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곤주 목사의 원문중심 성경강해 시리즈
제6강 복음의 능력과 하나님의 의<2> (롬 1:16-17)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1483년, 독일에서 태어났던 마르틴 루터는 법학을 공부하던 대학생 시절에 길을 가다가 갑자기 폭우를 동반한 천둥 번개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루터의 바로 옆에 벼락이 떨어져서 너무나 두려웠던 루터는 ‘자신을 살려 주면 신부가 되겠다’고 하나님께 서원 기도를 했고, 그 약속대로 그는 후에 신부가 되었습니다. 루터는 신부로서 고행과 수행을 계속했지만 죄인에게 진노하시는 심판의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마음의 불안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루터는 공부를 계속해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독일 비텐베르크(Wittenburg) 대학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어 로마서를 강해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루터는 본문 17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라는 이 말씀은 두렵고 의로우신 심판의 하나님이 나타나실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본문 1장17절이 복음의 진수를 보여주는 진리임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의”라는 이 구절에서 ‘의’라는 말은 헬라어로 ‘디카이오쉬네’ (δικαιοσύνη)라고 하는데, 우리말 성경에서는 ‘의’ ‘의로움’ ‘정의’ 또는 ‘공의’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 의”라는 표현과 관련해서 구약 성경에서 “의” (δικαιοσύνη)라는 단어는 두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로 이 ‘의’ (δικαιοσύνη)는 주로 ‘의롭다’고 선언하는 법정적인 용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다시말해서 재판석에서 재판관이 죄인에게 ‘의롭다’고 선언할때 쓰는 법적 용어입니다.
두번째로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행동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의미할때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성경의 실례를 보겠습니다. 먼저, 시 98편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의 구원을 알게 하시며 그의 공의를 뭇 나라의 목전에서 명백히 나타내셨도다”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와 하나님의 공의가 동시에 언급되고 있습니다.
또 이사야 51장 8절을 보면 “… 나의 공의는 영원히 있겠고 나의 구원은 세세에 미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처럼 구약 성경을 보면, 공의와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행위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공의가 죄인에게는 심판의 날이지만 동시에 의인에게는 구원의 날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하나님의 의는 행동하시는 구원의 능력을 보여 주시는 의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를 기본으로 우리는 본문 1장 17절에서 ‘하나님의 의’라고 말할때 그 ‘의’는 세가지 차원에서 이해 할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자신이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소유하신 의 라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의’요. 두번째는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해 주시는 법정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의’요, 세번째는 ‘구원의 행위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래서 본문 17절의 말씀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에 이른다’는 말은 복음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의로움을 주심으로서 ‘의롭다’고 선언하시고, 의롭다고 선언한 그 사람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이 사실은 로마서 3장 21절-24절을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 내용을 보면,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십자가에 피흘려 죽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의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1장 17절에서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말씀한 후에, 3장 21절에서는 ‘한 의가 나타났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자를 하나님께서는 의롭다고 인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들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시고, 의롭다고 선언 하신 후에는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 구원을 얻게 하심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주셨다고 그 다음 로마서5장8-9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 어떤 종교적인 선행이나 도덕적인 노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우리를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될 우리가 구원을 받아 영생을 얻게 하는 유일한 수단이 됩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우리를 구원하여 영생을 얻게 하는 것으로 끝나는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믿음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7절을 보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기록된다 오직 의인은 믿음을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이 말은 쉽게 말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이 요구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가 의인이요,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가 구원을 받고,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가 이 세상에서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설명하고자 사도 바울은 17절 마지막에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기록된 구약 성경 하박국 2장 4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 2장4절).
선지자 하박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세상 죄악에 물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바벨론 나라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악을 심판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박국 1장7-11절의 내용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언제까지나 보고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바벨론나라를 통하여 반드시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박국 선지자는 어떻게 악한 바벨론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할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항변할때 하나님은 하박국 2장 4절에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즉 하나님께서는 하박국 선지자에게 교만하고 악한 바벨론 나라 역시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지만 오직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씀하신것입니다. 그래서 2장5-20절의 내용을 보면 “화 있을찐저” 라는 말을 다섯번이나 반복하여 사용하면서 바벨론의 죄악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과 바벨론 뿐만아니라 온 세상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믿음의 대 원칙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세상의 모순된 현실앞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부인해서는 안됩니다. 비록 이 세상은 불의한 방법이 더 빨리 성공하고 정직하고 의롭게 살아가는 것이 더 손해를 본다고 해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져버리고 이 세상의 방법으로 살아가서는 안됩니다.
하박국이 살고 있는 유대나라가 곧 멸망하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하고 있지만 이 세상 역사를 주관하시고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는 의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깨달은 하박국은3장 16-17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여러분, 의인은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자요 (창15:6), 오직 믿음으로 시작해서 오직 믿음으로 끝나는 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을 읽어 보면, 믿음의 선진들은 오직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사자의 밥이 되고 화형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믿음을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기고 살았기에 세상 재물이나 세상 권세와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세상이 감당치 못했고 세상이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16절에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6-17절을 보면 ‘믿음’이라는 단어가 네번이나 반복해서 사용 되고 있습니다. 믿는자에게 구원을,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분명히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더 나아가서 이 믿음은 우리가 이 세상 마지막까지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야 함을 의미합니다. 믿음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과 역사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일차적인 믿음이라면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복음의 능력을 믿는 믿음안에서 살아갈때 나타나는 역사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입니다. 여러분의 하루 하루의 삶이 믿음의 발걸음이 되시길 바랍니다.
김곤주 목사(시드니새언약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