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곤주 목사의 원문중심 성경강해 시리즈
제38강 일체의 비결과 능력 주시는자(빌 4:10-13)
10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11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12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13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헬라의 스토아 철학자들은 자족하는 마음을 그들이 도달해야 할 윤리적인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들이 가르치는 자족하는 마음은 ‘모든 욕망과 감정을 완전히 초월한 상태, 그래서 아무것도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 4장 11절에 나오는 ‘자족’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위타르케스’ (αὐτάρκης)란 단어가 바로 이러한 문화적인 배경에서 사용된 단어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말한 자족이란 하나님께서 주신 풍성함들을 거절하고 가난한 삶을 살아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또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과 잠재력을 개발하기 위한 노력도 하지 않고 주어진 현실에만 만족하면서 살아가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할수만 있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나누어 주면서 살아갈수 있는 여유를 누리면서 살아갈 필요가 있습니다(엡4: 28).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일을 하고 돈을 버는 목적이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기 위한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 4장 10절 을 보면, 너희가 나를 생각해 주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가 이를 실천했기 때문에 내가 크게 기뻐 한다고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 교인들에게 말씀합니다. 여기서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10절)라는 표현은 빌립보 교인들이 마음에 품고 있었던 생각이 이제서야 실천에 옮겨겼다는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복음 전파에 힘쓰는 사도 바울을 돕고자 하는 마음과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지만 실천에 옮길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알수 없지만 아마도 먼 여행을 해야하는 문제로 인해서 혹은 형편이 넉넉하지 못해서 그럴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빌립보 교인들은 사도 바울을 물질적으로 돕고자 했던 생각을 이제 실천에 옮기게 되었고, 그래서 ‘이제 싹이 났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어려운 중에도 에바브로디도를 통하여 물질을 보내준 빌립보 교인들의 마음과 그 믿음을 보고 큰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4장 18절을 보면 ‘너희가 보내준 물질을 내가 에바브로디도를 통해서 받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 고 다시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해서, 필요한 물질을 받게 된것이 반갑기도 했지만 그보다 그들의 헌신된 마음과 성숙한 믿음, 그리고 사도 바울을 향한 깊은 애정을 다시 확인하고 느낄수 있었기 때문에 기뻤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매우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11절을 보면, 빌립보 교인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내가 궁핍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12절에 가면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선언합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신자들은 궁핍할때 하나님을 잘 섬기다가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될때 하나님을 잊어 버립니다. 반대로 어떤 신자들은 풍요로울때 하나님을 잘 섬기다가 궁핍한 환경에 처하게 되면 하나님을 떠나 버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도 바울과 같이 영적 광야의 훈련을 받으면서 풍부함과 궁핍함의 일체의 비결을 잘 배우고 체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때로 당신의 자녀들을 배고픔과 배부름을 통하여 훈련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가난한 것 그 자체나 병든것 그 자체가 저주도 아니고 부끄럽운 일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지만 나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오직 천국 복음의 전파하시기 위해서 남은 3년간의 공생애를 살았습니다. 반대로 돈을 열심히 버는 것도 좋고 많이 버는 것도 좋지만 돈을 사랑하고 돈을 섬기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돈이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기 위한 수단이 되어야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풍요로운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러한 세상의 풍요로운 생활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오직 복음 전파를 위해서 끊없는 고난의 길을 걸어갔습니다(고전 4: 11-13;고후 11: 23-27). 그리고 그러한 삶속에서 기쁨을 누렸고 자족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수 있었습니까?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장 13절에서 바로 그 비결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 말씀은 두가지 면에서 극단적으로 강조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나의 능력이 되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목표를 반드시 이룰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때때로 나의 편이 되어 주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내편이 되어 주기를 원한다면, 먼저 내가 하나님 편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편이 된다는 것은 나의 뜻과 나의 정욕을 따라서 살아가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쫒아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번째로 이 말씀을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만족 하면서 살 수 있다’는 소극적인 의미로만 해석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문맥적인 의미에서 보면 만족이라는 의미로 해석 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내게 능력 주시는자 안에서 내가 모든 일을 할수 있다’는 이 문장의 의미는 ‘만족’이라는 좁의 의미의 차원을 넘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은 기적적으로 감옥문이 열리고 손수건만 가져다가 환자에게 갖다 놓아도 치료되는 기적과 능력도 나타났습니다 (행 16장;행19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가장 연약한 인간 그 자체였습니다. 그는 몸에 불치의 병을 가지고 있었고 이것을 고치기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세번이나 기도 했지만 헛수고였습니다 (고후 12: 8-10).
그러므로 빌립보서 4장 13절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의미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리고 하나님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자족할수도 있고 그 이상의 것들(모든것)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가면 우리가 어떤 환경에 처해 있든지 넉넉히 감당할수 있는 힘을 공급받으면서 궁핍할때나 풍부할때나 변함없이 자족하는 생활을 할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 당시의 지성인들이었던 스토아 철학자들은 ‘인간의 욕망을 절제하는 부단한 노력을 통하여 행복에 도달한다’고 가르쳤지만,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참된 만족을 누릴수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가 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능한 존재요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기에 마땅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지만, 동시에 그 한계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바라보는 자리로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그래서 “내게 능력 주시는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주신 비젼을 품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신자들은 새힘(능력)을 경험할 수있습니다(사 40: 28-31).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가면 어떤 환경앞에서도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깨닫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도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가면,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행복(자족함)을 누릴수 있는 사람, 하나님의 뜻안에서 어떤 문제든지 헤쳐 나갈수 있는 능력의 사람이 될수 있습니다. 이러한 여러분의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김곤주 목사(시드니새언약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