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교인과 신자와 제자 (마16:24-25)
교인과 신자와 제자는 같을 수도 있고 있지만 다를 수도 있다. 교인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고, 신자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고, 제자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다. 교인 가운데 신자가 있고, 신자 가운데 제자가 있다. 교회를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로 나눈다. 보이는 교회는 사람이 보는 제도적인 교회이고, 보이지 않는 교회는 하나님이 보시는 영적인 교회이다. 차고에 있다고 다 차가 아니고, 격납고에 있다고 다 비행기가 아니고, 교회를 다닌다고 다 제자는 아니다.
매일 새벽 운동 중에 만나는 ‘비키’라는 은퇴한 간호사가 있다. “오늘은 무슨 설교할 예정이냐”고 묻는 것이다. 오늘 설교 제목을 중심으로 간단하게 설명했다. 비키는 교회와 관련된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나는 시골에서 자랐는데 그곳에는 구세군을 비롯하여 많은 교회들이 있었다. 모든 행사는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다양한 ‘사회적 행사’(Social Event)가 있었다. 교회 다닌다고 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예수를 믿지 않지만 God는 믿는다.” 그녀는 한마디 더했다. “나는 네가 매일 새벽 묵상을 하며 걷는 것을 보면서 너는 믿을 수 있다.” 그녀의 말에 힘을 얻어 말했다. “나를 믿는다면 내가 믿는 예수님을 믿어보세요”, 그녀는 웃으며 그것은 또다른 문제라고 대답을 회피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명령은 제자 삼으라는 것이다. 제자(disciple)란 단어는 훈련(discipline)에서 나왔다. 한문으로 弟子는 아우 弟와 아들 子를 쓴다. 제자는 형님으로부터 배우는 아우이며, 부모로부터 배우는 아들과 같이 배우는 자이다. 예수의 제자는 예수로부터 배우는 자이다. 제자가 되려면 세 가지가 단계를 거쳐야 한다. 첫째는 자기를 부인하고, 둘째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셋째는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

1. 자기를 부인하고(Deny yourself)
자기부인은 ‘자기 욕망과 뜻’을 부인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BC와 AD가 갈라진 것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는 새사람이 되었다(고후 5:17). 바울은 이것을 ‘세례’로 표현하였다(롬6:4). 물속으로 들어갈 때는 나는 죽고, 물 밖으로 나올 때 예수로 사는 것이다. 육의 사람이 아니라 영의 사람, 겉사람이 아니라 속사람, 옛사람이 아니라 새사람이 되었다. 자기 부인이라는 육의 사람, 겉사람, 옛사람을 부인하라는 것이다. 자기부인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인 운동이다.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고 했다(빌1:21). 날마다 육은 죽고 영으로 사는 것이고, 겉 사람은 죽고 속사람으로 사는 것이고,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사는 것이며,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것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을 핏방울 같이 흘리시며 기도하셨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이어서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셨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26:39)
어제 신학교에서 호주 맥켄지 선교사의 일대기에 대한 비디오를 보았다. 맥켄지 선교사는 1910년부터 1938년까지 한국의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아 주었고, 그의 큰딸인 헬렌과 둘째 딸인 캐더린은 의사와 간호사가 되어서 1952년 한국전쟁 중에 부산에 ‘일신기독병원’을 세우고 독신으로 26년간을 섬기다 귀국했다. 맥켄지 선교사의 사역을 도우며 많은 감동을 받았던 손양원 목사는, 후에 애양원에서 사역하다가 순교까지 하게 되었다. 학생들은 그분들의 땀과 눈물 그리고 피를 보면서 끝까지 선한 싸움을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은혜와 도전을 받았다. 맥켄지 선교사와 손양원 목사도 사람이다. 그들도 내적갈등이 많이 있었지만 날마다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며 사명을 감당했다. 어쩌면 예수를 위하여 죽는 것보다 예수를 위하여 끝까지 사는 것이 더 어려울 수도 있다.
2. 자기 십자가를 지고(Take up your cross)
자기십자가는 자기부인으로 인한 십자가이다. 자기 죄 때문에 당하는 고난을 ‘자기 십자가’라고 해서는 안 된다. 자기 잘못으로 인한 고난은 회개해야 한다. 자기부인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자기 십자가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흐름에 역류하기 때문에 박해를 받게 된다. 박해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 베드로는 이를 ‘믿음의 시련’이라고 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1:7) ‘No Cross, No Crown’이라는 말이 있다. 자기 십자가 없이, 자기 면류관도 없다. 힌두교와 불교에 ‘카르마’라는 용어가 있다. 카르마는 현생은 전생의 결과이고, 내생은 현생에 결과가 될 것이라는 믿음이다. 지금의 자신의 상황을 운명론적을 받아들이고 순응하며 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기독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새로운 피조물이다.
3.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Follow Jesus)
마가복음 10장에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라고 말씀했다. 청년이 모든 계명을 지켰다고 말하자, 예수께서는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데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부자 청년은 제물이 많아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예수를 떠났다. 세상적인 재물이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방해물이 되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장애물은 무엇인가? 돈인가, 명예인가, 지식인가? 그것이 언제까지 우리를 끝까지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무리 우리가 돈을 사랑하더라도 돈은 결코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 마지막까지 우리를 지켜 주실 분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이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마16:25)

다윗의 마지막 말
복 있는 자는 여호와의 말씀을 묵상하는 자이다. 묵상이란 되새김질하는 것이다. 지난주 설교는 교인과 신자와 제자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교인이고, 예수를 믿는 사람이 신자이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제자이다. 교인 중에 신자가 있고, 신자 중에 제자가 있다. 어느 교회에서 예배가 시작되기 바로 직전에 갑자기 기관단총을 들고 예배당에 괴한이 난입했다. 그는 큰 소리로 외쳤다. “셋을 셀 동안에 예수를 믿는 사람은 남아 있고, 믿지 않는 사람은 나가라”괴한의 카운트가 시작되자 마자 여기 저기서 일어나 밖으로 도망갔다. 몇몇 사람은 움직이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사람들이 나가자, 괴한은 목사를 향해서 말을 이어 갔다. “목사님, 가짜들은 다 나갔습니다. 이제 예배 시작하시죠”
사무엘상하의 주인공은 사무엘이 아니라 다윗이다. 다윗은 삼상 16장에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17장에 골리앗을 죽였으나, 18장부터 도망 다니다가 삼상 31장에 사울이 길보아 전투에서 죽음으로 망명생활을 막을 내린다. 헤브론에서 정권을 잡은 다윗은 나라를 통합하고,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옮긴다. 다윗은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긴 후 성전을 지으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삼하 23:1-7절은 다윗이 인생을 정리하며 남기는 유언과 같은 말이다. 요약하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고 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로 흙수저가 금수저가 되었다. 다윗은 3가지의 수식어로 자기를 규정하였다. 이새의 아들로 태어난 자신을, 하나님께서 높여 주신 자, 야곱의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자,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자라고 했다.
1. 높이 세워진 자
하나님께서 다윗을 높이 세워주셨다. 다윗은 자신이 노력하고 애써서 높아졌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높이 세워주셨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는 이새의 여덟 아들 중에 막내였다. 양을 치는 목동이었다. 왕이 될 수 있는 자격과 여건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무엘 선지자가 이새의 아들들을 초청했을 때에도 이새는 일곱 아들만 초청했고 막내아들인 다윗은 잊고 있었다. 그만큼 아버지의 관심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아들이었다. 사무엘은 그런 다윗을 불러 왕으로 기름 부었다(삼전16:13).
사무엘이 사울에게 처음 기름을 부어 왕을 삼으려고 했을 때는 아주 겸손했다. 사울은 처음에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오며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삼상9:21)라고 했다. 사무엘은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삼상15:17)라고 할 정도로 겸손했다. 그러나 왕이 된 후에 교만하여 결국 멸망했다. 하나님은 교만한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2. 기름 부음 받은 자
구약에 기름 부음을 받은 3가지의 직책이 있다. 제사장과 선지자 그리고 왕이다. 기름을 부음을 받았다는 것을 사명을 받았다는 것이다. 제사장은 사람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선 자이고, 선지자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람 앞에 선 자이고, 왕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나라를 통치하는 자이다. 다윗은 사명대로 살다가 사명을 마치고 죽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아직 사명이 남아 있는 것이고, 죽는 다는 것은 이제 사명을 마친 것이다. 바울도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딤후 4:7)라고 마지막 말을 남겼다.
인간은 3번 태어나야 인간답게 산다. 첫 번째는 육으로, 두 번째는 영으로, 세 번째는 사명으로 태어나야 한다. 소명과 사명은 조금 다르다. 소명은 부르심이고, 사명은 보내심이다. 召命이란 ‘부를 소’에 ‘목숨 명’을 써서 소명이다. ‘부름 받은 목숨’이란 뜻이다. 使命이란 ‘심부름 사’에 ‘목숨 명’을 써서 사명이다. 사명이란 ‘심부름하는 목숨’이라는 뜻이다. 소명과 사명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부르심은 은혜와 관계가 있고, 보내심은 은사와 관계가 있다.
3. 노래하는 자
다윗은 문무를 겸비했을 뿐 아니라 예술가였다. 다윗은 시편의 거의 반이 되는 73편을 쓴 시인이었다. 다윗은 골리앗을 죽인 용장이었다. 다윗은 음악 치료사였다. 사울 왕이 귀신들려 잠 못 잘 때 다윗이 수금을 취하여 연주하자 악신이 떠나가고 사울 왕은 안식을 얻을 수 있었다(삼상16:23).
‘예술치료’란 말이 있다. 창조적인 예술 활동을 통해 내담자의 감정이나 내면세계를 자발적으로 표현하게 하고, 사고나 감정, 행동의 치유 및 개선에 활용되고 있다. 음악치료는 예술 치료의 한 분야로, 음악을 매개로 심리 치료에 활용하는 분야이다. 음악 치료사들은 치매 환자나 어린 아이들의 몸과 마음을 치료해주고 있다. 미술치료란 다양한 미술 활동을 통하여 자신의 내면세계를 표현하게 함으로써 정서적 갈등과 심리적인 증상을 완화시키고 자기이해와 자기성장을 촉진시켜 한 개인이 원만하고 적응적이며 창조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심리치료의 한 유형이다. 정신분석학에서는 무의식의 의식화라고 한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구원의 예수를 널리 알리기 위함이다.

진리가 무엇이냐? (What is the Truth?)
“진리가 무엇이냐?” 빌라도가 예수께 한 질문이다.(요18:38) 철학에서 진리란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승인할 수 있는 보편 타당한 법칙이나 사실’이고, 논리학에서는 ‘논리의 법칙에 일치한 지식’이다. 한문으로 ‘진리'(眞理)는 ‘진짜 이치’이고, 영어의 진리(truth)는 ‘소유적 개념'(Having)이 아니라 ‘존재적 개념'(Being)이다. 동양에서는 길을 뜻하는 도(道)라고 한다. 진리의 일반 사전적인 뜻은 ‘참된 도리’이다. 진리는 사실이 분명하게 맞아 떨어지는 명제, 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불변적인 사실 혹은 참된 이치나 법칙을 뜻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Plato and Aristotle)
플라톤은 ‘진리’는 보이는 ‘현상’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상 밖에 있다고 했다. 그는 이것을 ‘이데아'(Idea)라고 했다. 그는 형체를 지닌 세계를 ‘현상’으로 보고, 형체가 없는 세계를 ‘이데아’라고 했다. 이데아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존재론적으로 실재하는 참 존재이지만, 현상은 시공간에 국한된 ‘질료’로서 헛된 존재로 보았다.
그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과 질료’란 용어를 통해서 ‘이데아'(형상)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상(질료) 내부에 있다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형상(form)’은 여전히 ‘현상’의 기초를 가리키지만, 이와 동시에 특정한 사물에 ‘구체화’되어 있다.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나 학당’을 보면 두 사람의 차이를 쉽게 알 수 있다. ‘아테나 학당’은 고대 그리스를 대표하는 총 54명의 학자들이 서로 토론하거나 깊은 사색에 빠진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림 중심부에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는 플라톤과 손바닥을 펼쳐 땅을 가리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서있다. 플라톤은 하늘과 땅을 분리한 ‘이원론’을 주장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땅에 모든 것이 있다는 ‘일원론’을 주장하였다.
어거스틴과 아퀴나스(Augustine and Aquinas)
중세로 접어들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플라톤의 철학은 ‘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여 ‘신학’으로 꽃을 피웠다. 어거스틴의 신학은 이원론적인 플라톤 철학을 근거로 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사도바울 이후 가장 위대한 신학자로 평가 받고 있다. 하버드 대학의 철학교수 ‘화이트헤드'(Whitehead)는 “현대의 모든 철학은 플라톤의 주석이고 현대의 모든 신학은 어거스틴의 주석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믿음을 갖기까지 이성을 통한 처절한 ‘지적 방황’을 하였다. 어느 날 그에게 ‘계시의 말씀’이 찾아왔다. “들고 읽어라.”(tolle lege)하는 어린아이의 음성을 듣고 성경을 폈을 때 로마서 13: 12-14절의 말씀을 읽게 되었다. 철학이 어거스틴에게 질문을 던졌다면, ‘성경’이 답을 주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낮에 행동하듯이 단정하게 행합시다. 호사한 연회와 술취함, 음행과 방탕, 싸움과 시기에 빠지지 맙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십시오.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꾀하지 마십시오.”(롬13: 12~14).
어거스틴이 플라톤 철학을 기반으로 신학을 발전시켰던 것처럼,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하여 신학을 재구성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플라톤에 밀려 유럽에서 잊혀졌다가, 중동에서 꽃을 피워 다시 유럽으로 역수출되었다. 아퀴나스의 신학은 ‘계시와 이성’을 동시에 강조하였다. 신학은 계시이고 철학은 이성이나, 서로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상호보완적’인 것으로 보았다. 모든 계시는 이성으로 모색하고 설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쓴 ‘신학대전’은 이성으로 계시를 설명한 책이다. 아퀴나스는 ‘스콜라철학자’이다. ‘스콜라’란 뜻은 본디 가톨릭교회나, 수도원에 부속된 학문 기관을 뜻하며, ‘학교'(School)의 어원이다. 스콜라 철학은 ‘르네상스와 계몽주의’로 이어진다.
헤겔과 마르크스 (Hegel and Marx)
근대가 되면서 ‘계시와 이성’은 ‘관념론'(Idealism)과 ‘실재론'(Realism)으로 발전했다. 관념론은 ‘인간의 정신’인 관념을 중시하고, 물질은 부수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실재론은 ‘실재’하는 것은 세계와 사물이고, 인간의 ‘의식’은 이차적인 것으로 보았다. 실재론이 조금 더 발전되면 정신은 물질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유물론’(Materialism)이 나온다. 서양 관념론을 완성한 사람은 헤겔이고, 헤겔의 좌파에 선 사람이 마르크스이다. 헤겔은 ‘변증법’을 통하여 더 이상 도달할 수 없는 상태를 ‘절대정신’이라고 하였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에 ‘포이에르바흐'(L. Feuerbach)의 유물론을 받아들여 ‘유물론적 변증법’으로 역사와 사회를 해석했다.
마르크스는 ‘역사발전 5단계설’을 주장했다. “원시공산사회 – 고대노예제사회 – 중세봉건사회 – 자본주의사회 – 공산주의사회” 그는 각 단계마다 ‘지배계급과 피지배 계급’이 있어 계급 간의 갈등이 있다고 했다. 고대 사회는 노예와 귀족, 중세사회는 소작인과 영주, 자본주의 사회는 노동자와 자본가. 내부의 갈등으로 각 사회는 붕괴가 되고, 최종적으로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 ‘공산주의사회’가 올 것이라는 이론이다. 마르크스는 ‘경제적 생산관계’에 기초하여 형성된 계급간의 투쟁을 역사적 관점으로 설명했다. 글을 마무리한다.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이원론과 일원론’, ‘이성과 계시’, ‘관념론과 유물론’ 등은 모두 ‘진리’를 찾기 위한 방법론적 노력이다.
공자는 “아침에 도(道)를 깨닫는다면 저녁에 죽어도 괜찮다”고 했다. 부처는 “진리를 깨달은 자”란 뜻이다. 예수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14:6)라고 했다. 공자는 “아직 나는 진리가 뭔지 모르겠다”는 입장이고, 부처는 “어떤 진리가 있는데 그것을 깨달았다”는 말이고, 예수는 “내가 진리”라고 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라이드한인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