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말씀
희망을 주는 교회(1) 행 8:4-8
실천신학대학원의 정재형교수가 ‘가나안교회’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 쓴 글을 읽어 본적이 있습니다. 이 글에서 오늘날의 사회를 지금까지 지배해왔던 절대 진리, 보편법칙이라고 하는 것이 무너졌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면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서 이전에는 결혼을 하는 것이 절대 진리였고 보편법칙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누구도 이것이 절대 진리라고 말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혼자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이죠. 우리는 학교는 꼭 다녀야 하는 것이 보편법칙이고 절대 진리처럼 알았습니다만 그런데 많은 부모들은 학교대신에 기술을 배우는 것을 격려하고 그 방향으로 가게 하는 부모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이전에는 명문대학에 가는 것이 능사라고 생각했지만 요즈음은 자기가 좋아하고, 자기가 잘하는 것이라고 하면 굳이 대학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부모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인 현상을 “포스트모던”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탈현대 사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종교성도 바뀌게 되고, 탈현대 시대의 사람들은 종교의 의식, 규율은 따르지 않으면서도 개인적인 신앙생활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는데 이것이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게 됩니다.
첫째는“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는 않은(spiritual but not religious)” 특성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영적인 것을 사모합니다. 종교를 가지고 있든 가지고 있지 않든 영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요가, 아니면 명상 같은 것에 사람들이 몰리는 것도 이러한 현상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적인 세계에 대하여 관심이 많지만 이것이 종교적인 틀 쉽게 말하면 기독교의 영성이나, 천주교의 수도원 아니면 불가의 명상 같은 것과는 다르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영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많지만 종교에서 말하는 영적인 것과는 다르고 싶은 것입니다.
둘째는“믿기는 하지만 소속되기는 원하지 않는(believing but not belonging)” 특성입니다. 포스트모던 사회는 자신이 어떤 공동체에 구속되는 것을 불편해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공동체에 가입하여 구속되는 것은 싫어하고 거부하는 것입니다. 사실 한국교회가 지금 실수하고 있는 것이 교회에 한두 번 오는 사람을 등록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을 교회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내쫓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죠, 특히 젊은 세대는 교회에 편하게 와서 예배하고 싶어 하고 그리고 감동이 오거나 때가 되면 그때에 등록해서 신앙생활을 하기를 원하는 데 오늘날 교회는 마음이 급하다 보니 등록을 시켜야 마음이 편하게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개인주의화 경향은 교회 없는 기독교인들을 만들어냅니다. 분명히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고백하지만 그들이 섬기는 교회가 없습니다. 그러다가도 어느 순간에 교회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어떤 필요에 의하여 등록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추천서가 필요하여 교회에 등록을 한다든지, 아니면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서 미리 교회를 등록해놓고 다니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필요가 생기기전까지는 자유롭게 교회를 다니는 그리스도인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현상입니다.
신학교 다닐 때에 가끔 전도사님들이 모여서 우스개 소리를 합니다. 수요일에 교회에 다녀왔느냐고 하면 몇 명의 전도사들이 가나안교회를 다녀왔다고 합니다. 이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교회에 출석은 하지만 어느 교회를 정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향해 가듯이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면서 예배하는 그리스도인을 가나안교인이라고 말을 합니다. 또 하나는 ‘가나안’이라는 말을 거꾸로 읽으면 ‘안나가’인 것과 같이 교회를 나가지 않는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분명히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교인을 가나안교인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주위의 그리스도인 중에도 가나안교인이 얼마나 많습니까? 집사이면서도 일 년에 한 번도 교회에 안 나온 가나안교회 집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를 잘 다니던 이들이 무엇 때문에 가나안 성도가 되는 것일까요?
첫째로 가장 큰 요인은 ‘강요받는 신앙’에 대한 부담감입니다. 등록을 하면 무엇을 해라, 예배에 안 나오면 부목사가, 전도사가, 구역장이, 여전도회에서 전화를 하고 왜 안 나왔느냐고 따지듯이 묻습니다. 등록하고 교회 한 번 안 나간 것이 엄청난 죄인처럼 느껴지게 만듬니다. 등록을 안 하고 안 나가면 누구도 연락하지도 않고 귀찮게 하지도 않는데 그래서 교회에 출석은 하지만 등록을 꺼려합니다. 왜냐하면 등록을 하는 순간에 구속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끔 교회에 열심히 나오시다가 몇 주 안보이면 궁금하기도 해서 연락을 해보려다가도 그 사람이 부담스러워 할까봐 연락을 주저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직접 전화는 못하고, 문자나 아니면 SNS를 통해서 연락을 합니다. 왜? 신앙생활은 자유함 가운데에서 해야 행복하지 강요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처럼 힘든 것이 어디에 있는가요? 물론 어떤 분은 너무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사고의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합니다. 신앙은 누구에 의해서 억지로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선택하고 하나님에게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심지어 내 남편도, 내 아이들도 신앙의 문제는 강요가 아니라 기도하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사실 신앙의 강요는 신앙 공동체에서조차 소통을 가로막습니다. 신앙에 대한 생각이나 관점 그리고 예전은 서로 다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교단이 존재하고 교파가 존재하는 이유이죠, 그래서 우리 교회에 와서 등록을 하다가 다른 교회가 자신의 신앙적인 컬러와 관점이 맞으면 그곳으로 갈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은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한국교회에 가나안성도들이 많아지는 이유가 지역교회가 성도들에게 강요하고 또 요구하는 것이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혼자서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은혜 받는 가나안성도가 됩니다.
두 번째는 교회의 공동체가 너무 속물적이기 때문입니다. 멀리서 보면 교회의 모임이 아름다워 보이고 너무도 좋아 보입니다. 그런데 막상 교회 안에 들어오면 그곳에도 세상과 똑 같이 아니 세상보다 더 지저분하고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것이 보입니다. 어렵게 교회 안에 들어왔는데 이런 모습을 보면 정나미가 떨어져 상처를 받고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그렇지만 교회를 떠났지 신앙을 떠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냥 주일날 말씀이 좋은 교회에 가서 예배자로 예배하는 가나안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교회가 희망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방송인 서세원씨의 목사 안수와 개척 그리고 이혼으로 이어져 파탄으로 세상에 들어난 사건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방송에서는 목사라고 하였지만 신학공부를 미국서 하였다고 하며 안수도 군소 교단에서 받았다가 제명당한 사이비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언론은 목사라고 과대 포장을 하면서 또 한 번 교회는 세상에게 희망을 줄 수 없는 존재로 보여졌습니다. 이런 뉴스를 접하면 누가 교회에 다닌다고 말하면서 교회에 나가겠는가? 그래서 가나안교인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병은 두 가지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는 이원론입니다. 성과 속을 구별하고 교회와 세상을 구별하는 이원론이 한국교회의 목회자와 성도들의 의식에 팽배한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교회일은 거룩한 것이고 세상일은 속된 것이라고 하는 이원론적인 의식을 깨트리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은 죽어도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은 할 수가 없습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 너희들은 세상의 빛이다,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교회의 빛이다, 교회의 소금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교회 밖으로 나가면 큰일 난다. 세상친구들을 만나면 큰일난다라고 가르쳤습니다.
또 하나는 기복신앙입니다. 우리나라가 일제시대 때만 해도 기복주의 신앙이 극성을 피우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6.25 전후가 되면서 먹는 문제가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되면서 기복신앙이 신앙의 핵심을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3박자 축복, 치유가 교회복음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기복주의적인 신앙이 한국교회의 부흥을 이룬 것을 인정합니다. 그 당시에는 그것이 정말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도 동남아국가 선교에서 먹는 것, 교육의 문제를 가지고 복음을 접근합니다. 일단은 먹여주고 나서 복음이 들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합니다. 그러나 이제 먹고 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었습니다. 물론 여전히 굶는 사람들이 있지만 절대빈곤자는 거의 사라졌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제 기복의 신앙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기복신앙의 변종이 자리를 잡고 한국교회를 흔들고 있는 것입니다.
강을 건널 때에는 뗏목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강을 건넌 후에는 뗏목이 아니라 자동차나 오토바이가 필요합니다. 강을 건넌 후에도 뗏목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됩니다. 과감하게 내가 타고 온 뗏목을 버려야 합니다. 왜 자수성가한 기업가들이 실패하는가요? 개척한 목사님들이 후임자들과 갈등하는가? 그것은 내가 타고 온 뗏목을 버리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물론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뗏목을 타고 온 정신입니다. 이것만을 남겨두고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새롭게 시작할 수 있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부흥이 기복신앙에서 출발했다면 이제 이 뗏목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복음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것이 이제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다고 봅니다. 이제 교인들도 알게 되었습니다. 무조건 기도한다고, 무조건 할렐루야 아멘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을 가지고 내가 결단하고, 훈련하고 그리고 변화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제 교회가 세상에게 희망을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도리어 세상이 종교를 걱정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더 큰 문제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마지막 순간에 피해야 할 곳이 어디입니까? 바로 종교입니다.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제 그나마 피할 곳도 믿을 수가 없다는 말은 이 세상에 더욱 더 힘들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마지막 선택하는 곳이 종교입니다. 그런데 이 종교마저 희망이 없다고 한다면 그들이 선택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자살자들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통감해야 합니다. 교회가 책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가 희망이 있어야 하고, 교회가 세상에 대하여 희망을 주어야 합니다.<다음호에 계속>
송상구 목사(시드니예일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