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근 목사 칼럼
벌레만도 못한 놈
오늘 시드니의 수은주가 36도를 훌쩍 넘겼습니다. 숨 막히는 더위 속에서 우리는 에어컨과 첨단 기술의 도움을 받으며 겨우 하루를 버텨냅니다. 문득, 이 극한의 환경에서 우리보다 훨씬 더 오래 지구를 지켜온 작은 생명체들, 바로 곤충들의 생존 방식이 궁금해졌습니다.
우리는 흔히 곤충을 작고 하찮은 존재, 기껏해야 다리가 여섯 개 달린 귀찮은 벌레로 여깁니다. 심지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향해 “벌레만도 못한 놈”이라고 비하하기도 하죠. 하지만 생물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곤충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경이로운 지혜를 지닌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의 역사보다 긴 곤충은 공룡이 활보하던 시대에도, 지구를 뒤흔든 대멸종의 순간에도 곤충은 끈질기게 살아남았습니다. 그들은 살기 좋은 온대지방은 물론, 무더운 열대지방과 극한의 추위를 자랑하는 극지방까지, 지구상 모든 곳에 분포합니다.
전 세계 생물의 절반, 심지어 조사되지 않은 열대우림 지역까지 포함하면 지구 생물의 80%가 곤충일 것이라는 곤충학자들의 예측은 그들의 생태적 지위를 압도적으로 증명합니다. 이 작은 생명체들이 이토록 오랫동안 번성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바로 그들의 환경에 맞는 놀라운 적응력에 있습니다.
곤충의 지혜는 인간이 살기 어려운 극한의 환경에서 더욱 빛을 발합니다. 예를 들어, 초여름 해질녘 우리 눈앞에서 성가시게 날아다니는 깔따구는 남극에서도 발견됩니다. 깔따구 애벌레는 남극의 차가운 얼음 속에서 무려 2년이나 견딘 후에야 어른벌레가 되는데, 이때 단단한 껍질 속으로 들어가 추위를 버텨내는 전략을 사용합니다. 나방 애벌레가 나뭇잎 사이에 숨거나 자신만의 집을 만들어 천적을 피하듯, 이들은 환경에 맞춘 방어와 생존의 설계자인 셈입니다.
특히 오늘처럼 뜨거운 날씨에 주목해야 할 것은 그들의 체온 조절 전략입니다. 곤충은 스스로 체온을 조절하지 못하는 변온(ectothermic) 동물이지만, 환경을 영리하게 활용합니다.
북극에 사는 네발나빗과 나비들은 검은 무늬가 있는 날개로 햇빛을 흡수해 체온을 유지합니다. 반면, 더운 지방의 나비들은 빛을 반사하는 흰색 날개를 가져 체온 상승을 막습니다. 날개는 단순한 비행 도구가 아니라 정교한 태양열 조절 장치인 것입니다.더운 날에는 활동을 줄이고 그늘이나 습한 곳으로 이동하여 체온 상승을 피하고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합니다. 심지어 파리와 같은 일부 곤충은 침을 뱉어 증발 냉각을 이용하거나, 날개짓으로 공기를 순환시켜 체온을 낮추는 지혜를 발휘하기도 합니다. 일부 종은 더위가 너무 심할 때 알이나 번데기 상태로 휴면에 들어가 생애 주기를 조절함으로써 극한 환경을 통과합니다.
곤충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환경에 맞춰 살이왔습니다. 하나님 창조의 신비 그 자체입니다. 그들의 생존 전략은 단순한 본능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지구 환경에 대한 가장 완벽한 지혜의 보고입니다. 이제, “벌레만도 못한 놈”이라는 말을 금지 해야 하지 않을까요?
‘주의 날’의 소고
‘주의 날 (The Lord’s Day)’은 문자 그대로 ‘주님께 속한 날’을 의미하는 소유격 표현입니다. 이는 단순히 주인이 있는 날을 넘어,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위해 성별 (聖別)하시고 지정하신 날임을 강조합니다. 이 날은 우리 개인의 소유나 계획에 우선순위를 두는 날이 아니라,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신 주님의 주권 아래 놓인 날입니다.
요한계시록 1장 10절에서 사도 요한은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라고 기록하며 이 날을 언급했는데, 이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일주일의 첫날(안식 후 첫날, 일요일)을 특별히 구별하여 지켰던 전통에서 유래합니다. 따라서 주의 날은 그리스도의 승리, 곧 죄와 사망을 이기신 구속 사역의 완성에 초점을 맞춥니다.
주의 날은 구약의 안식일 (토요일)과 연결되어 있지만, 중요한 구별점이 있습니다.주의 날은 안식일이 상징했던 참된 안식,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안식의 실현을 매주 기념하는 날입니다. 따라서 이 날은 의무감이나 율법적인 규제를 넘어선, 구원받은 백성의 자발적인 기쁨과 감사의 날이 되어야 합니다.
주의 날을 주님의 소유로 인정하고 주님께 기쁨이 되는 하루를 사는 것은 다음의 세 가지 핵심적인 영역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A. 예배 (Worship) – 하나님께 초점 맞추기
주의 날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공동체적 예배입니다. 세상의 염려와 분주함에서 벗어나, 창조와 구원의 하나님께 우리의 관심과 경배를 집중하는 시간입니다. 성도들이 함께 모여 성경 말씀을 배우고, 설교를 통해 영적인 양식을 공급받으며 믿음을 성장시키는 시간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세례와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확인하고 은혜를 체험하는 시간입니다.
B. 성도의 교제 (Koinonia) – 공동체를 세우기
주의 날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 된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고 세워주는 교제의 날입니다. 서로의 신앙생활을 나누고, 어려움을 함께 짊어지며, 말씀과 기도로 서로를 격려함으로써 지상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대리하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주님 안에서 모든 차별과 경계를 넘어 하나 됨을 실천하며, 평화와 용서를 배우는 훈련의 장입니다.
C. 선행과 봉사 (Service & Mission)
주님의 기쁨이 되는 삶은 교회 안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세상으로 확장됩니다. 주님의 날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웃이나 도움이 필요한 성도들을 돌아보는 ‘자비의 행위 (Acts of Mercy)’를 실천하는 데 집중하는 시간입니다. 예배를 통해 받은 은혜와 힘으로, 일상생활로 돌아가기 전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복음을 전할 준비를 합니다.
D. 개인적인 경건 생활 (Devotion)
공동체적 활동 외에도, 주의 날은 개인의 영적 충전을 위해 필수적입니다. 평소 시간에 쫓겨 깊이 하지 못했던 성경 말씀 읽기, 묵상, 그리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기도)에 집중합니다. 신앙 서적이나 경건 서적을 읽으며 신앙을 심화시키고, 세상의 정보를 잠시 차단하고 영적인 정보에 몰입합니다.
주의 날은 단순히 쉬는 날, 혹은 예배에 ‘참석’하는 날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의 부활을 매주 기념하며, 주님께서 우리의 삶과 시간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매주 돌아오는 축제입니다. 이 날의 실천은 예배, 교제, 봉사 및 개인 경건을 통해 우리 자신을 새롭게 하고,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갈 힘을 공급받는 소중한 기회입니다. 주의 날을 온전히 구별함으로써 우리는 주님께 기쁨이 되고, 우리 영혼은 참된 안식과 회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모두 행복한 주일 하루 되세요.
에뮤 (Emu)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
에뮤 (Dromaius novaehollandiae)는 오직 호주 대륙에만 서식하는 대형 조류입니다. 현존하는 새 중에서 아프리카의 타조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새로 알려져 있으며, 호주의 상징적인 동물 중 하나로 꼽힙니다.
에뮤는 ‘주금류 (Ratite)’에 속하며, 날 수 없는 거대한 새들 (타조, 레아, 화식조 등)과 같은 그룹입니다. 다 자란 성체의 평균 키는 약 1.5m에서 1.9m에 달하며, 몸무게는 보통 30kg에서 55kg 사이입니다. 에뮤는 호주의 숲, 초원, 사막, 관목 지대 등 광범위한 환경에서 발견됩니다. 이는 극심한 기후 변화에도 적응할 수 있는 놀라운 생존력을 보여줍니다. 깃털은 회색이나 어두운 갈색으로, 짧고 거친 털로 덮여 있어 마치 털복숭이 같은 외모를 지닙니다. 날개는 거의 퇴화하여 날지 못하지만, 그 약점을 상쇄할 만큼 강력하고 잘 발달된 다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다리 덕분에 에뮤는 시속 50km가 넘는 속도로 꾸준히 달릴 수 있습니다. 에뮤의 가장 흥미로운 생물학적 특징 중 하나는 몸의 구조상 뒤로 걸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오직 앞으로만 나아갈 수 있도록 진화했습니다.
에뮤가 담고 있는 삶의 지혜
에뮤는 뒤로 걸을 수 없습니다. 이는 단순한 생물학적 특징을 넘어, 인간의 삶에서 과거의 실수나 후회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명확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 삶의 여정에서 실패와 좌절은 언제나 존재하지만, 에뮤가 오직 전진만을 선택하듯이 우리도 믿음과 희망을 향해 뒤돌아보지 않고 달려나가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신앙의 길은 뒤를 돌아보거나 과거의 짐에 묶여 머뭇거릴 수 없는 경주와 같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이미 지나간 일을 잊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함을 강조합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곧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받으려고 달려가노라” (빌립보서 3:13-14)
에뮤는 하늘을 날지 못하는 새라는 약점을 지녔지만, 대신 강력한 다리와 지구력을 키워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속도와 생존력을 갖추었습니다. 이는 자신의 한계와 약점을 인정하되, 그것에 머무르지 않고 주어진 재능과 강점을 꾸준히 갈고닦아 발전시키는 삶의 태도를 상징합니다.
인간 역시 완벽하지 않고 각자의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에뮤처럼 자신의 강점을 집중적으로 단련하고 꾸준한 인내를 통해 노력을 지속할 때, 우리는 어떤 역경과 고난에도 굴하지 않는 강인함으로 삶을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힘이 아닌, 오직 주님을 의지할 때 그 인내와 강인함은 완성됩니다. 성경은 우리가 지치지 않고 달릴 수 있는 힘의 근원을 약속합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이사야 40:31)
이처럼 에뮤는 겉으로 드러난 약점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지구력으로 삶을 영위하듯이, 우리 역시 하나님께서 주신 새 힘으로 꾸준히 나아갈 때 궁극적인 승리를 얻을 수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문제가 있는 곳은 답은 있다
문제가 있는 곳에 답이 있다. 이 명제는 지난 40년이 넘는 호주 이민자로서의 삶을 관통하는 가장 확실하고 변하지 않는 진리였습니다. 33살, 낯선 땅에 첫 발을 내디딘 순간부터 지금까지, 삶은 잔잔한 호수가 아니라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와 같았습니다. 하나의 문제가 해결되면, 곧바로 더 크거나 혹은 전혀 다른 형태의 문제가 다음 파도처럼 밀려왔습니다. 생존의 문제, 언어와 문화의 장벽, 자녀 교육의 고민, 교회의 문제등, 이민자의 삶은 문제의 연속이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지금 되돌아보면 그 수많은 문제 중 어느 것 하나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는 것은 없습니다. 폭풍우가 지나간 뒤의 해변처럼, 모든 흔적은 깨끗하게 씻겨나갔거나 성장의 자양분으로 변모했습니다. 이 경험은 저에게 확신을 주었습니다. 문제가 주어졌다는 것은, 이미 그 문제와 함께 해답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문제와 해답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만일 답이 없다면, 그것은 애초에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거나, 자연의 이치에 맞지 않는 억지 문제였을 경우뿐입니다. 우리가 학창 시절에 출제자가 오류를 범한 시험 문제를 모두 정답 처리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현실의 삶에서 마주치는 진정한 문제들은 우리를 가르치고 성장시키기 위해 주어진 것이며, 그렇기에 반드시 해결 가능한 조건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진짜 어려움은 답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답을 보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문제의 거대함에 압도당해 공포와 당황 속에서 시야가 좁아집니다. 마치 열쇠가 바로 옆 테이블에 있는데도 집 전체를 뒤지는 격입니다. 패닉 상태에서는 가장 단순하고 명료한 해결책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끈기를 가지고 시선을 돌리고, 관점을 바꾸어 찾고 또 찾으면, 해답은 늘 문제의 그림자처럼 그 옆에 겸손하게 서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두려움 없는 문제 해결의 3단계 공식
따라서 문제가 눈앞에 닥쳤을 때, 두려움에 떨거나 도피할 필요는 없습니다. 항상 일이 생겼을때 직면 보다는 피하거나 우회를 하려는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많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성장의 기회가 주어졌다는 긍정적인 신호입니다. 수십 년간 수많은 파도를 헤쳐 오며 제가 정립한 문제 해결의 공식은 다음과 같이 세 단계를 거칩니다.
1.지혜의 구함
가장 먼저 저는 기도합니다. 문제의 크기와 상관없이, 저의 힘과 지혜를 의지하기보다 성령 하나님의 지혜를 구합니다. 이 과정은 단순한 염원이 아닙니다. 이는 문제 속에서 감정적인 동요를 잠재우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상황을 바라보게 만드는 정신적인 앵커를 내리는 행위입니다. 지혜를 구할 때,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 속에서 핵심 매듭을 볼 수 있는 영적인 통찰을 얻게 됩니다.
2.현실적인 첫걸음을 찾다
지혜를 구하며 마음이 평온해지면, 다음으로 제가 즉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냉철하게 분석합니다. 아무리 큰 문제라도 반드시 시작점이 되는 작은 행동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재정 문제라면 지출 목록 정리하기부터, 관계 문제라면 대화 시작하기부터가 될 수 있습니다. 거대한 산봉우리를 한 번에 오르려 하지 않고, 눈앞의 돌 하나를 치우는 것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3.지체 없이 행동하다
마지막이자 가장 중요한 단계는 지체하지 않고 그 일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완벽한 준비를 기다리거나 머뭇거리는 순간, 문제는 더 단단한 성벽이 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일단 움직여야 합니다. 실행은 그 자체로 또 다른 지혜를 낳고, 문제의 본질을 더 명확하게 드러내 줍니다. 큰 산을 옮기는 방법이 삽으로 한 줌의 흙을 퍼내는 것과 다르지 않듯이, 모든 문제 해결의 방법은 이 세 단계를 반복하는 것과 같습니다.
문제는 우리 삶을 멈추게 하는 장애물이 아니라, 우리를 다음 단계로 이끌어주는 등대입니다. 등대가 비추는 빛을 따라 두려워하지 않고 영적인 평안과 실질적인 행동을 병행한다면, 답은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스가랴 4장 7절 (개역개정)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슥 4:7)
변화를 시도하라
최근 필자는 유튜브를 보다가 깜짝 놀란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공영 방송 (KBS,MBC,SBS), 골프장, 학원, 노래방, 주유소 등 오랜 기간 우리 사회를 지탱해 온 전통적인 사업군이 줄줄이 문을 닫아가고 있다는 현실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이 단순한 ‘경기 불황’ 때문만이 아니라는 사실 그 자체입니다. 이는 곧 세상이 바뀌고 있다는 것입니다. 소비자 행태, 인구 구조, 기술 환경, 그리고 문화적 가치관이 근본적으로 재편되는 ‘사회 전반의 전환 (Societal Shifts)’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에 거센 파도가 몰려오고 있는 증거입니다. 정신을 차려할 때를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실을 직시히고 미래를 볼수 있는 자만이 살아남게 됩니다.
1. 플랫폼 혁명과 콘텐츠의 디지털 대이동
공영 방송국의 폐업 위기는 미디어 소비 방식의 구조적 변화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젊은 세대가 더 이상 TV 채널을 돌리지 않고, 넷플릭스, 유튜브, 틱톡 등 온라인 플랫폼 (OTT)으로 완전히 이동한 것이 핵심입니다.
TV가 거실의 중심이던 시대는 끝났습니다. 개인화되고 파편화된 모바일 환경에서, 편성표에 묶인 방송 콘텐츠는 속도와 즉시성에서 경쟁력을 잃었습니다.
기업의 광고 예산이 전통 미디어에서 검색, 소셜 미디어 등의 디지털 플랫폼으로 완전히 옮겨가면서, 방송사의 재정 기반이 붕괴했습니다.
보지 않는 방송에 의무적으로 요금을 내야 한다는 ‘수신료’에 대한 대중의 불만은 콘텐츠 경쟁력 약화와 맞물려 공영 방송의 존재 이유 자체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2. 세대 가치관의 전환과 ‘가성비’ 소비 문화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 특수를 누렸던 골프장과 오랜 시간 직장 회식의 상징이었던 노래방·유흥업소의 쇠퇴는 한국인의 여가 방식과 소비 가치관이 ‘가성비 (가격 대비 성능)’와 ‘개인화된 행복’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해외여행 재개 후 수요가 분산된 가운데, 폭등한 그린피와 캐디피는 젊은 층과 일반 소비자들을 ‘러닝’이나 ‘게임’ 등 저비용, 고효율 취미로 대거 이탈시켰습니다.
주 52시간 근무제와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은 강압적인 회식 문화를 해체했습니다. 직장인들은 퇴근 후 개인적인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고비용의 유흥업소 대신 코인노래방과 같은 저렴하고 짧은 여가를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3. 인구 구조의 불가역적 변화
학원 (사교육) 산업의 위축은 한국 사회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구조적 문제, 바로 저출산으로 인한 학령인구의 감소에서 비롯됩니다. 이는 시장 수요 자체가 뿌리부터 무너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교육 대상인 학생 수가 줄어드는 것은 학원 입장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수요 감소입니다. 아무리 좋은 커리큘럼도 ‘학생’이 없으면 무의미합니다.
저렴하면서도 질 높은 인터넷 강의 (인강), EBS, 유튜브 학습 콘텐츠 등이 보편화되면서, 학원이 제공하는 ‘정보와 학습 자료’의 차별성이 크게 줄었습니다. 소비자들은 가계 경제의 불황 속에서 교육비를 줄일 수 있는 대안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4. 기술 발전과 정부 정책의 이중 압력: 주유소의 생존 경쟁
주유소의 폐업은 거스를 수 없는 ‘기술의 흐름 (친환경차 증가)’과 ‘정책적 압력 (알뜰주유소)’이 결합된 결과입니다.
전기차, 수소차, 하이브리드 차량의 확산은 장기적으로 휘발유·경유 수요를 감소시키는 주요 요인입니다. 주유소는 미래 수요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투자 대비 수익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1990년대 10%대였던 영업이익률이 최근 1~2%대로 추락한 상황에서, 정부가 유가 안정을 위해 지원하는 ‘알뜰주유소’의 확산은 일반 주유소의 가격 경쟁력을 앗아갔습니다. 높은 운영 비용과 환경 규제 부담까지 겹치면서 폐업 외에 다른 선택지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한국의 사업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과거의 성공 방식을 버리고, 소비자의 ‘가성비’ 요구와 ‘개인화’된 니즈에 맞추어 사업 구조 자체를 재설계하는 새로운 생존 공식이 절실합니다. 전통적인 사업군이 겪는 위기는 단순히 경제가 나빠서가 아니라,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교훈을 남깁니다. 앞으로 이러한 형상은 사업세계에만 영향을 준다고 볼수는 없습니다. 시대를 바라보는 통찰력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대처 능력의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변화하는 자만이 발전하고 살아남게 됩니다.
시대를 통찰하고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지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이사갈 자손 중에서 시세를 알고 이스라엘이 마땅히 행할 것을 아는 우두머리가 이백 명이요, 그들은 모든 형제를 통솔하는 자였으니” (역대상 12:32)
오늘, 시드니의 열기
오늘 필자가 살고 있는 시드니 지역에는 39-42도 까지 수은주를 높일 예정이다. 최고 기온에 육박하며 도시 전체가 거대한 가마솥처럼 변하고 있습니다. 지금7시가 조금 지났지만 더위를 체감힐수가 있습니다. 이 정도 기온은 단순히 ‘덥다’는 느낌을 넘어,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뜨거운 오븐의 열기가 온몸을 덮치는 듯한 압박감을 줍니다.
오늘날 우리가 겪는 시드니의 40도의 폭염과 전 세계적인 기록 경신 현상은 우연이 아닌 지구 온난화 (global warming)의한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이산화탄소 (CO_2) 등 온실가스가 대기 중에 쌓이면서 지구의 열이 밖으로 나가지 못해 평균 기온이 상승하고 있습니다. 지구의 평균 기온이 조금만 상승해도, 통계적으로 폭염과 같은 극한 기상 이변이 발생할 확률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납니다. 과거에는 100년에 한 번 일어날 법한 더위가 이제는 매년 반복되고 있습니다. 온난화로 인해 제트기류가 약해지면서 고기압이 특정 지역에 정체되어 뜨거운 공기를 가두는 현상이 잦아지고 있으며, 이는 중동과 호주 등에서 발생하는 살인적인 폭염의 직접적인 원인이 됩니다.
국가적 차원의 강력한 의지와 정책적 노력이 필수적입니다. 화석 연료 중심의 에너지 구조를 재생 에너지로 전환하고,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한 국가적인 법적 규제와 인센티브가 필요합니다. ‘열섬 현상’을 완화하기 위해 도심 내 녹지를 확충하고, 열 차단 도로 포장이나 쿨링 센터 운영 등 폭염에 강한 도시 설계를 도입해야 합니다. 기후 변화는 국경이 없는 문제입니다. 파리 협정 (Paris Agreement)과 같은 국제적 약속을 철저히 이행하고 전 지구가 함께 공동 대응해야 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지역과 공식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세계 최고 기온: 미국 캘리포니아 데스밸리 (56.7C), 1913년 7월 10일 관측 (WMO 공식 인정).
근 중동의 극한 폭염의 사례는, 쿠웨이트 미트리바: 54C (2016년), 이라크 바스라: 53.9C (2016년), 이란 아후바즈: 53.7C (2017년)등입니다.
폭염 시 나타나는 주요 신체 증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온열질환으로 열사병 (Heat Stroke)입니다: 체온 조절 중추가 마비되어 체온이 40C 이상으로 치솟고 의식을 잃는 응급 상황입니다.
열탈진 (Heat Exhaustion)입니다: 심한 땀 배출로 수분과 염분이 부족해져 피로, 어지럼증, 구역질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열경련 및 열실신입니다: 근육 경련이나 일시적인 뇌 혈류 부족으로 인한 실신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기타 여러가지 반응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열부종 (부기)이나 땀띠 (열발진)가 발생할 수도 있고, 집중력 저하, 짜증 증가, 심한 탈수 현상이 동반하기도 합니다.
이 때 우리가 할수 있는 일은 시원한 그늘이나 에어컨이 있는 실내로 이동합니다. 젖은 수건이나 얼음팩으로 몸을 식힙니다. 의식이 있을 경우 물이나 이온 음료를 섭취합니다. 의식 저하 등 심각한 증상 시 즉시 응급조치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이렇게 더운 날씨에도 주안에서 지혜롭게 잘 대처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안에서 행복한 하루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더 추가한다면 시드니 땅에 성령의 열기로 충만했으면 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6-18).

성경의 사랑과 역사의 은혜
사랑
필자는 설교자로서도 설교중에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고, 그리고 다른 설교자들로 부터도 이 말을 수 없이 들어왔다. 전하면서도 그리고 들으면서도 항상 뭔가 좀 막연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떻게 성경 66권의 말을 다 지켜며 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느날 성령께서 예수님의 하신 말씀이 생각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말씀이 확인되면서 사랑하면,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 (마22:40)에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바울도 이 말씀을 같은 맥락에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롬10:13). 결국 성경 66권을 사랑이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처럼 사랑하면 성경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성경을 수백 번을 읽고 또 읽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바울은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어도, 그리고 자신을 불사를 정도의 구제를 해도 사랑이 없이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요한복음 13장 34절에서 다시, 사랑을 새계명으로 명명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할 때 제자의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는 곧 제자훈련은 성경공부나 어떤 프로그램을 마치는 것이 아니라 사랑훈련이 되어야 함을 말해 줍니다.
은혜
또한 이와 같이 2000년의 교회 역사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을 단 한단어로 표현을 한다면, 그 사랑이 지난 2000년의 인류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구현된 방식은 ‘은혜’라는 단어로 요약됩니다. 은혜는 자격 없는 자에게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호의이며,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개입입니다. 기독교 역사의 굽이마다 이 은혜의 발자취가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간략하게 역사속의 은혜를 정리해 보면, 로마의 서슬 퍼런 칼날 아래서 기독교가 소멸하지 않고 오히려 제국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전략이나 힘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을 이기는 소망을 부어주신 하나님의 압도적인 은혜가 연약한 자들을 통해 복음의 불길을 옮겨 붙였습니다. 또한 제도와 권력이 종교의 본질을 왜곡하고 인간의 공로가 진리를 가리던 어두운 시절에도 은혜는 살아 움직였습니다. 루터를 비롯한 개혁자들을 통해 “오직 은혜 (Sola Gratia)”라는 진리가 다시 울려 퍼졌을 때, 교회는 비로소 죽음의 늪에서 생명의 길로 회복되었습니다.
근대사에서도 낯선 땅으로 향했던 이름 없는 선교사들의 발걸음, 가난과 질병의 현장에서 묵묵히 헌신한 봉사의 손길들은 은혜에 빚진 자들이 뿜어낸 거룩한 향기였습니다. 세계 역사의 지평이 넓어진 배경에는 항상 인간의 계산을 뛰어넘는 은혜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오늘 지금 이 순간에도 교회는 여전히 부족하고, 때로 실패하며, 세상의 질타를 받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여전히 살아 숨 쉬며 생명을 살리는 역사를 이어가는 것은, 교회의 탁월함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포기하지 않으시는 은혜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관계하실 때 항상 이 두 가지 방식을 사용하셨습니다.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알리시고, 그 사랑을 성취하기 위해 은혜의 손길을 내미셨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마음이며, 은혜는 그 마음이 역사로 나타난 결과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 우리 삶의 ‘목적’이라면, 역사가 증명하는 은혜는 그 목적지에 도달하게 하는 ‘동력’입니다. 우리가 길을 잃을 때 성경은 사랑의 자리로 우리를 부르고, 우리가 넘어질 때 역사는 은혜의 손길로 우리를 일으켜 세웁니다.
결국 기독교는 이 사랑과 은혜의 이중주입니다. 성경 66권에 흐르는 뜨거운 사랑을 가슴에 품고, 지난 2000년의 역사 속에 도도하게 흐르던 그 은혜를 의지할 때, 우리는 비로소 오늘이라는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당당히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서로 사랑을 받고 주는 존재이며, 무엇보다 은혜로 말미암아 감사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오직 두 단어 “사랑” 그리고 “은혜” 입니다. 이것만이 우리를 행복의 길로 인도합니다.

김병근 목사
시드니성시화운동 대표회장, 엠마오상담대학 학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