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말씀
선교적 교회(3) 롬 12:18
오늘 본문에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고 하였습니다. 한국교회가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려고 하였는가?
지금까지 전도, 선교라고 하면 무조건 예수천당 불신지옥의 개념으로 교회에 나와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강요 하다시피 하는 전도를 가르치고 해왔습니다. 그래서 매일 길거리 전도를 하고, 총동원 주일을 해서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물론 지금도 이렇게 전도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어느 교회에서는 자기네 교회에 이쁜 자매들이 많다고 남자청년들을 전도하는 교회도 있다고 하고, 심지어는 예배에 참석하면 5000원을 준다고 하는 교회도 있다고 합니다.
전도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죽이면서까지 전도하고 선교를 해왔던 식민지 선교, 그리고 그 나라의 문화적인 배경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문화를 이식하려고 했던 식민지선교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 기독교가,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이웃에 대했던 무례함을 뒤돌아보고 새로운 기독교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전개하려고 하는 노력이 신학에서도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공공신학이라고 하기도 하고 교회론은 선교적 교회론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선교적 교회론이란 무엇인가요? 뉴 비긴이라는 신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가 초청(Come)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위한 조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세상으로 나가기(Go) 원하는 사람들의 전람회(exhibition)가 되어야 한다” 이 말은 교회는 교회 안에 안주하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다. 하나님에게 Go가 없는 Come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선교적 교회론의 핵심입니다.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 즉 선교가 본질입니다. 그런데 이 선교를 어떻게 할 것인냐를 고민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선교적 교회론은 교회가 얼마나 선교사를 파송했느냐 아니면 선교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느냐 아니면 얼마나 많은 예산을 선교사에게 파송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교회의 주된 멤버 즉 교인들의 주된 관심이 어디에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선교적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요?
첫째는 교회자체가 선교적인 공동체입니다. 지금까지 교회는 교회중심의 공동체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지역사회나 이웃과의 소통이나 관계를 갖지 않고 독자적인 위치를 가지고 존재해왔습니다. 그러나 선교적 교회는 교회가 지역과 함께 하는 선교적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기존의 교회중심의 선교는 교회가 없는 곳에 교회를 세우는 것인 선교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성장을 하면 그 교회가 선교를 잘한다고 착각을 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 선교는 예수 믿으세요, 전도지를 나누어주는 전도가 아니라 이 지역에, 교회가 서 있는 그 곳에서 교회자체가 선교이어야 합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교회를 보면 참 교회가 좋다! 교회가 이 지역에 있어서 좋다라고 이웃에게 들려져야만 그 교회가 선교적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지역주민들이 무엇이라고 해도 교회를 크게 건축하고 북치고 장구치면서 선교해서 성장만 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다시 적용해보면 예전에 아버지는 열심히 돈만 벌어오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아내와 아이들이 상처를 받는지 말든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가장 가까이 있는 아내와 자녀들에게 사랑받는 것이 가장 중요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 오는 분들, 우리 교회를 지나가는 분들, 우리 교회에 잠시 들렸다 가는 분들에게 잘해야 합니다. 그리고 스님들한테도 잘해주고, 타 종교인들에게도 잘해주어야 합니다, 이단들에게도 잘해주세요. 그러나 논쟁하거나 다투려고 하지 말고 친절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누가 승자인가? 친절을 베푸는 사람이 최후의 믿음의 사람입니다. 우리 교회들은 이단들이 들어와서 이런 생각을 하게 해야 합니다. “이 교회를 파괴시켜야지라는 마음을 가지고 처음에 들어왔다가 교회에 다니면서 이런 교회라면 정말 옮기고 싶다”라는 마음을 가지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선교적 교회입니다.
둘째는 교인이 선교적인 삶을 살아가는 교회입니다. 개인적으로 오늘날에 전도대, 전도지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전도대, 전도지는 마케팅입니다. 전도는 마케팅을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저는 1%의 변화를 강조합니다. 우리 교회가 1%변하고 내가 1%의 변화만 되어 진다면 전도 안 해도 내 주변의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나의 삶이, 나의 모든 언어가, 나의 행동이 바로 전도지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교적인 삶입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 나는 어떤 이미지인가요? 어떤 향기를 그 사람에게 품고 있는가를 물어보아야 합니다. 내가 만나는 곳에서, 내가 일하는 곳에서 손님을 주님 대하듯이, 목사님 대하듯이 하면 무엇인가 달라지지 않을까라고 생각해봅니다. 이것이 바로 선교적인 삶입니다. 그런데 나도 말은 이렇게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교회에 와서 무례하고 막말하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셋째는 교회 밖의 세상을 포용하고 긍휼히 여기는 교회입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세상과 대립구조로 보았습니0다. 그래서 교회에 오면 거룩한 것이고 세상에 나가면 세속적이라고 보았습니다. 교회는 구원의 방주이고 세상은 죄로 가득 찬 곳이라고 배워왔습니다. 더구나 영적전쟁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더욱 더 고착되었습니다.
이런 이분법적인 의식을 강하게 가지면 가질수록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 타종교인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기가 어렵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이제 교회가 세상을 품어야 합니다. 물론 세상을 품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어렵습니다. 아프기도 하고 이해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을 품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자신을 믿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십자가에 돌아가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자신을 믿는 제자들과 함께 공동체 들어가서 살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세상을 안고 돌아가셨습니다.
한국교회는 구원론을 강조합니다. 특히 종말에 개인이 구원받는 개인적 구원론에 목숨을 건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나 자신만의 구원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어디를 사랑하셨는가요? 그렇게 미워하는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교적 교회의 핵심입니다.
세상을 미워하지 마라, 안 믿는 남편을, 아내를, 안 믿는 이웃을 미워하지 마라.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사건은 온 인류가 화평하고 화목하게 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오늘 본문을 읽어드립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송상구 목사(시드니예일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