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오 박사의 또박또박 준비하고 가는 유학과 해외체험(31)
앞으로 여러 회에 나뉘어 나가는 이 연재는 옆 이름의 책(도서출판 엠-에드, 2006)에서 저자의 양해를 얻어 발췌한 것입니다. 저자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편집자 주
제5장 해외유학 공부, 어떻게 할 것인가? 공부충격
11. 외국대학에서의 사제 관계
[아래는 시드니의 매콰리대학교 경제학과 남대훈 교수가 이 장을 위하여 기고해준 글이다. 시드니대학교 박사인 남 교수는 현직에 몸담고 있으면서 유학생 문제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다. 성공적인 유학을 위해 아시아학생이 영미 대학에 와서 먼저 바꿔야 할 태도와 사제관계에 대해 매우 의미심장한 말을 하고 있다].
언어와 문화가 다른 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는 물론 여러 가지 문제가 있겠지만, 특히 필자처럼 유교문화권에서 기본교육을 받은 사람이 이곳 학생들을 지도할 때는 문화적 갈등을 겪게 된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는 아니라고 해도 인간적인 정감마저도 느끼지 못한 상태에서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이 무미건조하고 허무하게 느껴지는 때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정감이란 무엇인가? 교육자의 공정한 평가를 흐릴 수도 있는 사사로운 감정은 아닌가? 적당한 실력보다는 사제지간의 인간관계에 따라 학력을 평가받고 장래를 보장 받는 부조리의 이면에는 정(情)이 있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만은 없지 않을까?
동양의 교육(敎育)이나 서양의 [education]은 모두 지식을 전수하고 바람직한 품성을 기를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는 의미에서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목적과 방법을 살펴보면 서로 많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교육의 구체적인 목적이 다르다는 것은 물론 문화와 그에 따른 가치관이 서로 판이하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어떤 품성이 바람직하고 무엇이 사회에 필요한 지식인가 하는 것이 그 사회의 여건과 가치관에 따라 결정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의 차이는 중등교육까지는 뚜렷하다고 할 수 있으나 대학교육에 이르면 사실상 유야무야하게 된다. 학생들이 선택할 수 있는 전공분야만이 조금씩 다를 뿐, 그들의 품성을 변화시킬 교육의 단계는 이미 지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목적의 차이는 외국 대학에서 강의하는 이들이 겪는 어려움과는 무관하다고 하겠다.
결과적으로, 글머리에 던진 화두(話頭)는 동서양의 교육방법의 차이를 고려해야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동양과 서양의 교육방법의 차이는 스승과 제자가 서로를 어떻게 인식하는가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동양에서는 일단 가르침을 받는 자는 스승으로부터 전문지식뿐만 아니라 그 인격도 전수받아야 하는 ‘아랫사람’으로 인식되는 반면, 서양에서는 동등한 인격체로서 상호계약에 따라 교육이라는 서비스를 받는 ‘소비자’로 인식된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인격을 바탕으로 한 규범교육이 중시되는 반면, 서양에서는 학생들이 필요로 하는 지식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전수하는가 하는 교수의 기능성이 강조된다.
스승이 훌륭한 본보기가 되었을 때, 가르침이 가장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 동양사회에서는 자연히 스승과 제자 사이에 상하관계가 형성되고 가르침이 곧 은혜로 인식된다. 그리고 그것은 곧 스승에 대한 존경심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동등한 인격체들간의 계약에 의한 서비스 정도로 교육을 인식하는 서양사회에서는 학생들에게 교수의 인격까지 존경할 마음이 생길 것을 기대하는 것은 마른 밭에서 벼가 나기를 기다리는 것 같다고 하겠다. 물론 가르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단순한 실력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 학생들의 존경을 받는다면 흐뭇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볼 때, 스승의 모범에 가르침을 크게 의존하는 방법만이 좋다고 할 수 있을까? 잠시 언급했었지만, 두 가지 방법이 모두 장단점이 있어서 어느 한 가지가 절대적으로 좋다거나 나쁘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스승의 인격이 교육의 바탕이 된다는 우리들 방식의 단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스승도 인간인 이상 완전할 수는 없다는 진리를 무시한다는 것이다. 배우는 이들의 복지를 가르치는 사람의 개인적 판단과 인격에 일임할 뿐, 그것을 제도적으로 견제하는 수단이 거의 없다. 이럴 경우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가는 우리의 정치제도를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영미 대학의 동양인 교수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고 하지 않던가. 힘이 있는 곳에는 항상 그 힘의 덕을 보고자 하는 이들의 유혹이 따르기 마련이고, 힘을 가진 자는 그 집요한 유혹을 뿌리치기가 어려운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가지면 과시하고 싶은 것이 힘이다. 과시욕이 상대방의 외양을 중시하게 되고, 그로부터 받는 느낌이 감정으로 이어져 객관적인 판단을 어렵게 한다. 그러한 사고가 아직도 한국사회에서 거침없이 통용되고 있음은, 사법적 판결에도 소위 ‘괘씸죄’라는 것이 공공연히 적용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생각할수록 불합리한일이다.
이와는 반대로, 서양제도의 단점은 인간이라면 필연적인 감정을 무시하고 제도와 역할만을 강조함으로써 무미건조하고 고독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그들은 사회의 모든 문제를 제도와 법률로 해결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한두 사람이 못된 짓을 하면, 사회 전체 구성원들을 법률로 얽어 놓는다. 이런 까닭으로 스승과 제자는 물론 가족간의 관계에도 냉랭한 법망이 드리워져 있다.
선생과 부모조차 경계하고 조심해야 할 대상이 된다면, 아이들은 누구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한다는 말인가. 물론 제자를 희롱하는 선생이나 자식을 학대하는 부모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다수 선생과 부모는 선량하지만 어쩌다 나쁜 경우가 있다고 교육하지 않고, 어느 선생이나 부모라도 상황에 따라 괴수로 변할 가능성이 있는 경계의 대상이라고 가르치는 데 이들의 잘못이 있는 것이다.
서양 학생들을 가르치는 동양인 선생들을 괴롭히는 것은 이런 두 사회의 현격한 차이만이 아니다. 가끔 동양인 교수들이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본다. 물론 개인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학생들로부터 예우 받지 못하는 섭섭함이 큰 작용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사실을 객관적으로 보면, 이러한 섭섭함도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공정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 학생들의 입장과 힘과 과시욕이 야기하는 부조리를 놓고 보면 학자적 양심으로 섭섭하다고만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들이 흔히 다시 되돌아오는 이유도, 이곳에서는 미처 보지 못했던 불합리함을 그들의 고국에서 뒤늦게 발견한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서양의 대학에 몸담고 있는 동양인 교수들은 동서의 장점들을 잘 결합함으로써 이곳 출신 교수들보다 더 만족스러운 사제관계를 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비결은 서양제도의 공평성을 철저히 유지하면서도 그에 어긋나지 않는 한도 안에서 학생들을 엄하게 꾸짖고 자상하고 성심껏 돌보는 것이다.
학생들이 교육의 소비자로서 바라는 것 이상의 서비스를 제공받았다고 생각할 때,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 자연스럽게 우러나온다. 사회의 전통적인 관행에 의한 형식적 예우보다는 학생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을 느낄 때 보람이 더 큰 것은 물론이다. 거기에 인간적인 따스함이 부담 없이 전해진다면 더 바랄 것이 없지 않겠는가. 이러한 것은 배우는 과정에 있는 유학생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어떤 사회에서 태어나고 자랐든 인간은 누구나 따뜻한 피가 흐르는 존재다. 내 마음이 먼저 열리고 따뜻해질 때, 저들의 마음도 차갑고 이질적인 싸개를 비집고 포근한 모습을 드러낸다.<다음호에 계속>
김삼오 박사(커뮤니케이션학 박사)
고려대학교 정외과 졸업 (BA)
컬럼비아대학교 언론대학원 졸업 (MS)
매콰리대학교 박사과정 졸업 (PhD)
전 파이스턴 이코노믹 리뷰 서울특파원
전 호주국립한국학연구소 수석연구원
E-mail: karckim@optusnet.com.au
Blog: blog.daum.net/samokim3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