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마지막 편지
한해를 돌아보고 새해를 맞이할 시기이다.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이 좋아진 삶을 사는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다. 비교와 경쟁은 너와 하는 것이 아니다. 비교는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하는 것이고, 경쟁은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내가 하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세상에서 가장 큰 행복은 한 해가 끝날 때 그 해의 처음보다 더 나아진 자신을 느낄 때이다”라고 했다.
1. 마지막 수업
독일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알자스의 학교에 다니는 프란츠는 학교 수업을 빼먹기 좋아하는 말썽꾸러기 소년이다. 그날도 늦은 시간에 설렁설렁 교실에 들어가는데, 이상하게 선생님은 지각했다고 혼내지도 않고, 마을 어른들이 교실 뒤쪽에 엄숙하게 앉아있기까지 했다. 그리고는 아멜 선생님은 이제 다음날부터는 우리의 모국어인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것이 금지된다면서, 오늘이 마지막 프랑스어 수업이라고 말하지요. 그 이야기를 듣자 프란츠를 비롯해 이래저래 학교 공부를 소홀히 했던 많은 아이들은 반성하고, ‘마지막 수업’에서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고 수업을 끝내야만 할 시간이 되자, 선생님은 ‘프랑스 만세’를 마지막으로 칠판에 쓰고는, 수업은 끝났다는 말로 아이들을 돌려보냈다. 프란츠는 공부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2. 마지막 잎새
뉴욕에 거주하던 여자 화가인 존시 (Johnsy)는 폐렴으로 투병 생활을 하던 도중에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의사는 이대로는 존시가 생존할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존시는 담장에 있는 담쟁이 덩굴 잎을 보면서 그 잎이 모두 떨어진다면 자신도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담쟁이 잎과 자신의 운명을 동일시했다. 어느 날 밤새 심한 비바람이 불면서 아침에는 담쟁이 덩굴 잎은 마지막 한 장만 남았다. 다음날 밤에도 심한 비바람이 몰아쳤지만 마지막 남은 잎은 떨어지지 않았다. 존시는 삶에 희망을 가질 수가 있었다. 마지막 잎은 아래층에 살고 있는 술주정뱅이 화가 베어먼이 담장에 붓으로 정밀하게 그린 것이었다. 존시는 기적적으로 완쾌되었지만, 사다리를 타고 차가운 비바람을 맞고 밤을 새며 벽에 잎을 그린 베어먼은 폐렴으로 죽고 맙니다. 마지막 잎새는 그의 가장 위대한 걸작이 되었다.
3. 마지막 편지
디모데 후서는 바울의 13권의 서신 중에서 제일 마지막에 쓴 편지이다. 디모데 후서는 에베소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보내는 목회서신이고, 2차로 수감되고 쓴 옥중서신이다. 바울은 차가운 로마 감옥 안에서 자신의 처형을 예감하고 있었다. 디모데후서는 바울의 유언과 같은 편지이다. 바울은 자신의 삶을 정리하면서 디모데와 다른 모든 신자들에게 믿음 안에서 인내하고 복음을 전파할 것을 격려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딤후 4:6-8).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라고 말하고 있다. ‘전제’란 영어로 Drink Offering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바칠 때 그 제물 위에 포도주나 기름을 붓는 것을 뜻한다. 전제란 표현이 신약에 한 번 더 나온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빌2:17)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상에서 마지막 피를 흘리신 것같이 연상을 하게 하고, 옥합을 깨서 향유로 예수님의 발을 씻는 여인의 모습을 생각나게 한다.
바울은 생애를 세 마디로 표현하였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웠다. 나는 달려갈 길을 마쳤다. 나는 믿음을 지켰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딤후 2:3-6).
1. “내가 선한 싸움을 싸웠다”는 신앙생활은 영적 싸움이다. 성도는 날마다 자신의 죄악성과 싸우며 세상의 악한 풍조와 싸우며 그 배후에 활동하는 사탄과 악령들과 싸운다 (엡 6:12). 디모데후서 2장 3-4절에는 신앙인을 병사로 비유하고 있다. 병사는 고난을 각오하고,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고, 모집한 사람을 기쁘게 해야 한다고 했다. 이번에도 자선냄비 모금을 도와주는 친구 복사가 낡은 군복이라도 좋으니 한 벌만 달라고 하는 것이다. 자기는 군복의 S.S.가 정말로 좋다고 한다. 자기가 보기에는 SS는 ‘Super Star’의 약자인 것 같다고 했다.
2. “내가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다”는 말은 바울이 어떻게 사명의 길에 충성했는지를 증거한다. 딤후 2:5절에는 신앙인을 경주자로 비교하고 있다.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를 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한다고 했다. 1988 서울 올림픽에서 세기의 대결이 펼쳐졌다. 캐나다의 벤존스와 미국의 칼루이스의 100M 경기이다. 게임에는 벤존슨이 이겼지만, 금메달은 칼루이스가 받았다. 벤존슨은 약물을 복용했던 것이다.
3. “내가 믿음을 지켰다”고 했다. 말세지말이 될수록 신앙생활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약속할 수는 있지만, 약속을 지키는 쉽지가 않다. 믿을 수는 있지만, 믿음을 지키기는 쉽지가 않다.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면 환난과 핍박과 불이익을 받게 될 수도 있다. 믿지 않는 사람들과 관계도 깨어질 수 있다. 경제적으로 불이익을 받을 때도 있다. 하지만 믿음의 시련은 불로 연단하여 없어질 금보다도 귀하다.
바울은 자신의 삶을 3마디로 요약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웠다. 나는 달려갈 길을 마쳤다. 나는 믿음을 지켰다. 우리의 삶을 요약한다면 무슨 말을 쓸 수가 있을까? 처음이란 단어는 늘 설렘과 희망을 주지만, 마지막 이란 단어는 늘 아쉬움과 회한을 남긴다. 아쉬움과 회한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는 끝에서 시작을 볼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죽음에서 삶을 생각하는 명철이 있어야 한다.
마라나타 예수
오늘은 대강절 2번째 주일이다. 대강절 (The Advent)은 ‘도착’ 또는 ‘오다’를 의미하는 라틴어 ‘Adventus’에서 유래됐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4주간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의 달력이 유월절을 기점으로 시작되듯이 교회력은 대강절로부터 시작된다. 대강절은 2000년 전에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것만이 아니라, 초림의 예수를 기다렸던 그 마음 그대로, 구세주의 탄생을 기다렸던 그 마음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때이다.
1. 초림하신 예수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인간의 육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다. 성육신이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요 1:14) 사건을 의미한다. 말씀은 세상의 창조 이전부터 계신 분이며, 이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을 뿐만 아니라, 이 말씀 자신이 곧 하나님이시다. (요 1:1)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빌2:6-8) 그분이 땅에 오신 이유는 우리가 자력으로 하늘로 갈 수 없기 때문이다.
2. 재림하실 예수
부활하여 승천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광 속에 다시 오셔서, 신자와 불신자를 심판하실 것이라고 했다. 마태복음 24장에 재림의 징조에 대하여 자세히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마 24:36)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 1:7-8)
예수 시대에 에세네 (Essenes)로 불리는 파가 있었다. 이들은 바리새파나 사두개파와 마찬가지로 유태교의 한 갈래였다. 에세네파는 쿰란공동체라고 불린다. 에세네파가 쿰란공동체라고 불리는 이유는 이들이 금욕생활을 하던 정착지가 쿰란동굴이었기 때문이다. 에세네파 신자들은 재산과 예배, 독서와 식사 따위를 모두 함께 했다. 결혼은 하지 않았고, 오로지 세상의 종말에 대비하여 하나님과 한 몸이 되기를 기도했다. 그들은 세상이 마지막에 이르면, 그들 ‘빛의 아들들’이 ‘어두움의 아들들’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꿈을 가지고 있었다. 에세네파 교인들은 금욕, 기도, 하나님의 말씀 읽기를 계속해 왔다.
3. 마라나타 예수
마라나타는 아람어로 “주여 오소서”란 뜻이다. 만일 “마라-나타”라고 띄어 읽게 되면 그 뜻은 “우리 주님이 오셨도다”가 됩니다 그리고 “마라나-타”라고 띄어 읽으면 “주여 오소서”라는 의미가 된다. 신약성경에서 ‘마라나타’ 단어는 딱 한번 나온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마라나타)” (고전 16:22), 요한계시록의 22장 20절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는 의미는 같지만 다른 단어를 썼다. 마라나타는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인사말 중 하나이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놀랄 만큼 자주 언급하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 260장 가운데에 318번이나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 친히 이 땅에 계실 때 재림에 대하여 언급하셨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3). 그날은 추수하는 날이다.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모아 불태우는 날이다. 불신자에게는 지옥의 심판이 있고, 성도들은 천국의 축제에 참여할 것이다.
성경의 제일 마지막 구절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찌어다 아멘” (계 22:20-21).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까지를 말세하고 한다. 재림이 점점 더 가까워지면 말세지말이라고 한다. 우리는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그날의 삶을 오늘, 그곳의 삶을 이곳에서 살아야 한다.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여행은 만남이다. 길을 걸으며 ‘오늘의 사람’과 만나고, 유적지를 방문해서 ‘어제의 사람’과 만나며,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내일의 나’를 만나는 것이다. 6월 19일 (2018년), 새로운 만남을 위해 영국으로 떠난다. 영국의 공식적인 명칭은 UK (United Kingdom)이다. 4개의 왕국이 연합해서 만들어진 나라이다. 아일랜드는 독립을 해서, 지금은 북아일랜드만 영국에 속해 있다. 나는 잉글랜드의 수도 런던,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 웨일즈의 수도 카디프,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을 간다.
오늘의 사람 – 딸
영국에는 딸이 살고 있다. 경제적 부담 없이 훌쩍 떠날 수 있는 것은 딸 덕분이다. 시드니 대학교에서 심리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고, 영국 ‘요크 대학교’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딸은 ‘유럽연구위원회’ (ERC, European Research Council) 자금으로 ‘교사의 자질과 인성’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교사는 실력뿐 아니라 인성이 좋아야 한다. 교육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을 설득하는 3가지 요소가 있다고 했다. 첫째 이성 (Logos), 둘째 감성 (Pathos), 셋째 인격 (Ethos). 이중에서 ‘인격’ (Ethos)으로 설득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했다.
산 날보다 살아갈 날이 적어질수록 두 자녀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어머님은 아들만 네 명을 키우셨다. 연세가 드실수록 딸이 없는 것이 정말 서럽다고 말씀하셨다. 아들과 딸을 키워보니 어머님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시편기자는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며, 태의 열매는 하나님의 상급이고, 장사의 수중에 화살과 같다고 했다. 내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이니, 하나님의 뜻대로 잘 키우라는 뜻이다. ‘부모의 축복’은 자녀가 있는 곳에서 잘 사는 것이고, ‘자녀의 축복’은 부모가 계신 곳에서 건강하게 사는 것이다.
어제의 사람 – 토마스 선교사
6월 24일 주일, ‘토마스 선교사’를 파송한 웨일즈 ‘하노버 (Hanover) 교회’에서 간증한다. 토마스 선교사는 조선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이다. 1866년 미국 상선인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조선에 왔다가 27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그를 참수했던 ‘박춘권’은 회개하여 평양교회의 장로가 되었고, 토마스 선교사에게 3권의 성경을 받은 12살의 ‘최치량’은 박영식에게 주었고, ‘박영식’은 성경으로 방을 도배하였다. 세월이 지나 ‘최치량’은 박영식의 집을 사서 여관으로 사용했는데, ‘사무엘 마펫’ 선교사가 도배된 성경을 보고 놀라기도 했다. 훗날 그곳은 ‘널다리골 교회’가 되고, 널다리골 교회는 1907년 ‘평양대부흥회’를 주도하였던 ‘장대현 교회’가 되었다. ‘터툴리안’은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라고 했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대동강 근변에 ‘토마스 선교사 기념교회’가 있었다. 북한이 공산화되면서 교회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 시절 북한과 관계가 회복되면서, 2002년 6월 남북교류협력 일환으로 추진된 ‘평양과학기술대학교’ 캠퍼스 부지조성 공사 중 인부들에 의해 종탑을 비롯한 교회 유물들이 발견됐다. 역사 속에서 사라진 ‘토마스 선교사 기념교회’의 유물이었다. 평양과학기술대학교는 ‘토마스 선교사 기념교회’ 위에 세워졌다.
내일의 사람 – 나
인생은 나를 찾아서 떠나는 여행이다. 인생길은 ‘장미 빛 아스팔트길’이 아니다. 넘어야 할 산이 있고, 건너야 할 물도 있고, 지나야 할 광야도 있다. 모든 길에는 만남이 있고, 모든 만남에는 의미가 있다. 의미를 찾는 순간, ‘내일의 나’를 만난다. 나치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삶의 의미를 잃지 않고, 인간 존엄성의 승리를 보여 주었던 ‘빅터 프랑클’ 박사가 있다. 그는 조각난 삶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여, ‘삶의 퍼즐’을 맞췄던 사람이다. “모든 인생에는 의미가 있으며, 인간은 의미를 찾는 의지와 의미를 추구하는 자유가 있다”고 했다. ‘삶의 의미’의 상실은 곧 죽음이다.
‘이카루스의 역설’이라는 말이 있다. ‘날개가 있기에 비상할 수 있듯이, 날개가 있어 추락하는 것이다.’ 인간은 추락이 두려워 날려고 하지 않는다. 이별이 두려워 떠나지 못하고 있다. 죽음이 두려워 삶이 비겁하다. 호주의 호스피스 간호사가 임종 환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남이 원하는 삶만 살았다’는 것이다. 끝에서 시작을 볼 수 있는 ‘지혜’가 있으면 좋겠다. 죽음에서 삶을 볼 수 있는 ‘명철’이 있으면 좋겠다. 하늘에서 땅을 볼 수 있는 ‘혜안’이 있으면 더 좋겠다. 나는 그런 나를 만나러 떠난다.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라이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