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말씀
개념있는 그리스도인(2) 딤후 3:1-5
교회를 다닌다고 모든 것이 용서가 되지 않는다. 물론 교회를 다니고 주님을 영접하면 구원받는 것은 틀림이 없다. 그렇다고 세상 사람들에게 까지 다 용서가 되고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음식점에 가거나, 공공장소에 가면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부모들이 있다. 그곳에서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고 뛰어다니는 것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부모가 있다. 착각하면 안 된다. 내 아이니까 내가 다 용서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공공장소에서 모든 사람들이 다 용서하고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내 아이는 내가 용서하고 이해할 수 있지만 외부의 사람들은 그것을 용납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
물론 병원에서 다급한 환자를 위하여 기도하면 환자는 충분히 이해한다. 나를 위하여 이렇게 간절하게 기도해주는데 이해 못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 살고 있다. 이 세상 속에서 정말 지혜롭게 살아야 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야 할 두 가지>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두 가지가 있어야 한다.
하나는 비둘기처럼 순결하게 사는 것이다. 비둘기는 미련한 새라고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비둘기가 왜 그렇게 사랑을 받고, 평화를 상징하는 새가 되었는가? 그것은 비둘기가 순결하다고 보여 지기 때문이다. 사실 비둘기는 순결할 수가 없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것처럼 비둘기 똥이 얼마나 많은가? 공원이나 비둘기가 모여 있는 곳에 비둘기 똥은 정말 지저분하게 이를 데가 없다.
그런데 어떻게 비둘기가 정결함을 유지할 수 있는가?그것은 비둘기의 날갯죽지 밑에서 나오는 기름 때문이다. 비둘기는 그 기름을 자기 부리로 온 몸에 바르기 때문에 아무리 더러운 곳에 살아도, 더러운 오물이 몸에 묻지 않는다고 한다. 순결함은 날개에 기름을 바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련하다. 그런데 우리가 이 땅에서 순결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성령의 은혜, 하나님의 도우심이다. 하나님이 도우심으로 우리는 이 땅에서 순결함을 유지해야 한다.
또 하나는 뱀처럼 지혜롭게 살라는 것이다. 인간 아담과 하와를 무너트린 것은 누구인가? 바로 뱀이다. 뱀의 지혜가 아담과 하와를 무너트렸다. 여기서 뱀의 사악함이 아니라 뱀의 지혜를 배우라는 말씀이다. 지혜는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힘의 지혜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능력을 키우라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다. 화제가 된 영화 “부러진 화살”에서 석궁을 쏜 교수가 감옥에서 육법전서를 가지고 공부를 하여 재판관이나 검사를 꼼짝 못하게 하는 내용이 나온다. 내가 실력이 있으면, 내가 능력이 있으면 그게 법이 되는 것이다. 또 하나는 뱀의 지혜는 부드러움의 지혜이다. 우리는 뱀의 지혜를 생각할 때에 힘의 지혜가 아니라 부드러움의 지혜라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뱀은 아담과 하와를 공격하지 않았다. 힘으로 그들을 설득하지 않았다. 대신에 부드러움으로 아담과 하와를 설득한다. 이것이 바로 뱀처럼 지혜로운 것이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는 말세가 되면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한 일들이 점점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개념 없이 사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게 된다고 하였다.
오늘 1절에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라고 하였다. 이것을 표준 새번역에서는 “말세에 어려운 때가 올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이 이렇게 개념 없이 살아갈 것이라는 것이다.
개념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1) 자기를 사랑하는 자, 2) 돈을 사랑하는 자, 3) 자랑하는 자, 4) 교만한 자, 5) 비방 하는 자, 6) 부모를 거역하는 자, 7) 감사하지 아니하는 자, 8) 거룩하지 아니한 자, 9) 무정한 자, 10) 원통함을 풀지 아니한 자, 11) 모함하는 자, 12) 절제하지 못하는 자, 13) 사나운 자, 14)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는 자, 15) 배신하는 자, 16) 조급한 자, 17) 자만한 자, 18) 쾌락을 사랑하는 자 등 이런 사람을 오늘 본문의 5절에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라고 하였다. 이것은 세상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조차도 이런 개념 없는 일들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의 말씀이다.
오늘날의 우리 그리스도인이 혹여나 경건의 모양 즉 병원에서 찬양하고 기도하고, 길거리에서 열심히 전도하고, 교회 봉사하는 것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 즉 하나님에 대한 신뢰, 하나님이 가진 십자가의 사랑은 부인하는 우리가 아닌가 돌아보아야 한다.
그런데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능력을 부인 하는 자들이 어떤 자들인가? 바로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런 자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우리는 경건의 능력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경건의 모양은 무엇이고 경건의 능력은 무엇인가?
경건의 모양은 아마도 눈에 보이는 종교생활일 것이다. 기도하고, 찬송 부르고, 교회에 출석하고, 봉사하는 모든 것이 아마도 경건의 모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도 모르게 경건의 모양이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정말 우리의 경건의 모양이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가? 나는 이러한 경건의 모양만 있는 그리스도인을 개념 없는 그리스도인라고 부르고 싶다.<다음호에 계속>
송상구 목사(시드니예일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