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경제윤리 연재기획7 : 자본/대부에 관한 기독교경제윤리
빚 문제,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셨을까(1)
지난 글에서 구약성경에 담긴 빚에 대한 가르침은 빈민(貧民) 무이자 대부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의 탕감, 생산적인 대부의 이자는 허용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빚과 이자, 빚 탕감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셨고 어떤 입장을 취하셨을까?
먼저 예수님이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심판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로 알았느냐. 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 돈을 찾았으리라(눅 19:23)”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생산적인 대부의 이자에 대해서는 암묵적으로 인정하셨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반면 예수님은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눅 6:35)”고 말씀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꾸어 주는 것에 대한 이자를 인정하신 것인가 인정하지 않으신 것인가? 칼뱅은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자의 전적인 금지를 포함하는 것은 아니라고 해석했다. 성경의 전체적인 맥락과 여러 자료를 참조해 볼 때 예수님도 가난한 자에게 꾸어 주고 이자 받는 것과 갚을 수 없는 빚을 탕감해 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존 하워드 요더(John Howard Yoder)는 <예수의 정치학(The Politics of Jesus)>(IVP)에서 주기도문에 나오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는 기도의 원래 의미는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탕감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빚)를 탕감하여 주소서”라고 말한다. 나요섭 교수도 <신약성서의 경제윤리-신약논단 제4권: 누가복음에 나타난 죄 용서를 위한 회개로서의 빚 탕감에 관한 연구>(한들)에서 “누가복음 저자는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이 죄를 용서받음과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성을 지니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빚 탕감을 의도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청지기 비유(눅 16:1~8)를 통해 다른 사람의 빚 문서에서 빚을 줄여 주는 청지기를 지혜롭다고 칭찬하신다. 또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마 18:23~35)를 통해서는 갚을 수 없는 엄청난 빚을 탕감 받고도 다른 사람의 작은 빚은 탕감해 주지 않는 무정한 사람은 빚을 다 갚기까지 옥에서 결코 나오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감안해 보면 예수님도 빚 탕감을 의도하신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은 빚 탕감을 회피하는 ‘프로스불’에 반대
존 하워드 요더는 <예수의 정치학>(IVP)에서 안식년의 빚 탕감을 회피하기 위해 가말리엘(바울의 스승)의 할아버지인 힐렐이 만든 프로스불(Prosbul)에 대해 예수님은 확실한 반대자였다고 말한다. 프로스불은 ‘법정 앞에서(pros boulē)’라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프로스불은 안식년이 지난 후에도 채권자가 자신의 채권을 주장할 수 있는 법률 형태로 채권자가 아닌 법정이 빚을 대신 받아 주는 방법으로 안식년(면제년)의 빚 탕감 규례를 회피하였다.
힐렐은 안식년이 가까워지면 빚을 탕감해 주어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돈을 빌려 주려 하지 않자 그럴 바에는 차라리 가난한 사람들이 빚 탕감을 받지 않고 급한 돈을 빌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였다. 힐렐은 안식년의 빚 탕감 규정이 개인 사이의 채무 관계에만 적용된다는 점을 이용하여 채권자가 법원에 자신의 채권을 위탁한 후 안식년이 되어도 빚 탕감을 하지 않고 법원이 대신 빚을 받아 주도록 만든 것이다. 힐렐이 프로스불을 만든 이후로 이스라엘에서 안식년의 빚 탕감은 사실상 폐기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에 대한 빚 탕감을 무력화하는 프로스불에 반대한 것이다.
롤랑 드보도 <구약 시대의 생활 풍속>(대한기독교서회)에서 헤롯왕의 통치 초기까지 안식년 규정들이 엄수되었고 유효하였으며 채권자들은 안식년 규정들을 준수해야 했다고 말한다. 또 드보는 헤롯왕 시대에 힐렐은 프로스불을 통해 안식년의 빚 탕감 규정들에 대한 탈출구를 찾았다고 말한다. 드보는 채권자들이 안식년의 빚 탕감을 회피하기 위해 빚 문서에 채무자는 안식년을 통해 예상되는 이익을 단념한다는 조항을 넣었고, 이런 부채 증서가 무랍바아트(쿰란의 남쪽 사해 서안)에서 발견되었다고 말한다. 이런 점을 미뤄 보면 안식년의 빚 탕감이 실제로 있었고 빚 탕감을 회피하기 위해 프로스불을 비롯해 빚 탕감 회피 조항을 만들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성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같은 가난한 동족에게서 이자를 받고 그들을 종으로 만드는 죄악에 분노하셨던 것처럼 성자 예수님도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빚 탕감을 회피하게 만드는 프로스불에 반대하셨다는 사실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은 신구약 성경을 통해 가난한 자에게 이자를 받지 말고 꾸어 주고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은 탕감해 줄 것을 동일하게 말씀하신 것으로 보인다. 성령 하나님은 희년 말씀을 어기면서 많이 가지고 있는 땅과 집을 팔아 가난한 자와 나누고, 가난한 자에게 이자를 받지 않고 꾸어 주며 갚을 수 없는 빚은 탕감해 주는 성령의 코이노니아(koinonia)를 가능케 하신다.
성부 하나님이 말씀하신 희년(레 25장)을 성자 예수님이 성취(눅 4:18~21)하시고 성령 하나님이 오순절 성령 강림(행 2장)을 통해 사랑으로 완성하신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성령의 코이노니아는 율법의 완성(롬 13:10)이다. 사도 바울의 말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 5:6)”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빚지지 말고 서로 사랑의 코이노니아를 나누라
로마서 13:8에서 사도 바울은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고 말한다. 이 말씀이 정확히 빚에 관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성경 해석상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초대교회는 희년 말씀을 어기면서 많은 땅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회개하고 성령을 받은 후에 땅과 집을 스스로 팔아 서로 책임지는 코이노니아(koinonia)의 삶을 살았다. 이런 점을 감안해 보면 초대교회 안에서는 서로 빚을 지지 않았거나, 설사 빌려 주어도 이자를 받지 않고 갚을 수 없는 빚은 탕감해 주었거나, 오히려 다른 그리스도인의 갚을 수 없는 빚을 대신 갚아 주는(무르기 해주는) 사랑의 삶을 살았으리라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초대 교회사를 살펴보면 교회가 노예 신분인 그리스도인의 몸값을 대신 치르고 자유롭게 해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교회가 빚의 노예가 된 같은 그리스도인을 빚에서 자유롭게 해 주는 일은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의 말대로 초대교회는 서로 빚을 지지 않고 서로의 삶을 책임지는 사랑과 성령의 코이노니아를 나누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신구약 성경 모두 동일하게 빚에 대해 ‘빈민 무이자 대부’와 ‘갚을 수 없는 빚의 탕감’을 말씀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또 신구약 성경은 가난에 처한 사람에게 돈을 빌려 주고 이자를 받으면서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통해 돈을 버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라 가르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즉 가난한 사람이 다시 자립할 수 있도록 이자를 받지 말고 갚을 수 없는 빚은 탕감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 빚에 대한 기독교경제윤리라고 말할 수 있다.
반면 성경은 모든 이자를 금하지는 않고 더 많은 이윤을 얻으려는 목적의 생산적인 대부에 대해서는 이자를 통제하에 허용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요약하면 성경은 가난한 사람에게는 자립할 수 있도록 이자를 받지 말고, 갚을 수 없는 빚은 탕감해 주며, 이자 자체를 금하지는 않고 더 많은 이윤을 얻으려는 목적의 생산적인 대부의 이자는 통제하에 허용한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까지 교회는 빚에 대해 어떻게 가르쳐 왔을까
그렇다면 빚에 대한 신구약 성경의 가르침을 지금까지 교회는 어떻게 가르쳐 왔을까? 초대교회 이후부터 종교개혁 이전까지 교회에서는 대부분 이자 금지가 원칙이었다. 교부 암브로시우스는 고리대금은 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는 것이라고 말했다. 주후 300년 엘비라 주교회의와 325년 니케아 주교회의에서 성직자들의 고리대금이 금지되었고, 5세기에 교황 레오Ⅰ세는 돈을 통해 이자를 획득하는 것은 영혼의 죽음과 같다고 말했다.
주후 626년 클리치 주교회의에서는 평신도들의 고리대금이 금지되었다. 775년 니케아회의에서는 이자 금지가 교회법으로 결정되어 공식적으로 이자를 요구하는 것은 불법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교회의 이자 금지에 대해 몇몇 국가들은 반대하였고 백성들의 경제생활에 여러 불편과 불만을 가져오게 되어 중세 후반에는 일부 국가에서 이자를 용인하게 되었다.
빚 문제가 심각해지자 1179년 제3차 라테란 회의에서는 사람들이 고리대금업자가 되기 위해 신분을 바꾼 것을 지적하면서 공개적인 고리대금을 처벌할 것을 규정하였고, 13세기 교황 이노센츠Ⅳ세는 고리대금으로 인해 농촌 경제가 황폐해지는 것을 경고했다. 중세 신학자 중에서 페트루스 롬바르두스, 안셀무스, 아퀴나스, 토마스 폰 코브함 등은 고리대금은 도둑질과 같다고 주장했다.
중세 교회에서는 대부분 이자 금지가 원칙이었으나 예외 규정도 있었고 오히려 교회가 뒤로 몰래 이자를 받기도 했다. 겉으로는 공식적으로 이자 금지를 내세웠지만 뒤로는 이자를 받았던 것이다. 앙드레 비엘레(André Biéler)는 <칼빈의 사회적 휴머니즘-칼빈의 경제신학>(대한기독교서회)에서 “교회는 이자를 받고 대부하는 것이 교회법상 금지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묘하게 시행하여 일반화되었고 16세기에 들어서면서 급속하게 증가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중세 교회는 성경의 많은 구절이 이자를 받지 말라고 말씀한다는 것과 돈은 돈을 낳을 수 없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화폐불임(不姙)설’을 받아들여 이자를 금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돈으로 더 많은 돈을 낳으려는 행위는 부자연스러운 것이라 생각했다. 중세 스콜라 신학의 대부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화폐불임설을 받아들여 이자를 금했다. 또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소비 물질과 비소비 물질의 구분에 따라 돈은 한 번 소비하면 그만인 소비 물질로 간주하여 이자를 금했다.
반면 아퀴나스는 이자를 원칙적으로 금지하되 채권자가 돈을 빌려 주었다가 오히려 손해가 생겼을 때, 더 이익이 생기는 투자를 할 수 있는데도 돈을 빌려 주어 희생한 이득을 보상받아야 할 때, 채무자가 만기를 넘겨 연체했을 때는 이자를 받아도 된다는 예외를 두었다. 토마스 폰 코브함은 고리대금은 시간에 따른 장사라는 이유로 이자를 금지했다. 시간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데 고리대금은 이런 하나님이 만드신 시간을 이용해 돈을 버는 것이고, 결국 이자를 받는 것은 하나님의 재산인 시간을 도둑질하는 것이라는 이유였다. 코브함은 이자가 시간 때문에 발생한다고 해석한 것이다.
한편 기독교인이 아닌 유대인에게는 이자가 허용되었다. 기독교인들이 보기에 유대인은 불신자 혹은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이자를 허용한 셈이다. 중세 당시에 유대인에게는 경제활동이 제한되어 있어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사업으로 이자를 받을 수 있는 대부업과 여러 금융 기법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유대인들이 지금도 전 세계 금융 산업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이런 역사적인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다음호에 계속>
고영근 / 희년함께 사무처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