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곤주 칼럼
십일조에 대한 양 극단적인 생각
십일조에 대한 양 극단적인 생각은 언제나 경계해야 합니다. 그 하나는 말라기서3장 8-12절을 근거로 십일조만 하면 자동적으로 복받는다고 믿는 것입니다. 과연 십일조만 하면 자동적으로 물질의 복을 받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쉽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세상에서 정직하지 못한 방법으로 벌어들인 수입으로 아무리 십일조를 한들 하나님이 그것을 받지는 않으십니다. 그렇게해서 아무리 많은 소득을 거두어 드린들 그것을 하나님이 축복하신 것이라고 결코 말할수 없습니다. 또 더 많은 물질적 축복을 받겠다는 생각으로 십일조를 드린다면 그런 이기적이고 계산적의 생각으로 바치는 십일조는 평생 드려도 헛것입니다. 복받은 일은 꼭 “십일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마음이 중요하고 사랑의 실천이 중요합니다.
십일조에 대한 또 다른 극단적인 성경 해석이 있는데, 그것은 ‘십일조는 구약의 율법제도로서 신약시대에는 폐지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목회자들이 무지해서 혹은 자신들의 욕심을 위해서 지금도 계속해서 십일조를 가르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십일조를 내면 복받는다’는 극단적인 주장에 반발해서 생겨난 주장으로서, 지금 우리 주위에는 이러한 주장들이 퍼져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십일조 폐지론자들은 ‘우리가 모두 제사장(만인 제사장)이요 따라서 제사장 제도가 없어졌기 때문에 십일조도 없어졌다’고 해석합니다. 하지만 십일조는 본래 수입이 없는 가난한 이웃들과 제사장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제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일조가 제사장들의 생활을 책임지는 것으로 국한시켜서 ‘이제는 없어졌다’고 적용하면 곤란합니다. 또 ‘만인이 제사장 되었다’는 것의 의미는 ‘각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 선다’는 의미이지 실제로 제사장이 되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제사장과 제사제도가 없어졌기 때문에 십일조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주장은 십일조의 근본 정신과 거리가 있습니다. 오히려, 십일조의 원칙과 그 정신을 따르면 그것은 여전히 교회와 가난한자들을 위해서 필요합니다.
또, 십일조를 율법 시대에 한정해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창세기를 읽어 보면, 율법 시대 이전에도 십일조는 있었습니다. 야곱은 벧엘광야에서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시고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 오도록 하시면 평생 십일조를 바치겠다’고 서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자들이 아니라 율법의 정신(참 뜻)을 바로 알고 그 정신을 이어받고 지키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은 율법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초월(완성)하는 것입니다. 물론 제사 제도와 의식법은 폐지 되었지만 그외의 율법 내용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고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 마땅히 필요한 하나님의 법입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십일조의 의미에 대해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십일조는 모든 물질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신앙 고백의 표현이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물질의 청지기 일뿐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연장해 주시고 건강을 허락해 주지 않는 다면 어떨까요? 우리는 아무것도 거두어 들일수 없고 거두어 들인 소득도 더이상 내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십일조는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시고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의 은혜에 감사하며 드리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십일조 폐지론자들은 신약 성경에는 연보(헌금)외에는 십일조나 그외 어떤 항목의 헌금도 나오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십일조 폐지를 주장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구원받은 신자들은 어느 정도의 헌금을 해야 할까요? 초대 교회 신자들은 자신의 전부를 교회에 내 놓았습니다. 그러니 신약 성경이 보여주는 대로 하면 십분의 일이 아니라 전부를 바쳐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최소한 십분의 일을 하는 것이지 할수 있다면 십의 이조도 하고 십의 삼조도 해야 합니다. 그 금액을 다 교회에만 갖다 바치라는 말은 아닙니다. 교회도 필요하지만 십일조 본래의 정신대로 고아와 과부들과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소한 즉 십분의 일은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내가 가진 물질의 주인이 하나님임을 고백하고 구원의 은혜와 감사함으로 드리는 것이 십일조가 되어야 합니다.
두번째, 우리는 십일조(기타 헌금 포함)를 공동체적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영적인 가족입니다. 가족들이 여러가지 활동을 하고 가정이 건강하게 유지되기 위해서도 누군가 수고하고 많은 부분에서 재정을 마련하여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역시 가족 공동체로서 여러가지 활동을 해야 하고 그러한 활동을 하는데 재정적 분담이 필요합니다. 즉 우리가 진심으로 교회 공동체를 사랑한다면 자신이 가진 물질 가운데 십분의 일을 나누는 것이 기꺼이 즐거운 마음이 되지 않을까요?건강한 교회는 공동체 구성원이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로써의 권리와 책임을 고르게 나눠지는것입니다.
세번째, 십일조는 물질에 대한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는 자기 훈련의 도구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은 훈련을 통해서 성숙되어지는 면이 있습니다. 특별히 물질에 대한 부분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사실 인간의 부패한 마음과 욕심때문에 신자들이 인색함이나 억지로가 아닌 자원하는 심령으로 물질을 드린다는 것이 쉽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어떤 원칙을 정해서 지키지 않으면 쉽지 않은것이 사실입니다. 인간은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면에서 십일조는 우리의 신앙 훈련에 좋은 도구입니다.
넷째, 십일조는 한국 교회의 좋은 신앙 전통입니다. 성경의 십일조 정신은 존종되어지고 잘 이어받는 것이 앞으로 한국 교회가 살길입니다. 외국(이곳 호주도 만찬가지) 교회는 십일조를 안한다고 앞서가는 교회처럼 착각하는 분들이 있는데 말그대 착각입니다. 사실은 많은 서구 교회들이 십일조 교인들이 없어서 교회 건물을 유지하지 못하고 문을 닫고 있습니다.
물론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서 무너지는 것이지만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최소한 십일조는 따라가지 않겠습니까? 마음이 있는 곳에 물질도 있으니까요. 이런 말을 하면 일부 신자들은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교회 건물에 심한 반감을 가지기도 합니다. 물론 교회는 신자의 공동체이지 건물은 아닙니다. 그러나 신자들의 모임이 활성화되고 사랑의 관계가 회복되기 위해서 모일 공간이 있어야 하고 건물이 필요합니다. 심지어는 건물에 대한 심한 반감으로 가정에서 모이는 교회를 많이들 말하지만 가정 교회도 결국에는 장소가 문제가 되고 건물이 문제가 됩니다. 십일조에 관한 바른 이해와 바른 신앙위에 여러분의 신앙이 성숙되어 가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글을 마칩니다.
김곤주 목사(시드니새언약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