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구세군 사회 정의 세미나
호주는 매년 6월에 ‘난민 주간’(Refugee Week)을 지키고 있다. 올해 ‘난민 주간’ (Refugee Week)의 주제는 ‘일치 (Unity)’이다. 난민주간을 지키는 이유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난민에 대해 올바로 알고, 난민이 처한 어려움을 이해하기 위함이며, 범국가적인 차원에서 ‘난민협약’ (Convention Relating to the Status of Refugees)의 의미와 가치를 되돌아보고, 난민을 보호하는 책임을 함께 나누기 위함이다. 난민들이 호주사회의 긍정적인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리기 위한 목적도 있다. 올해 난민주간은 6월 14일부터 시작하여 6월 20일까지이다. 난민 주간의 마지막 날인 6월 20일은 ‘세계 난민의 날’ (World Refugee Day)이다.
난민 (Refugees)이란?
‘난민협약’ (Convention Relating to the Status of Refugees) 제1조에 의하면 “인종 (race), 종교 (religion), 국적 (nationality), 특정사회집단의 구성원 (social group they belong to) 그리고 정치적 의견(political opinions)의 이유로 박해를 받을 우려가 있어 자국을 떠난 사람”이다. 난민을 신청한 사람은 난민신청자 (Asylum Seeker)이다. 유엔은 1951년 ‘난민협약’을 채택하고 ‘난민기구’ (UNHCR)를 설립하여 난민신청자들을 선별한다.
처음에 ‘난민협약’은 1951년 이전에 발생한 난민에게만 적용되고 있어서, 시간제한을 철폐한 ‘난민지위에 관한 의정서’ (Protocol Relating to the Status of Refugees)를 1967년 1월 31일 유엔총회에서 채택하여, 1967년 10월 4일에 발효하였다. 의정서는 1951년 이후에 발생한 난민에게도 ‘난민협약’에 규정된 동일한 권리를 보호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호주는 난민협약에 사인하여, 지금까지 매년 13,000명 이상의 난민을 받아들여야 한다.
현재 난민조약에 140여 개국이 가입하고 있다. 한국은 1992년 11월 11일 국회의 비준을 받아, 1993년 3월 3일에 조약 제1166호로 정식으로 가입하였다.
구세군 사회정의 세미나
난민주간을 즈음하여 지난 목요일(10일) 오번 구세군 교회에서 사회정의 (Social Justice)에 관한 세미나가 있었다. 4개의 주제를 가지고 8명이 발표를 했다. 각각의 주제로 가지고 한 사람은 이론적인 근거를 설명하고, 다른 사람은 실질적으로 활동하는 프로그램을 소개했다. 첫 번째 발표자 하관은 ‘성서적인 입장에서 정의란 무엇인가?’, 두 번째 발표자는 ‘삶 속에서의 정의를 위한 활동’, 세 번째 발표자는 사회정책과 주창‘, 네 번째 발표자는 다문화 속에서의 사회정의’란 주제로 발표하였다.
첫 번째 발표자인 ‘Robyn Black’ 사관은 창세기 1:27절, 아모스 5:24, 미가 6:8, 야고보서 1:27절 등의 말씀을 근거로 인간 사이에는 절대로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신학적인 차원에서 설명했고, 두 번째 발표자인 ‘Matt Cairns’ 사관은 교회에서 장애인을 돌보는 구체적인 사례를 들면서 삶이라는 것을 설명했고, 세 번째 발표자인 ‘Jennifer Kirkaldy’는 개인의 정의를 넘어서 사회정책과 주창의 구조적이고 조직적인 차원에서 사회정의가 실천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왜 물에 빠졌는가를 고치는 것이 근본적인 정의임을 강조하였다.
호주의 최초의 인종차별은 에보리진, 두 번째는 유럽 이민자, 세 번째는 아시안 등으로 이어진다. 호주 정착 시기에는 원주민은 거의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다. 1967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원주민은 참정권을 갖게 되었다. 호주는 2차 대전 이후 인구의 필요성을 깨닫고 백호정책을 유지한 상태에서 이민의 문호를 열었다. 유럽에서 많은 이민자들이 오기 시작했다. 앵글로 색슨 족이 아닌 사람들은 인종차별을 피해갈 수 없었다. 1973년 백호주의 정책을 폐지하면서 아시아인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들은 언어 장벽과 문화 충격까지 겹치면서 더 심한 인종차별을 격어야만 했다.
마지막 발표자인 ‘Adrian Kistan’는 시드니의 다문화와 다민족에 대한 전반적인 현황에 대해 발표했다. 광역 시드니에는 39%가 해외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살고 있고, 시드니 서부지역은 54%가 살고 있다. 난민들이 가장 많이 정착하는 곳은 1. 페어필드, 2, 리버플, 3. 뱅스타운, 4. 오번, 5. 파라마타. 이다. 그는 인종차별에 대하여 단어인 ‘Racism’에 ‘Gracism’이란 새로운 용어를 설명했다. Gracism이란 ‘God + Racism’이다. 하나님은 인종차별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모든 문제 있는 단어 앞에 God를 붙이면 해결책이 나온다고 설명했다.
좋은 두려움이 경건입니다
경건의 의미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Godliness)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딤전4:8)
‘경건’이란 말은 헬라어로 ‘유세베이아(ευσεβεια)’라고 하는데, 이는 ‘유(ευ, 좋은)’+ ‘세베이아 (σεβεια, 두려움)’의 합성어이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갖게 되는 ‘좋은 두려움’이다. 두려움은 대부분 부정적이다. 하나님이 주신 마음은 두려워 하는 마음이 아니요 능력이고 사랑이고 절제라고 했다.(딤후1:7) 경외란 부정적 두려움이 아니라 긍정적 두려움을 말한다. 하나님앞에서 최고의 경외를 표현하는 마음이 두려움이다. 유대인 남자는 예배 때 반드시 ‘키파’(Kipa)라는 ‘작은 모자’를 써야 한다. ‘통곡의 벽’ 앞에 서 있는 유대인에게 물었다. “키파는 왜 써야 합니까?” 그는 상냥한 미소로 대답했다. “하나님의 임재(Divine Presence)를 인식하고, ‘그를 두려워'(Fear of God)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경건'(Godliness)이다.
경건의 유익
‘육체의 연습’이란 고대의 운동 경기자들이 경기에 나가기 전에 부지런히 훈련하던 모습을 연상케 하는 말이다. 나이가 들면서 최고의 운동은 걷기이다. ‘걸으면 살고, 못 걸으면 죽는다’란 말이 있을 정도고 걷는 운동은 중요하다. 내가 살고 있던 지역에서 중풍에 걸린 분이 사셨는데, 하루도 빠지지 않고 걷는 연습을 하더니 1년만에 정상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다. 새벽 워킹 때 그리스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10시 정도로 몸이 기우뚱하면서 걸었다. 6개월 정도 지나서는 11시, 1년이 지나니 12시로 걸었다. 그는 하루에도 4시간 정도 걷고, 점심을 먹고 나서와 또 걷는다고 한다. 마치 걷기 위해서 사는 사람 같았다. 아무리 걷는 연습을 열심히 하여도 생로병사는 자연의 순리인데 누가 이길 수 있겠는가? 언젠가는 온 곳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인생이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특권이다. 금생의 문제 뿐 아니라 이생의 문제까지 모두 해결되기 때문이다. 경건은 금생(今生)에 하나님과 더불어 삶으로써 은혜가 넘치는 평화스러운 삶을 살며, 내생(來生)에 있어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
실천적 경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약1:27)
‘하나님 앞에서’는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편에 서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야고보는 하나님의 편에 서서 사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에 대해서 두 가지로 말하고 있다. 첫째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자기 자신을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이다. 고아와 과부는 나그네, 병든 자, 갇힌 자 등의 모든 사회적 약자를 의미하고 있다. 둘째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다. 자신 스스로가 죄악에 빠지지 아니하고 성화를 위해 계속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고 했다. 이웃 사랑과 거룩한 삶이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이다. 잘못된 사회구조로 인하여 사회적 약자가 되는 사람들이 있다. 사회적 약자를 도와주어야 하지만, 구조적 모순에 도전하는 것도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
인성은 혼의 성품, 영성은 영의 성품
인간은 영.혼.육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서에서 죽었다는 말은 분리되었다는 뜻이다. 영이신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는 영이 죽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한다는 말을 한다. 인격적이란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 번째는 ‘인격과 인격’으로 하나님과 일대일의 관계로 만나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의 신앙은 3인칭으로 시작되지만 1인칭으로 고백이 되어야 하다. 인간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이다. 누군가 나에게 알려준 예수가 아니라 내가 믿는 예수가 되어야 한다. 두 번째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로 창조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 관계가 깊어짐으로 그에게까지 자라고 그를 더 닮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의미는 일대일의 관계로 하나님을 만나, 교제하며 그를 더 깊이 알아가는 것이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인성으로 살지만,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영성으로 산다. 인성은 혼의 성품이고, 영성은 영의 성품이다.
구원받은 죄인이다
Two Popes란 영화가 있다. 현 교황인 프란체스코 교황과 전 교황인 베네딕트 16세의 이야기다. 교황은 종신직으로 소천후에 차기 교황을 선출한다. 영화는 베네딕트 16세가 중간에 사임을 하고, 프란체스코 교황이 선출되는 과정을 영상에 담았다. 베네딕트 16세는 자신의 연약함을 추기경에게 고하며 기도를 부탁한다. 과거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들렸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고백한다. 추기경은 놀라며 되 질문을 한다. “교황님도 그럴 수 있습니까?” “교황이기 때문에 그렇다네” 화려한 교황복을 입고 수많은 군중을 앞에서 말씀을 전하는 교황이 아니라, 자신의 부족함을 진솔하게 고백하는 그 사람이 진짜 교황이 아닌가 생각한다. 진정한 성도는 자신이 의인임을 증명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구원받은 죄인임을 고백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자격과 조건을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한량없는 사랑에 감사하는 사람이다.
인간은 죄인이기에 스스로 구원할 수가 없고, 스스로 성결해 질 수도 없다. 오직 예수를 믿어 ‘성령세례’로 구원받고, ‘성결의 영'(롬 1:4)인 ‘성령충만’으로 성결해 질 수가 있다. 구원 받은 것도 은혜이고 구원받은 자답게 사는 성결도 은혜이다. 나의 노력으로 이룬 것이 아니라 자랑할 것이 아니라 감사해야 한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그리스도인’을 ‘성도’라고 한다. 로마서 8:9절에 ‘그리스도인’에 대한 정의가 나와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교회 잘 다니고, 헌금 많이 하고, 봉사 열심히 해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영’이 있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래서 우리를 성전이라고 했다.(고전 3:16, 6:19절)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배는 삶이다
예배란 Worship 또는 Service로 번역한다. Worth + Ship은 ‘가치 있는 분에게 최상의 가치를 돌려 드리는 것’이다. 히브리어 ‘아보다’는 일이란 뜻인데, 예배란 의미도 함께 가지고 있다. 모여서 드리는 예배도 있고, 흩어져서 드리는 삶의 예배도 있다. 예배와 삶이 결코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예배가 삶이어야 하고, 삶이 예배여야 한다. 교회에서 하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고 세상에서 하는 일은 세상일이라는 잘못된 신앙관이 우리를 갈등하게 만든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있고, 교회에서 세상 일을 하는 사람도 있다. 장소가 일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일을 결정한다. 주의 마음을 가지고 하는 모든 일은 주의 일이고, 주께 하는 것이다. 장소와 관계없이 ‘가치 있는 분에게 최상의 가치를 돌리는 것’이 예배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영과 진리로 예배드릴지니라”(요4:24) 첫째 프뉴마는 ‘하나님의 영’이고, 둘째 프뉴마는 거듭난 ‘인간의 영’이다. 영이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죽은 영이 아닌 산영 즉 거듭난 영으로만 가능하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예식을 지키는 사람도 있다. 예배는 영으로 드리는 것이고, 예식은 혼으로 지키는 것이다.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신앙생활하고, 예식을 지키는 사람은 종교생활을 한다. 신앙생활은 특권으로 하고, 종교생활은 의무로 한다.
기도는 대화이다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이다. 기도는 하소연이 아니고 푸념이 아니라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다. 대화는 일방통행이 아니라 쌍방통행이다.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자는 대화를 할 수 없다. 사울이 처음 왕으로 등극했을 때는 겸손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교만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블레셋과의 전투 때에서 사무엘 대신 자신이 제사를 드렸고, 아말렉과 전투에서도 자신의 뜻대로 전리품을 가지고 왔다. 결국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서 떠난다.(삼상16:14) 다윗도 비슷한 상황에 처한 적이 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를 취하고 나단에게 지적을 받는다. 다윗은 침상을 적시며 하나님께 통회하며 자복한다. 시편 51편이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10절) 하나님이 영이 떠난 기도는 푸념이고 하소연이며, 허공에 울려 퍼지는 공허한 메아리와 같다.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에게,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변화시켜 내 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변화되어 하나님 편이 되는 것이다. 로마서 8장 26절은 기도와 관련된 성령의 역할을 설명하고 있다.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셔서,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에 돕는다고 했다. 요한일서 2장 1절에 아버지 앞에 계신 그리스도는 ‘파라클레토스’로서 하늘의 법정에서 죄를 범한 성도를 대변해 주는 변호인으로 등장한다.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라이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