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나는 세상의 빛이다 (요 8:12)
오늘은 대림절 마지막 주일입니다. 대림절은 초림의 예수님을 기뻐하며 기념하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소망 가운데 기다리는, 성탄 전 4주간의 절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대림절 네 주간을 촛불로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첫째 주에는 절망 속에 희망의 빛입니다. 희망은 미래적인 동시에 현재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미래의 희망은 현재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둘째 주에는 전쟁 속에 평화의 빛입니다. 샬롬은 전쟁이나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전쟁과 갈등 중에서의 평화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습니다.
셋째 주에는 슬픔 속에 기쁨의 빛입니다. 쾌락은 육신적인 것이며 외적인 것이지만, 기쁨은 내적인 것이며 영적인 것입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므로 영이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진정한 기쁨은 없습니다.
넷째 주에는 미움 속에 사랑의 빛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의 빛이 구약과 신약을 어떻게 관통하며,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실천되어야 하는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 구약의 사랑 – 포기하지 않는 사랑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깊이 보여주는 책은 호세아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불성실한 여인 고멜과 결혼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개인의 결혼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고멜은 남편을 떠나 다른 남자에게 갔습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그녀를 다시 데려옵니다. 이 행동은 하나님께서 배신한 이스라엘을 끝까지 사랑하시고, 회복시키려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포기하지 않는 사랑,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사랑, 회복을 이루시는 사랑입니다.
고등학교 시절, 남파 공작원이었던 김신조 씨가 학교에 와서 강연을 했습니다. 1968년 1월 21일 발생한 ‘김신조 청와대 습격 사건’은 대한민국 안보 체계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31명 중에 29명은 죽고 한명은 북으로 도주를 하고, 김신조씨는 생포되어 전향을 하였습니다. 이 사건 이후 군복무 기간 연장과 예비군 제도의 창설, 주민등록번호 도입 등과 같은 제도적 변화가 뒤따랐습니다. 얼마전 이무렵에 군복무를 했던 분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제대를 몇 칠 앞두고 있었는데, 김신조 사건으로 6개월 더 근무했다고 합니다.
그때 김신조씨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한 문장은 지금도 선명합니다. “남한에 오니 사랑이란 단어가 안 들어간 노래가 없수다. 북한에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거의 쓰지 않습네다.” 이 말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매일 사랑을 말하지만, 정말 사랑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풀꽃 시인이란 불리는 나태주 시인을 알고 있습니다. 이분이 쓴 풀꽃은 정말 짧지만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옆에 사람을 보고 함께 인사합니다. “너도 그렇다”
나태주 시인은 드라마도 반전이 있어야 재미있는 것처럼, 시에도 반전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나태주 시인은 ‘사랑에 답함’이란 시에서 사랑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예쁘지 않은 것을 예쁘게 보아주는 것이 사랑이다. 좋지 않은 것을 좋게 생각해 주는 것이 사랑이다. 싫은 것도 잘 참아주면서 처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중까지 아주 나중지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랑이다.’
’나 시인의 ‘사랑에 답함’은 고린도전서 13장을 연상하게 하는 시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한다”(고전 13:4-5)고 성경은 말합니다.
사랑에는 분명 감성의 요소가 있습니다. 누군가를 향해 마음이 움직이고, 따뜻함을 느끼고, 기쁨과 설렘이 생기는 것은 사랑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감성은 사랑을 시작하게 하고, 사랑을 느끼게 하는 창문과 같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감성으로만 규정하기에는 사랑의 폭이 너무 넓고 깊습니다.
감성은 사랑의 한 부분일 뿐, 사랑의 전부는 아닙니다. 감성은 순간적으로 흔들릴 수 있고,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지만,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지속, 의지, 태도, 행동의 차원을 포함합니다. 사랑은 지정의를 모두 포함한 성품을 의미합니다. 사랑할 때는 정적, 지적 그리고 의지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
우리는 사랑을 노래하지만, 정말 사랑을 살아내고 있습니까?
- 신약의 사랑 – 성육신과 십자가의 사랑
신약성서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성육신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늘의 영광을 내려놓으시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오셨다는 사실 자체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 위해, 우리의 고통을 함께하시기 위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인간의 삶 한가운데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영원하신 분이 시간속으로 오신 것입니다. 무소부재하신 분이 공간 속으로 오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성육신의 목적이자 절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질고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이 사랑은 조건 없는 희생의 사랑이며, 인간의 불성실보다 더 크고 깊은 은혜의 사랑입니다. 성육신이 없다면 십자가는 없고, 십자가가 없다면 성육신은 의미를 잃습니다. 두 사건은 하나님의 사랑을 완성하는 하나의 흐름입니다.
비유로 설명하자면, 건물에 불이 났을 때 밖에서 마이크로 “이쪽으로 나오십시오”라고 안내하는 것과, 구조대원이 산소통을 메고 연기 속으로 직접 들어가 사람을 업고 나오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연기 자욱한 건물 속으로 들어오신 사건이고, 십자가는 그분이 우리를 업고 건물 밖으로 데리고 나오신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우리의 사랑 – 사랑에서 시작되는 사명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상최대의 계명’(The Great Commandment, 마 22장 37–40절)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 계명은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선지자의 모든 가르침이 결국 이 사랑의 계명 위에 서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신앙의 중심이고, 모든 순종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맡기신 ‘지상최대의 사명’(The Great Commission, 마 28장 18–20절)은 선교, 곧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삼는 일입니다.
사랑은 사명의 출발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베드로에게 사명을 맡기시기 전에 먼저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의 고백이 있은 뒤에야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요 21장). 예수님은 베드로의 능력을 묻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의 과거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사랑을 물으셨습니다. 사랑 없는 사명은 부담이 되지만, 사랑에서 시작된 사명은 기쁨과 자유로 이어집니다.
결론 – 사랑의 빛을 밝히는 삶
오늘 대림절 마지막 주에 우리는 ‘사랑의 빛’을 기억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는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도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사명을 맡기시는 이유도 사랑 때문입니다.
이 사랑의 빛을 가정에서, 일터에서, 교회에서, 이웃 가운데서 밝히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빛이 되고, 우리의 사랑이 세상 속에서 또 하나의 빛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쁨은 선물입니다 (로마서 14:17, 시편 100:1–2, 갈라디아서 5:22–23)
서론
사람은 누구나 기쁨을 갈망하며 살아갑니다. 형편이 조금만 더 나아지면 기쁠 것 같고, 건강해지면 기쁠 것 같고, 관계가 좋아지면 참된 기쁨이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쉼 없이 바쁘게 움직이며 기쁨을 찾지만, 마음 깊은 곳에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을 느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에 영의 만족이 있을 때 비로소 기뻐할 수 있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만나지 않으면 육신의 쾌락은 있을 수 있지만, 영적인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없습니다.
웃으면서 죽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검시관이 물었습니다. “이사람은 어떻게 죽었나?”, “번개 맞아 죽었습니다.”, “번개 맞아 죽었는데 어떻게 웃을 수 있는가?”, “아 그건! 사진 찍는 줄 알았다고 합니다.”
성경은 기쁨의 근원을 분명하게 말해 줍니다. 기쁨은 세상의 조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 참된 예배를 드릴 때,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실 때 주어지는 선물이라고 말씀합니다. 오늘은 로마서 14장 17절, 시편 100편 1-2절, 갈라디아서 5장 22-23절 말씀을 의지하여 “기쁨은 선물입니다”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잃어버린 기쁨이 회복되고, 우리의 예배와 일상 속에 하나님 나라의 기쁨이 새롭게 흘러 넘치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천국의 기쁨 –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 드러나는 기쁨 (롬 14:17)
예수님의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첫번째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입니다. 사도행전 마지막 장 마지막 절인 28장 31절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라고 했습니다.
주기도문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 이 고백 속에는 하나님 나라가 지금 우리의 삶의 자리에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 위에도 실제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단지 죽은 후에만 가는 곳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이 임하는 곳은 그 어디나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적이면서 현재적입니다. 선교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 확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특징을 로마서 14:17절에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4장 17절은 하나님 나라의 특징을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설명합니다. 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세워지는 상태를 의미하며, 평강은 하나님과 화목하고 이웃과도 화해하며 마음에 쉼을 누리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 피어나는 희락, 곧 기쁨은 하나님께 속한 자에게 주어지는 내적인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환경의 좋고 나쁨에 따라 흔들리는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안에 있다는 사실에서 흘러나오는 존재의 기쁨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주인 된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사역 전체는 이 나라를 선포하고 확장하는 일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생각과 욕심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며 순종할 때, 그 삶의 자리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우리의 마음과 가정과 공동체 안에 의와 평강과 기쁨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예표입니다. 우리 교회에 하나님의 의와 평강과 기쁨이 있습니까? 한국에서 집 근처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교인들은 대화할 때 언제나 웃음 꽃이 피어났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 일반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예배의 기쁨(시 100:1–2)
시편 100편은 ‘감사의 시’로서, 모든 민족과 온 땅을 하나님께 예배와 찬양으로 초대하는 공동체적 예배의 노래입니다. 시편 100편 1–2절은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라고 선포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성전에 들어갈 때 백성들이 부르던 노래로, 하나님께 드리는 공동체적 감사와 기쁨을 표현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배는 억지로 나오거나, 누구를 위하여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초청임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쁨으로 찬양하며, 감사함으로 그분 앞에 서기를 원하십니다.
예배는 단순한 종교적 의식이나 주간 행사 하나를 채우는 시간이 아니라, 은혜의 하나님을 “만나는 것”(to Meet God)이며 동시에 그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to Meet with God)입니다. 예배 시간에 우리는 찬양과 기도와 말씀 가운데 살아 계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대면하며, 그분과 마음과 마음이 오가는 은혜의 교제를 나누게 됩니다. 예배의 성공 여부는 형식이 얼마나 완벽했는가가 아니라, 오늘 이 시간에 내가 정말 하나님을 만났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예배의 본질은 어느 교단과 전통 속에서도 동일하지만, 강조점과 형식은 조금씩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말씀과 성례를 더 강조하고, 어떤 공동체는 찬양과 간증을 더 풍성히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의 중심에는 항상 하나님이 계시며, 우리는 그 앞에 은혜 입은 죄인으로 서서 감사와 찬양과 순종으로 응답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식의 차이를 넘어, 예배의 본질을 붙들어야 합니다.

구세군 예배의 특징은 4가지가 있습니다.
1.자유함 (Freedom)
예배는 진리 안에서 누리는 참된 자유의 자리입니다. 성경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고 말씀하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갈 5:1)라고 선포합니다. 구원이란 우리를 억누르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함을 얻는 것이며, 성령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습니다(고후 3:17).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 드릴 때 진정한 자유를 경험해야 합니다.
2.참여 (Participation)
구세군 예배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참여가 있는 예배입니다. 받은 은혜를 나눌 때 그 은혜는 두 배가 되고, 슬픔을 나눌 때는 반으로 줄어듭니다. 간증은 단순히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입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 나눌 사람이 없다면 불행한 일이며,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기도 부탁할 사람이 없다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구세군 예배는 참여와 나눔을 통해 공동체적 은혜를 더욱 풍성히 경험하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예배의 방관자나 구경꾼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배의 참여자입니다.
3.자비석 (Mercy Seat)
자비석은 성경에서 ‘속죄소’로 번역된 법궤의 뚜껑을 의미하며, 하나님께서 모세와 만나셨던 자리입니다(출 29:42, 출 30:6, 민 17:4). 구세군 교회는 건축할 때 자비석을 마련하며, 예배에서는 설교 후 자비석으로 초청하여 회개와 헌신, 기도의 자리를 갖습니다. 자비석은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회개석이 되고, 믿는 자들에게는 성결의 단이 됩니다. 이는 하나님과 일대일로 만나는 은혜의 보좌로서, 구세군 집회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4.기쁨 (Joy)
예배는 구원의 기쁨을 회복하는 자리입니다. 사랑하는 이를 만날 때 설레임이 있듯이, 은혜의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카리스’라는 은혜의 어원은 ‘기쁘다, 즐겁다’라는 ‘카라’ 입니다. 은혜가 은혜인 줄 알 때 우리에게 기쁨이 넘칩니다. 윌리암 부스는 “좋은 예배는 병사들을 격려해 주어야 한다”고 말하며, 구세군 안에는 반드시 ‘기쁨’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나갈 때, 더 눌리고, 더 낙심하고, 더 무거워지는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더 위로받고, 더 소망을 품고, 더 감사하며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에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예배는 우리의 실패를 바라보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오늘 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 제 안에 잃어버린 예배의 기쁨, 구원의 즐거움을 다시 회복시켜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배를 통해 우리는 다시 한번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고, 잃어버렸던 기쁨을 회복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우리의 시선이 세상에서 하나님께로 옮겨질 때,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새로운 소망과 평안이 솟아나게 됩니다.
성령의 기쁨(갈 5:22–23)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성령의 열매를 나열하면서 두 번째로 희락, 곧 기쁨을 언급합니다. 이 말씀은 참된 기쁨이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역사하실 때 맺히는 열매임을 보여 줍니다. 성령의 기쁨은 감정의 일시적인 고조가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인격을 빚어 가실 때 생겨나는 내적 상태입니다.
시드니 브릿지 교회는 2015년부터 노숙자 사역을 시작해 현재까지 센트럴역 주변에서 꾸준히 노숙인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도시락 제공, 침낭·담요 나눔, 성탄절 특별 사역 등을 통해 노숙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과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어젯 밤에 센트럴역에 나가서 봉사를 하였습니다. 음식을 받은 노숙자들은 배고픔이 채워져서 기뻤고, 음식을 건넨 자원봉사자는 사랑을 흘려보낼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물질로 인한 기쁨은 일시적이지만, 영으로 인한 기쁨은 계속됩니다.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자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5)
성령의 열매라고 부르는 이유는, 열매의 주체가 우리가 아니라 성령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지에 불과하며, 포도나무 되신 주님께 붙어 있을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사랑과 기쁨과 화평의 열매를 자라게 하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스스로 기쁨을 짜내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 우리 마음을 내어 드리고 그분의 다스리심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상황과 조건이 따라줄 때만 유지되는 불안한 기쁨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주시는 기쁨은 고난과 눈물 가운데서도 사라지지 않는 깊은 기쁨입니다. 현실이 어렵고 이해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확신이 마음을 지키게 할 때, 우리는 설명하기 어려운 평안과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로서의 기쁨입니다.
혹시 우리의 마음에 기쁨이 메말라 가고, 예배가 의무처럼 느껴진다면, 우리는 다시 한 번 성령의 충만을 간구해야 합니다. 말씀 앞에 자신을 낮추고, 회개와 순종으로 나아갈 때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잃어버린 기쁨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때 우리의 삶과 공동체 안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기쁨의 분위기가 형성되고, 그 열매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됩니다.
결론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세 가지 기쁨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 주어지는 천국의 기쁨,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할 때 누리는 예배의 기쁨,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실 때 열매로 맺히는 성령의 기쁨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이렇게 기도하며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주님, 제 안에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회복시켜 주옵소서.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게 하시고, 성령의 기쁨으로 제 마음과 삶을 채워 주옵소서.” 이 기도가 우리의 고백이 될 때, 우리의 예배와 일상이 천국의 기쁨을 미리 맛보는 복된 자리가 될 줄 믿습니다.

11월의 기도문
♡2025년 11월 29일(토)♡
주님,
일상의 모든 일을 짐으로 여기지 않고, 주님의 선물로 볼 수 있는 은총을 주소서. 크고 작은 모든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서 주님의 손길이 함께 하심을 알게 하여 주소서. 모든 순간을 기뻐하며 선을 행하고,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 알고 감사하며 살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전 3:12-13)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의 삶, 음식과 음료, 우리의 관계와 성취 모두가 그분의 은혜입니다. 선물들은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인해 주어진 것들입니다. 선물들을 소중히 여기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은 더욱 풍성해질 것입니다. 인생을 ‘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행위 중심으로 살지만, ‘선물’로 생각하는 사람은 은혜 중심으로 삽니다.
♡2025년 11월 28일(금)♡
주님,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주님께 한 것이라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게 하소서. 사람 안에서 주님을 보게 하시고, 사랑의 손길을 내밀게 하소서. 작은 자를 향한 우리의 발걸음이 주님의 발걸음이 되게 하시고, 작은 자를 향한 우리의 손길이 주님의 손길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 25:40)
마태복음 25장은 세 가지 비유(열 처녀, 달란트, 양과 염소)를 통해 종말과 심판의 기준을 보여줍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 속에서, 예수님은 마지막 심판 때에 의인과 불의한 자를 가르시며 기준을 밝히십니다. 그 기준은 단순히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한 사랑과 돌봄입니다.
♡2025년 11월 27일(목)♡
주님,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주님과 더불어 말하는 모습을 제자들이 보았던 것처럼, 오늘 우리의 눈도 예수님께 열어 주옵소서.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이 결국 예수님을 가리킨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십자가의 길이 실패가 아니라 영광의 길임을 믿게 하옵소서. 인생의 두려움과 현실의 무게 속에서 자꾸 작아지는 주님의 모습을 다시 크게 보게 하시고,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신 아버지의 음성에 순종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마 17:3)
마태복음 17장과 마가복음 9장에 변화산 사건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변화산에서 광채 나는 모습으로 제자들 앞에 서 계실 때,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씀을 나누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율법을,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합니다. 그들이 예수와 함께 나타난 것은 율법과 선지자가 모두 예수 안에서 성취됨을 보여줍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이 장면을 목격함으로써 예수의 참된 영광과 권위를 체험합니다. 이는 훗날 그들의 사역과 증언에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2025년 11월 26일(수)♡
주님,
우리는 자꾸 제사를 앞세우며 사람을 정죄하려 합니다. 자비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시고, 무죄한 자를 함부로 정죄하지 않게 하소서. 율법의 눈이 아니라, 십자가의 눈으로 사람을 보고, 교회를 보고, 자신을 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마 12:7)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면 판단이 왜곡됩니다. 율법 조항은 알고 있지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면 결국 사람을 죽이는 방향으로 판단을 하게 됩니다. 제사는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자비 없는 제사, 사랑 없는 의식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2025년 11월 25일(화)♡
주님,
주께서 보내신 사람들을 주님의 마음으로 알아보고 맞이하게 하소서. 작은 환대도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믿음이 되게 하옵소서. 보이는 크고 작은 섬김을 통해 내가 주님의 일에 참여하고 있음을 잊지 않게 하소서. 기쁨으로 섬기며 하늘의 열매를 누리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마 10:41)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선지자와 의인을 그 믿음과 사명 때문에 기쁨으로 영접하는 자는, 그들의 사역에 동참한 자로 인정받아 같은 은혜와 열매를 누립니다. 이는 사람을 단순히 개인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를 인정하며 존중하는 것이 참된 영접임을 보여 줍니다.
♡2025년 11월 24일(월)♡
주님,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시고, 다윗에게 길을 열어 주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완성을 보여주신 주님, 저희의 걸음을 그 은혜의 역사 속에 두게 하소서. 작은 일에도 감사하며, 만나는 이들에게 평화를 나누고,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의 뜻을 찾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마 1:17)
‘14대’는 단순한 족보의 숫자가 아니라, 예수가 다윗의 후손임을 강조하는 상징적 장치입니다. 히브리어로 다윗(דוד, DWD)의 자음 값은 4 + 6 + 4 = 14 입니다. 따라서 ‘14대’는 예수께서 다윗의 후손임을 강조하는 상징적 장치입니다. 마태는 족보를 의도적으로 배열하여 예수가 ‘참된 다윗의 후손’임을 드러냅니다.
♡2025년 11월 22일(토)♡
주님,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시고, 세대를 이어 족보 속에 구원의 길을 놓으신 주님, 오늘도 우리의 삶이 그 큰 이야기 속에 작은 빛으로 이어지게 하소서. 만나는 이들에게 따뜻한 말과 겸손한 마음을 나누게 하시며, 작은 일에도 감사와 기쁨을 발견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눅 3:23)
성경에서 이름과 족보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과 구속사의 흐름을 드러내는 상징적 장치입니다. 이름은 정체성과 소명을 나타내며, 족보는 하나님의 약속이 세대를 통해 이어지는 것을 증거합니다. 마태복음의 족보는 예수님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강조하여 유대인들에게 메시아의 정통성을 증명하고, 누가복음의 족보는 예수님을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인류의 구원자’로 제시하여 보편적 구속을 드러냅니다.
♡2025년 11월 21일(금)♡
주님,
오늘도 주님의 미쁘심을 의지하여 하루를 시작합니다. 사람의 말과 세상의 평가에 흔들리지 말게 하시고, 주님의 신실하심을 믿게 하소서.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의 문제가 아무리 커 보여도 주님께서 해결하지 못할 일은 없음을 고백합니다. 변함없는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날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살후 3:3)
우리의 삶이 흔들리는 이유는 흔들리는 세상에 시선을 두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변하고 불안정하기에 그곳을 바라보면 우리도 요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변하지 않는 신실하신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께 시선을 고정할 때, 주님은 우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우리를 지키십니다.
♡2025년 11월 19일(수)♡
주님,
오늘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옵소서. 세상의 소리보다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게 하시고, 사람의 말과 분위기에 흔들리기보다, 성령께서 주시는 분별력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눈에 보이는 성공과 이익, 편안함이 아니라, 거룩과 진리를 붙드는 믿음의 길을 선택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계 20:3)
요한계시록 20장의 ‘천년왕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 사탄이 결박되고,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는 시기를 가리킵니다. ‘천년왕국’은 크게 세 가지 해석으로 나뉩니다. 전천년설: 예수님이 재림하신 후 실제로 천 년 동안 지상에서 통치하신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후천년설: 복음이 세상을 변화시켜 의와 평화가 확산된 후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무천년설: 천년왕국은 상징적이며, 이미 교회 시대에 그리스도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2025년 11월 18일(화)♡
주님,
땅에서 구원을 받은 자들만이 부를 수 있는 새 노래가 있음을 보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내가 걷는 이 길, 눈물 섞인 순종의 발걸음이 언젠가 주님 보좌 앞에서 찬양이 되게 하소서. 세상의 소리보다 어린양의 음성을 따르게 하시고, 타협 대신 믿음을, 원망 대신 감사와 찬양을 선택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계 14:3)
요한계시록의 숫자들은 단순한 수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과 인간의 불완전함을 대비시키며, 신앙적 결단을 촉구하는 상징적 언어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7은 완전함과 충만함을 나타내는 수로서, 계시록 전체의 구조를 이루는 핵심적인 상징입니다. 이에 반해 666은 짐승의 수로 불리며, 인간의 불완전함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을 상징합니다. 144000은 하나님의 인 맞은 사람들의 총수, 구원받은 공동체의 완전성을 상징합니다. 12(지파) × 12(사도) × 1000으로 계산되어, 모든 시대와 민족 가운데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나타냅니다.
♡2025년 11월 17일(월)♡
주님,
요한에게 보내신 천사의 증언처럼 우리도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복 있는 자가 되게 하소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의 귀를 열어 주의 음성을 듣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의 계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계 1:1)
‘계시’라는 말은 원래 ‘가려져 있던 것을 열어 보여 준다’는 뜻입니다. 커튼으로 가려져 있던 무대를 한순간에 열어 보이듯이, 보이지 않던 세계가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바로 이 보이지 않는 현실을 열어 보여 주는 책입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지금 이 세상을 누가 다스리고 계신가?”, “역사의 마지막 결말은 누구의 손에 있는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2025년 11월 15일(토)♡
주님,
우리의 마음이 육신의 욕망에 끌리지 않게 하시고, 눈에 보이는 것들에 현혹되지 않게 하시며, 세상의 자랑과 성공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지켜 주옵소서. 우리의 삶이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말씀 위에 세워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6)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하나님을 떠나게 만드는 세 가지 흐름이 있습니다. 첫째는 육신의 정욕입니다. 내 몸이 원하는 즐거움과 편안함이 하나님보다 더 중요해지는 상태입니다. 둘째는 안목의 정욕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 돈과 성공과 외모와 소유를 부러워하며 그것을 인생의 가치 기준으로 삼는 마음입니다. 셋째는 이생의 자랑입니다. 내가 이 땅에서 가진 것과 이룬 것들을 붙들고 그것을 내 정체성과 자랑으로 삼는 태도입니다.
♡2025년 11월 14일(금)♡
주님,
우리의 작은 친절, 조용한 위로가 누군가의 하루를 밝게 하는 날이 되게 하소서. 나눔이 제사요, 섬김이 예배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우리의 일터와 가정, 공동체가 주님을 섬기는 성소가 되게 하시고, 우리의 손과 발이 주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히 13:16)
‘제사’는 단지 제도적 예배가 아니라, 삶 전체를 드리는 예배를 의미합니다. 예배는 찬양과 기도뿐 아니라, 선행과 나눔이 곧 예배라는 선언입니다. 히브리어 ‘아보다(avodah)’는 ‘일’, ‘섬김’, ‘예배’라는 세 가지 의미가 담긴 단어입니다. ‘아보다’는 예배가 단지 의식이 아니라, 삶 전체를 드리는 태도임을 말합니다.
♡2025년 11월 13일(목)♡
평화의 왕이신 주님,
멜기세덱처럼 의의 왕을 닮아 공의로 말하게 하시고, 평화의 왕을 닮아 온유로 행동하게 하시며, 왕 같은 제사장으로 중보자의 삶을 살게 하소서. 오늘도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그를 구하게 하소서. 선택의 순간마다 주님의 뜻을 먼저 묻게 하소서. 분주함 속에서도 중요한 것을 붙드는 지혜와 멈춰 서서 기도하는 믿음을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왕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히 7:1)
멜기세덱은 누구인가? 멜기세덱은 살렘의 왕이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전쟁에서 돌아오는 아브람을 떡과 포도주로 맞아 축복받게 했고 아브람은 그에게 십일조를 드렸습니다(창 14:18–20). 그의 이름은 “의의 왕,” 살렘은 “평강”을 뜻하여, 그는 의와 평강의 통치를 상징합니다(히 7:2). 다윗의 시는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선언하여, 왕과 제사장의 결합된 약속을 예고합니다(시 110:4). 히브리서는 멜기세덱을 통해 레위 계통을 넘는 더 큰 제사장직을 설명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에 영원한 중보 사역을 밝힙니다(히 7:1–3, 17, 23–27).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담대히 은혜의 보좌에 나아가며(히 4:14–16), 교회는 세상 속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름 받았습니다(벧전 2:9).
♡2025년 11월 12일(수)♡
소망의 주님,
우리 영혼이 흔들릴 때, 주님은 닻이 되어 우리를 붙잡아 주소서. 감정의 파도, 사람의 말, 세상의 소문이 우리를 흔들리지 말게 하소서. 주님의 약속은 흔들리지 않는 반석이요, 주님의 임재는 지성소 안의 평강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반석이신 영혼의 닻을 내리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히 6:19)
하나님은 단지 소망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소망 자체가 되시는 분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소망은 감정이 아니라 영혼을 붙잡아 주는 ‘닻’입니다. 배가 아무리 튼튼해도, 바람과 파도 앞에서는 끌려 다니기 쉽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환경과 감정, 사람의 말, 소문과 불안이 우리를 흔들 때, 하나님이 주신 소망은 우리를 붙잡고, 다시 제자리를 지키게 하는 닻입니다.
♡2025년 11월 11일(화)♡
구원의 주님
우리가 오늘 누리는 구원은 값없이 주어진 것이지만, 결코 값싼 것이 아님을 고백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주님의 피, 그 사랑의 대가로 우리가 자유를 얻었습니다. 오늘은 Remembrance Day입니다. 오늘, 우리는 기억합니다. 전쟁터에서 쓰러진 이들의 이름을. 그리고 그 이름들 속에 담긴 헌신과 희생을 마음에 새깁니다. “Lest we forget.”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 4:16)
오늘은 Remembrance Day입니다. 매년 11월 11일, 전쟁과 평화유지 활동 중 목숨을 잃거나 고통을 겪은 이들을 기억하고 기리는 날입니다. 1918년 11월 11일 오전 11시, 제1차 세계대전의 서부 전선에서 전투가 공식적으로 중단되었습니다. 처음에는 Armistice Day(휴전일)로 불렸으며,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이들을 기리기 위한 날이었습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모든 전쟁 희생자들을 기억하는 의미로 확대되어 Remembrance Day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2025년 11월 10일(월)♡
소망의 주님,
죽음을 이기신 부활의 능력으로, 오늘도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내일을 향한 믿음의 행진을 기쁨으로 하게 하소서. 오늘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산 소망을 나누게 하시어, 절망의 자리마다 생명의 꽃이 피어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벧 1:3)
산 소망은 죽음을 이긴 생명의 능력에서 비롯된 소망입니다. 산 소망은 단지 미래의 보상이 아니라, 현재의 고난을 견디게 하는 힘입니다. 믿음의 시련 속에서도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을 누리게 합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 3:15)
♡2025년 11월 8일(토)♡
주님,
고난 중에 있는 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고난이 찾아올 때 절망이 아니라 기도가 되게 하소서. 고난의 밤이 길어질수록 주님을 향한 기도가 깊어지게 하소서. 기도가 주님과의 만남이 되게 하시고, 그 만남이 기쁨의 찬송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 5:13)
사람은 누구나 고난과 기쁨 사이를 오가며 삽니다. 고난은 외로움이나 절망으로 빠지기 쉬운 시간입니다. 그러나 고난은 우리를 기도로 인도하여, 기도 속에서 주님을 만나게 하시고, 기쁨 속에서 주님을 찬양하게 하십니다.
♡2025년 11월 7일(금)♡
주님,
어둠을 밀어내고 빛으로 부르시니 감사합니다. 어제의 염려를 주 앞에 내려놓고, 오늘의 걸음을 말씀에 맞춥니다. 우선순위를 분별하게 하시고, 서두르지 않되 게으르지 않게 하소서. 듣는 귀와 부드러운 혀를 주시어, 사람을 살리고, 세우는 날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내가 너를 그레데에 남겨 둔 이유는 남은 일을 정리하고 내가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딛 1:5)
바울은 디모데와 디도를 각각 “믿음 안에서 난 참 아들”이라 부르며, 두 사람 모두를 깊이 신뢰하고 사랑한 동역자로 삼았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가장 가까운 제자이자 목회적 후계자였고, 디도는 외교적 감각과 조직 능력을 갖춘 사역의 관리자였습니다.
♡2025년 11월 6일(목)♡
주님,
주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다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우리에게 주어진 일상과 만남, 음식과 자연, 그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게 하소서. 오늘 우리가 마주하는 사람들에게 감사와 존중의 마음으로 다가가게 하시고, 작은 일에도 주님의 뜻을 묵상하며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 4:4)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은 본래 선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 질서 안에서 모든 것은 의미와 가치를 지닙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정하는 믿음의 표현이며, 그것을 통해 우리는 일상의 모든 것을 거룩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2025년 11월 5일(수)♡
주님,
오늘도 말씀을 묵상하며 새날의 문을 엽니다. 사람을 만나기 전에 주님을 만나고, 말하기 전에 들을 수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우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게 하소서. 오늘도 주님의 평강이 우리 가운데 머물러 서로를 위로하고 세워가는 복된 하루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바울은 단지 기도하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하십니다. 이는 우리가 구하는 것의 응답 여부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돌보시고 인도하신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감사입니다. 감사는 기도의 태도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며, 염려를 평안으로 바꾸는 영적 열쇠입니다.
♡2025년 11월 5일(수)♡
주님,
오늘도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와 간구로 주님께 나아갑니다. 사람을 만나기 전에 주님을 만나고, 말하기 전에 들을 수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감사함으로 기도하게 하소서. 오늘도 주님의 평강이 우리 가운데 머물러 서로를 위로하고 세워가는 복된 하루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바울은 단지 기도하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하십니다. 이는 우리가 구하는 것의 응답 여부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돌보시고 인도하신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감사입니다. 감사는 기도의 태도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며, 염려를 평안으로 바꾸는 영적 열쇠입니다.
♡2025년 11월 4일(화)♡
교회의 머리 되신 주님
교회가 성령으로 하나 되게 하시고, 거룩과 사랑의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성령의 단비가 내려 주신 은사를 통해 은혜와 진리 위에 든든하게 세워지게 하소서. 성령의 임재와 인도함을 받는 교회가 되어, 세상을 향한 증인공동체로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2)
교회는 성령의 임재로 시작되고 성령의 인도로 자라나는 공동체입니다. 오순절의 바람과 불의 혀가 임하던 그날, 성령께서 찾아오시자 그들의 마음은 열리고, 언어는 풀리고, 삶의 방향이 달라졌습니다. 교회는 사람의 조직이 아니라, 하나님의 숨결이 만든 성령공동체입니다.
♡2025년 11월 3일(월)♡
주님,
새 날을 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새 힘과 새 마음을 부어 주시고, 말과 생각과 행실이 주의 뜻에 합하게 하소서. 헛된 분주함이 아니라 주님이 기뻐하는 일에 집중하게 하소서. 오늘 만나는 모든 이에게 주님의 사랑과 평안을 전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골 4:14)
골로새서는 바울이 옥중에서 보낸 편지입니다(골 4:3, 18). ‘누가’는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를 가리키며, 그의 직업은 의사였습니다. ‘데마’는 바울의 동역자 중 한 사람으로, 이 시점에서는 함께 사역하고 있었지만, 후에 디모데후서 4:10에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떠났습니다.
♡2025년 11월 1(토)♡
자비로우신 주님,
11월의 첫 아침을 허락하시고 새로운 달을 은혜로 시작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우리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우리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외적인 성공보다 내면의 성숙을 구하게 하시고, 사람의 눈보다 주님의 뜻을 따라 살게 하소서. 주님, 오늘도, 그리고 이 한 달 동안도 가정에는 사랑과 평강이 흐르게 하시고, 일터에는 정직과 지혜가 넘치게 하시며, 교회와 사역에는 성령의 은혜가 임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행 6:28).
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는 총 세 번 등장합니다. ‘그리스도인’(Χριστιανός, Christianos)은 헬라어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 또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를 뜻합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이 명칭이 외부인들에 의해 붙여졌지만, 이후 신앙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용어로 자리잡았습니다.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 11:26),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행 26:28),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 4:16)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채스우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