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문
문제의 열쇠는 소통
소통의 문제가 삶의 모든 분야에서 중요시되고 있읍니다.
대개의 문제가 소통이 안되는데서 온다는 인식이 보편화 되어가는 시대 상황을 반영하는 것 같습니다.
한국사회는 유난히 소통의 문제로 시끄럽습니다.
소통이 안되는 중요한 요인들로는 성격의 차이, 체면, 이해관계 등을 꼽을 수 있을것입니다.
그리고 그중에 가장 치열한 것이 이해관계일 것입니다.
이해관계가 특히 격렬한 집단인 정치권에서 유난히 소통의 문제가 심각한 것이 그 증거라고 봅니다.
더구나 물질 중심의 상업주의가 거시적으로도 미시적으로도 세상을 주도해 가는 상황이 더욱 소통의 문제를 어렵게 만드는 것으로 보입니다.
본질을 흐리기 위한 현란한 논리와 언어의 수사, 공사구별과 지켜야 할 원칙을 외면하고 인맥을 형성,동원해서 자신과 소속 집단의 이익만을 꾀하는 행위들이 이 세상을 불통의 수렁에서 헤어나기 어렵게 만든다고 보여집니다.
내가 더 많이 갖고 더 높이 되겠다는 욕심을 바닥에 깔고서 하는 소통은 형식적인 게 되고 겉돌게 됩니다.
때문에 갑과 을의 관계에서 오는 불균형적 소통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른 소통의 바탕은 누구나 인정하고 공감할 수 있는 공정성,기회의 평등을 기반으로 한 형평성 등이라고 정리해 봅니다.
한국사회 전체를 큰 충격과 국가에 대한 부정적 회의의 소용돌이에 몰아 넣고 아직도 진행 중인 진도 여객선 ‘세월호 참사’는 한국사회의 소통 문제, 즉 불통의 극단을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합니다.
원칙을 일그러뜨린 부정,부패와 어울려 극단적으로 비틀어진 불통이 엄청난 숫자의 고귀한 인명을 앗아갔읍니다.
사고의 주 원인 제공자들인 선장과 승무원들과 해경,안전행정부 등 가장 소통이 효율적이고 체계적이어야 할 주체들이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여줬읍니다.
최소한의 기본적 안전 점검도 제대로 안된 채 출항한 것 부터 시작해서 경험이 미숙한 항해사에게 운항을 대행시킨 것, 사고 발생 후 기본적인 대피 절차 규정도 따르지 않은 것 등이 인명 피해를 전혀 내지 않을 수 있는 상황을 최악의 상황으로 몰았읍니다.
대부분의 책임이 있는 주체들이 기본적 의무도 저버리고 먼저 도피하므로써 최소한의 책임도 팽개치는 행동을 했읍니다.
좋은 소통을 위해서는 권리 행사나 이해관계보다는 책임과 의무 의식이 앞서야 하는데 정확히 그 반대로 된 치명적 사례를 보여줬읍니다.
탄식을 넘어서 너무도 어처구니없고 비통한 상황이 일어난 배경입니다.
이런 와중에도 삶은 또 이어져 가야하기에 ‘세월호 참사’를 단지 재난이라는 관점에 제한하지 말고 보다 전체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데 인식이 모아지고 있읍니다.
물질만능의 이해타산적인 사회 풍조와 끼리끼리의 집단이기주의 등, 바탕에 깔린 문제를 제대로 직시하고 그 근본적인 변화를 위한 각성과 치유책이 전 국가적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이러한 참사의 재발을 막을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억울하게 숨진 귀한 희생들을 헛되게 하지 않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했더라도 제대로된 소통으로 극복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이런 사례들이 흔히 미담으로 남아서 시시때때로 우리들에게 힘을 주곤 합니다. 앞으로의 한국사회는 이번 경우처럼 사고 날 이유가 없는 데도 사고가 나는 경우는 근절되고 불가피한 사고가 발생해도 훌륭한 소통 체계와 책임주의로 극복하는 미담이 쌓여가는 한국이 되기를 충심으로 소망하는 마음입니다.
소통의 문제는 일상적 상황에서는 그리 심각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해관계가 치열하게 부딪힌다든지, 절박한 상황에 놓였다든지 할 때 보다 중요하고 세밀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신앙을 지향하는 한 사람으로서 예수께서 어떻게 소통하셨는가를 돌아보았읍니다. 그러므로써 신앙인이 노력해야 할 소통의 방향을 가늠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입니다.
예수께서 처하셨던 상황 중 몇가지를 들여다보았읍니다.
그 하나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에 기도하시면서 제자들도 기도하기를 당부하신 장면입니다.
자신은 밤을 하얗게 세우시면서 혼신의 기도를 하신 반면에 제자들은 여러번의 당부에도 번번히 잠을 이기지 못합니다.
가장 친애하던 제자들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이 극심한 실망과 분노를 자아낼 상황이었지만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하시며
깊은 이해가 깔린 말씀을 하십니다.
제자들에게 중요 상황에서 영적 상승의 큰 기회를 주신 것이지만 무리하게 강요하지 않는 소통을 보여주신 것이라 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께서 3년간의 공생애를 결산하는 ‘십자가’입니다.
지금도 똑같지만, 당시의 권력자들과 그 추종자들, 그리고 세속적 삶 자체에 몰입되어 있는 대중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기득권과 세속적 이해관계에 매몰돼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께서 수많은 전무후무한 이적과 기존의 모든 진리체계를 꿰뚫고 집대성하는 가르침을 설파하셨음에도 받아들이기는 커녕 십자가로 몰고갑니다.
예수께서는 원하시면 세상을 벌할 수 있음에도 기꺼이 ‘십자가의 길’을 받아들이셨읍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최고,최선의 소통을 하신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한 소통의 결실이 세대를 거듭하며 신앙인들이 누리고 있는 은혜라고 믿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와 대화하는 장면입니다. 닭 울기전에 세번이나 부인한 베드로에게 추궁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가장 중요한 핵심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만 확인합니다.
그리고 가르침의 핵심 사항인 ‘내 양을 치라’는 말씀을 당부하십니다.
참으로 인간 세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품격의 소통을 봅니다.
오늘날의 세대는 첨단 물질문명이 가파른 속도로 진행되는 것처럼, 불확실성과 세대,계층간의 단절도 가파르기만 합니다.
기독교와 여타 종교들도 이러한 소용돌이에 휩쓸리는 상황을 보여주는 징후들이 여러 형태로 보여지고 있읍니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소통의 중심적 의미들을 성심으로 묵상해가는 노력이 절실한 때라고 여겨집니다.
조유현(평신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