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말씀
거룩한 싸움을 하라(3) 딤전 6:11-12
피해야 할 것이 있지만 또 우리가 따라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라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좋은 말씀인가요? 정의, 경건함, 믿음, 사랑, 인내, 온유를 따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이 다 좋은데 다 추상적인 것처럼 들립니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무슨 말씀인가? 예수그리스도의 성품을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성경본문에서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성품을 따르는 것을 무섭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하였습니다. 싸우기는 싸우는 데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하라는 것입니다. 옆 사람이 잘되는 것을 보고 질투하면서 싸우지 말고, 말 실수 한 것을 가지고 싸우지 말고 사소한 것 가지고 싸우지 말고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하였습니다.
강철왕 카네기(Andrew Carnegie)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카네기는 직원 채용시험에서 단단히 포장된 물건의 끈을 푸는 문제를 냈습니다. 유력한 후보 가운데 한 사람은 아주 꼼꼼히 묶힌 끈을 풀었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은 몇 번을 풀더니 안되겠다 싶어서 가위로 끈을 잘랐습니다. 시험이 끝난 뒤 카네기는 포장된 끈을 손으로 차근차근 꼼꼼하게 푼 사람은 불합격시키고, 고정 관념을 깨고 생각을 바꿔 칼로 단번에 잘라 낸 사람들을 합격시켰다고 합니다. 카네기는 무엇을 본 것인가요? 물건의 포장의 끈을 본 것이 아니라 포장 안에 있는 물건을 본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것 가지고 싸우느냐면 포장된 끈을 왜 이렇게 늦게 푸느냐고 부부싸움을 합니다, 아이들에게 왜 그것도 못 푸느냐고 구박을 하고 화를 냅니다. 그런데 끈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끈은 어떻게 풀어도 괜찮습니다. 포장된 물건에 시선을 맞추어야 합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은 끈 가지고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선한싸움, 거룩한 싸움은 대체 어떤 싸움인가요? “나 자신과 싸우는 싸움입니다.”우리의 가장 큰 적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각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매 순간 하나님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충돌합니다. 그때에 우리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하는가? 대체적으로 내가 원하는 선택을 합니다. 여러분의 가장 큰 적은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우리가 변화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가 변화되지 않고 그냥 현상유지를 하고 있는 이유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우리 교회 같은 교회가 어디에 있어! 나 같은 남편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나 같은 부모가 어디에 있냐?”라고 하는 착각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 오늘부터 자신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해보십시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고,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변화를 시도해보십시오.
이것을 오늘 성경에서는 싸움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자신과의 싸움! 이것이 바로 진정 싸워야 할 거룩한 싸움입니다.
장자 <달생>편에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왕이 투계를 몹시 좋아하여 당시 최고의 투계 사육사였던 기성자란 사람에게 최고의 싸움닭을 구해 최고의 투계로 만들기 위한 훈련을 맡겼습니다. 맡긴 지 십 일이 지나고 나서 왕이 기성자에게 물었습니다. “닭이 싸우기에 충분한가?” 기성자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아닙니다. 아직 멀었습니다. 닭이 강하긴 하나 교만하여 아직 자신이 최고인줄 알고 있습니다. 그 교만을 떨치지 않는 한 최고의 투계라 할 수 없습니다.” 십 일이 지나 왕이 또 물었을 때 기성자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아직 멀었습니다. 교만함은 버렸으나 상대방의 소리와 그림자에도 너무 쉽게 반응합니다. 태산처럼 움직이지 않는 진중함이 있어야 최고라 할 수 있습니다.” 십 일이 지나 왕이 또 묻자 그는 “아직 멀었습니다. 조급함을 버렸으나 상대방을 노려보는 눈초리가 너무 공격적입니다. 그 공격적인 눈초리를 버려야 합니다.” 십 일이 지나고 왕이 또 묻자 기성자는 대답하였습니다. “이제 된 것 같습니다. 이제 상대방이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아무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이제 완전히 마음의 평정을 찾았습니다. 나무와 같은 목계(木鷄)가 되었습니다. 닭의 덕이 완전해졌기에 어느 닭이라도 그 모습만 봐도 도망갈 것입니다.”
장자가 이 이야기에서 최고의 투계는 어떤 투계인가를 말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목계’라고 하였습니다. 사소한 것에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잃어버리지 않고 있는 투계입니다.
최고의 목계가 되는 데는 세 가지 조건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째, 자신이 제일이라는 교만함을 버리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였다. 항상 자신이 최고라고 하는 교만, 나는 분명히 옳다라고 주장하는 의, 왜 다른 사람들은 나와 같지 않을까라고 하는 교만함을 버려야 합니다. 자신이 조금 깨우치면 자신만이 깨우쳤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섬기고 봉사하면 자신만이 그렇게 하고 남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아직 멀었습니다. 그것은 교만입니다.
둘째, 남의 소리와 위협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나의 소리에 민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툭 던진 말에 상처 받아 며칠간 잠을 못 이룹니다. 상대방은 아무생각 없이 던진 말에 고민을 하고 또 고민을 하면서 분노했다가, 용서했다가 심지어는 죽였다가 살렸다가를 반복합니다. 물론 사람들의 말을 너무 무시해서도 안되지만 그것에 민감하게 반응을 하는 것은 자신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못 들은 척 넘어가야 하고 무시해야 할 때가 아주 많이 있습니다.
셋째, 상대방을 품을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미워하는 사람은 쳐다보지도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도 섞지 않습니다. 얼마나 불편한가요? 그러나 아무리 불편한 관계라고 할지라도 웃을 수 있고 인사할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을 사랑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지는 못하더라도 그 사람을 그 자체로 볼 수 있는 마음과 생각을 가질 때에 진정한 목계가 될 수 있습니다.<다음호에 계속>
송상구 목사(시드니예일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