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말씀
빛으로 나오라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요 8:10-11)
오늘 본문의 내용은 여러분도 잘 아시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예수님께서 용서하신 사건에 대한 것입니다. 이 사건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난을 당하시기 약 6개월을 앞둔 시기(수전절, 겨울)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시던 때였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 제사장, 그리고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미워하여 어떻게 하든 종교재판으로 몰아 죽이려고 갖은 모략을 하고 있을 때이기도 하였습니다. 이 사건이 있던 날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저쪽에서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한 여인을 끌고 나타났습니다. 그 여인은 얼굴을 들지 못한 채 그들의 손에 이끌려 예수님 앞에 세워졌습니다.
여인을 끌고 온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이렇게 말을 합니다.
“이 여인은 간음하는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이니, 율법에 의하여 돌로 쳐 죽이려는데, 예수 당신의 생각은 어떻습니까?”라고 말입니다.
이들이 예수께로 와서 이 질문을 하는 이유는 예수님으로부터 신성모독의 죄를 대중 앞에서 보여 그 증거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즉 그 당시 유대인인 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위험인물로 지목하고 죽이려고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사형시킬 제일 확실한 죄목은 바로 신성모독죄이었고, 예수님께서 대중과 바리새인, 서기관들 앞에서 본인의 입으로 “율법대로 하라.”고 하여 율법아래 묶으든지, 아니면 율법을 위반한 죄에 대하여 “죄를 사하여 주겠다.”라고 하나님의 권한에 도전하는 말을 하게끔 하여 신성모독죄를 공론화 하려는 속셈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요 8:6).
그러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다 알고 계시는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속셈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어떻게 그들은 간음한 여인을 찾아 그들이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 즉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를 맞추어 그 여인을 끌어 올 수 있었을까? 가능하다고 상상할 수 있는 경우는 그 여인은 원래 행실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그들의 하수인을 시켜서 계속 감시하다가 그 여인의 간음현장을 덮쳐서 잡아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또 다르게는 어떤 남자를 내세워 그 여인을 유혹하게 하여 그 시간에 약조를 하고 그 여인을 몰래 만나게 한 뒤 그 현장을 지켜보다가 잡아 왔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가 아니고, 우연히 사건을 보게 된 경우라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어떻게 그렇게 빨리 소집하여 그 시간에 같이 몰려 왔을까? 상식적으로 그 여인의 간음현장을 우연히 여러명이 그것도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보았다고는 여전히 납득하기 힘든 상황인 것입니다. 즉 그들은 계획적으로 이 사건을 준비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이런 음모를 이미 아신 예수께서는 “율법대로 하라, 마라.”는 대답은 하지 않으시고,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습니다. 즉 율법을 내세워 어떻게 하는가 보려는 그들에게 “너희는 율법을 들먹여 누구를 죄가 있다 없다 판정할 자격도 없다.”는 반응을 보이셨던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땅에 무엇을 쓰셨을까?
아마도 십계명을 쓰고 계시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1. 너는 내 앞에서 나 외에 아무것도 신으로 섬기지 말라.
2. 너는 너를 위해 어떤 우상이든 만들지 말라.
3. 네 하나님 여호와(야웨)의 이름을 망령되어 일컫지 말라.
4. 안식일을 기억하여 이를 거룩히 지켜라.
5. 네 부모를 공경하라.
6. 살인하지 말라.
7. 간음하지 말라.
8. 도적질하지 말라.
9.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
10. 네 이웃의 집(소유)을 탐내지 말라.
어떤 내용이었든지 간에 그 내용은 율법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내용이었을 것이고, 그 쓰신 내용을 그들이 보고 깨달아 적절한 행동을 취하기를 바라는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쓰신 내용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또한 자신들의 죄를 예수님께서 다 알고 계시는 줄을 전혀 모르고, 그래도 자신들은 경건한 사람들이라고 자신하며, “저 죄인을 죽이자.”고 계속 아우성 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시고는 다시 몸을 굽히셔서 땅에 무언가 쓰시기 시작합니다. 이 때 쓰신 내용은 아마도 율법의 세부조항 중에 그곳에 모인 그들에게 해당되는 죄목들을 자세하게 정리하여 쓰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어쨌든,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무언가 땅에 쓰시기 시작하자, 살기 등등하여 아우성을 치던 그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들로부터 나이 순으로 젊은이까지 슬그머니 그 자리를 떠나갔습니다. 대개의 경우 나이가 많을수록 세상에서 지은 죄가 많은 까닭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숨겨진 죄가 드러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었습니다. 율법만을 내세워 예수님을 고소할 조건을 얻으려고 한 여인을 죽이자고 음모하고 선동하였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리고 그들에게 동조한 그 현장에 있었던 백성들은 타인의 죄를 정죄하려는 자신들이 예수님께서 적어내려가시는 죄목에 비추어 그들 자신도 이 여인과 별로 다르지 않은 죄인임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다 떠나갈 때까지 일어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앞을 떠난 그들은 안타깝게도 예수님께 자신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부르짖지도 않았습니다. 여전히 그들은 그들의 죄를 숨기고 생명의 주이신 예수님께 나아오지 않고, 예수님께로부터 멀어져 갔습니다.
그들을 쳐다보지 않으셨던 예수님께서는 그들 중 단 한 명이라도 “내 죄를 용서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어오기를 바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여인을 정죄하려다가 그들의 죄가 대중 앞에 들어나는 것이 두려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구경꾼들은 다 그들의 죄를 숨기고 예수님으로부터 돌아서서 멀어져 갔습니다.
생명의 주이신 예수님께로 향하지 않고, 빛 가운데로 나오지 않고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감출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두움 속으로 다시 돌아 갔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죄를 고백하지 않은,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빛으로 나온 죄인
집을 나간 탕자를 떠나 보냈던 탕자의 아버지처럼,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백성들이 떠난 것에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 앞에는 이제 단 한 명, 간음하다 붙잡혀 온 여인만이 남아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군중들과 함께 도망갈 수도 있었으나, 예수님께서 쳐다보아 주실 때까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추측하건대 얼굴을 들고 살수 없을 정도로 부끄럽고, 씻을 수 없는 자신이 저지른 죄가 저주스러워 죽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그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그러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그들은 너를 정죄할 권한이 없다. 나는 너를 정죄할 수 있는 권한은 있지만 정죄하지 않겠다. 즉 “그들은 너를 정죄하지 못한다”, 그리고 “나는 정죄하지 않겠다”의 분명한 차이를 말씀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 뜻은 “우리 인간은 서로를 정죄할 자격이 없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정죄할 수 있다”라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하여 삼위일체 하나님 한 분만이 인간의 죄를 사하여 줄 권한이 있다는 것과 우리들은 서로 용서해야 한다는 진리를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정죄하실 수 있는 예수님’앞에서 죄를 인정하고 떠나지 않았던 여인의 태도입니다. 그 여인은 죄를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예수님 앞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지금 자기 앞에 계신 이 분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자기를 죽음의 위기에서 건져내 주신 이 예수님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예수님만이 자신의 생명을 보전해 주실 분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여인에게는 이 예수라는 분이 자기 생명의 주인이시며, 현재 자신을 뒤덮고 있던 어둠을 뚫고 비추는 한 줄기 빛이었습니다. 그 여인은 이렇게 온 세상이 캄캄하여 갈 곳이 없는 것 같은 상황에서 예수님 한 분만을 의지하여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며 그 곳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 앞에 서있던 그 여인의 모습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었지만 죽음에서 건져내주신 예수님을 끝까지 믿고, 생명의 빛으로 나온 성도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회개하여 용서받는 성도
예수님 앞에 있는 이 여인은 죄를 지었습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그 죄를 묵인하시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나 이 여인의 경우 그 죄에 대하여 영원한 멸망의 형벌은 내리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이 경우는 다윗의 경우와 흡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회개하는 다윗을 하나님께서는 징계는 하셨지만, 용서해 주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대답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삼하 12:13).
그것은 정죄를 받아 형벌로 죽음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징계를 통하여 새로운 삶을 보장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가 있어도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지 않고 있으면, 그것은 형벌로 이어집니다. 즉 회개하지 않고는 영원한 형벌을 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은 죄는 빛되시는 예수님 앞으로 나와 회개함으로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지금 이 여인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 회개하는 성도, 용서받는 성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떠나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율법을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삼을 뿐 율법에 비추어진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가 예수님께서 일깨워 주심으로 깨닫게 된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예수님께 의지하여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지금 이 시대에 넘쳐나는 회개하지 않은 성직자, 자칭 기독교인, 지식인, 세상의 권력자들 또는 집단적 우월주위에 빠진 기독종교단체 등 기득권 자들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
율법을 내세운 바리새인과 서기관 그리고 그 군중들은 이 여인을 율법으로 정죄하여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예수님을 율법아래 가두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율법의 완성이 아님을 예수님께서는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경륜도 아니며,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도 아닌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한 사람의 죽음이 율법에 준한 경고는 될수 있겠지만, 그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이루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율법은 죄를 인식하게 하고 경고하는 역할일 뿐이므로, 율법으로 모든 죄를 종결 지으려는 했던 것은 하나님의 경륜, 사랑을 그들이 아직 몰랐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하게함으로써 그 죄를 용서해 주시려는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사역을 하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율법의 연장선 상에서 율법을 완성하시러 오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율법의 구약시대가 죄를 깨닫게 하는 구속사역의 전반부라면, 예수님의 구속사역의 신약시대는 율법을 완성하는 구속사역의 후반부 또는 종결부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율법을 완성하는 주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르게 이야기 하자면, 하나님의 사랑이 만유에 충만하게 되는 것이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극진한 사랑은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쓰셔서, 인간의 죄로 인하여 막혔던 하나님과의 교제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는 것으로 나타났음을 성경은 아래와 같이 전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8)
성도의 결단
오늘 본문에 등장한 죄지은 여인은 빛으로 인도하시는 예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회개의 다리를 건너 하나님께로 향했던 것입니다. 그 길은 생명의 길이었습니다. 어두움 속에 숨어 죄를 드러내지 않고 영원한 형벌로 가는 길이 아닌, 밝은 빛 가운데 죄를 드러내어 징계를 받게되어 힘들더라도 영원한 생명의 길, 좁은 길, 협착한 길, 사람들이 많이 가지 않는 길로 향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그곳에 있던 백성들도 그 여인과 마찬가지로 생명의 길로 향할 기회가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회개하지 않음으로 그 기회를 외면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빛으로 오신 예수님 앞에 내 놓고, 끝까지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던 그 여인은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으로 용서를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죄가 드러나는 것은 누구나 두렵고,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예수님만 바라보며, 예수님 앞에 죄를 숨기지 않고 고백하는 것만이 용서받고 구원에 이르는 길임을 오늘 본문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저와 여러분은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지 않고 예수님을 등지고 멀어진 바리새인과 서기관 그리고 그들에게 동조한 백성들처럼 회개의 기회를 잃지 말아야 겠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죄가 드러나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끝까지 예수님만 향하여 서 있던 이 여인처럼, 우리의 죄를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 앞으로 나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은혜를 받아 영생의 면류관을 받아 쓰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손창건 전도자(시드니가정공동체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