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특집
21세기 기독교 인간교육의 과제로서 양심교육(2)
한상진 교수(총신대 기독교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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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2. 양심의 의미 1) 양심의 개념 2) 양심의 정의 3. 양심의 기능과 종류 1) 양심의 기능 2) 양심의 종류 4. 양심의 도덕의식 5. 신앙과 양심 1) 아담 안에서의 양심 2) 그리스도 안에서 양심 3) 성경적 양심 이해 6. 기독교교육의 과제로서의 양심교육 1) 양심교육의 필요성 2) 양심교육의 가능성 7. 나가는 말 |
3. 양심의 기능과 종류
1) 양심의 기능
Hallesby는 양심의 기능을 다양한 측면에서 재판석과 함께 비교 설명하고 있다. 재판석은 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법을 검토하고 적용하여 판결을 내리는 자리로 재판석으로서의 양심은 인간의 행위, 말, 생각, 생활 전체를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검토하고 판결을 내리는 것이 양심에 의한 재판 과정이다. 양심은 한 개인이 따르려 하거나 이미 따랐던 구체적 행동 노선의 윤리성과 구체적 상황에서의 윤리의무를 판단 할 때 그 기능을 발휘하며, 양심의 기능은 윤리적 인식과 판단 능력을 가지고 선과 악을 구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양심의 기능이 실제로 작용하는 데는 교육과 체험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1) 완전성을 위한 노력의 기능
프로이드는 personality의 구성요소를 id(원본능), ego(자아), superego(초자아)의 세 개의 주요 체계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였다. id는 성격의 생물학적 구성요소이고, ego는 심리학적 구성요소이며, superego는 사회의 전통적 요소라고 한다. 프로이드는 superego가 두 하위체계 즉 이상 자아(ego Ideal)와 양심(conscience)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 이상 자아는 개인으로 하여금 자랑을 느끼게 함으로 보답을 주는 것이고, 양심은 죄책감을 갖게 함으로 벌을 준다. 초자아의 주요기능은 첫째, 성적이거나 공격적인 원본능(id)의 충동을 억제시키고 둘째, 자아가 현실적인 목표 대신에 도덕적 목표를 갖도록 납득시키는 것이며 셋째, 완전성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초자아의 하나의 체계라고 할 수 있는 ‘양심’은 끊임없이 도덕적 목표를 완전히 성취하도록 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2) 내적 증인 기능
모든 시대나 문화 사회 속에서 양심은 신적인 기원으로 주어진 생활의 내적원리로서 존재해왔다. 사회나 교육의 정도에 따라서 양심적 행동 양식이라는 것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문화적 상대주의 때문이다. 양심은 시대와 문화를 초월해서 공통된 역할을 한다. 그 역할이란 각 사회와 문화에서 어떤 것이 선한 행동인지 악한 행동인지를 증거 한다는 것으로 선한 것은 의무감을 가지고 지켜 행하게 하고 악한 것은 거부하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양심은 인간의 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3) 행동의 규범으로서의 기능
양심은 항상 우리의 행동, 언어, 생각, 느낌이 어떠한가를 말해주며, 또 하나님의 의지에 비추어 우리 자신의 형편이 어떠한지를 말해준다. 양심은 그 스스로를 어떤 때는 행동하기 “전”에, 또는 행동하는 “동안”에, 또는 행동한 “후”에 규범을 제시한다.
행동하는 “동안”에는 대체적으로 양심의 소리를 듣기가 가장 어렵다. 일에 열중하다 보면 결과적으로 양심의 소리는 부분적으로 또는 완전히 질식되고 만다. 행동하기 “전”에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행동을 실천하도록 격려하든지 하지 말라고 권하든지 한다. 행동이 있은 “후”에는 그 일에 찬성하고 흐뭇해하든지, 혹은 반대로 마음을 불안하게 하든지 양심의 소리가 가장 강력하게 들려온다. 이에 대하여 할레스비는 “양심 자체가 좋고 나쁜 것이 아니고, 그것은 마치 기압계가 날씨의 좋고 나쁨을 말해주듯이 양심은 우리의 행동을 그 규범에 맞추어 판단해 줄 뿐이다.”라고 말하였다.
(4) 공동체(사회) 유지의 기능
양심이 사회와 공동체를 형성, 유지한다는 것은 롬2:15의 양심작용인 “변명”과 “송사”의 형태로 나타나며, “마음에 새겨진 율법의 행위”라는 것은 타락한 불의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알만한 것”이 보이며 그것을 하나님이 보이셨다고 말씀하시는데, 그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인간 속에서 결국 “율법” 같은 것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타락하고 불의한 인간은 그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자기 속에 지니면서도 “하나님이 스스로 그것을 인간에게 보이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양심의 작용도 하나님의 나타내심에 의해 생겨지는 작용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타락한 인간은 자기 스스로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의 스스로 보이심에 힘입어 양심의 작용을 일으키고 그 작용은 남의 잘못을 송사하는 일과 자신의 잘못에 대해 변명하는 일이 된다. 송사와 변명은 양심작용의 한 형태로 사회구성원들 서로를 지키고 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되고 양심작용을 통해 개인의 사회화를 촉진한다.
(5) 심판의 기능
할레스비(O. Hallesby)는 그의 책 “양심”에서 ‘양심의 심판’이라는 주제로 양심을 재판석과 비교한다. 양심은 우리의 행위와 언어 그리고 생각과 전체 생활을 도덕률, 곧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검토한다. 그리고 판결을 내린다. 양심의 심판과정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할레비스는 양심의 재판의 성격을 4가지로 특정 짓고 있다.
첫째, 양심의 심판은 “무조건적”이다. 양심은 이유가 없이 판결을 선포한다. 양심의 하는 일이란 그 행동이 좋은가 나쁜가를 분명하게 선고한다.
둘째, 양심의 심판은 “절대적”이며, 흥정이나 타협은 없다. 만일 내 양심이 그 행위는 좋은 것이라고 판결을 내리면 그대로 해야 하고, 좋지 않다고 판결을 내리면 그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셋째, 양심의 심판은 개인적이다. 양심이 모든 사람에게 마찬가지로 작용하기는 하지만, 그 양심의 판결은 개인에 따라 다르다. 그러므로 개인의 양심의 판단이 타인에게 강요될 수 없다. 다만 그들의 양심을 자극하여 스스로 옳은 길을 찾도록 영향력은 행사할 수 있다.
넷째, 양심의 심판은 상고 할 수가 없다. 양심은 ‘최고 법정’이요 그 양심의 심판을 기각시키거나 무효 시킬 수 있는 다른 법정은 없다. 그렇지만 양심의 발전에 의해 처음에 내린 심판과 후에 내린 심판의 결과가 달라질 수 있는 여지는 남아있다. 이런 의미에서 양심은 구체적 행동의 윤리성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으로서 선한 것을 행하고 악한 것은 피하라고 하는 명령이다. 양심은 미래의 행동할 내용에 대한 지침을 제공하고 가치판단과 결단에 관여하며, 궁극적으로 개인의 도덕적 완전성을 위해 노력하는 기능을 한다. 동시에 현재의 자신의 행동에 대한 경험과 현재의 자신의 이미지에 대한 느낌을 제공하고 행동의 규범을 제시한다. 또한 양심은 과거의 자신의 행위나 말, 생활전체를 판단하고, 그 결과로서 죄책감과 죄의식을 부여하는 기능을 한다.
양심의 판단 기능은 다음과 같다. ① 그것은 우리의 언어를 판단한다. 우리가 무슨 말을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 판단한다. 우리가 타인과 대화 할 때 진실성과 사랑 친절 등에 판단을 한다. ② 우리의 생각을 판단한다. 양심은 주로 지속적이고 자주 떠오르는 해로운 생각과 및 사고방식에 작용한다. ③ 우리의 태도도 판단을 받는다. 태도에는 사랑, 미움, 동정, 슬픔, 분노, 무관심 등 여러 가지가 있다. 태도란 우리의 생각보다 더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지만, 양심은 이 태도에 쉽게 접근한다. ④ 우리의 동기를 판단한다. 동기란 우리가 어떤 행동을 취하게 되는 직접적이고 근본적인 원인이 된다.
2) 양심의 종류
성경에 나타나는 양심의 종류는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다. 선한양심, 악한 양심, 강한 양심, 약한 양심으로 분류할 수 있다.
(1) 착한 양심과 세심한 양심
기독교인의 생활은 신앙과 선한 양심을 갖고 있느냐에 중요성이 의미를 가진다. 선한 양심은 올바른 믿음이다(딤전 1:19-20). 선한 양심은 도덕적이고 문화적인 영역이 아니다. 온전히 인간의 전 존재를 하나님과 관계시킨다. 히브리서의 양심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좇음으로써 얻어지는 순수함 즉 영원한 언약의 피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양심이다.
바울은 “오늘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행23:1)”라고 했다. 이것은 바울이 죄를 범했거나 양심을 거스린 적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양심의 소리에 신속하고도 올바르게 반응했다는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다(딤전1:19)”고 했다. 착한 양심을 버리는 것은 우리 믿음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착한 양심은 경건한 양심(딤후1:3), 깨끗한 양심(딤후3:9), 선한 양심(벧전3:21)으로 불리워진다.
(2) 악한 양심과 마비된 양심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10:22)”라고 했다. 본 절에서 악한 양심이란 그리스도의 피가 “너희 양심은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된다(히9:14)”고 했다. 따라서 악한 양심이란 자백하여 깨끗케 하심을 받지 않는 죄, 즉 죽은 행실이 있음을 알고도 자백하지 않고 그냥 지내는 양심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히1:22에 나오는 악한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poneros 인데 이는 “수고와 고통 및 슬픔을 가져오는 악”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악한 양심은 깨끗케 됨을 받지 않은 양심이며, 회개하지 않은 죄의 결과로 이런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디모데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 바울은 외식하여 거짓말 하는 자들에 대해 말하면서 그들은 “양심에 화인 맞은 자들”로서 다른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을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게(딤전4:1-2)”한다고 했다. 또 다른 편지에서 그는 불신자들에 대하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한다(엡4:18-19)”고 말했다. 성경의 말씀은 양심이 무감각 해진 사람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동일한 죄를 거듭해서 범할 때, 마비된 양심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된다.
양심은 우리의 몸과 피부와 다르다. 양심은 치료되어 회복될 수 있다. 양심이 감각을 잃어 버렸다면 그 양심은 하나님에 의해 치료, 교육 받아 다시 감각을 회복 받을 수 있다.
이런 교육과 더불어 회복과정은 지금까지 양심이 무디어져 있던 분야에 대한 양심의 소리와 성경말씀과 일치 할 때 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우리의 삶 전 영역에서 숨어있는 죄악은 다른 많은 영역에 까지 오염시키고 있다. 우리의 양심이 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온전케 되는 양심교육이 필요하다.
(3) 약한 양심과 혼미한 양심
양심은 두 경우 중 하나가 될 때 약하게 될 수 있다. 하나는 미성숙 할 때이며, 다른 하나는 지나치게 예민할 때이다. 미성숙한 양심에 대해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약한 양심은 그 원인이 지식의 부족과 습관에 의함(고전8:7), 또는 다른 사람의 본을 따르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의 결여(고전 8:10)에 있다고 한다. 약한 양심은 연약하여 갈팡질팡하는 마음일 뿐만 아니라 지식을 따라 행동 하는데 필요한 힘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즉 너희 자유 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고전8:9-12).”
여기서 약한 양심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다른 그리스도인의 행동을 모방하거나 잘못 해석하여 죄를 짓게 된다는 것이다. 초신자는 신앙인이 아니었을 때 가지고 있던 많은 문화적 또는 종교적 관념들을 계속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가 어떻게 신앙인으로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를 판단 할 때 혼란과 갈등이 일어난다. 그럴 때 성경공부를 통해서 그것을 성경에 적용함으로 양심을 올바르게 계발시켜 나가야 한다.
(4) 더럽혀진 양심과 이완된 양심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및 양심의 인도를 거부하면 양심은 더럽혀지고 타락하게 된다. 바울은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디도서1:15)”라고 기록했다. 이런 상태에서 양심은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능력을 상실하며, 사실 타락한 모습을 보일 것이다. 더럽혀졌다는 말은 깨끗한 것과 불결한 것이 섞여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더렵혀진 양심과 마비된 양심은 유사하다. 그러나 마비된 양심은 완전히 무감각한데 비해, 더럽혀진 양심은 옳은 것과 그른 것이 서로 섞여 있어 우리를 잘못 인도한다. (다음호에 계속)
한상진 교수(총신대 기독교교육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