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곤주 목사의 원문중심 성경강해 시리즈
두 종류의 열망(빌립보서 1: 22-26)
22.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23.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4.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25.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26.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천국을 사모하는 열망으로 가득차 있음을 보게 됩니다. 동시에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더 머무르고 싶은 열망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즉,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는 이땅에 더 머무르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이 세상을 떠나 영원한 천국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가지 갈등 가운데 있는 자신의 마음을 ‘내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알지 못해서, 그 둘 사이에 끼었다’는 말로 22-23절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 둘 사이에 끼었다’는 표현에서 “그 둘은” 그 앞에 나오는 21절의 “ 죽는 것” 과 22절의 “육신으로 사는 것”을 서로 대조해서 하는 말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21절을 다시 살펴보면, 사도 바울은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원문에 의하면 죽는 것이란 ‘켈도스’ (κέρδος) 인데 그 뜻은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영어 성경들 (NASB;NIV; KJV…)은 ‘죽는 것이 얻는 것이다’ ( “to die is gain”) 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의미를 조금더 생각해 보면, 보통 세상 사람들은 ‘죽음이란 모든 것을 잃어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수고 해서 벌어 놓은 재산과 물질을 잃고,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모든 것을 다 잃고 한 줌의 흙으로 사라지는 것이 죽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죽음을 맞이할 때가 되면 모든 것이 아쉽고 때로는 고통스럽고 두려울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잃는 것이 아니라 얻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죽음은 우리 곁을 잠시 떠난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들을 천국에서 다시 만나는 것입니다. 질병과 고통이 없이 부활한 신령한 육체를 얻고 영원한 행복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거하기 때문에 얻는 것이요, 우리의 참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영원히 함께 거하기 때문에 얻는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러한 천국에 갈 날을 열망하며 그곳에서 누릴 영광을 생각하며 주를 위하여 살았습니다.
또한 23절에 나오는 ‘끼여 있다’는 단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쉬네코’ (συνέχο)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붙잡히다’ 혹은 ‘어려움을 겪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로서 마치 암벽에 둘러싸인 협곡을 지나가는 길을 연상하게 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그 둘 사이에 끼었다’는 말은 사도 바울이 ‘죽어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과 ‘살아서 더 많은 선교의 열매를 맺는 것’ 이 둘 사이에 붙잡혀서 고민하는 사도 바울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치 험한 협곡을 지나가는 여행자가 어느 길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하는 심경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살아도 좋고 죽어도 좋다는 자신의 신앙 고백을 21절과 22절에서 ‘삶’과 ‘죽음’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 23절에서는 “이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좋다”고 다시 고백합니다. 여기서 ‘떠난다’는 의미의 단어 ‘아나뤼오’(ἀναλύω)는 항구에 정박된 배가 밧줄을 풀고 출항하는 경우, 혹은 텐트의 밧줄을 풀고 떠나는 여행자의 경우에 쓰이는 말로서 우리가 이 세상에 잠시 머물러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내용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고후 5:1-2).
다음으로, 빌립보서 1장 24절에서는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다”고 고백합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자신이 이 세사을 떠나는 것과 이 세상에 머무르고자 하는 두 가지 열망에 사로 잡혀 있음을 계속해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유익하다’는 의미로 번역한 단어 ‘아낭카이오스’ (ἀναγκαιος)는 ‘필요한’ (necessary) 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원문의 의미는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천국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함께 거하고 싶은 열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살아야 할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라는22절의 말씀을 통하여 알수 있습니다.
여기서 “내 일의 열매”란 가장 먼저 25-26절의 말씀을 통하여 이해할 수있습니다. 다시말해서, 사도 바울이 표현한 ‘내 일의 열매’는 사도 바울 자신이 감옥에서 풀려나서 빌립보 신자들을 다시 보게 되고 그럼으로써 복음의 진보와 기쁨을 가져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기쁨을 함께 나누는 복음의 자랑거리가 풍성한 그날을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넓은 의미에서 생각해 보면, “내 일의 열매”란‘ 불신자들에 대한 구원의 열매와 신자들의 생활속에서 나타나는 신앙의 열매’를 포함하는 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1장 6절에서 ‘너희 가운데 전파된 복음이 열매를 맺고 또 온 세상에서 복음의 열매가 자란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나서 골로새서 1장 10절에서는 골로새 교회의 신자들이 ‘범사에 주를 기쁘시게 하는 선한 일의 열매를 맺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장 1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한다”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렇게 신자들의 삶이 거룩하게 변화되어 가는 것은 성령의 은혜를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의 말씀처럼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 또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지칠줄 모르는 선교의 열정을 가지고 복음의 열매를 맺었을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신자들의 믿음이 지속적으로 자라도록 하는 영적인 돌봄에 큰 책임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구원의 열매와 신앙의 열매를 거두어 들이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이 땅에 더 남아 있고 싶은 열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어떠한 마음의 열망을 품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과 같이 예수 믿는 신자들은 삶의 이유와 삶의 목적이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식물은 꽃을 피도록 창조되었고 과실 나무들은 열매를 맺도록 창조 되었듯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우리 각자의 인생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안에서 즐거움을 누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럴때 우리는 이 땅에 더 머물러 살든지 더 빨리 천국 에 가든지 후외없고 미련없는 삶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영혼의 갈망이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김곤주 목사(시드니새언약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