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말씀
낮은 자리로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 2)
영국의 등반가 조지 말로리 (George Mallory)는 1920년대 에베레스트를 정복하기 위하여 도전했던 등반가로 유명합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90여 년 전, 지금과 같이 과학적인 지식이나 현대적인 장비가 없이 에베레스트를 정복하기 위하여 세 번이나 도전했던 그는 3차 에베레스트 등반에서 안타깝게도 정상 정복을 성공하지 못한 채 실종되었습니다. 그는 생전에 “왜 에베레스트에 오르느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산이 거기 있어서.”라고 명언을 남긴 사람으로도 유명한 사람입니다.
조지 말로리는 비록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도전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악조건 속에서도 감행한 3차에 걸친 에베레스트 정상을 향한 도전은 그 후에 도전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에베레스트 산을 등정할 때 필요한 실제적인 정보들을 많이 제공하였던 것입니다. 그동안 조지 말로리가 개척한 등정로가 있었을 것이고, 그가 겪었던 에베레스트 산에서의 경험과 지식들은 그 후에 등반가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런 기초자료들을 바탕으로 현대적 장비의 발달과 더불어 에베레스트 산은 정복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조지 말로리는 비록 그 자신은 에베레스트의 정상을 정복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죽음을 불사한 도전은 후대 사람들이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하는 데 필요한 용기와 기초자료 면에서 큰 밑거름이 되었던 것입니다.
상식적으로도 조지 말로리가 올라갔던 곳 까지는 비교적 손쉽게 올라갈 수 있었을 것이고, 그곳에서 정상에 오르는 코스는 다른 등반가에 의하여 개척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오늘날과 같이 최신 장비를 갖춘 프로 등반가들이라면 정상에 오르는 일이 전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은 에베레스트 산을 오르려고 계획을 하는 사람들의 조건은 조지 말로리의 조건과는 많이 다릅니다. 이미 정상에 오른 사람들이 제공하는 정보들로 위험한 코스와 기상변화에 대한 대책, 각종 최신 등산장비들 그리고 통신기기의 발달로 위급한 상황에서 구출될 수 있는 유리한 조건하에 정상을 향하여 출발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정상정복의 성공률도 높아진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달성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을 때는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길을 잃고 헤매게 되며, 시행착오를 겪게 됩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우리가 달성하고자 하는 일을 이미 이루고 그 목표에 도달하기까지의 청사진을 우리에게 보여준다면, 우리는 자신감을 가지고, 어려움에 봉착하더라도 앞으로 성취하게 될 성과에 위안을 삼으며 그 목표까지 전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 즉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인생의 목표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입니까?” 라는 이 질문에 대하여 “구원이고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라고 우리는 분명히 대답하여야 하겠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서 돈을 많이 벌어서 남들에게 자랑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고 가정합시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정말로 사람들에게 자랑할 만 한 돈을 주자마자 “지금 바로 죽어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우매한 자 외에는 그렇게 하겠다고 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눅 12:20)
그렇습니다. 재물, 권력, 명예 등 세상의 목표들은 잠시 우리 곁에 있을 수는 있지만, 그것은 우리가 영원히 소유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인생의 목표를 구원과 영생에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진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성경을 통하여 끊임없이 말씀하고 계신 주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셨다는 것을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목표에 우리의 목표를 맞추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요? 예를 들자면, 어떤 사람이 달콤한 사탕을 만들려고 했는데, 그 사탕이 달콤하지 않고 쓴 맛이 난다면, 그 사탕을 만든 사람이 그 사탕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연히 그 쓴 사탕을 쓰레기통에 버릴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의 궁극적 목표, 최종의 목표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고자 하시는 우리의 구원과 영생에 맞추어져야 합니다. 즉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인생에서 경험하게 되는 여러 가지 사건들은 바로 구원과 영생으로 이어지는(가는 길에) 징검다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위에서 이야기한 조지 말로리라는 등반가가 에베레스트 산에 계속 도전했던 이유가 “거기 산이 있어서”라고 대답했던 것처럼, 우리들도 세상을 헤치며 계속 살아가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거기 구원과 영생이 있어서”라고 답변해야 하는 것입니다.
초기에 에베레스트를 정복에 도전했던 사람들 때문에 후에 등반가들이 에베레스트를 정복할 수 있다고 자신감을 가지고 도전하게 되었고 선배들이 작성한 지도와 정보로 그 이후에는 에베레스트 산도 정복될 수 있는 산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앞서 가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이기시고 결국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도 결국은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과 영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보고 끝까지 잘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우리들이 표준삼아야 할 우리의 인생의 모습은 예수님의 생애라는 것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 12: 2)
예수님께서는 고통과 조롱과 죽음의 두려움으로 상징되는 십자가의 고난을 통과하신 후에,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생애를 통하여 우리에게 제시하시는 우리들이 살아야 할 삶의 표준 청사진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생애는 우리 성도들의 본이 되는 것인데, 그 예수님의 생애에는 여러 가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삶의 모습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가 예수님께서는 낮은 자리로 임하셨다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낮은 자리로 오신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로서, 땅과 하늘의 모든 권세를 받으실 상속자로서, 이 세상 왕들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화려한 궁전에서 태어나지 않으시고, 동물들이 밤을 지내는 헛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은 그 당시 중한 죄인들에게 내려지는 십자가형을 언도받으셨을 때, 그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행할 수 있는 권능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말씀으로 바람을 잠잠하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물위를 걷게 하시고 먹을 것을 마구 만드실 수 있는 그 권능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십자가를 지시고, 그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것이 이 땅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삶의 시작과 끝이었습니다. 곧 낮은 자리로 임하셨다가, 철저히 낮추신 모습으로 돌아가셨던 것입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들이 살아가는 목적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구원과 영생을 얻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려면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예수님의 삶을 좇아 사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태어나심과 그 분의 마지막을 보며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인생의 궁극적 목표인 구원과 영생을 향한 첫 걸음은 우리자신을 스스로 낮추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심하게 꾸짖으셨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의 삶을 본받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삼가라고 가르치십니다. 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삼가라고 하셨는가 하니, 그들은 율법을 입으로는 줄줄 외우나, 그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이기 때문이라고 제자들에게 설명하십니다. 지금 시대로 이야기하자면, 성령으로 거듭 태어나지 않고 각종 지식만 머리에 가득한 종교지도자, 지식인, 권력자들을 일컫는다고 보면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현실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 23:3-7)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6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무슨 일을 하는데 말만 하고 실제 행동에 나서지 않고, 무엇을 하든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 일을 한다는 뜻입니다. 즉 자신은 보통사람들과 다르다는 생각이 항상 그들 마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상석에 앉으려고 하고, 사람들에게 먼저 고개 숙이지 않고, 상대방이 자신에게 인사하기를 기다리면서, 자기들은 사람들을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내용이 무엇을 표현하고 있습니까? 하나같이 자기는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사람이라는 교만함과 사람들로부터 높임을 받고 싶어 하는 욕심으로 가득 찬 악한 성품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성품을 지녀서는 안 된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런 교훈을 실제로 보여주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태어나실 때부터 낮은 곳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후세 사람들이 예수님께서는 화려하고 남들보다 뛰어난 곳에서 탄생하셨다는 말을 못하도록,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결코 자랑할 만한 곳에서 태어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잉태하여 태어나신 예수님께서는 출산의 비밀을 공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다윗의 자손으로 자랑스럽게 공개적으로 임신사실을 알리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축복도 받으실 수 없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 세상의 자랑거리를 배경으로 태어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의 탄생은 하늘에 왕의 별이 나타남으로 징조를 보여주었으며, 천사들이 친히 그의 탄생을 알리고 찬양하였습니다. 그리고 동방에서 박사들이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에게 드리는 예물을 들고 와서 경배하였습니다. 낮은 자리로 임하셨지만, 이 세상의 누구도 받을 수 없는 영광에 싸여 경배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보통 사람들보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셨지만, 예수님의 영혼이 육체를 떠날 즈음에는, 하늘이 온통 어두워지고, 예수님께서 돌아가시자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이 열리고 자던 성도들의 몸이 많이 일어났으며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갈라지는 등 사람들이 두려워 할 정도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위엄을 나타내시며 하나님으로부터 영화롭게 하심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심으로 세상에서는 결코 줄 수 없는 하늘의 영광을 받아 누리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철저히 낮출 때, 겸손해질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분의 영광을 우리를 통하여 나타내실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마 23:12)
자신을 낮춘 탕자의 이야기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야기 중에서 여러분도 잘 아시는 집을 나갔다가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아들은 아버지가 물려줄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해서 아버지의 근심을 아랑곳하지 않고 집을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유산을 탕진하고 먹을 것이 없어 죽을 지경이 되자 집으로 돌아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가 집에 돌아와서 아버지께 고백한 내용은 이렇습니다.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눅 15:18-19, 15:21)
그 아들은 집을 나갈 때는 자신에게 아직은 해당되지 않는, 즉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을 때, 유산을 챙겨 세상에 나가 남들에게 자랑하며 살려하였지만, 그런 그를 세상은 시험하고 실족하게 하여 빈털터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런 그가 이제는 자존심을 버리고 철저히 낮아진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그러자 집에서 기다리던 아버지는 그렇게 자신을 낮춘 그 아들에게 종을 시켜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주어 그 아들을 높여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무르익기 전에 하나님의 유업을 받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세상에 떠벌리고 자랑하는 것을 경계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진정으로 낮추었을 때, 우리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우리 신분을 종의 신분으로 낮추었을 때 비로소 그 분의 자녀로 회복시키시고 높여주신다는 진리를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격인 삼위일체 중에 한분이십니다. 그분은 이 땅에서 죽은 자를 살리는 등 창조주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이적을 행하심으로, 그리고 부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심으로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분은 이 땅에 오실 때도, 그리고 이 땅에서 활동하시는 기간에도 섬김을 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 20:26-28)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렇게 섬기며 사셨고, 심지어는 죄인들을 위하여 대신 죽기까지 하셨는데, 우리들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의 모습이 아닌, 상대방과 비교하여 우월감을 과시하려고 하고, 더 높은 자리에 앉으려하고, 더 큰 사람이 되려고 한다면 그런 삶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성도의 결단
우리들은 이상의 말씀 속에서 분명히 깨닫는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 자신이 낮아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탄생에서부터 그 예수님의 모든 생애를 통하여 보여주셨던 인생의 지침을 보면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으로부터 꾸중을 들었던 것처럼, 우리가 남보다 우위에 서서 자신을 내세우려고 또 자랑하려고 무엇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와는 달리, 돌아온 탕자가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본인이 낮아져야 함을 깨닫고 스스로 낮추는 사람이 되었을 때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들을 그분의 영광으로 높여주신다는 것을 오늘 말씀은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저와 여러분은 일상에서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 그 분을 닮는 삶을 살도록 목숨을 건 노력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종의 신분으로 낮추고 하나님의 뜻에 절대 복종하면서 죽도록 충성해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것을 실천해야 하는 것을 또한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성도님들은 그렇게 낮은 자로 살기로 결단하고 실천하셔서, 하늘아버지께서 입혀주시는 새 옷을 입고 상속자로 높임을 받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손창건 전도자(시드니가정공동체교회 시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