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공룡체가 아닌 공동체
2021년 3월 13, 14일, 제15회 시드니 성시화 대회가 새순교회에서 열린다. 성시화 운동은 일회적인 행사 (Event)가 아니라, 지속적인 운동 (Movement)이다. 전교회가 전복음을 전도시에 전하는 생명운동이다. 성시화 운동은 ‘영혼구원’을 넘어 ‘전인구원’, ‘개인구원’을 넘어 ‘도시구원’을 위하여 다민족이 연합하여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 확장하는 운동이다. 성시화 운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도가 성도답고, 교회가 교회다워야 한다.
교회의 제도화 (Institutionalization)
교회가 성장하면 ‘제도화’에 신경을 쓴다. 초대교회가 갑자기 부흥하자, 구제가 불공평하게 이루어지면서 7집사를 세우게 된다. 사도들의 과중한 업무를 분담하기 위해 ‘제도’을 만들었다. 문제는 ‘제도’가 아니라 ‘제도화’가 문제이다. 제도화란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본질을 잃어버리는 현상이다. 제도란 틀에 묶여 해야할 일을 하지 못한다. 초대교회에 집사를 뽑을 때 기준이 있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사람이 해야 한다. 사람이 잘못 선임되면 본질을 잊어버리고 제도에 집착하게 된다. 교회의 ‘제도화 현상’이다.
교회의 모든 활동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최대의 명령인 선교로 귀결되어야 한다. 왜 구원받았는가? 왜 성경 공부하는가? 왜 봉사하는가? 왜 구역예배를 드리는가? 왜 모이는가? 왜 훈련을 받는가? 모두 선교를 위함이 아니겠는가!
교회의 세속화 (Secularism)
교회의 세속화란 교회가 세상을 닮아가는 현상이다. 세상 속에 교회가 있어야 하는데, 교회 속에 세상이 들어온 것이다. 초대교회가 그리스로 이동함으로 철학이 되었고, 로마로 이동하여 제도가 되었고, 유럽으로 이동하여 문화가 되고, 미국으로 건너가서 기업이 되었다고 한다. 교회의 세속화 현상을 시대에 따라 구분한 말이다. 초대교회는 세상과 분리되어 핍박을 받았다면, 지금은 세상과 같아서 비난을 받고 있다. 비난을 받는 다는 것은 아직도 희망 있다는 뜻이다. 세상의 가치관이 교회에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세상 권력을 가진 사람이 교회에서 높은 사람이고, 믿음 좋은 사람이 아니라 돈 많은 사람이 더 대접받고 있다. 세상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교회도 똑같이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교회의 세속화 현상이다.
세속화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중세유럽이 아닌가 생각한다. 중세유럽을 대표하는 키워드 두 개가 있다. ‘봉건사회와 기독교’이다. 정치적으로는 왕과 신하 사이에 봉토를 기반으로 주종관계 계약을 맺은 봉건사회였다. 봉건사회는 경제적으로 농노의 노동을 중심으로 경제가 돌아가는 장원제도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장원이란 지방 영주의 지배를 받는 작은 마을을 말하는데 지방 영주는 이곳에서 왕과 같은 권력을 누렸다. 기독교는 국왕의 세력과 결탁하여 봉건제도를 등에 업고 세력을 확대하였다. 사제는 제후와 더불어 봉건사회의 대토지 소유주가 되었고, 봉건 사회의 지배계층의 세력으로 형성되었다. 교회는 봉건사회의 사상적 생산을 독점하였고, 봉건사회의 불평등한 위계질서와 신분질서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는 역할을 하였다. 교황은 기독교를 정치적으로 세속화하면서 중세 암흑시대를 공고히 하는데 일조하였다.
교회의 성결화 (Holiness)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인 생명공동체이고, 단장한 신부는 신랑인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거룩과 순결’을 지켜야 한다. 모든 공동체에는 문화가 있다. 세속적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점점 세속화되어 가고, 생명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점점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 교회는 박물관에 전시된 죽은 공룡체가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거룩한 생명공동체이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벧전1:15, 16)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벧1:16)고 하셨다. ‘거룩’이란 헬라어 ‘하기오스’로 성결 (Holiness), 성화 (Sanctification)라고 번역한다. 히브리어 ‘코데쉬’ (kodesh)는 ‘잘라냄, 분리함’을 의미하는 말로 세속적인 것이나 부정한 것으로부터의 탈퇴를 의미한다. 교회는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한 공동체가 아니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생명 공동체이다.
거룩은 인간의 속성이 아닌 하나님의 속성이기에,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것은 거룩한 영인 성령충만을 받는 길 밖에는 없다. 성령세례가 일회적인 사건이라면, 성령충만은 지속적인 운동이다. 인간은 된 존재가 아니라 되어가는 존재이고, 인생은 완성형이 아니라 진행형이다. 오직 성령충만으로 주님을 닮아가고,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 수 있다.
주님, 오늘도 자기를 쳐서 복종케 하시고 성령충만하여, 그리스도의 충만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는 날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구세군의 군복 (Uniform)과 붉은 방패 (Red Shield)
오늘은 구세군 주일이다. 우리 교회는 매달 말째 주일을 구세군 주일로 지키고 있다. 구세군 주일을 통해서 우리는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를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자신이 속한 단체에 대하여 자긍심을 가지지 못한다면, 단체는 물론이고 구성원도 불행하다. 구세군의 상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군기, 자선냄비, 군복, 밴드, 군기, 붉은 방패, 면류관 등이다. 상징이란 보이는 것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구세군의 군복 (Uniform)
구세군의 상징 중에 하나가 ‘군복’이다. 구세군은 1865년에 시작되어, 1878년 구세군이로 이름을 바꾸고, 1880년부터 군복을 입기 시작했고, 1883년부터 대장은 병사들도 입을 것을 적극적으로 권유하였다. 군복은 ‘병사 입대식’을 받은 분에 한하여 입을 수 있다. 군복을 입으면 ‘자연인’이 아니라 ‘구세군인’으로 구세군을 대신하기 때문이다. 군복은 3가지 의미가 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I belong to Jesus Christ), 나는 봉사하는 사람이다. (I am here to serve), 나는 국제 구세군에 속한 사람이다. (I belong to the international Salvation Army)
구세군의 붉은 방패 (Red Shield)
구세군의 ‘붉은 방패’ (Red Shield)이 처음 등장한 것은 남아프리카에서 보어(Boer) 전쟁 때이다. 붉은 방패는 처음에는 은색이었으나 빛이 반사되어 적에게 노출될 가능성이 있어, 호주사관으로 후에 대장이된 ‘조지카펜터’에 의해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시드니 ‘Rookwood Cemetery’의 구세군 ‘Memorial Wall’의 길 이름은 그를 기념하여 ‘George Carpenter’로 지었다. 구세군은 전쟁 중 사관을 군목으로 파송하여 예배와 상담 그리고 기도 등으로 병사들을 도왔고, 특별히 여사관과 병사들은 환자를 돌보고 빵과 도너츠를 제공하여 육신적으로 도왔다. Australian Superbrands Volume 5 의하면, 호주에서 ‘Thank God for the Salvos’와 함께 국민의 93% 정도가 구세군의 붉은방패를 알고 있다. 현재도 호주군에는 ‘Red Shield Defence Service’ 이름으로 군목으로 사역하고 있다.
1996년 뉴질랜드에 교환사관으로 갔었다. 그곳에서 한국전쟁에 군목으로 참전했던 Percy L. Smith 사관의 집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분은 자신이 한국전쟁 때 찍었던 Video Tape과 책 한권을 선물해 주었다. 책 제목은 ‘Colonel Korean Smith’이다. ‘William Smith’ 사관의 일대기이다. 그는 1923년 – 1940년까지 17년 동안 한국에서 사역했다. 구세군 사관으로 사역하는 동안 많은 에피소드가 있었다. 그가 충청도 영동에서 사역할 때 교인들이 급하게 와서 소가 아프니까 빨리 와달라고 했다. 당시의 소는 농사를 짓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동물이었다. 개인 소가 없고 공동의 소로 농사를 짓는 사람들도 많았다. 스미스 사관은 도착했을 때는 마을 사람들이 소 옆에서 간절한 기도를 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소꼬리에 찬송가를 묶어 놓고 기도했다. 그는 사람들과 함께 어느 정도 기도하다가 저녁이 되어 다 집으로 보내고, 혼자 남게 되었다. 그는 가지고간 ‘피마자유’ (Castor Oil)을 먹인 후 집을 돌아왔다. 다음 날 동네에서 환호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소가 일어난 것이다. 스미스 사관은 그들과 함께 기뻐하고 성경 말씀 한 구절을 남겼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그는 영국인이지만 한국을 진심으로 사랑하여 사람들은 그를 ‘Korean Smith’라고 불렀다. 그의 외동딸 Doreen은 4살 때 풍토병으로 죽어 지금 양화진에 잠들어 있다.
성경 속의 옷
옷에 대한 성경의 첫 번째 언급은 창세기 3장에 타락한 아담과 하와를 위해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지어주실 때이다. 구약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 신약은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다.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첫 번째 예언은 창세기 3:15이다. 아담과 하와는 뱀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자신들의 벗었음을 두려워하며 무화과나무 뒤에 숨는다. 하나님은 뱀을 저주하며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하나님은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창 3:21)
가죽옷은 구원에 대한 상징이다. 가죽옷을 지어 입히려면 짐승 한 마리가 죽어야 한다. 곧 어린 양 한 마리가 희생되어야 가죽옷이 나오는 것이다. 어린 양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그분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우리가 ‘구원의 옷’을 입을 수 입게 된 것이다. 복음서에는 어떤 사람이 임금님 아들의 혼인잔치에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갔다가 쫓겨 나오는 이야기가 나온다.(마22장) 예복은 구원을 상징한다. 계시록에는 ‘세마포’가 나온다.(계 19) 구원 받은 성도들이 세마포 옷을 입었는데 그 세마포도 구원의 옷이다.
1992년 10월 28일 다미 선교회의 시한부종말론 사건이 있었다. 성도들은 하얀 옷을 입고 통성으로 기도하고, 열광적으로 찬양하며 밤새 휴거를 기다렸지만 아무런 일이 없자 절망과 좌절 속에 빠져 성도들은 고개를 숙이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 사건을 언론사들이 그곳에 진을 치고 촬영한 동영상이 지금도 유튜브에 떠돌고 있다. 계시록 19:8에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라고 했다.
그리스도로 옷 입자
오늘 본문은 구원 받음을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는다고 했다.(엡4:22-23) 이는 겉 사람은 죽고 속사람이 되는 것이며 (고후 4:16), 육의 사람은 죽고 영의 사람이 되는 것이고(롬8:5-6), 땅의 사람이 아닌 하늘의 사람이 되는 것이고(골3:2-3), 어둠의 자식이 아니라 빛의 자녀가 된다는 뜻이다.(엡 5:8)
바울은 구원과 관련하여 옷을 입고 벗음에 묘사하고 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4).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전15:53,54)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8-10)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엡 4:22-24)
구세군 군복은 ‘우리가 누구이며, 무엇하는 사람인가’를 상징하는 옷이다. 병사견장의 푸른색은 하나님의 성결, 사관견장의 빨간 색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미한다. 양쪽의 S.S는 Saved to Save, Saved to Serve, Salvation and Sanctification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구세군은 하나님의 군대이고 (창 32:2), 구세군인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이다.(딤후 2:3)
소명은 부르심, 사명은 보내심
인생의 슬럼프로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초심으로 돌아가라. 삶의 의미가 없어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글자의 앞뒤를 바꾸어 보아라. 아직도 ‘가나안 교인’으로 신앙 생활하는 사람이 있는가? 처음 교회로 돌아가라. 사역에 회의를 느끼며 시간을 죽이는 사람이 있는가? ‘소명과 사명’을 다시 검토하여 보아라.
1. 소명과 사명 (Calling and Mission)
소명은 ‘부르심’이고, 사명은 ‘보내심’이다. 召命이란 ‘부를 소’에 ‘목숨 명’을 써서 소명이다. ‘부름 받은 목숨’이란 뜻이다. 使命이란 ‘심부름 사’에 ‘목숨 명’을 써서 사명이다. 사명이란 ‘심부름하는 목숨’이라는 뜻이다. 소명과 사명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소명은 사명을 위한 ‘부르심’이고, 사명은 소명을 위한 ‘보내심’이다. 부르심은 은혜와 관계가 있고, 보내심은 은사와 관계가 있다. 은혜는 자격이 있어 받는 ‘상’이 아니라, 자격없어도 받을 수 있는 ‘선물’이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은, 우리를 보내시기 원한다. 하나님은 보내실 때 감당할 만한 능력도 함께 주신다. 그것이 ‘은사’이다.
사람은 세 번 태어나야 한다. 첫째 육신으로, 둘째 영으로, 셋째 사명으로 태어나야 한다. 사명은 삶의 의미이고 목적이다. 인생을 바다의 배로 비유하거나, 마라톤 선수로 비유하기도 한다. 목적지가 없는 배는 항해하는 것이 아니라 표류하는 것이고, 결승점을 알지 못하는 선수는 아무리 빨리 달려도 상을 받지 못한다. 소명이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이라면, 사명은 “나는 왜 사는가”에 대한 답이다.
2. 에클레시아와 디아스포라 (Ecclesia and Diaspora)
에클레시아는 ‘모이는 교회’이다. 성경에 ‘교회’ (Ecclesia)란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마태복음 16장 18절이다. ‘에클레시아’ (εκ+κλησια)란 용어를 분석하면, 접두사 ‘에크’(~로부터 εκ)와 동사 ‘칼레오’(부르다 καλεω)의 합성어로 ‘세상에서 부르심을 받아 모인 무리’를 의미한다. 예배 드릴 수 있는 장소는 ‘예배당’이고, 그 안에서 예배드리는 사람이 ‘교회’이다.
디아스포라는 ‘흩어지는 교회’이다. ‘디아스포라‘(Diaspora)는 그리스어로 ‘흩어짐’이라는 뜻이다. ‘흩어지는 교회’는 ‘사명’과 관련된 용어이다. 교회는 모이기 위해서 모이는 공동체가 아니라, 사명을 받고 흩어지기 위해서 모인 공동체이다. 모이는 교회가 ‘방주’ 역할을 한다면, 흩어지는 교회는 ‘구조선’ 역할을 한다. 예수께서도 너희는 교회의 빛과 소금이 아니라,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 (마 5:13)고하지 않았던가!
3. 구원과 선교 (Salvation and Mission)
구세군의 사역을 요약하는 몇 가지 표어가 있다. “마음은 하나님께, 손길은 이웃에게” “한 손에는 빵, 한 손에는 성경” 그리고 “구원 받은 것은, 구원하기 위함이다” (Saved to Save)이다. 구원은 ‘부르심’이고, ‘구원하기 위함’은 ‘선교’이다. ‘전도’ (Evangelism)와 ‘선교’ (Mission)는 조금 다르다. 선교를 문화가 다르거나, 민족이 다른 곳에 가서 전도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전도는 순수하게 복음만을 전하는 것이고, 선교는 ‘매체’를 통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문서를 통해서 전도하면 ‘문서선교’, 스포츠를 통해서 전도하면 ‘스포츠 선교’, 방송을 통해서 전도하면 ‘방송선교’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최대의 ‘사명’은 ‘선교’ (Mission)이다. ‘지상최대의 사명’은 ‘The Great Commission’이라고 한다. ‘Commission’은 ‘Com (With) + Mission’으로, 혼자 가라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이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20) 마침내 사도행전 2장에 성령이 오심으로 그 언약이 성취되었다.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라이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