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6.25 한국전쟁 64주년
6.25 한국전쟁과 교회의 역할
교회, 한국위기때 마다 ‘기독청년의용대’와 ‘정전반대 신도대회’, ‘구국기독 신도대회’ 등 개최
지난 6월 25일은 한국전쟁 64주년 기념일이었다. 64년이 흘러 이제 전쟁을 경험한 적이 없는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면서 전쟁의 비극을 잊어가고 있는 시점에 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일어났던 연평도 폭격 사태는 한반도가 아직도 남북간의 전쟁을 위한 대치상태라는 것을 다시 한번 인식시켜 주었으며, 지난 64년 동안의 평화는 결국 일시적인 평화였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고 있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한국교계는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었으며 남북한 전역에 걸쳐 교회재건과 신앙부흥운동에 열과 성을 쏟고 있었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인하여 교회는 다시 아픔을 겪게 되었다.
6.25전쟁을 통하여 한국국민 전체가 받은 손실과 피해는 매우 컸다. 그중에서도 기독교가 받은 비극의 깊이는 엄청난 것이었다. 수많은 교역자와 평신도가 순교를 당하거나 끌려갔고 교회가 불탔다. 많은 신도와 교회 지도자는 각 지역으로 흩어져 피신했으나 미처 피신하지 못했던 기독교인들은 공산군에 의해 갖은 고초를 겪었고 학살당하기도 했다.
북한군이 남침하자 서울시내 각 교파의 일부 교역자들은 승동교회에 모여 서울을 사수할 비장한 결의를 하고,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불과 3일도 못되어 서울이 점령되자 이 모든 계획은 이루지 못하였고 교역자들은 온갖 고초를 당하고 순교당하기 시작하였다.
1950년 초 한국교회는 12만-15만의 성도와 900여명의 목회자, 2,000여개의 교회가 있었다. 그러나 6.25전쟁을 통해 파손, 손실된 교회의 수는 장로교가 152교회, 감리교가 84교회, 성결교가 27교회, 그리고 구세군이 4교회이다. 또한 순교, 납치당한 이는 장로교에서 177명, 감리교에서 44명, 성결교에서 11명이었다. 그러나 이 통계로는 교회가 그 뿌리에서부터 받은 아픔과 고난을 다 표현할 수 없다. 9.28서울수복과 함께 연합군의 북진이 시작되자 인민군과 내무서원들은 후퇴직전에 예배당을 불사르고 기독교인들을 집단으로 학살하였다.
연합군이 미처 진주하지 못한 지역의 교회와 신도들은 혹독한 박해를 당하였다. 한국에서 교회의 분포밀도가 가장 높은 용천, 의주지역은 불행하게도 연합군이 진주하지 못하여서 적어도 수 천명의 신도가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6.25전쟁은 대체로 네 단계를 거쳐 전개됐다. 교회는 매 단계마다 각기 다른 영향을 받으며 반응했다.
첫 번째 단계는 개전 초기 북한 인민군이 대구와 부산 일원을 제외한 남한 전역을 점령했을 때다. 이 단계에서 유엔군이 참전해 전쟁은 국제전이 됐다. 해방직후부터 활발해진 남북한교회의 정치참여는 전쟁발발 후 ‘전쟁지원’으로 이어졌다. 남한교회 지도자들은 1950년 7월 대전제일장로교회에서 대한기독교구국회를 결성했다. 이 단체는 주로 선무, 구호, 방송같은 일을 담당했다. 기독교청년들로 구성된 의용대를 조직해 전선배치까지 시도했으나 성사되지는 않았다.
두 번째 단계는 인천상륙을 계기로 서울을 탈환하고 여세를 몰아 압록강까지 갔던 시기다. 이 두시기 동안 남북한의 교회는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다. 1950년 9월 서울을 수복하고 10월 중순 평양을 점령하자 선교사들과 남한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유엔군을 따라 평양까지 가서 기독교인들은 위로하고 선무활동(지방이나 점령지의 주민에게 정부 또는 본국의 본의를 권하여 민심을 안정시키는 일)을 했다. 평양탈환 축하집회가 열린 10월 25일 이인시, 윤하영, 한경직, 김양선 등 월남했던 장로교 목사들과 애담스, 뵐켈, 쇼 등의 선교사들이 평양에 도착 북한교회 재건을 협의했다. 이 밖에도 장로교 목사 황은균, 강원룡, 조향록 등이 북한지역에 파견돼 활동했다. 남한교회 장로교 대표들이 평양에 도착한 첫 일요일에는 약 3천명의 신도가 서문밖 교회에 모여 환영예배를 성대히 치렀다.
세 번째 단계는 중국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다시 뒤집혀 유엔군이 오산 근처까지 후퇴했다가 다시 서울을 수복한 기간이다. 이 시기에 남하하는 유엔군을 따라 북한지역 기독교인들이 대거 월남했다. 1951년 1.4후퇴가 시작되자 서울 등지에 있던 교회 지도자들도 대구, 부산 등 지로 피난했다. 부산 피난시절 교회는 전쟁의 승리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1951년 1월 부산중앙교회에서 조직된 기독교연합 전시비상대책위원회는 미국 대통령, 유엔 사무총장, 맥아더 사령관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채택했다. 또한 위원회는 미국교회에 한국 정황을 설명하고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한경직과 류형기를 미국에 파견했다.
네 번째 단계는 이후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을 할 때까지의 시기다. 전쟁승리를 통해 통일을 하겠다는 남한교회는 이승만 정부와 함께 휴전을 강력히 반대했다. 남한교회는 휴전반대운동을 최고의 구국적 행위로 이해했다. 1951년 7월 부산에서는 ‘정전반대 신도대회’가 열렸다.
휴전이 임박했던 1953년 6월 13일과 15일 사이에는 전국 각처에서 대규모의 휴전반대집회가 열렸다. 서울 탑골공원에서는 7천여 명의 기독교인이 참석한 가운데 ‘북진통일 기원대회’가, 부산 충무로광장에서는 1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구국기독 신도대회’가 개최됐다. 한국기독교연합회(총무 유호준) 주최로 인천과 청주, 광주에서도 열린 이러한 집회에서는 휴전반대입장을 세계교회와 미국 대통령 등에게 알리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구국기독 신도대회’는 세계교회에 보내는 성명서에서 “한국의 통일은 공산주의와의 유화에서가 아니라 공산주의를 굴복시킴으로써 이뤄질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성명에서는 “(아이젠하워가) ‘설복될 수 없는 마귀’인 공산주의를 ‘회개할 줄 아는 선의의 죄인’으로 과대평가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민족의 비극이었던 6.25전쟁은 이처럼 한국교회와도 직·간접적으로 적지 않은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오늘날도 다르지 않다. 중요한 것은 교회가 변화하는 시대와 상황속에서 시대와 이권에 편승해 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와 의를 실현하기위해 어떤 모습으로 영향을 미쳐야 할지를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가장 성경적인 모습을 찾아가는 것일 것이다.
6.25전쟁의 교훈
비록 한국 국민의 80%이상이 6.25전쟁의 참상을 겪어보지 못한 전후세대라고 할지라도 전쟁을 억제하고 통일시대를 대비하며 국가안보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서라도 6.25전쟁의 실상과 교훈을 잊어서는 안된다.
6.25전쟁은 국토를 초토화시키며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큰 인적, 물적 피해를 남겼다. 6.25전쟁을 통하여 특히 기독교가 받은 비극의 깊이는 엄청난 것이었다. 수많은 교역자, 평신도가 순교를 당하거나 끌려갔고 교회가 불탔다. 많은 신도와 교회지도자는 각 지역으로 흩어져 피신했으나 미처 피신하지 못했던 기독교인은 공산군에 의해 갖은 고초를 겪었고 학살당하기도 했다. 전쟁은 대체로 네 단계를 거쳐 전개되었는데 교회는 매 단계 마다 각기 다른 영향을 받으며 반응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전쟁 후 재건위원회 조직, 신앙부흥운동, 교육기관 재건 및 신설, 특수전도운동 등을 통해 나라를 구하는데 앞장섰다. 6.25전쟁은 한국사회의 위기에 대한 종교적 대처의 강화, 생존자 신드롬의 효과, 군종제도와 군선교의 시작 등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한편 6.25전쟁과 한국교회를 살펴봄으로써 얻을 수 있는 교훈을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로 역사의 교훈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6.25전쟁은 ‘종전’이 아닌 ‘휴전’ 상태임을 명심해야하겠으며, 완벽한 전투 준비태세를 갖추는 것만이 제 2의 6.25전쟁을 예방하고 조국의 평화와 안전을 지키는 지름길임을 재인식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강한 군대를 만들고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 독일 본대학교 하케(Hacke) 교수는 “전쟁을 피하려거든 전쟁을 준비하라”며 의미있는 말을 했다. 자유는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Freedom is not free). 무엇보다 우리군은 항전의식을 갖고 전투준비태세에 만전을 다해야할 것이다. 또한 국가안보를 위한 국민적 관심과 단합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셋째로 신앙을 통해 정신전력을 무장해야 한다. 적과 대치하고 있는 장병들의 전투력중에서 무형전력의 하나인 정신전력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정신전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길은 ‘신앙전력화’이다. 한국군은 창군 때부터 6.25전쟁을 비롯하여 월남전, 1960년대 무장공비침투 국지도발 전투 등을 경험하면서 강한 군은 장병들이 죽음을 두렵게 생각하지 않는 바른 사생관 확립이 절대적임을 알았다. 이에 전쟁중에 군목제도가 전격적으로 시행되었으며, 군종 병과는 그 이념을 ‘신앙전력화’에 두고 있다. 그러므로 신앙으로 무장된 특히 내세관이 분명한 종교를 갖는 1인 1종교갖기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무종교도 종교라는 헛된 주장이 장병들을 나약하게 만들어 가고 있다. 신앙전력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군대는 결코 강한 군대가 될 수 없다. 오직 예수신앙으로 무장할 때 강한 군사가 될 수 있다. 강한 군사는 대한민국을 더욱 강하게 한다. 강한군대 만이 전쟁을 막을 수 있다. 그리고 자유와 평화를 지킬 수 있다.
넷째로 무엇보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인 기독교인은 두 나라, 즉 하나님 나라와 조국의 이중시민권자들이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또한 조국을 위해 기도하면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땅 대한민국에 자유와 평화가 꽃피고 열매 맺게 해야 할 것이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