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곤주 목사의 원문중심 성경강해 시리즈
제5강 복음의 능력과 하나님의 의<1> (롬 1:16-17)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신자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 전하는 일을 부끄럽게 여기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상식이나 경험에 맞지 않은 이야기들을 잘 받아 들이지 않거나 종종 복음에 대해서 심한 거부감을 갖는 경우들도 있기 때문에 그럴만도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지성인이라고 스스로 자처하는 신자들 일수록 복음을 전하는 일을 부끄럽게 여기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막8: 38).
특별히 오늘 본문 16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여기서 ‘의’라는 말은 헬라어로 ‘디카이오쉬네’ (δικαιοσύνη)라는 말로서, 우리말 성경에서는 ‘의,’ ‘의로움,’ ‘정의,’ 또는 ‘공의’라고 번역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본문 17절에서 ‘하나님의 의’라고 말할때 그 ‘의’는 두가지 차원에서 이해 할수 있는데, 그 첫번째는 의롭다는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의요, 둘째는 구원의 행위로서 하나님의 의입니다. 이 부분은 많은 설명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다음 시간에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사는 이 시대 보다도 더 복음을 부끄러워할 수 밖에 없는 시대에 살았습니다. 그 시대는 헬라문화의 전성기로서 인간의 이성과 논리를 가장 고상하게 여기던 철학의 시대였고, 그 반면에 예수 믿는 신자들은 조랑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면서 심지어는 죽음을 당하기 까지 하던 시대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를 믿기전에는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과 학문을 배운 당시 최고의 지성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로 받아 들여졌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데 앞장 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자신이 핍박하던 예수를 만나는 신앙적을 경험을 하게 되었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보니 그분이 참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1장 16절에서, 우리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아야 할 이유는, 복음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믿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이유가 어디있습니까? 물론 소심한 성격이나 자기의 자존심 때문에 혹은 조롱과 핍박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거나 복음의 능력을 깊이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고등학교 시절, 학교 축제가 있었습니다. 그 순서 가운데 나를 지목해서 노래를 부르게 했습니다. 저는 유행가 가사를 아는게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영혼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때 그 무리들이 예수님 못박았네”] 이런 가사의 복음성가를 무대에서 불렀습니다.]. 그 일이 있은지 얼마뒤에 반 친구 중 한명이 저를 따라서 우리 교회를 나왔습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 말씀했습니다(고전 1: 18). 십자가의 도, 즉 십자가의 진리가 복음이요 그 복음이 곧 능력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능력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믿는 자에게만 능력이 됩니다. 그리고 이 복음을 믿는 일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 남녀노소, 빈부귀천 그 무엇도 상관이 없습니다. 복음을 믿는 자는 누구나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1725년에 영국에서 태어났던 존 뉴톤은 십대에 뱃사람이 되어 선원생활을 시작했고, 나중에 노예무역의 선장으로 일했습니다. 그러다가 큰 폭풍우를 만나서 배가 파선되자 처음으로 절박하게 하나님께 기도했고, 배는 파선된지 4주만에 구조되었습니다. 죤 뉴톤은 이 일 후에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고, 후에 목사가 되어 유명한 “나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 이라는 찬송가 가사를 쓰게 되었습니다.
일제 시대에 평양의 깡패로 이름을 날렸던 이기풍은 한때 선교사의 턱뼈를 부러뜨렸던 깡패였지만, 복음을 듣고 변화되어서 한국 최초로 안수받은 7명의 목사 중 한명이 되었습니다. 1963년도에 일가족 다섯명을 무참하게 도끼로 살해했던 고재봉은 감옥에서 예수를 믿고 사형을 받기 까지 1800명을 전도하고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된 삶에 대한 간증들이 헤아릴수 없이 많습니다. 복음은 어떠한 죄인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부끄러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복음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측면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그 두가지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다시말해서 하나님은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이지만 동시의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한량없이 사랑하지만 동시에 죄는 결코 용납하지 않으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한 형벌에서 구원하시고자 친히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공의를 완성시킨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의’와는 정반대 개념인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로마서 1장 17절에서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흘리신 십자가의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로움을 우리에게 주시는 사건이 바로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동시에 완성된 십자가의 사건이 복음이요, 이 복음이 바로 구원의 능력이라고 사도 바울은 선언합니다.
카톨릭 신부요, 신학교 교수였던 마르틴 루터는 로마서를 신학생들에게 가르치다가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의’가 인간의 종교적인 수행이나 선행으로 도달할수 없는 성격의 ‘의’ 즉 ‘하나님 의’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시말해서, 종교적인 선행이나 인간의 의로운 행위가 인간의 죄를 속죄하는 효력이 있다고 믿었던 카톨릭의 신앙관이 잘못됨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종교적인 선행이나 죽은자들을 위한 기도가 연옥에 있는 조상들을 천국으로 가게 한다고 믿었던 카톨릭의 교리들, 이와 관련하여 교황청이 면죄부를 파는 행위들이 결코 성경적인 진리가 아님을 선언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에 대한 깨달음은 중세 기독교의 세계관을 뒤흔들고, 복음의 의미가 점점 퇴색되어 갔던 중세 후기의 유럽시대에 종교 개혁의 불을 붙였고, 그 결과 개신교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유앙겔리온’ 즉 ‘좋은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무엇이 좋은 소식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이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소식입니다. 이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 졌고, 그 결과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관한 사건이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은 지금도 우리를 변화시켜 가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복음을 누리고 이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면서 이 복음을 증거하면서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김곤주 목사(시드니새언약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