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희 칼럼
중년의 위기를 겪는 크리스천에게 드리는 글
밴드를 통해 만난 초등학교 동창 중에 인태라는 친구가 있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아랫마을 은행 시장에서 그 친구는 생선을 팔고 있었다. 친구를 만나러 간 날 그 친구는 물에 젖은 장화를 신고 생선 냄새가 진하게 배어있는 작업복에 앞치마를 걸친 채 하루 장사를 마무리 하고 있었다. 오랜 노동과 현실이 주는 중압감에 친구의 어깨는 꽤 무거워 보였고 얼굴 깊이 하루의 피곤이 주름지어 있었다. 그러나 친구는 여전히 생동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나와 친구들을 반겨주었고 마지막까지 가게를 찾는 손님들에게 특유의 커다랗고 씩씩한 목소리로 생선을 팔고는 했다. 단골손님인 듯한 아주머니께 “엄마 요즘 이건 비싸 다른 게 싱싱하고 좋은 데 그걸로 찜 해 드셔..”하며 넉살 좋게 장사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내 오래 전 보았던 아버지의 모습이 친구의 모습 속에 있었다. 삶이 단련시킨 마음의 근육이 강하게 발달된 남자의 모습이었고 아버지의 모습이었고.. 진정한 가장의 모습이었다. 정말 말처럼 토끼 같은 아이들과 아내를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헌신하는 친구는 전형적인 이 시대의 가장이며 중년의 아름다운 모습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친구에게서 가장의 모습이나 아버지의 모습만을 발견한 것만은 아니었다. 중년… 한 두어 번쯤 모진 슬픔을 견디어봤고, 두서너 번쯤 죽을 것 같은 절망도 겪어봤고, 네다섯 번쯤 만남과 이별과 상실로 지옥 같은 시간도 살아봤을 나이, 삶에 대한 이상을 꿈꾸기엔 철이 들어버렸고 설렘을 포기하기엔 아직 심장이 너무나 뜨거운 나이, 거듭 거듭 죽는다 해도 내 목숨보다 귀한 가족이 옆에 있고 그토록 귀한 사랑이건만 때로는 훌훌 털어버리고 혼자만의 둥지에 숨어버리고 싶을 때도 있는 나이… 다 그런거지 하면서도 털어버릴 줄 안다지만 한겨울 가시나무처럼 외로운 마음 어쩔 수 없는… 중년의 나이… 그 친구는 그 중년의 사춘기를 앓고 있었다. 새벽이 되면 습관처럼 눈이 떠져서 일을 시작하고 현실에 발을 동동거리면서도 문득 무언가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사는 것 같은 막연한 그리움에 못 견딜 감정앓이를 하곤 하는 친구였던 것이다
융의 심리학에 의하면 유아기 무의식성이 잠식되고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페르조나가 형성되고 의식의 강화가 이루어진다. 이때부터 무의식 즉 내면세계와의 단절 위협이 시작된다. 다시 말하면 자아의식이 이상을 치열하게 구현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게 되면서 의식적인 인격과 무의식적 인격 사이에 긴장과 분리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중년 이후에는 자기 인식 즉 의식화 과정을 통해 페르조나와 자기의 구별을 하게 되며 그림자와 아니마 아니무스의 의식화를 지향하게 된다.
부연하자면 35세부터 40세를 전후하여 정신적 변화가 오게 되며 외향적 목표와 야망은 그 의미를 잃기 쉽게 되는 것이며 외부에 쏟았던 에너지를 자신의 내부에 초점을 맞추도록 자극 받으며 자신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는 곧 자기 인식을 촉진시켜 자기 실현이라는 궁극적인 단계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친구의 마흔앓이는 이러한 자기실현이라는 궁극적인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발걸음인 듯 했다. 자신도 모르는 감정의 정체에 어느 날 문득 흔들리고 있다지만 결국 친구는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가장 행복하게 살아가는 밝은 삶을 향한 길을 발견할 것이며 이를 위해 자신의 희생이나 헌신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발전과 통합과 조화를 지향하게 될 것이다.
비단 이 친구만이 마흔앓이, 중년의 위기를 겪어가는 것은 아닐 터이다.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그러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마음의 열병을 앓는 하루 하루를 견디곤 했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많은 이들 역시 비슷한 감정과 시기를 전염병처럼 앓곤 했을 것이다. 내가 왜 이러지… 이러면 안 되는 데… 정신 차리자… 이런 말로 자신을 자책하지도, 정죄하지 않았으면 한다. 인생이라는 숙제에 정답은 없으며 답을 풀어가는 과정 역시 모범이 정해져 있지 않다. 조금 비틀거리는 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우리는 내 안의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하고 통합과 조화를 이루어 보다 성숙된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린 천사가 아니며 우린 성인도 아니다. 메시아 콤플렉스로 나를 정죄하기보다는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단 한가지이다.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해주시는 그분께 온전히 맡기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그분은 우리를 정죄하기 위해 우릴 살리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자녀 삼은 것이기 때문이다.
김은희(시인, 미술심리치료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