드리는 경이와 경건의 소리는 정언명법이 아니라 하늘의 별과 같이 초월해 계신 하나님과 공유된 내적 연결고리의 울림인 것이다. 인간과 창조주 하나님 사이의 이러한 본질적 연결고리는 분명히 존재한다. 인간 실존의 경험적 차원에서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실재이다. 이것은 칸트 자신의 인간에 대한 정의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과 세계라고 하는 두 이념을 절대적인 전체로 결합하는 매질인 것이다.”
칸트에 의하면 인간의 선의지는 경험세계에서는 찾아질 수 없고 이성의 세계 내지 예지의 세계에서 찾아질 뿐이다. 그것은 오로지 순수이성의 개념에서 찾아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윤리학의 전제이다. 필연적인 선한 행동의 기준은 오로지 보편과 관계하는 이성 존재 내지 이성적 지평에서만 물어질 수 있다. 칸트의 양심은 이성이 이러한 명령과 이에 복종해야 하는 이성 존재의 의무와 연관하여 논의된다. 양심은 실천적 의식이며 그것은 그 스스로 의무인 바의 의식이다. 현실에서의 구체적인 행위에 대한 판단은 이성의 역할이 아니라 오성의 역할이며 이러한 내용의 판단 자체를 시험하는 것이 양심이다. 도덕성의 실천적 주체로서의 양심은 경건의적 전통의 빚을 지고 있는 칸트에 있어서 오류적일 수 없으며 완전한 선의지이다. 그것은 도덕적 행위에 있어서 최종적이며 절대적인 법정이다.
다시 말해, 칸트는 순수 이성에 의해 정초되는 선의지로서의 기준을 제시하고 이것의 범주 속에서 양심을 실천적 의식이라고 정의한다. 이성은 경험세계의 행동을 정초하는 기준일 뿐이며 구체적인 행위의 판단은 이성의 역할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의 실천적 주체를 양심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것을 궁극적으로는 실천이성이라는 개념의 범주로 도식화하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실천은 이성의 영역이 아니라 의지의 영역이며 양심은 의지를 아우르는 실천의 주체이다. 인식과 판단의 선험적 논리 구조가 전적으로 이성에게 귀속되는 것이 아니므로 양심이 바로 선험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공유하게 된 도덕적 자각으로서의 인식과 판단이 수납, 반응, 실천되는 장소이자 힘의 원천인 것이다.
이성과 양심은 동일하게 자료를 수용하여 체계화하지만 이를 판단하고 실천함에 있어서 이성은 그 자신의 합리적 논리 구조에 의거할 뿐이다. 그래서 이성적 판단은 비양심적이고 비윤리적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양심의 판단은 이와 달리 도덕에 대한 선험적인 자각을 함유하기 때문에 도덕적 가치를 항상 반영하고 있다. 이성적 판단은 그 자체로서 정당하거나 옳다는 가치를 보장할 수 없지만 양심적 판단은 그에 따르기만 하면 그 자체로서 정당성을 확보하며 도덕적 가치를 보장받는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 본연의 목소리로서 도덕적 당위성과 그런 선택의 압력을 양심의 범주로 돌리는 것이 정당하다고 본다.
인간의 삶이 있는 곳에는 어떤 교육과 관습의 규범이 있었고, 이것을 위반하고 감정과 실천하고 싶은 행위가 인간의 마음속에서 갈등을 향한 음성이 있다. 이런 마음속의 음성은 18세기에 도덕감(Moral Sense) 또는 양심(Conscience)이라고 표현하였다. 현대 철학과 심리학 등 다양한 학문의 발전 속에서 양심의 역할을 설명하는 마음속의 기능에는 다음과 같은 3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
1) 감정적인 측면으로서 우리가 옳다고 믿는 일을 행할 때는 만족감이 있었고, 나쁘다고 믿는 행위에는 불쾌감이 따른다는 것이다.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이와 동일한 현상이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감정적인 작용은 동시에 도덕적 행위의 동기가 되며, 양심의 근본적 힘도 이런 측면에서 검토한다.
2) 양심의 기능은 인지적 측면에서, 즉 도덕적 인식능력과 관련된 감정적인 어떤 것만이 아니라, 도덕적인 선과 악, 옳고 그름을 판별하게 해주는 힘이다. 이런 인지적 양심은 도덕적 행위의 의미와 도덕 법칙의 인식과 도덕법칙의 합리성의 근거이다. 실천적인 측면에서 양심은 영어로 ‘Con-science’, 독일어의 ‘Ge-wissen’은 함께 안다는 지적인 측면을 의미한다.
3) 인간이 도덕적 지식과 감정을 가지고 있더라도 옳고 선한 것을 선택하고 실천하는 의지의 결단이 없다면 행위로 연결되지 못한다. 양심은 의지적 측면에서 이해했던 피히테(J. G. Fichte)는 양심을 삶의 과정에서 도덕적 사명감을 가지고 활동하라는 인간 마음의 명령하는 기능으로 받아 들였다.
브로드(Broad)는 양심을 이와 같이 3가지 기능과 함께 도덕적 본성 자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면서, 일반적으로 도덕적 지식, 도덕적 숙고, 도덕적 감정, 도덕적 신념, 도덕적 노력 등으로 광범위하게 해석하였다.
칸트의 도덕관은 실천이성과 의지에 정초하고 있다. 그러한 실질적인 도덕관은 각 개인의 도덕 진리가 되는 것은 감정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지는 이성에 의해 규정되고, 영향 받음으로서 이성의 보편적 법칙에 따르지만 그러나 의지는 경향성(Neigung, 감정적 욕구)에 의해 지배되는 성질이 있어서 이성이 규정해 주는 방향으로만 따라가기에는 어려움이 많으므로 도덕 법칙에 따라 행위 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떤 특수한 감정이 필요하다.
칸트의 이런 도덕적 감정(das moralische Gefühl)은 도덕 법칙에 대한 존경 감정(ein Gefühl der Achtung fürs moralische Gesetz)이다. 이러한 존경 감정은 경험에서 유래하지 않고 지성적인 근거(intellektueller Grund)에서 생기는 감정으로서 선험적(a priori)으로 인식되는 적극적 감정이다.
칸트의 이런 도덕 감정은 인간이 도덕적 존재로서 본래부터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이런 감정에 무감각하다면 동물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 감정은 후천적으로 습득되는 것이 아니며,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을 교육을 통하여 계발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실천 이성을 통하여 도덕 감정에 관계하는 양심은 도덕 법칙에 대한 존경심과 관계성을 가진다. 즉 양심은 어떤 행위가 도덕적 감정에 의해 야기된 도덕적 관심에 따라 법칙을 실천했는지에 관한 판단이다.
5. 신앙과 양심
그리스도와 아담의 관계에 근거하여 인간의 양심은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떠난 ‘아담 안에 있는 인간의 양심’이며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의 양심’이다. 모든 인간의 양심은 이 두 가지 중 하나이다.
1) 아담 안에서의 양심
양심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라 경건치 아니한 자, 죄인을 위하여 세운 것이 것이다(딤전1:8-9). 그러나 인간의 양심은 본성적으로 자신의 죄를 알게 하지만 그것 때문에 뉘우쳐 사함을 받고 구속의 은혜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지는 못한다. 인간의 양심에 의존하는 한 인간은 죄를 앎에도 회개치 아니하고 완악한 마음에 사로잡혀 있다. 이 양심은 아담 안에 있는 인간, 즉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않는 자, 경건치 않은 자, 타락한 죄인으로서 망령된 삶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자신들의 죄를 핑계치 못하게 하기 위한 양심이다. 이는 자연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을 발견하지만 미련한 마음에 허망하여 져서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감사치도 아니한다는 바울의 진술과 동일한 맥락이다. 인간은 신의식 자체만을 가지고, 혹은 자신의 도덕적 의식만을 가지고는 누구도 자신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2) 그리스도 안에서의 양심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는 믿음과 세례로 말미암아 구속에 참여하게 된 인간은 이전 아담 안에서 갖고 있던 악한 양심을 벗어버리고 참 마음, 선한 양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된다(벧전3:21).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선하게 된 양심이 찾게 되는 하나님은 바로 온전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이것은 칸트가 말하는 바 도덕적 요청에 의한 신, 절대자와는 다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만이 진정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인 것처럼 인간의 이성과 더불어 인간의 전인격 역시 그리스도에 의해 한계 지워진다. 즉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인간의 이성과 인격 즉 인간의 삶 전체가 바르게 인식될 수 있다. 전인은 그리스도 예수와의 관계 속에서 총체적으로 파악된다.
3) 성경적 양심 이해
구약에서는 양심이라는 단어를 찾을 수 없다. 양심과 비슷한 개념을 가진 용어를 찾는다면 마음(leb)이 양심에 가장 가까운 단어라 할 수 있다. 구약에서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을 마음이란 단어를 사용하여 표현한다. 신약에서는 양심을 바울과 히브리서 기자가 사용했다. 특히 히 10:2, 벧전 2:19의 말씀에는 우리나라 성경에 양심이란 단어 대신에 “죄를 깨닫는 일” “하나님을 생각함으로”로 번역되었다.
성경에 사용된 양심의 개념을 두 가지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중생되지 못한 자의 양심과, 중생한 자의 양심이다.
둘째: 중생한 자로서의 양심의 성장과 퇴화이다.
(1) 중생되지 못한 자의 양심과 중생한 자의 양심
모든 사람은 양심을 소유하고 있다(롬2:15, 엡31:33). 이 뜻은 창조 시에 하나님의 법이 분명하고 명료된 형태로서 인간의 마음 판에 새겨져 있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 이 법은 손상되었고 훼손되었다. 이 법은 양심의 법으로 무감각하게 되었고 인간의 오선은 희미하게 되었다.
박윤선도 양심은 훈련이나 경험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 본래의 본성으로 본다. 다윗과 나단 선지자의 사건을 해석하면서, 다윗이 양심을 소유하였으며, 또 양심을 통해 회개했다고 설명한다.
성경은 양심의 2가지 본성을 가진 것으로 해석한다. 즉 현 존재인 자신과의 충돌과, 증거의 기능(롬1:20)의 본성이다. 충돌되므로 변명하고 송사하고(롬2:15), 서로 송사하고 변명하므로, 분열(롬2:12)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이 분열은 양심 자체의 가장 심오한 표현이다.
성경은 중생되지 못한 자의 양심은 더러워진 양심(고전8:2)이며, 중생 후 타락한 양심은 화인 맞은 양심(딤전4:2) 그리고 중생한 자의 양심은 선한 양심과 깨끗한 양심(딤전1:1, 3:9)이라 한다.
중생되지 못한 양심은 침착하지 못하고, 불확신하며, 불안전하다. 그러므로 불건전하고, 불신앙하며, 하나님의 법에 의해 불복종하여 그 법을 미워하는 마음으로 꽉 찼고, 또 양심이 오염되고 더러워져 그들의 잘못된 광신성을 옹호하며 그들의 잘못을 자신에게 돌리지 않고 다른 것에 돌린다. 이것은 양심이 앞제자에 고소자라는 표현이며 또 최후 심판의 전주곡으로 이해된다. 양심 앞에 숨겨진 실체는 전혀 없다. 그러므로 최후 심판 때에 양심이 하나님 앞에서 지조한 것이며, 또 벌거벗은 것 같이 심판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은 타락한 양심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음을 아신다(시14:2-3). 양심이 인간존재의 죄된 근본인 마음을 변화 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참된 지식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법과 뜻을 단계적인 방법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였다.
모세의 율법을 통해 의식적 방법을, 선지자들을 통하여 양심의 각성을 계시하셨다. 이 양심은 하나님께서 새로운 계약을 주신 때까지 몽학성생(갈3:24)으로 존재했다. 그러나 율법의 완성자로 오신(요1:45)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것이 됐다.
율법은 인간 스스로가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다(골2:2).
율법이 주어지므로 양심의 각성이 있을 수 있다. 이 각성은 중생과 상용한다. 이 각성은 단계적 혹은 단번에, 즉 일회성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회개는 다르다. 각성은 전적 은혜로운 국면이며, 회개는 각성의 기적 후에 얻어지는 인간의 행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계시의 각성을 통해 회개케 하시고, 회개 한 후 얻을 때까지 하나님은 계속적으로 영향을 주신다(빌2:13, 행16:14, 시51:10).
야스퍼스의 인간론에서 인간은 혼돈적 존재가 아니라, 본래적 존재가 되기로 결정하는 것으로써 결단하는 존재(entscheidendes sein)인 책임의 존재이다. 그러므로 회개는 인간의 결단과 책임이 따르는 것이다. 인간은 회개와 함께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으로서 하나님을 만나게끔 되어있는 참인간인 것이다.
이 믿음은 말씀과 모든 율법이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뜻으로 받기 때문에 “지켜야만 하는 것”으로 알고 “나는 …해야 한다”고 양심은 계속 말한다. 그러므로 중생한 양심은 하나님의 법에 순종할 책임을 지는데, 그것은 형벌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양심 때문에 순종할 책임을 진다.
믿음과 양심 사이에 하나님의 역할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의인된 것을 믿게 하는 선물을 주는 것이다(엡2:8). 그러므로 믿음을 인정하는 양심이고 이 양심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게 한다. 즉 중생한 양심이 중생치 못했던 양심 자체를 알게 된다. 그러므로 옛사람의 양심은 비정상적이고 범죄적이다. 이제 남은 것은 그리스도 분량만큼 자라 가는데 있다(엡4:13-16).
(2) 중생한 자의 양심의 성장과 퇴화
믿음이 어떻게 성장해 가는가? 이것은 양심이 어떻게 성장해 가느냐와 관계한다. 양심의 성장은 성령님의 조명과 그리스도에게의 순종,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연합에서 이루어진다. 중생한 양심은 확신을 얻기 위해 여러 가지 선한 일을 하고 또 성경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한다. 이런 양심은 중생되지 못했을 때보다 더 차원 높게 죄 의식을 전 삶에 갖게 하는 것이며 자기기만으로부터 지켜주는 것이다.
양심의 내용에는 의지와 관계성을 가진다. 칸트는 양심을 의지에 내리는 무상명령으로 보았다. 이 무상명령의 의지가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에 따라서 양심의 미래는 결정된다. 의지가 따르면 성장이고 따르지 않으면 퇴화이다. 양심을 죽이는 행위를 창세기 3장에서 볼 수 있다. 또 딤전 4:2에는 “화인 맞은 양심”이라 하며 딤전 1:9에는 “양심을 버린 자”, 딛 1:15에서는 “마음과 양심이 더러워 진자”이다.
구원은 양심이라는 통로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성경이 사람의 죄를 꾸짖어 바로 잡아 줄 수 있는(요16:8) 양심이 불타 없어졌기 때문이다. 양심이 불탄 것을 죽음에 이르는 죄(요일5:16), 성경모독 죄(마12:31, 히6:4-6)에 해명된다. 왜냐하면 성령님의 역사할 장소가 없기 때문이다. 결코 용서받을 수 없고 또한 죄를 더 이상 슬퍼하지 않고 탄식하지 않는다.
양심을 성장시키는 요소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에 좌우한다. 말씀에 의해 스스로 얼마나 깨우침을 받았는가? 이 양심이 하나님의 빛 아래서 성장하게 되어지면 훌륭한 열매(갈5:22-23)를 맺게 된다.
양심은 의지에게 명령하고, 의지는 그 명령을 방해치 않고 순종할 때 양심은 계속적으로 우리를 경계, 심판하여 순수한 양심(행24:16, 딤전1:5-9; 3:9, 딤후1:3, 히13:18, 벧전3:16,21)이 되게 한다.
순수한 양심의 특징은 “민감해 지는 것”이다. 민감한 양심은 조심성 있는 신앙인으로 양성시켜 유혹에 넘어지지 않게 더욱 권위 있는 양심이 되게 한다. 이 권위 있는 양심은 신앙인의 의지 실천에 분명하고 정확한 선을 제공한다. 그렇게 되므로 양심적인 기독교인은 모든 것에 양심과 상의하며 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밝혀진 양심에 자신의 삶 전부를 굴복시켜 매일 매일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 민감한 양심은 우리로 하여금 생산적인 삶을 갖게 한다. 그러므로 양심내용과 그 실천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교육인가?
6. 기독교 교육의 과제로서의 양심교육
1) 양심교육의 필요성
인간 삶에 있어서 가치있는 행위들의 하나가 양심이다. 양심은 모든 의로운 행위를 용기있게 실천하도록 하며, 악에 대한 반항과 선에 대한 희생까지도 감수하는 원동력이다. 이런 원동력의 근원을 이루는 양심의 행위는 교육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양심은 구체적인 상황 안에서 최종적인 판단을 내리는 윤리규범이다. 양심의 판단은 불완전하며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에 판단오류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 판단오류의 가능성을 극복하기 위해서 기독교교육은 올바른 양심을 형성해야 할 과제를 가지고 있다.
올바른 양심은 자신의 의지와 함께 인간자체가 한계성을 가지고 있는 불완전한 존재인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안에서 필수적으로 진리를 인식하고 양심의 판단과 함께 행위가 나타나야 한다. 인간은 올바른 삶의 가치 판단과 인식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세상에서 올바른 양심을 형성해 나아가야 하는 책임이 있다.
양심이라는 개념은 ‘conscience’의 con+sciesntia의 합성어가 어원이다. 즉 ‘con’은 “함께”라는 뜻이고, ‘sciesntia’는 “안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양심의 문제는 “무엇을 어떻게 바로 아느냐”라는 지식의 문제와 관계된다. 잘못된 지식에는 잘못된 양심, 약한 양심이 나오고, 바른 지식의 앎에서는 강한 양심, 바른 양심이 나오게 된다. 그리고 “함께”라는 의미는 자신의 존재와 함께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아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므로 양심은 인간 속에서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음성일지라도 자연적인 양심은 하나님의 소리라 규정할 수 없다. 자연적인 양심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바른 지식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양심의 기능은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 문화에 따라 역사에 따라 제각기 반대되는 양심적 행동이 다양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육으로 양심이 존재한다면 하나님과 인간은 올바로 판단을 할 수 있다. 이런 지식은 하나님의 음성, 소리라고 표현할 수 있다.
자연적이고 일반적인 양심은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중생되어져야만 한다. 하나님에 의해 새로워진 양심만이 바른 양심으로 작용할 수 있게 된다. 이 중생된 양심은 계속적으로 바른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육되어져야만 한다.
양심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위해서 양심은 교육되어져야만 한다. 양심을 교육시킨다는 것은 우리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형성되도록 함으로써 양심을 민감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특정한 양심의 문제들에서 정확한 사실들을 고찰할 때 인간이 선한 양심을 소유했다 할지라도 완전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중생한 양심도 교육을 통해 끊임없이 성숙되어져야만 한다. 할레스비는 예수 그리스도의 양심이 민감해지고 권위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양심의 민감성이란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관계되어진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민감성은 양심의 발전을 가져다준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그 말씀에 의해서 스스로 깨우침을 박고 발전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양심 교육의 출발과 전 과정은 하나님의 말씀의 올바른 적용과 함께 삶의 지혜를 깨닫는 과정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민감한 양심이 인간의 의지에 권위를 나타낼수록 양심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민감하고 권위 있는 양심 교육의 필요성은 첫째로,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고 그 의미 속에서 인간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둘째, 이 양심은 예수 그리스도와 긴밀한 교제를 가지게 한다.
이렇듯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과 계속 교육되어져 민감해져야 한다. 양심 그 자체는 완전하지 못한다. 이 양심은 생명 있는 식물처럼 성장하기도 하고 메말라 죽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인간교육은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악하고 약한 양심을 포기하게 하고 선하고 민감한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바르게 살아가도록 만들어야 한다.
2) 양심교육의 가능성
하나님께서 타락한 이 세상에 일정한 규범과 같은 자연법을 허락하셨고, 또한 인간에게 내적 증거인 양심을 주셨다. 더욱 더 하나님께서 은혜의 법을 주심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이 시대의 삶을 가치 있게 살도록 허락하셨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과 법 앞에서 갈등하며 자신의 삶을 진단하며 살아가야만 한다. 끊임없는 삶의 실천적인 판단과 더불어 행위의 옳고 그름의 규범적인 자연법도 양심의 교육과 함께 조화로운 하나님의 법칙을 이 세상에서 의미 있는 삶의 가능성을 진단할 수가 있다.
인간의 존재는 인간 이해의 지평선을 너머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서 하나님의 책임을 구현할 교육을 하나님의 메신저로서 실천하여야 한다. 이러한 방향전환적인 교육적 만남은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진리 안에 거하는 존재로 규정되어야 한다.
양심교육의 목적지는 딤전 1:5의 말씀과 같이 “사랑까지” 가는 것이다. 훼케마(M. Fakkema)역시 기독교 철학을 사랑의 철학이라고 하였는데, 이 사랑의 철학은 기독교교육 측면에서 사랑을 위하여 목적과 과정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를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사랑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신6:5)인 내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는데(마22:37-39)까지 가는 것이다. 이곳까지 인도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소유한 마음의 핵심인 양심이다. 양심은 중생한 자나 중생하지 못한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이다.
기독교교육의 대상은 인간과 사회, 학교 등 하나님이 다스리는 모든 통치 영역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기독교교육의 과제는 하나님의 통치 법칙이 이 세상에 올바르게 전하여지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 세상에서 드러날 수 있도록 중생된 양심을 가진 신앙인은 양심교육의 가능성을 가지고 그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7. 나가는 말
우리시대의 한 현상으로서 삶의 의미, 삶의 본질 그리고 자신의 삶이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만 하는가?라는 당위성이 계속 논의되어졌다. 이런 삶의 물음은 공허한 대답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능력과 상황들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과제들을 가지게 되었다. 현 시대는 이런 물음의 교육적인 대답으로써 양심교육의 중요성을 가져야 한다.
과학의 발전과 함께 삶의 무의미성이 대두되어질지라도 우리의 삶이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비본질인지 분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한 교육의 길은 인식의 체험과 전달을 거쳐서 양심교육에 이르게 되고 이러한 교육의 준거는 인간이해이고 인간의 삶의 의미는 양심과 절대적으로 관계성을 가지고 있다.
양심은 하나의 상황에 내재한 의미를 발견해 낼 수 있는 인간의 직관적인 능력이다. 양심은 상황 속에 내재된 의미를 두고 인간으로 하여금 반성할 수 있게 한다. 또한 그 상황에서 인간 책임성을 해석할 수 있게 하고, 그 다음 그 상황에서 발전된 의미에 의거해서 행동할 수 있게 한다.
시대가 아무리 다원화되고 자기중심화 된다고 하여도 그 사회를 받쳐주는 기본적인 약속은 인간이 인간답게 서로를 존중하며 양심적인 삶을 추구한다는 명제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와 같이 감성적 경험주의, 자기중심주의, 다원주의와 함께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양심의 회복은 중요한 연구의 과제이다.
기독교 인간교육의 과제로서 양심교육은 피교육자로 하여금 바른 윤리규범을 갖게 하고 삶 속에서 바른 분별력을 갖게 한다. 이러한 양심교육의 가능성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법칙과 예수 그리스도와 긴밀한 관계성에 기초한다. 이러한 관계성에 기초하여 변화된 내면적인 삶이 외면적인 행위를 창출하는 인간 양심교육은 기독교교육에 중요한 분야로 인식되어야 한다.
또한 기독교교육에서 인간은 양심교육을 통하여 인간 소외현상을 극복하는 ‘책임있는 인간’과 올바른 분별력을 소유한 ‘전인적인 인간’으로 교육하는 것이 기독교 인간교육에 중요한 과제이다. 이런 양심교육은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교육적 만남을 발생시켜 ‘인식된 세계 밖의 존재로부터(Aus-der-Welt-Sein)’ ‘진리 안의 존재(In-der-Wahrheit-Sein)’로 거듭나게 한다.
이런 연구는 앞으로 양심교육이 기독교교육철학과 일반교육학, 그리고 신학과 연계하여 발전적으로 연구되어야 하며 더 나아가 이러한 양심교육을 기독교교육의 과제로 제시할 수 있는 교육의 실천적 요소로 부각되기를 바란다.
한상진 교수(총신대 기독교교육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