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구세군과 6.25
‘구세군과 육이오‘ (롬 8:31-39)
2021년, 광복 76주년이 되었다. 아니 분단 76주년이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동시에 한반도는 북위 38선을 경계로 남과 북이 분단되었다. 1945년 8월 8일 소련군은 일본에 선전포고 후 파죽지세로 한반도로 밀려오고 있었다. 트루먼 미 대통령은 미군이 상륙하기 전에 한반도가 소련의 손에 넘어갈 것을 우려했다. 그는 지도를 꺼내어 한반도의 중심인 북위 38도 선에 줄을 그었다. 트루먼은 ‘북쪽은 소련이 점령을 하여 일본을 무장해제 하고, 남쪽은 미군이 점령하여 무장해제 하자’고 제안했다. 스탈린은 트루먼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38선 이북을 점령한 후, 김일성을 전면에 내세워 북한을 공산화하기 시작했다.
우리민족의 의지와 관계없는 분단이었기에 남한도, 북한도 통일을 원했다. 그러면 어떻게 통일을 할 것인가? 북에서 김일성은 호시탐탐 남한을 침공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1950년 1월 5일 미국의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타이완 섬이나 중국 본토에서의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국민당의 내전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며, 7일 후 미국의 국무장관 애치슨은 “한국은 미국의 영향권 밖에 있다”라고 말했다. 소위 애치슨 라인을 발표했던 것이다. 그 후 6개월이 조금 넘어, 김일성은 침공할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소련과 중국의 지원 하에 주일 새벽 4시 탱크를 앞세워 남침을 감행하였다.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7월 말에는 낙동강까지 진출한다. 총사령관인 맥아더의 지휘 하에 유엔군은 9.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계기로 전세를 역전시켰다.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하고, 10월 말에는 압록강까지 북진하였다. 뜻하지 않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빼앗기고 한강 남쪽으로 후퇴하게 된다. 2월 다시 서울을 되찾았지만 38선 부근에서 고지전으로 전쟁의 양상이 바뀌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1951년 7월부터 휴전 논의가 있었으나 2년이 지난 1953년 7월 27일에야 이루어진다. 휴전협정에서 유엔과 공산군의 가장 큰 쟁점은 포로교환 문제였다. 유엔군이 잡고 있던 공산군 포로는 13만이 넘었는데 공산군이 밝힌 유엔군 포로는 11559명에 불과했다. 만약 무조건적으로 포로를 송환할 경우, 공산군은 132474명의 병력을 충당하는 반면, 유엔군은 만여 명에 불과한 병력만 충당하게 된다. 이승만 대통령은 포로 송환 협정이 조인되기 직전인 1953년 6월 6일, 헌병사령관 원용덕 중장을 은밀히 불러 ‘반공포로석방’을 지시했다. 6월 18일 00시를 기점으로 작전은 개시되었다. 작전은 성공적으로 마치고 27000여명의 반공포로를 석방할 수 있었다. 북한은 국경선을 38선으로 주장하였으나 유엔군은 휴전 시점의 국경선을 주장하였다. 유엔군의 제안이 받아들여져 오늘의 휴전선이 만들어 졌다. 당시 땅에 관한 협정은 이루어 졌으나 바다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다. 이것을 구실로 북한은 잊을 만하면 한번씩 NLL(North Limit Line)을 침범하고 있다.
로드 부장 (1889.12.8. ~ 1971.4.13.)
로드(Herbert Arthur Lord)는 1889년 12월 18일 영국 리버풀에서 태어났다. 1909년 11월 8일에 사관 임명을 받고, 1910년 1월 15일에 한국에 입국했다. 서울 지방관으로 3년 동안 영문(교회)을 섬겼다. 1924년부터 5년 동안 구세군 사관학교 교장을 역임했고, 1929년부터 1934년까지 성경 번역에도 참여했다. 1935년 그는 말레이시아 지역 사령관으로 임명 받고 출국하였다. 1947년 4월 27일 한국 사령관으로 임명 받고 재입국했다. 6.25가 발발하자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서울에 남아서 구세군을 지켰다. 북한군에 의하여 피납 당했다가 휴전 회담이 진행되면서 민간인들에 대한 포로 취급이 해제되고, 로드 부장은 1953년 4월에 모스크바를 경유하여 고국으로 돌아갔다. 로드 부장은 1957년부터 1959년까지 남아프리카 연방 순회 사령관으로 사역하고 은퇴 후 1971년 4월 13일 영국에서 생을 마쳤다. 18명의 구세군 악대원이 납북되었다. 1959년에 한국을 방문하여 당시 허정 서울시장으로부터 감사장을 받기도 했다.
유영복 정교 (1914.8.15 ~ 1950.10.28.)
서울 동대문과 창신동에서 태어났다. 강원도 철원의 김화교회 정교로서 1950년 6.25가 발발하여 북한의 교회 들이 흔들릴 때에도 교회를 지키며 봉사하였다. 주변의 목회자들이나 장로들이 유정교에게 권면할 때에도 그는 “다들 교회와 영문을 버리면 누가 주님의 병사들을 돌봅니까? 저 같은 사람이라도 지켜야 지요.” 라며 김화에 남겠다고 했다. 1950년 10월 8일 패주하는 인민군은 김화 교회까지 들이닥쳐 유 정교를 철원의 상리 배우개 고개로 끌고 가면서 예수 믿지 않는다고 하면 풀어준다고 회유하였으나 “그런 소리 마시오. 예수가 누군데 내가 예수를 배반한 단 말이오? 나는 사나 죽으나 예수 사람이오!” 라며 굴복치 않자 총살당했다.
노영수 사관 (1897.1.3 ~ 1950.9.5.)
1919년 사관으로 임관. 31년간 10여 곳을 담임하고, 1949년 8월 진주영문에 담임사관으로 부임. 1950년 6.25 전쟁이 발발. 군우들이 담임사관의 피난을 적극 권유했지만 “어찌 목자가 양들을 버리고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하겠는가!”라며 목회에 전념하다가 공산당에게 끌려가 사상전환을 강요받았다. “공산당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죽는 것보다 나으니 공산당이 좋다고 하세요”라고 말하는 어린 딸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구세군사관으로서 예수님을 위해 죽을지언정 무신론 집단인 공산주의자들을 찬양하며 양심을 기만할 수 없다”고 거절하여 1950년 9월 5일 새벽, 지리산 자락인 진주 널문리 산 기슭에서 공산군의 총탄에 맞아 장렬히 순교를 하였다. 그의 마지막 설교는 롬 8:31~39의 말씀을 의지하여 ‘종말이 온다면’ 이다.
그는 설교 중에 이런 말을 했다. “인간의 종말은 가장 귀중한 결산의 시간이다. 헛되이 죽을 수도 있고, 병들어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주의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한다면 생명의 면류관이라는 영광된 상급이 주어지는 것이다” 노사관은 죽음은 ‘결산의 시간’이라고 했다. 한 때 ‘웰빙’이란 말이 유행을 했는데, ‘웰빙’의 완성은 ‘웰다잉’에 있다. 100세를 사는 지금은 ‘웰에징’이란 말도 있다. ‘웰빙’(Well Being)의 인생은 ‘웰에징’(Well Aging)으로 익어가고 ‘웰다잉’(Well Dying)으로 완성된다.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의 완성이다. 죽음은 ‘화룡점정’과 같은 것이다. 양나라의 전설적인 화가인 ‘장승요’가 용의 그림을 그리고 눈동자에 점을 찢지 않았다. 사람들의 요청으로 용의 눈동자를 찍는 순간 벽에 그렸던 용이 살아서 하늘로 승천하였다.
인생은 살아야 할 이유와 죽어야 할 이유가 동일해야 한다.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 살수는 있지만 자기를 위해서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바울은 삶과 죽음의 이유가 동일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7-8) 삶과 죽음의 이유가 동일한 사람은 삶과 죽음에 연연하지 않는다.
용서는 회돌이 입니다 (창 50:19-21)
요셉은 야곱의 11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야곱이 제일 사랑하던 라헬의 첫번째 아들이다. 그는 다른 형제보다 아버지의 더 많은 관심과 사랑 속에서 자랐다. 하지만 아버지의 편애는 다른 형제들의 미움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요셉의 이야기는 창세기 37장에서 시작해서 50장까지 이어진다. 37장 2절에 그의 이야기는 17세에서 시작하여,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을 때는 약관 30세였다. (41:46)
꿈꾸는 소년 (창 37:1-36)
요셉은 형들에게 배신을 당했다. 배신이란 말은 믿었던 사람에게 상처를 받을 때 쓰는 말이다. 전혀 모르는 도둑이나, 강도에게 배신당했다고 하지 않는다. 배신은 믿었던 만큼의 깊은 상처를 남긴다. 영화나 소설에서나 일어날 것 같은 이야기지만, 막상 우리의 이야기가 된다면 정말 당황할 수밖에 없다. 오래전 30여 년간 이단과 싸운 목사의 강의를 들었다. 본인이 가장 힘들 때는 이단과 싸울 때가 아니라, 소속 교단 내에서 자신을 비판하는 소리를 들을 때라고 한다. 이단에게 받는 비난은 당연하다고 생각되나, 동역자라고 믿었던 사람들의 비난은 참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분의 표현대로 하자면 이단보다 1000배 이상의 화가 난다고 했다.
십자군 전쟁은 1095년부터 1291년까지 약 200여년 간 8차에 거쳐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전쟁이다. 십자군 전쟁의 발단은 이슬람 세력에 위협을 받던 동로마 황제인 ‘알렉시오스 1세’가 서로마 교황인 ‘우르반 2세’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시작되었다. 1차 십자군만 예루살렘을 정복했고, 나머지 전투는 모두 실패로 끝났다. 4차 십자군은 베네치아에 모였다. 이들은 이집트 대신 동로마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잔인한 살육과 약탈을 하였다. 이후 동방교회인 정교회와 서방교회인 가톨릭은 철천지원수가 되었다. 반목과 불신의 관계는 1000년 동안 계속되다가, 1964년 쿠바에서 교황 바오로 6세가 ’아테나고라스 1세’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를 만남으로써 본격적인 물꼬를 텄다.
보디발의 집사장 (창 39:1-19)
보디발의 아내가 집사장으로 일하는 요셉을 유혹했다. 요셉은 외모는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더라”(39:6)했다. 보디발의 아내는 혈기 왕성한 요셉을 유혹하여 동침하기를 청했다. 하지만 요셉은 넘어지지 않았다. 날마다 집요하게 접근하는 그녀에게 요셉은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39:9)라며 거절한다. 성서에서 시험(Test)과 유혹(Temptation)은 다르다. 시험은 더 좋은 나를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테스트이지만, 유혹은 나를 파괴시키려는 사탄의 장난이다. 보통 시험(Test)은 외부의 환경이나 물질 등으로 접근하고, 유혹(Temptation)은 우리의 내부의 심리에서 시작한다. 심리학자인 ‘데이빗 씨맨즈’는 사탄이 인간에게 유혹할 때에 치명적 유혹의 방법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고, 환경적인 것도 아니고 지극히 심리적이라고 했다.
페이스 북에 3년 전 7월 2일에 올렸던 사진과 글이 올라왔다. 타이타닉 박물관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타이타닉은 북 아일랜드의 수도인 ‘벨파스타’에서 건조되었다. 1912년 4월 15일, 2224명을 태우고 미국으로 가는 도중 빙산과 충돌하여 1514명이 사망했다. 사진과 함께 글귀가 있었다. “배가 침몰하는 것은 주변의 물 때문이 아니라, 물이 배안으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주변의 일이 네 안으로 들어와 너를 침몰시키려는 것을 막아라”
감옥의 죄수 (창 39:20- 40:36)
감옥에서 요셉은 술 맡은 관원의 꿈을 해몽하면서 다시 복직할 것이니, 그 때는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부탁했다. 3일 후 술 맡은 관원은 감옥에서 풀려나 복직을 했다. 하지만 그는 ‘요셉을 기억하지 않았고 잊었더라’(창40:23). 그 후 요셉은 2년 동안 ‘잊어진 사람’으로 감옥에 지내야 했다. 권력의 중심에 서 있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는 대수롭지 않은 일까지 챙기면서 찾아온다. 하지만 한직으로 물러나면 뜸해진다. 그러다 은퇴를 하면 모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 사람이 된다. 정승의 개가 죽으면 문상객이 많고, 정작 정승이 죽으면 문상객이 없다고 한다.
한국에 갔을 때 예산에 있는 추사 김정희 선생의 생가를 방문했다. 호를 따서 그가 쓴 필체를 추사체라고 한다. 글씨 뿐 아니라 그림에도 조예가 깊었다. 대표작으로 ‘세한도’가 있다. 세한도란 ‘추운 날에 그린 그림’이란 뜻이다. 추사가 58세의 나이인 1844년에 제주도에서 귀양살이할 때 그린 그림이다. 세한도는 겨울풍경을 담은 그림으로 유난히 쓸쓸한 분위기가 많이 나는 그림이다. 추사는 거친 붓으로 집 한 채에 소나무와 잣나무 몇 그루만을 그렸다. “날이 차가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시든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彫)”는 논어의 글귀를 인용하며, 제자 이상직의 변함없는 마음을 ‘세한도’에 담았던 것이다.
애굽의 총리 (창 40:37 – 50장)
바로가 꿈을 꾸었는데 아무도 풀지 못하자 술 맡은 관원이 2년저에 감옥에 있었을 때 자신의 꿈을 풀이해준 요셉을 소개하였습니다. 요셉은 바로의 꿈을 풀이하고 바로의 신임을 얻어 30살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7년의 풍년이 지나고 7년의 기근이 시작되었습니다. 애굽 뿐 아니라 가나안 땅에도 기근이 왔습니다. 야곱은 베냐민을 제외한 10 아들을 애굽으로 보냈다. 형들은 요셉의 앞에 섰다. 요셉이 형들에게 팔려간 나이가 17세이고, 총리가 된 나이는 30세 그리고 7년간의 풍년이 지나고 흉년이 시작되고 몇 년이 되었으니 20년이 넘어서 형들을 대면하는 것이다. 요셉은 통역을 사용하여 그들을 마음을 떠본다. 첩자가 아니면 베냐민을 데리고 오라고 하고 시므온을 볼모로 잡고 보낸다. 야곱은 요셉도 잃었는데 베냐민까지 잃을 수 없다면 거부한다.
식량이 떨어지자, 유다가 모든 책임을 질 것이니 보내 달라고 부탁한다. 야곱도 어쩔 수 없이 베냐민을 보낸다. 요셉은 베냐민을 보고 방성대곡한다. 요셉은 통역을 통해서 그들의 의중을 다시 떠본다. 그들을 돌려보내며 베냐민의 자루에 술잔을 몰래 집어넣고 그를 잡아온다. 유다는 자신이 종이 될 터이니 동생만은 보내 달라고 한다. 히브리말로 그들은 자신들이 요셉을 팔았기 때문이라고 이렇게 된 것이라며 후회한다. 요셉은 더 이상 신분을 감추지 못하고 자신이 요셉임을 밝힌다. 야곱을 애굽으로 모시고 왔다. 아버지가 죽자 형제들은 다시 두려워했다. 자기들을 해할까 두려워하는 형들에게 “나에게 못할 짓을 꾸민 것은 틀림없이 형들이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도리어 그것을 좋게 꾸미시어 오늘날 이렇게 뭇 백성을 살리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이제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형들과 형들의 어린것들을 돌봐 드리리다”라고 했다. 형들은 요셉의 종이라도 되어서 목숨을 구걸하였는데 요셉은 형들은 물론 조카들까지 잘 돌보아 주겠다고 약속했다.
사람은 상처를 받을 때 3 종류의 반응을 한다. 바둑으로 비유하면 하수, 중수, 고수의 응수이다. 하수는 ‘자학’으로 응수하고, 중수는 ‘복수’로 응수하며, 고수는 ‘용서’로 응수한다. 용서는 회돌이 같아 사석을 통해서 상대의 돌을 제압한다. 용서는 악에게 지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적극적인 포석이다. 용서는 작은 것을 희생하여 큰 것을 얻는 것이다. 용서는 국지적인 싸움에는 지지만, 전체적인 게임에는 이기는 것이다. 용서받는 사람보다 용서한 사람이 큰 사람이다. 용서는 바둑으로 비유하면 회돌이고, 씨름으로 비유하면 뒤집기이다.
자유란 무엇인가
갈라디아서는 ‘자유의 헌장’이다. 중심주제는 자유이고, 핵심 구절은 5:1절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마라”. ‘종의 멍에’란 율법을 말한다. 은혜가 아닌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여 ‘멍에’가 되었던 것이다. 율법이 예수께로 나가는 ‘디딤돌’이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걸림돌’이 되었다.
율법은 초대교회의 민감한 사안이었다. 바나바와 바울에 의하여 이방선교가 시작되었다.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안디옥 교회로 돌아왔을 때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분란을 일으켰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사도행전 15장에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렸다. 갑론을박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서 이야기를 했다.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행전15:7-11)
베드로의 말이 끝나자 의장인 야고보가 결론을 내린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15: 28 – 29) 바울과 바나바는 기뻐하며 안디옥에 돌아가 이 사실을 교인들에게 전하였다.
이후에도 초대교회에서는 예수를 믿으려면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되었다. 갈라디아 교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바울은 율법 문제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갈라디아서’를 썼다. 바울은 3장 24절에 율법을 개역성경에는 ‘몽학선생’, 개역개정에는 ‘초등교사’로 번역을 했다. 사전에서 “蒙學(몽학)”을 “어린아이의 공부”라고 하고 있다. ‘몽학선생’은 어린아이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는 선생이다. 예수를 처음 믿는 사람들은 영적 어린아이다. 율법은 ‘몽학선생’으로 인간의 한계를 깨닫게 하여,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율법은 거울 같아서 죄를 깨닫게는 하지만, 죄를 사해 주지는 못한다. 죄의 문제는 죄 없으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만 해결할 수 있다. 바울은 이어서 말하기를 장성한 사람은 더 이상 ‘몽학선생’ 아래에 있지 않다고 했다.(갈3:25) 장성한 사람은 ‘율법’이 아닌 ‘믿음의 법’으로 사는 사람이다.
자유의 3 종류
1)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
소극적 자유란 인간을 억누르는 것으로 ‘부터의 자유'(Freedom from~)이고, 적극적 자유란 ‘향하는 자유'(Freedom To ~)이다. 소극적 자유가 애굽에서 ‘부터의 자유’라면, 적극적 자유는 가나안 땅을 ‘향하는 자유’이다. ‘부터의 자유’는 얻었지만, ‘향하는 자유’를 잃게 되면 방황할 수밖에 없다. 민수기 13장에 10 정탐꾼들의 부정적인 보고로 백성들은 ‘향한 자유’를 잃어버리고,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게 되었다.
2) ‘외적 자유’와 ‘내적 자유’
자유(自由)는 일반적으로 어떤 존재가 내부나 외부로부터 구속이나 지배를 받지 않고 하고자 하는 것을 하거나 있는 그대로 존재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외적자유란 외부에 있는 물리적 장애물, 신체적, 경제적 조건으로부터의 자유를 뜻하고, 내적자유란 내면에 있는 죄, 본능, 욕구, 충동 등에서 벗어난 자유를 뜻한다. 외적자유는 환경을 개선하면 얻을 수 있지만, 내적 자유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을 수 있다. 외부와 내부의 구속이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신의 행동과 의지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자유 의지'(Free Will)라고 한다.
3) ‘의한 자유’와 ‘위한 자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8:32) 진리가 무엇인가? 예수는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요14:6)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자유’가 될 때 완성된다. 자유를 자신의 육신을 위한 기회로 삼게 되면 방종이 된다. 방종이란 사회의 도덕적 책임과 의무를 고려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함으로 사회 규범 및 공중도덕을 어기거나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이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사랑으로 종이 되기 위한 자유이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갈5:13) ‘진정한 자유인’은 ‘진정한 종’이 될 때 완성된다. 마틴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란 글에서 이를 ‘종의 자유’라고 했다.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라이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