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논문 : 아리랑의 비밀과 한국인의 정체성(1)
아리랑은 인류 최고(最古)의 찬송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행마다 열자씩 4행 40자의 이 분장(分章) 가요. 이 노래를 우리는 ‘아리랑’이라고 부른다. 아리랑…. 이 노래만큼 우리 민족의 애환을 달래 온 노래도 없으리라. 슬플 때도 아리랑, 기쁠 때도 아리랑…. 아리랑은 우리 겨레의 역사와 함께 민족의 한과 기쁨을 노래해온 단 하나의 노래다.
겨레의 노래 아리랑이 서양에 처음 알려진 것은 19세기 말.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미국인’으로 알려진 호머 헐버트(1863∼1949) 선교사는 구전으로 전해오던 아리랑을 1896년 서양식 오선지에 처음 채보해 외국에 알렸다. 그는 “아리랑은 조선인에게 쌀과 같다”고 하였다. 또한 헐버트는 팔도 어디서나 들려오는 아리랑을 두고 이렇게 예찬했다. “조선 사람은 즉흥곡의 명수로, 바이런이나 워즈워드에 못지않은 시인들이다.”
한국인은 아리랑을 부를 때 저절로 흥이 난다. 기쁜 자리 슬픈 자리 없이 언제 어디서나 불러서 기쁘고, 들어서 정다운 노래…. 무슨 이유로 ‘아리랑’은 한국인의 마음에 그토록 크게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일까? 아득한 옛날부터 남녀노소 상하귀천 없이 입을 모아 불러 온 노래…. 들어도 들어도 싫지 않은 이 노래는 과연 언제부터 무슨 연유에서 불려지기 시작한 것일까?
현재까지 아리랑의 비밀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두고 오랫동안 연구가 거듭되어 왔으나 시원한 해답은 찾을 수 없었다. 아리랑은 굉장히 큰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특별한 노래이다. 놀랍게도 아리랑은 셈의 후손인 우리 배달겨레의 조상들이 대홍수 후 광명의 본원지(밝달=배달)를 찾아 동방으로 천동(遷動)할 때 험한 산과 높은 고개, 그리고 고원들을 넘어오면서 부른 ‘찬송가’였다(창 10:21~30).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논하려면 종교적인 시각으로 접근해야 한다. 배달 동이겨레는 하느님을 섬기던 제천민족(祭天民族)으로서 단순한 정치세력(민족, 국가)이 아닌 ‘종교적’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겨레는 다신숭배가 만연한 고대 세계에서 제천신앙으로 유일신 하느님을 숭배하던 독특한 민족이었다.
단군조선시대에는 제천의식이 북으로는 백두산에서, 남으로는 강화도 마리산 산정의 참성단에서 행하여졌다. 이 제천행사야말로 동이문화의 정수(精髓)이며, 우리 문화의 본성(本性)인 것이다. 따라서 동이의 후예인 우리가 부르는 ‘아리랑’도 종교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야 그 비밀이 드러날 것이다.
아리랑의 어원은 알이랑
가장 중요한 것은 ‘아리랑’이라는 말의 의미이다. 모든 종류의 아리랑 노래에서 변하지 않고 쓰이고 있는 후렴구가 ‘아리랑’이다. 그만큼 한국인에게 ‘아리랑’이라는 말은 특별한 뜻과 사연이 배어 있다는 증거다. 실지로 우리 한국인은 ‘아리랑’이라는 말 자체에 친근감을 느끼며 흥분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아리랑 연구가는 ‘아리랑’은 뜻이 없는 단순한 후렴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단지 흥을 돋우고 음조를 메워나가는 구실을 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아무 뜻도 없는 말이 한국인의 마음을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사로잡아 왔단 말인가? 당치도 않은 소리다. 만에 하나 그의 주장대로 ‘아리랑’이 단순히 ‘흥을 돋우고 음조를 메워나가는 구실을 하는 아무 뜻이 없는 말’이라고 치자. 그럴 경우에도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왜 하필이면 그것이 ‘아리랑’인가? 꼭 그렇게 소리 내야만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차라리 ‘아리랑’은 끝까지 해명이 필요한 어떤 특별한 뜻이 있는 말로 간주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더욱이 ‘아리랑’은 후렴구이다. 후렴(refrain)이란 노래 곡조 끝 혹은 앞에 붙여 반복해 부르는 짧은 가사를 말한다. ‘아리랑’이 노래의 후렴구라는 사실은 오히려 ‘아리랑’이라는 말이 굉장히 중요한 뜻을 담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대부분 후렴은 그 노래의 중요 메시지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리랑’에 담겨져 있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아리랑’에는 한국인의 원형과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아주 귀중한 비밀이 감추어져 있다. ‘아리랑’은 성민(聖民) 한국인의 키워드(keyword)이다. 먼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아리랑은 한자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아리랑’이라는 한자가 기록된 책이 어디선가 고서(古書) 가운데 한 권이라도 발견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리랑은 구전으로만 전해져 온 순 우리말의 민요이기 때문이다. ‘아리랑’의 어원은 ‘알이랑’이다(알이랑=아리랑).
“알이랑 알이랑 알 알이요
알이랑 고개를 넘어 간다“
그런데 오랜 세월동안 글이 없는 가운데 구전으로만 전해지다 보니,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로 부르게 되었고 결국 가사가 그렇게 굳어지고 만 것이다. 그러니까 원래의 노랫말을 잃어버린 것! 따라서 아리랑이 진정 어떤 노래인지를 알려면 먼저 가사부터 ‘알이랑 알이랑 알 알이요’로 복원해야 할 것이다.
왜 본래 “알이랑 알이랑 알 알이요”라는 가사를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로 부르게 되었을까? 우리말의 발음에는 ‘연음법칙’이라는 음절의 연결규칙이 있기 때문이다. 자음으로 끝나는 음절에 모음으로 시작되는 음절이 이어질 때 앞 음절의 끝소리가 뒤 음절의 첫소리가 되는 음운 규칙을 말한다.
예, “깊이→기피” “옷을→오슬” “책이→채기” “낮에→나제”
“벗이랑→버시랑” “가물어”→“가무러” “하늘이→하느리”
알이랑 → 아리랑 / 알알이요 → 아라리요
이제야 비로소 우리가 왜 “아리랑 아리랑 아리리요”가 아닌 “아라리요”라고 노래하고 있는지 그 의문이 해소되었다! (지금까지 어떤 아리랑 연구가도 이 문제를 명확히 규명한 적이 없다.)
‘알이랑’은 ‘알’과 ‘이랑’으로 구분된다. ‘알’은 ‘하느님’을 의미한다. ‘하느님’이라는 신명(神名)은 처음에 ‘알’이었다. 그런데 ‘알’ 앞에 ‘한’이라는 관형사를 붙이고, ‘알’ 뒤에 ‘님’이라는 존칭명사를 붙여서 ‘한알님’이라고 했다. 그것이 [한님→하님→하늘님→하느님]으로 소리가 바뀐 것이다. 그래서 ‘알’은 ‘하느님’이다. 창조주 하느님(하나님)을 뜻하는 원시 언어가 ‘알’이었다.
유대인의 ‘엘(EL)’, 아랍인의 ‘알아(알라)’는 바로 이 ‘알’에서 파생된 말이다(‘알라’는 아랍어로 하느님(하나님)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렇기에 크리스천인 아랍 사람들도 이 단어를 사용한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느님(하나님)의 이름인 ‘엘로힘’(단수는 Eloah)은 ‘알라(alah)’라는 말에서 유래했다(벌코프 조직신학 239쪽*크리스챤 다이제스트 간). 즉 창조주 하느님(하나님)을 뜻하는 인류 최초의 신명이 ‘알’이었는데, 노아에 의해 홍수 이후의 세대로 전해졌다.
‘이랑’은 ‘~와 함께’라는 토씨로서(언어학자들은 ‘토씨’는 6천년 이상 간다고 한다) 영어의 ‘With’이다(예, 갑돌이랑= 갑돌이와 함께, 갑순이랑= 갑순이와 함께). 따라서 ‘알이랑’은 ‘하느님과 함께’(With God)라는 말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 겨레가 잃어버린 아리랑의 원의(原意)이다.

유석근 목사 (알이랑코리아 대표, 알이랑교회 담임)
| ※ 유근만 목사의 저 「또 하나의 선민 알이랑 민족 – 아리랑과 성경과 민족사의 만남」(도서출판 예루살렘)은 한국인의 정체성과 부르심이 무엇인지를 내증(특별계시)과 외증(일반계시)으로 설명한 책으로, 본서는 출간되자 국민일보에 “화제의 신간”이라는 제목 아래 기사로 취급되었으며, 월간 「신앙계」에 1년 6개월 간 연재되었고, 강문호 목사(갈보리교회 담임)에 의해 CTS 기독교방송에서 연속특강으로 소개된 바 있다. 본지에서는 요약해 몇 주간 소개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