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구세군의 3대 모금
우리 교회는 매달 마지막 주일을 ‘구세군 주일’로 지키고 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고난주일’이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한 날이다. 입성할 때 백성들이 환호하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어서 ‘종려주일’이고, 호산나 호산나 소리를 외쳤서 ‘호산나 주일’이라고도 한다. 오늘부터 토요일까지를 ‘고난주간’이고 다음 주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고 무덤에서 부활하신 ‘부활절’이다.
호주 구세군에서는 매년 세 번의 모금 행사가 있다. 12월의 자선냄비모금 (Christmas Kettle Appeal)와 5월 말의 붉은방패 모금 (Red Shield Appeal)과 사순절 기간의 극기헌금 (Self Denial Appeal)이다. 오늘은 구세군의 3대 모금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1. 자선냄비 모금 (Christmas Kettle Appeal)
1891년 성탄이 가까워 오던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서 자선냄비는 그 첫 종소리를 울리게 되었다. 1891년 추운 겨울날 선박이 좌초돼 승객 1,000명 여명이 오도 가도 못하게 됐다. 구세군의 죠셉 맥피 사관은 갑작스럽게 재난을 당한 이들과 도시 빈민을 위한 모금을 위해 부두로 나가 주방에서 수프를 끓일 때 쓰던 큰 쇠솥을 내 걸었다. 옛날 영국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누군가가 사용했던 방법이었다. “이 국솥을 끓게 합시다” 이것이 구세군 자선냄비의 시초이다.
조선에서 자선냄비가 시작하였던 1928년은 식민지 수탈이 가장 극심했던 해이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일제는 전쟁 물자를 팔아 막대한 이익을 챙겼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농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농촌을 떠나자, 일시적인 식량 부족 사태를 맞이하자, 일제는 부족한 쌀을 조선에서 확보할 목적으로 산미증식 계획을 세웠다. 당시의 조선의 상황은 흉년과 가뭄, 뒤늦게 쏟아 부은 홍수피해로 양곡추수가 실패한 해였을 뿐 아니라, 1929년에 불어 닥칠 세계적 경제공항과 일제의 대륙 침략 조짐이 있었기에 더욱 추웠던 해이다.
2. 붉은방패 모금 (Red Shield Appeal)
호주에는 크게 3번의 인구 유입이 있었다. 첫 번째 1850년경에 ‘Gold Rush’, 두 번째 2차 대전 직후 이민법 완화, 셋째 1973년 ‘백호주의 정책’의 폐지이다. 그 후 호주는 다문화, 다민족, 다종교의 사회가 되었다. 사회는 유기체와 같아서 계속된 변화를 거듭하게 된다. 구세군은 정치에는 관여하지는 않지만 사회악에는 민감하게 대처한다.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많은 문제들이 야기되었다. 마약, 알코올, 도박, 인신매매, 난민 등. 구세군은 사회적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1950-60년경 사회시설을 확장하면서, 자원의 한계를 느꼈다. 호주 구세군 자체적으로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40년 경에 호주보다 먼저 캐나다도 유사한 문제에 봉착했다. 캐나다 구세군은 사회, 경제 문제를 타결하기 위하여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함께 회의를 가졌다. 회의 도중 ‘캐나다 태평양 철도 회장’ (Chairman of the Canadian Pacific Railroad)은 “이것은 구세군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이고, 지역 사회의 문제입니다.”라고 했다. 이 말이 기폭제가 되어 캐나다 구세군에서는 ‘Red Shield Appeal’이란 이름으로 ‘외부모금 (External Appeal)’을 시작했다. 호주에서도 캐나다 구세군의 모금 방법을 도입하여, 1965년부터 ’붉은방패모금‘ (Red Shield Appeal)을 시작하게 되었다.
3. 극기헌금 (Self Denial Appeal)
1886년 영국의 존칼톤 (John Carleton) 사관이 ‘1년 동안 매일 푸딩을 먹지 않으면 50 쉴링을 모을 수 있으며, 이렇게 모은 돈을 선교헌금으로 드리겠다.’는 제안을 창립자가 발전시킨 것이다. 지금도 국제 구세군은 사순절 기간을 즈음하여 극기헌금을 세계선교를 위하여 국제 구세군으로 보낸다. 극기헌금은 구세군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에 선교할 수 있는 중요한 자원이 된다. 올해는 남아프리카, 브라질, 우크라이나, 인디아 선교 헌금으로 보내진다.
한국 구세군에서는 고난주간을 극기주간으로 지키고 있다. 한 주간 극기하며 경제적 지출을 아껴서 모아진 물질을 부활주일에 극기헌금 (self denial appeal)으로 드린다. 克己 (Self Denial)는 ‘자기 부인’이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고 했다. 자기부인은 무엇이고, 자기 십자가는 무엇인가? 겟세마네 동산의 주님의 기도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자기부인는 ‘자기의 뜻’을 부인하는 것이고, 자기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받는 고난이다. 자신의 죄로 인한 고난은 회개해야 하지만,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은 기뻐해야 한다. 믿음의 시련은 불로 연단하여 없어질 금보다 귀하다.(벧전1:7)
올해 극기헌금의 주제는 “삶을 바꾸고, 미래를 바꾸어라” (Transform a life – Transform the future”이고 성경 말씀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이다.
오늘날의 시대정신인 ‘포스트모더니즘’을 한마디로 말하면 ‘절대란 절대로 없다’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를 한 문장으로 정의하자면 ‘절대란 절대로 없다’이다. 우리는 상대적인 것을 절대화하는 잘못된 풍조를 따라서는 안된다. 이 시대는 ‘주관적, 상대적, 다원적, 복합적’ 등의 단어로 대체되어 혼합주의 (Syncretism), 다원주의 (Pluralism), 세속주의 (Secularism), 상대주의 (Relativism), 해제주의 (Deconstructionism) 등의 사상이 지배하고 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라고 했다. 마음 (Heart)이란? ‘존재의 중심’이다. 성경에 ‘카르디아’ (Kardia)라는 단어가 나온다. 영어로는 ‘Heart’라고 번역했고, 우리말은 ‘마음’이다. 카르디아의 어근은 ‘Cord’로서, ‘중심 (中心)’이란 의미이다. “코드 (Cord)가 같다, 다르다”란 말이 있다. “마음이 일치하다, 혹은 틀리다”란 뜻이다. 여기서 파생된 단어는 ‘진심의’ (Cordial), ‘일치’ (Concord), ‘불일치’ (Discord) 등이 있다. 마음이란 ‘카르디아’는 성경의 중심적인 단어로 850여 차례 나온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 (Heart)을 보느니라 하시더라”(삼상16:7). 마음이 변하면 모든게 변한 것이고,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6:38,39)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신 목적을 이렇게 밝혔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생명은 구원이고 풍성한 생명은 성결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구원이고 성결이다. 바울도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딤전2:4),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4:3)고 했다.
말씀을 정리한다. 행함과 믿음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우리의 믿음은 행함으로 증명이 된다. 행함은 ‘보이는 믿음’이다. “가난한 자를 보살펴 주는 자는 복이 있으니 환난 때에 여호와께서 그를 구하실 것이다”(시41:1),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은 여호와께 빌려 주는 것이니 여호와께서 그의 선행을 반드시 갚아 주실 것이다”(잠19:17)고 하셨다.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은 자기를 돕는 것이다. 주께서 우리에게 긍휼한 마음을 허락하여 주셔서, ‘마음은 하나님께 향하고, 손길은 이웃에게 펼치는 구세군인이 되기를 기도한다.
엠마오에서 예루살렘으로 (눅 24:13-35)
안식 후 첫날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이었다. 무덤을 찾은 여인들이 부활하신 예수을 만나고,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알렸지만 제자들은 믿지 않았다. 제자들은 더 이상 예루살렘에 머무를 이유가 없어 서둘러 자신의 길을 떠났다. 그들 중 절망과 공포에 잠겨 근심하며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있었다.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이십오리 (NIV 7 Miles, 새번역 삼십 리, 현대인의 성경 11 Km) 떨어진 곳이다. 엠마오란 지역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고, 왜 그곳으로 갔는지에 대한 이유도 밝히고 있지 않다. 아마 그들의 고향이 아닐까 생각한다.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예수의 제자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며 엠마오로 가고 있었다. 이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들과 동행하며 걸었지만 이들은 눈이 가리어져 예수인줄 몰랐다. 예수님에게 “너희가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눅 24:17)고 물었다. 가던 길을 멈추고 슬픈 빛을 하고 그 중의 한사람인 글로바가 대답했다.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예수에 대한 일을 왜 알지 못하느냐, 그는 하나님과 백성 앞에서 능한 선지자인데 대제사장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로 바랬고, 벌써 3일이 되었다. 또 제자 중에 여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가서 시체를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았다 하여 우리 가운데 두어 사람이 갔지만 보지 못하였다.”(눅24:18-24) 사도들도 여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허탄한 듯이 믿지 않았다. 그중에 요한과 베드로가 혹시나 하여 무덤으로 달려갔지만 세마포만 보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보지 못했다.(요20:1-10)
예수의 제자들은 주님의 가르침과 능력에 매료되어 자기들의 생애를 예수에게 걸었을 것이다. 그가 로마의 식민지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을 기대했으며, 아마 그때에 한 자리씩 차지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삼일 전에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돌아가셨다. 그들의 기대는 산산조각 나고 절망과 공포에 잠겨 침통해하며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내려갔던 것이다.
엠마오에서 예루살렘으로
글로바의 이야기를 다 듣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라고 하지 않았느냐”(눅24:25,26) 말씀하시고, 성경이 자신에 관하여 쓴 글임을 자세하게 설명하여 주었다. 엠마오에 도착하자 해가 저물어 이들은 예수를 강권하여 그곳에 유하게 하였다. 음식을 먹을 때 예수께서 축사 하시고 저희들에게 나누어 주자 저희들이 눈이 밝아져 그가 예수인줄 알게 되었다. 저희들이 서로 이야기를 하기를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냐”하며, 즉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열한 사도와 그들과 함께 한 자들에게 길에서 일어난 일과 자기와 함께 떡을 떼었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이다. 구약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 신약은 오신 예수 그리스도. 신약을 읽던 구약을 읽던 우리는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한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므로, 성령의 도움으로 성경을 이해하여야 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이들의 말이 끝나자 부활하신 예수께서 친히 저들에게 나타나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눅24:36) 선포하신다. 공생애를 시작한 주님의 첫 번째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이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첫 번째 메시지는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이다. 예수님의 탄생 때 천사들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2:14) 찬양했다.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했다.
‘팍스 로마나’ (Pax Romana)란 말이 있다. ‘로마의 평화’란 의미다.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할 때는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통지하던 때이다. 그는 모든 내전을 종식시키고 로마를 위협하는 외부 세력을 제압하였다. 그는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로마의 평화’를 선포하였다. ‘팍스 로마나’ 시대에 ‘팍스 그리스도’로 예수께서 탄생하셨다. 팍스 로마나가 힘을 바탕으로 한 외적 평화라면, 팍스 그리스도은 사랑을 바탕으로 한 내적 평화이다.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전쟁 중에도 평화이다.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중에도 평안이다. 예수 자신이 이 땅에 평강의 왕으로 오셨다.(사 9:6)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시고 막힌 담을 허무신 분이다.(엡 2;14)
절망과 공포에 잠겨 근심하며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내려갔던 제자들이,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즉시 엠마오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혹시 우리 가운데 침통해 하며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시는 사람이 있는가?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엠마오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 갈 수 있기를 기도한다. 그곳에서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 지어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 2021년 부활절이 되기를 기원한다.
용서에 대한 깊은 생각과 힘든 적용
에메랄드에서 사역하는 000 사관의 메일을 받았다. 가족 이야기, 사역이야기, 기도 제목 등을 나누었다. 지난주에는 한국인 청년 2명과 함께 ‘용서’란 주제로 성경공부를 하면서, “용서에 대한 깊은 생각과 힘든 적용”이란 표현을 썼다. 용서는 생각도 깊이 해야 하지만, 적용은 더욱더 힘든 것 같다. “내가 죽으면 죽었지 그 사람은 용서할 수 없다”, “그 사람을 생각만 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다”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정말 쉽지가 않다. 특히,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 당할 때의 분노는 뭐라 표현할 수 없다.
남을 용서해 주지 못한 마음은 자신을 아프게 한다. 사람들은 외면의 상처는 보여서 치료하지만, 내면의 상처는 보이지 않기에 방치하고 있다. 인간은 원하든 원치 않던 관계 속에서 살고 있기에, 자신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한다. 상처를 준 자와 받은 자의 관계가 원만해지려면 ‘가해자’는 용서를 구하고, ‘피해자’는 용서해 주어야 한다. 상처와 관련된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을 각각 3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보고자 한다.
가해자 (加害者, Offender)
가해자의 사전적 의미는 ‘신체적, 정신적, 물질적으로 남에게 해를 입힌 사람’이다. 가해자를 3종류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첫째: 무지의 가해자
자신이 가해자인지 모르는 가해자이다. 죄에는 알고 지은 죄와 모르고 지은 죄가 있다. 알고 지은 죄는 진짜 죄이고 모르고 지은 죄는 몰랐기 때문에 용서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엄격하게 이야기하면 알고 지은 죄보다 모르고 지은 죄가 더 위험할 수가 있다. 알고 지은 죄는 알기 때문에 회개할 기회가 있지만, 모르고 지은 죄는 회개할 기회 조차 없기 때문이다.
.둘째: 의도적 가해자
상대방에게 의도적으로 해를 입힌 사람이다. 상대방에게 해를 끼치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이 경우에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가해자’가 된 이유는, ‘피해자’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셋째: 무의도적 가해자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뭔가 잘못되어 피해자가 상처를 받는 경우다. 이 경우 가해자는 미안함과 함께 죄책감을 갖게 된다.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는 실수 때문에 스스로를 자책한다. 죄와 죄책감은 다르다. 죄책감은 본의 아니게 죄를 저질러 버리는 경우나 과거에 잘못했던 일로 인해서 생기는 감정으로, 자신이 저지른 행위로 인해서 상대방이 당하는 피해가 커질수록 그에 수반되는 죄책감은 더 커지게 된다.
피해자 (被害者, Victim)
피해자란 해를 당한 당사자를 의미하며, 일반적으로 피해자는 3 종류의 반응을 한다. 바둑으로 비유하면 하수, 중수, 고수의 응수이다.
.하수: 하수는 ‘자학’으로 응수한다.
자학이란 자기를 스스로 비하하고 학대하는 것이다. 일종의 자기혐오, 또는 자기증오 현상으로 자기 자신을 극도로 증오하거나,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감 내지 선입견에 빠져 있는 상태를 말한다. 자기혐오는 자기 자신이 속해 있는 가족, 계급, 정신병, 고정관념에 대한 증오이다. 모든 원인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가정, 교육, 외모, 행동, 환경 등의 결함으로 받아들인다.
.중수: 중수는 ‘복수’로 응수한다.
상대방에게 당한 만큼 갚아 주겠다고 다짐한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인간은 본능적으로 당한 만큼 갚아 주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복수에 관련된 영화를 보면서 대리만족을 하는 것 같다. 복수는 중수가 택하는 응수이다.
.고수: 고수는 ‘용서’로 응수한다.
용서는 내 안의 분노를 잠재우고, 가해자의 잘못을 묵인하고, 복수를 단념하는 소극적 개념이 아니다. 용서는 ‘사랑’으로 하는 적극인 반응이다. 자신이 가해자인줄 모르는 가해자에게는 잘못을 ‘알려주고’, 의도적인 가해자에게는 자신의 입장을 ‘설명’해 주며, 무의도적인 가해자에게는 상대의 실수를 ‘이해하여’ 주는 것이다.
‘올드보이’ (Old Boy)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오대수’ (최민식)는 아주 평범한 샐러리맨이다. 이름도 ‘오늘만 대충 수습하면서 산다’고 해서 오대수이다. 비가 오는 어느 날 퇴근길에서 그는 납치당한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독방에서 기약 없는 분노의 세월을 보냈다. 15년이 지난 어느 날 갑자기 풀려났다. 오대수는 복수를 위해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을 집요하게 추적하였다. 수수께끼의 단추는 하나둘씩 풀리며, 자신을 감금한 사람은 다름 아닌 고등학교 때 친구인 ‘이우진’ (유지태)라는 것과 알게 되었다. 동시에, 그는 우진이 왜 자기에게 그렇게 잔인한 행동을 했는지도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 우연하게 실험실에서 우진이 자기 누나와 조금 어색한 행동을 하며 함께 있는 것을 목격했다. 오대수는 별 생각 없이 친구들에게 과장되게 이야기했다. 그 후 오대수는 전학을 갔다. 오대수의 말은 일파만파 파문을 일으키면서 결국 우진의 누나는 자살한다. 그때부터 우진은 복수의 칼을 갈았던 것이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오대수는 용서를 구한다. 자신의 혀를 자르면서까지 참회를 한다. 우진은 자살하고, 오대수는 ‘기억상실증’에 걸린다. 둘은 모두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되고 영화의 막은 내린다.
“만약 당신이 복수를 꿈 꾼다면, 먼저 두 개의 무덤을 파라. 한 개는 상대의 것,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의 것을” 복수는 함께 죽는 자폭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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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라이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