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근 목사 칼럼
멈추지 않는 심장
어느 날 문득, 쉼 없이 몰아치는 심장의 박동에 귀를 기울였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한 번의 휴식도 허락하지 않은 채, 단 한순간의 파업도 없이 제 자리를 지키며 치열하게 박동하는 심장. 이 경이로운 노동 앞에 깊은 고마움과 함께 근원적인 질문이 일었다. ‘도대체 무엇이 이 작은 근육을 이토록 강력하게, 그리고 영원히 멈추지 않게 만드는가?’
세상은 지속하기 위해 의지력을 쥐어짜라고 말한다. 그러나 심장은 정반대의 진실을 증명하고 있다. 심장이 멈추지 않는 것은 맹목적인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생명의 본질로서 ‘리듬’ 그 자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심장의 박동은 의식적인 노력을 넘어선 차원의 일이다. 심장 내부에 있는 ‘동방결절’이라는 전기 발전소는 0.8초마다 단 한 번의 오차도 없이 신호를 쏘아 보낸다. 우리가 삶에서 무언가를 지속하고 싶다면, 그 일을 의지력의 투쟁 영역에서 습관의 자동화 영역으로 강제 이식해야 한다. 의지로 견디는 것이 아니라,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삶을 멈추지 않게 하는 첫 번째 열쇠다.
그러나 습관만으로는 부족하다. 심장 근육이 지치지 않고 계속될 수 있는 또 다른 강력한 비결은 ‘불응기’라는 정교한 멈춤에 있다. 수축과 수축 사이, 아주 찰나의 휴식이 있기에 심장은 다시 폭발적인 힘을 응축할 수 있다. 멈춤은 퇴보가 아니다. 다음 박동을 위한 치열한 에너지의 충전이다. 습관이라는 시스템 안에 적절한 쉼을 설계할 때, 우리의 열정은 소진되지 않는 생명력을 얻는다.
마지막으로, 심장은 자신의 박동 그 자체를 즐긴다. 심장은 자신의 존재 이유가 곧 박동임을 알고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삶의 가치를 증명하는 사명이 될 때, 우리 뇌는 그 보상으로 끝없는 에너지를 공급한다. ‘좋아하는 일’을 ‘습관’으로 만들고, ‘정교한 휴식’을 통해 에너지를 관리하는 것. 이 세 박자가 맞물릴 때, 인생이라는 엔진은 멈추지 않는 심장처럼 요동치며 나아간다.
지속은 결심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다. 삶을 가장 위대한 목적지까지 데려다주는 것은 거창한 한 번의 도약이 아니라, 심장의 박동처럼 멈추지 않는 일상의 리듬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한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라디아서 6:9)
이 말씀처럼, 멈추지 않는 일상의 박동이 쌓일 때 우리 인생은 비로소 결실의 계절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치열하게, 그러나 흔들림 없이 자신의 리듬을 지켜가는 삶이 곧 승리하는 삶이다.
쉼과 놀이의 심리학
지난달, 한국에서 온 아들 가족과 함께 시드니에서 보낸 2주간의 시간은 참으로 분주하고도 아름다웠습니다. 다양한 명소를 방문하고 특별한 경험들을 공유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여행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날,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호주에서의 기억 중 가장 좋았던 게 무엇이니?” 잠시 고민하던 아이들의 대답은 뜻밖에도 매우 단순하고도 명확했습니다. “놀이터에서 놀았던 기억이 가장 좋았어요.”
수많은 화려한 볼거리와 체험을 뒤로하고 아이들이 꼽은 최고의 추억이 ‘놀이터’였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깊은 통찰을 던져줍니다. 우리는 흔히 인생을 ‘책임’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자신이 맡은 분야에서 치열하게 일하며 성취를 쌓아가는 과정이라고 정의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 여정의 이면에는 반드시 ‘쉼’과 ‘놀이’라는 토양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네덜란드의 역사학자 요한 하위징아는 그의 저서 『호모 루덴스』에서 인간을 ‘놀이하는 인간’으로 정의했습니다. 그는 인간 문화의 발달이 바로 이 ‘놀이 정신’에서 비롯되었으며, 일과 놀이가 엄격히 분리된 것이 아니라 놀이 속에서 창의적 에너지가 솟아나고 진정한 개인의 성숙이 일어난다고 역설했습니다. 즉, “잘 노는 사람이 일도 잘한다”는 말은 단순히 여가 생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경구를 넘어, 삶을 지탱하는 본질적인 생존 원리입니다. 일과 쉼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상호 보완적인 순환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역시 태초부터 ‘안식 (Rest)’의 가치를 끊임없이 강조합니다. 창조의 섭리 안에서 쉼은 나태함이 아니라, 다음을 향한 거룩한 멈춤이자 재충전의 시간입니다. 휴식이 없는 열심은 결국 소진으로 이어지며, 쉼이 결여된 삶은 자기 존재의 의미마저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창조의 사역을 마친 하나님께서도 일곱째 날을 복 주시며 안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창세기 2:3).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느꼈던 그 해방감은, 인위적인 성취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 즐거움을 느끼는 ‘놀이의 본능’에서 기인합니다. 우리 어른들도 인생이라는 놀이터에서 때로는 멈추어 서서 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숨을 고를 줄 알아야 합니다. 일과 쉼의 조화, 그 균형점 위에 서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라는 귀한 선물을 끝까지 건강하게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신학과 상담의 만남
학문의 세계를 깊이 들여다보면, 시대의 변화에 따라 지혜의 지형도가 어떻게 넓어져 왔는지 실감하게 됩니다. 예전에는 ‘신학’이라는 거대한 울타리 안에 목회 상담이라는 실천 신학의 한 과목이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은 어떠합니까. 상담학은 이미 실천 신학의 경계를 넘어 독자적인 상담 대학원과 학과로 우뚝 서며, 우리 시대가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학(學)’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인식의 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학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인식의 틀이라면, 상담학은 사람을 알아가는 인식의 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참된 지혜에 이르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깊이 알아가는 일만큼이나, 인간이라는 존재를 깊이 이해하는 일이 결코 소홀해질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러한 진리의 조화를 가장 아름답게 보여주는 비유가 바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3장에서 들려주신 씨 뿌리는 비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비유 속에서 하늘의 진리를 품은 씨앗이 ‘신학’이라면, 그 씨앗이 뿌려지는 토양은 곧 ‘상담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상담학이란 다름 아닌 예수님이 말씀하신 마음밭을 고르고 일구어가는 거룩한 과정입니다.
아무리 좋은 씨앗이라도 딱딱하거나 가시덤불이 우거진 땅에 떨어지면 생명력을 발휘하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좋은 씨앗이 옥토 같은 토양에 깊이 뿌리내릴 때 비로소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게 됩니다. 신학이 그 자체로 머물러 있다면 관념에 불과할 뿐입니다. 신학이 상담학과 손을 잡고 인간이라는 옥토밭과 만날 때, 하나님의 말씀은 비로소 생명의 열매로 피어납니다. 오늘날 신앙안에서 삶의 열매나, 성도의 변화가 없음은 토양의 문제로 볼수 있습니다. 사실 이사야 선지자가 앞으로 오실 메시아 사역을 설명하면서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리고 가장 첫번째 사역으로, “마음 상한자를 고치며,”(사61:1)라고 명확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이 사역을 소홀히 한것에 솔직하게 인정하고, 이에 대한 수업료를 많이 부담하고 있습니다.이 두 학문은 어느 한쪽도 포기할 수 없는, 언제나 함께 걸어가야 할 동반자인 것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신학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 왔습니다. 비유하자면 생명을 잉태할 좋은 종자를 연구하는 일은 이제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었습니다. 그러나 그 종자를 받아들이는 인간의 토양, 즉 심리적 건강과 영혼의 상처를 다루는 상담학은 여전히 끊임없이 발전해야만 합니다. 특히 인공지능(AI)이 모든 것을 대체할 것 같은 첨단의 시대일수록, 인간의 내면을 어루만지고 회복과 치유를 이끌어내는 상담학의 가치는 더욱 빛을 발할 것입니다. 과학이 인간의 뇌와 기술을 설명할 수 있을지언정, 상처 입은 영혼의 결을 만지고 눈물을 닦아주는 일은 오롯이 사람과 사람, 그리고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상담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신학과 상담의 만남은 목회 현장은 물론이고,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삶에 깊은 유익과 구원의 실제를 선물합니다. 하늘의 진리가 인간의 가장 깊은 마음속에 스며들어 풍성한 열매를 맺는 그 조화로운 길 위에, 우리 모두의 발걸음이 늘 함께하기를 소망해 봅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맺히기도 하였으니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마태복음 13:8)
마음의 발전소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 속에서 숨 쉬고 살아간다. 물리적인 세계를 움직이는 심장이 ‘전기’라면, 인간 사회와 마음의 세계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동력은 단연 ‘관계와 소통’일 것이다. 에디슨이 전구를 밝힌 이래 인류는 전기를 통해 어둠을 지배해 왔지만, 첨단 기술이 고도화된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 삶을 결정짓는 가장 강력한 키워드는 단연 전기에너지, 그리고 이와 놀라울 정도로 닮은 ‘인간의 연합’이다.
그렇다면 전기는 도대체 어떻게 세상에 태어나는 것일까? 수력, 화력, 원자력, 풍력 등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수많은 발전 방식은 사실 터빈을 돌리기 위한 각양각색의 ‘수단’에 불과하다.
그 복잡한 껍데기를 벗겨내고 본질을 들여다보면, 전기를 낳는 진짜 핵심은 단 하나로 수렴한다. 바로 강력한 자석의 자기장 안에서 코일이 N극과 S극의 자석에 의해 맹렬하게 회전하는 ‘전자기유도’ 현상이다. 외부에서 가해지는 물리적인 힘이 코일을 돌리고, 그 회전 속에서 전자의 흐름인 ‘전류’가 폭발하듯 쏟아져 나온다.
즉, 겉모습이나 방법이 아무리 다양해도 전기를 일으키는 원리는 정확히 하나이듯, 복잡한 세상의 이치 역시 본질을 꿰뚫을 때 비로소 명쾌해진다.
이 물리적 원리를 우리의 삶과 인간관계로 가져와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자석이 N극과 S극이라는 서로 다른 성질을 만날 때 비로소 강력한 인력과 에너지를 뿜어내듯, 인간사 역시 나와 완전히 똑같은 사람보다는 서로 다른 성향과 결핍, 그리고 고유한 은사를 가진 존재들이 만날 때 진짜 역동적인 에너지가 발생한다.
두 사람이 마음의 회로를 열고 서로를 향해 다가가 소통할 때, 그 상호작용 속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따뜻한 정(情)과 사랑의 전기 작용이 일어난다. 차갑고 단절되어 있던 영혼의 회로에 불이 켜지고, 서로의 온기로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치유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인간은 결코 혼자 존재할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작은 터빈이 미약한 전기를 만들고, 거대한 발전소가 도시를 밝히듯, 우리 인간도 함께 모여 연합하면 얼마나 놀라운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서로 다른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각자의 이기심을 내려놓고 하나로 맞물려 돌아갈 때, 개인의 역량을 아득히 뛰어넘는 엄청난 시너지와 문명적 에너지가 폭발한다. 그 가장 압도적인 증거가 바로 1969년의 아폴로 11호 달 착륙 프로젝트이다. 당시 로켓 과학자, 수학자, 프로그래머, 그리고 수십만 명의 기술자들이 각자의 전문 분야를 초월해 하나의 거대한 목표로 완벽하게 ‘연합’했을 때, 인류는 지구의 중력을 뿌리치고 달이라는 미지의 세계에 발을 내딛는 기적을 창조해 냈다. 수많은 톱니바퀴가 오차 없이 맞물릴 때만 가능한 거대한 에너지의 승리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날 21세기에 우리 사회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바로 이 ‘연합의 부재’에 있다. 모두가 각자의 자기의 것만을 주장하지만, 서로 마음의 기어를 맞추고 단단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연합의 기술’은 갈수록 퇴화하고 있다. 네트워킹은 넘쳐나지만 진정한 결속은 사라진 시대, 각자의 극에 갇혀 서로를 밀어내는 척력만 가득한 현대 사회의 단면은 그래서 더욱 뼈아프다. 힘을 잃고 변화를 하지 못하고 있다.
인간의 힘과 기술로 이뤄낸 역사적 연합의 가치를 넘어, 진정한 연합의 궁극적인 원천은 성경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온 세상 믿는 이들을 위해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라며 성부와 성자 하나님의 완전한 연합 안으로 우리를 초대하셨다.
나아가 마태복음 18장 20절을 통해 주님은 이렇게 약속하셨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태복음 18:20)
단 두 사람이라도 주님의 이름 안에서 마음의 회로를 연결하고 온전한 연합을 이룰 때, 그곳이 바로 하늘의 능력이 임하는 가장 작은이자 가장 강력한 영적 발전소가 된다는 뜻이다. 인간의 이기심과 상처로 끊어진 관계의 회로는 오직 이 위대한 사랑과 임재의 전류가 흐를 때 비로소 온전히 회복될 수 있다.
전기가 끊어진 도시는 한순간에 암흑에 휩싸이듯, 연합이 깨어진 공동체는 생명력을 잃고 차가운 침묵에 빠진다.
오늘, 자석과 코일이 만나 전기를 빚어내듯, 그리고 두 사람이 모인 그곳에 주님이 함께 임하시는 거룩한 연합 속에서, 우리의 삶에서도 서로 다른 온기를 가진 이들이 마음의 회로를 단단히 연결하기를 소망해 본다. 연합의 거대한 터빈을 돌릴 때 비로소 세상은 가장 따뜻하고 눈부신 빛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김병근 목사
엠마오상담대학 학장, 시드니성시화운동 직전대표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