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다시 복음 앞에 서다
다시 복음 앞에 서다 (롬 1:17, 갈 5:1, 갈 5:13절)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전 세계 개신교회는 이 날을 단순한 역사적 기념일이 아니라,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야 할 날’로 기억합니다.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붙였던 95개조 반박문은 교회의 타락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복음으로 돌아가자고 외친 신앙의 울림이었습니다.
복음은 관념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복음은 죽어 있는 심령을 살리고, 억눌린 영혼에 자유를 주며,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게 만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복음의 여정은 믿음 → 자유 → 사랑이라는 세 가지 흐름으로 이어집니다. 이 흐름을 성경은 다음 세 구절로 분명히 보여줍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롬 1:17),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자유를 주셨다.” (갈 5:1),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갈 5:13)
오늘 우리는 이 세 말씀을 따라, 복음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복음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삶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복음은 믿음으로 시작됩니다.
복음의 출발은 어디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노력이나 행위가 아닙니다. 우리의 결심이나 열심도 아닙니다. 복음은 믿음으로 시작됩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롬 1:17)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설명해 줍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의입니다. 다시 말해 구원은 ‘사람의 의’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롬 10:3). 사람의 의는 행위와 율법의 의이고, 하나님의 의는 믿음으로 얻는 은혜의 의입니다.
마틴 루터도 처음부터 이 진리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수도사가 되어 금식하고 기도하며 자신을 학대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았고, 하나님의 심판은 두려움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로마서 1장 17절 말씀 앞에서 그는 무릎 꿇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시는 분이시다.” 그는 그 순간 “천국의 문이 활짝 열리는 경험”을 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깨달음은 그의 삶을 바꾸었고, 종교개혁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믿음이란 단순히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내 인생에 받아들이는 결단이며, 내 삶의 기준을 나에서 하나님으로 옮기는 방향 전환입니다. 믿음은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중심이 이동된 것이고, 내가 나의 주인이었다가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이 된 것으로, 주인이 바뀐 것입니다.
둘째, 믿음은 자유로 이어집니다
복음은 믿음으로 시작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참된 믿음은 우리를 자유로 이끌어 줍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루터가 갈라디아서를 “자유의 대헌장”이라고 부른 이유는, 이 책이 인간이 율법에서 풀려나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참된 자유로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는 복음의 본질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단순한 해방이 아니라, 존재의 깊은 회복이며 관계의 새로움입니다. 이 자유는 세 가지 핵심 영역에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첫째는 죄의 사슬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죄책감과 정죄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그 대속의 은혜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이 자유는 단지 과거의 잘못을 덮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둘째는 율법의 멍에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율법은 총 613개입니다. 하지 말라는 부정 명령이 365개이고 하라는 긍정 명령이 248개입니다. 613개의 율법을 모두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율법 앞에 서면, 율법은 우리가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자임을 깨닫게 하여 줍니다.
바울은 율법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라고 했습니다(갈 3:24).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율법의 요구를 완전하게 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은혜로 인하여 율법의 멍에에서 자유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셋째는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인간은 죽음의 불안 속에 살아갑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면 삶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을 이기신 승리이며,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의 소망을 주신 사건입니다. 이 부활의 능력은 단지 미래의 약속이 아니라, 오늘의 삶을 새롭게 하는 힘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죽음에 매이지 않고, 부활의 생명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며, 부활의 문이자 영원한 생명으로의 초대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 율법, 죽음이라는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속박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선언입니다. 이 자유는 방종이 아니라,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며 살아가는 복음의 삶으로 이어집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참된 자유를 누리며, 그 자유를 통해 공동체를 세워가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셋째, 자유는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복음은 믿음으로 시작되어, 자유로 이어지며,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갈 5:13)
마틴 루터는 그가 쓴 논문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종의 자유’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 위에 있는 자유로운 사람이며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의 종이며, 모든 사람을 기꺼이 섬기는 자이다.”
자유는 방종이 아닙니다. 자유는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는 자유입니다. ‘종 노릇’이라는 표현은 강한 언어지만, 자발적인 섬김을 뜻합니다. 사랑 안에서 서로를 위해 자신을 낮추는 삶이 참된 자유입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19)
참된 자유는 결국 사랑으로 흘러가며, 이 사랑은 나 중심의 삶이 아니라 이웃을 향한 섬김입니다. 루터가 말한 유명한 문장이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붙어 있고, 사랑은 이웃에게 흘러간다.” 자유는 내 권리를 주장하는 힘이 아니라, 내 권리를 내려놓고 이웃을 섬길 수 있는 능력입니다. 교회는 억지로 종이 되는 곳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자발적으로 종이 되는 공동체입니다. 복음의 완성은 이론이나 지식이 아니라, 사랑의 실천입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분명히 말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믿음이 복음의 시작이라면, 사랑은 복음의 완성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종교개혁은 단지 508년 전의 있었던 역사가 아닙니다. 종교개혁은 오늘 우리에게 묻습니다.
나는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행위로 자기의 의를 증명하려 하고 있는가?
나는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는가, 아니면 두려움과 죄책감 속에서 묶여 있는가?
나의 사랑으로 섬기고 있는가, 아니면 정육을 위한 육체의 기회로 삼고 있는가?
오늘 우리는 다시 복음 앞에 서야 합니다. 믿음으로 시작되어, 자유로 이어지며, 사랑으로 완성되는 복음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개혁의 정신이며, 오늘 우리가 회복해야 할 복음의 본질입니다.

밖의 칼과 안의 독
서론
초대교회를 바라보면, 교회는 한 번도 안전하고 편안한 공간에서 존재한 공동체가 아니었음을 금방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두 방향에서 강한 압력을 받았다. 밖으로는 로마 제국이라는 거대한 정치‧사회적 구조가 교회를 향해 박해의 칼을 겨누었고, 안으로는 복음의 본질을 흐리고 왜곡하는 이단의 가르침들이 독버섯같이 자라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치열한 긴장과 고통의 한가운데에서, 교회는 자신이 무엇 위에 서 있는 공동체인지 더 분명히 깨달아 갔다. 밖에서 오는 칼은 그리스도인의 몸을 상하게 할 수 있었지만, 복음 자체를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안에서 퍼지는 독, 곧 이단과 왜곡된 가르침은 교회를 혼란스럽게 했지만, 그 논쟁과 분별의 과정을 통해 오히려 정통 신앙과 교리가 선명하게 다듬어졌다.
오늘 우리는 초대교회의 역사를 따라가며, 세 가지 흐름으로 이 현실을 바라보고자 한다. 첫째, 밖에서 오는 칼, 곧 로마 제국의 핍박이 무엇이었는지. 둘째, 안에서 퍼지는 독, 곧 초대교회를 괴롭혔던 이단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셋째, 그 모든 흔들림 속에서도 어떻게 교회가 결국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위에 세워져 갔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과정을 통해, 오늘 우리 시대의 교회와 신앙이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지 조용히 비추어 보려 한다.
1.밖에서 오는 칼 – 로마 제국의 핍박
초대교회를 돌아보면, 교회는 처음부터 평탄한 환경에서 자라난 공동체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사회 속에서 단순히 새로운 종교를 가진 사람들로 보인 것이 아니라, 기존 질서와 가치에 도전하는 존재처럼 여겨졌다. 로마 제국은 수많은 신들을 인정했지만, 제국의 안정을 위해 황제 숭배와 전통 신들에게 드리는 제사를 중요한 시민의 의무로 삼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는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하며, 황제를 신으로 섬기기를 거부했다.
이 고백은 신앙의 언어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선언처럼 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인들은 국가와 조상을 무시하고, 황제에게 충성하지 않는 집단으로 오해받았다. 로마의 대화재 이후 그 책임을 뒤집어쓰고 잔혹한 형벌을 당했던 성도들, 제국 전체가 우상에게 제사하라는 명령 앞에서 끝까지 거부하다가 목숨을 잃어 간 신자들, 예배 장소가 파괴되고 성경이 불태워지는 상황 속에서도 공동체를 지키려 했던 사람들이 초대교회 역사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처럼 밖에서 오는 칼, 곧 정치적‧사회적 박해는 교회를 끊임없이 흔들어 놓았지만, 동시에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무엇을 위해 살고, 무엇을 위해 죽을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 서게 만들었다. 박해는 신앙을 약하게 만들기보다, 오히려 복음의 진실성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불꽃이 되었다.
2.안에서 퍼지는 독 – 초대교회의 이단
초대교회를 위협한 것은 밖에서 들어오는 칼만이 아니었다. 교회 내에 이단의 사상이 독버섯과 같이 자라고 있었다. 첫째로 율법주의이다. 교회 안쪽에서는 복음을 조금씩 비틀고, 다른 기초 위에 올려놓으려는 시도들이 끊이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할례와 모세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 위에 인간의 행위를 더해야 한다는 생각이 복음의 자리로 스며들었다. 교회는 예루살렘 공의회와 여러 사도들의 가르침을 통해, 구원이 사람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해 나갔다.
둘째는 영지주의이다. 물질 세계를 악한 것으로, 영적인 것만을 선한 것으로 보는 이원론적 사고가 들어와, 예수님의 참된 인성을 부정하거나, 소수에게만 주어지는 비밀 지식이 구원의 열쇠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을 분리해 이해하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 성경은 과감히 제거하려 했다. 이는 결국 “내가 받아들이기 쉬운 방식으로 하나님을 재구성하려는 시도”였고, 복음을 사람의 취향에 맞추려는 유혹이었다.
한편, 성령의 역사를 내세우면서 성경과 사도적 전승, 교회의 분별을 가볍게 여기는 움직임도 있었다. 자신들의 예언과 체험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세우고, 기존의 교회와 질서를 모두 낡은 것으로 취급하는 태도였다. 교회는 성령의 역사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성령의 이름으로 말해지는 것들이 정말 복음과 일치하는지, 사도들의 가르침과 어긋나지 않는지를 끊임없이 점검해야 했다.
이런 내적인 도전들 속에서 교회는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라는 질문으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단과 논쟁하고 분별하는 과정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시라는 고백, 성부‧성자‧성령이 한 본질이신 하나님이라는 신앙, 구원이 은혜와 믿음으로 주어진다는 복음의 핵심이 더욱 또렷하게 정리되었다. 이단은 교회를 무너뜨리려 했지만, 역설적으로 교회의 신앙고백을 더 깊고 탄탄하게 다져 주는 역할을 했다.

3.십자가와 부활 위에 세워지는 교회
이처럼 초대교회는 밖에서는 박해가, 안에서는 이단이 교회를 흔들어 놓는 상황 속에 서 있었다. 그러나 역사를 자세히 따라가 보면, 그 모든 흔들림 한가운데서 교회는 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바로 “교회의 기초는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다시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교회는 권력 위에 세워진 공동체가 아니었다. 정치적 안정, 사회적 인정, 다수의 지지가 교회의 토대가 아니었다. 순교자들의 피와 눈물, 그리고 복음을 끝까지 지키려 했던 신앙의 분투가 교회의 뿌리를 이루고 있었다. 밖에서 오는 칼은 교회를 겉으로 찢어 놓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예수는 주님이시다”라는 고백은 더 깊어졌다. 안에서 퍼지는 독은 복음을 흐려 놓으려 했지만, 그 논쟁과 분별 속에서 교회는 어떤 가르침이 참으로 사도적 복음에 속한 것인지 더 분명히 알아가게 되었다.
정경을 분별하고, 신앙고백을 정리하고, 성경을 더 깊이 읽어 나가는 과정 속에서, 교회는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교회는 사람의 지혜 위에 세워질 수 없고, 시대정신이나 종교적 열광 위에 세워질 수도 없다는 사실을. 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곧 복음 그 자체 위에만 참되게 서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결론
오늘 우리의 시대는 초대교회와 환경은 다르지만, 비슷한 긴장 속에 서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피 흘리는 박해 대신, 신앙을 사적인 영역으로 밀어 넣으려는 문화, 복음을 성공과 심리적 위로의 언어로만 축소시키려는 흐름, 성경의 불편한 부분을 외면하고 싶은 유혹이 존재한다. 교회 안에서도 복음에 인간의 공로나 성취를 슬그머니 더하려 하거나, 내 감정과 경험을 성경보다 앞세우려는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다.
초대교회의 이야기는 이러한 우리에게 조용히 말을 건넨다. 밖에서 들어오는 압력보다 더 위험한 것은, 안에서 복음을 조금씩 바꾸어 버리는 일이라고. 교회가 교회답게 서기 위해서는, 상황이 어떠하든 다시 복음의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님이시며, 그분의 은혜만이 우리의 구원의 근거라는 사실을 붙들고, 그 위에 삶과 공동체를 세울 때 교회는 비로소 참된 교회로 존재할 수 있다고.
초대교회가 박해와 이단 속에서 오히려 더 단단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결국 이 한 가지에 있었다. 모든 흔들림 속에서도, 교회의 기초는 사람도, 권력도, 흐름도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의 교회와 신앙도 같은 부르심 앞에 서 있다. 어떤 외적인 손해와 불이익이 있어도, 어떤 내적인 유혹과 왜곡이 있어도, 다시 복음의 중심으로 돌아가 그 위에 굳게 서라는 초대교회의 증언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성령의 임재와 성령의 떠남
“성령의 임재와 성령의 떠남” (사무엘상 16:13–14)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이자 선지자요,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사사 시대에서 왕정 시대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하나님의 뜻을 듣고, 그 뜻에 순종하며 이스라엘을 이끌었던 사람입니다. 사사시대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 이후, 왕정 시대가 시작되기 전까지의 약 300년간을 가리키는 시기로, 여호수아의 죽음 이후부터 사무엘이 사울을 왕으로 세우기 전까지의 기간입니다. 이 시기는 사사기, 룻기, 사무엘상 초반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느 날 이스라엘 백성은 사무엘에게 나아와 요구합니다. “우리도 다른 나라들처럼 왕을 세워 달라.” 이 말은 단순히 정치 제도를 바꿔 달라는 요청이 아니라, 사실상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왕을 믿고 의지하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삼던 신정 체제에서 벗어나, 다른 민족들처럼 살고 싶다는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요구를 슬퍼하셨습니다. 그러나 강제로 막지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삼상 8:7)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미성숙한 요구를 그대로 허락하시면서, 그 역사 한가운데서 사울과 다윗, 그리고 그들에게 기름을 붓는 사무엘을 세우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 두 왕을 통해 “성령이 임하실 때, 그리고 떠나실 때”의 모습을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1.하나님의 선택 (삼상 16:7)
먼저 사울을 보겠습니다. 사울이 처음 성경에 등장할 때, 그는 두 가지 모습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그는 겉으로 보기에는 완벽한 왕감이었습니다. 사무엘상 9장 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기스에게 아들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더라.”(삼상 9:2)
그의 외모는 왕의 상징성과 권위를 갖추기에 충분해 보였습니다. 오늘 식으로 말하면, 이미지, 카리스마, 리더십 포지션을 다 갖춘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둘째, 놀랍게도 그는 처음에는 자기를 작고 미약한 자로 여기는 겸손함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이 그를 부르며 하나님의 뜻을 전할 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스라엘 지파 중 가장 작은 베냐민 지파 사람이요, 내 가족은 그 지파 중에서도 가장 미약한 가문입니다.”(삼상 9:21)
실제로 사무엘이 그를 회중 앞에 세우려 할 때, 그는 짐보더미 사이에 숨어 있었습니다. 이 겸손은 하나님께서 그를 쓰실 수 있는 마음의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를 들어 쓰시는 분이십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기름을 붓고, 그를 “하나님의 기업의 지도자”로 세웁니다. 이렇게 사울은 겸손과 좋은 조건을 동시에 지닌 왕으로 출발했습니다.
반면, 다윗은 처음부터 주목받는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이새의 여러 아들 중에 막내, 그리고 들에서 양을 치던 목동이었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아들들을 차례로 보며, 사람 눈에 보기에는 장남 엘리압이 왕감처럼 보일 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들에서 양을 치던 다윗을 하나님께서는 이미 보고 계셨고,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택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의 기준을 분명히 봅니다. 사람은 외모, 조건, 능력을 보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의 중심, 하나님께 향한 마음, 겸손을 보십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스펙과 이미지와 실적을 보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나는 사람을 볼 때 무엇을 기준으로 보는가, 또 하나님 앞에서 어떤 중심을 품고 서 있는가” 이 질문이 우리에게 던져집니다.

2.성령의 임재 (삼상 16:13)
하나님은 사울을 그냥 세우지 않으시고, 그에게 성령을 부어 새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네게는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삼상 10:6)
이 말씀대로, 사울에게 여호와의 영이 임하자 그는 선지자들과 함께 예언을 하게 되고, 사람들은 놀라며 말합니다.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성령의 임재는 사울에게 왕으로서의 권위, 영적 능력,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부어주시는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이 은혜는 자동으로, 영구적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지속적인 순종과 겸손을 요구하는 은혜였습니다. 왕이 된 이후, 사울의 문제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그는 점점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 판단을 앞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사무엘상 13장에서는, 사무엘이 오기 전에 조급함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제사를 드립니다. 이는 제사장의 권한을 침범하고, 하나님께서 세워 놓으신 영적 질서를 무너뜨리는 일이었습니다.
사무엘상 15장에서는,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부분적으로만 순종합니다. 좋은 가축은 남기고, 아말렉 왕 아각도 살려둡니다. 그리고는 자신을 위한 기념비까지 세웁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이용해 자기 이름을 높이려는 교만이 드러납니다. 사무엘은 사울을 책망합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삼상 15:17)
그리고 사무엘이 선포한 말이 유명한 말씀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삼상 15:22)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보다, 자기의 판단, 자신의 체면, 자신의 정치적 계산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겸손했던 시작과 달리, 점점 성령의 역사보다 자기 능력으로 일을 처리하려는 왕이 되어갑니다.
반면, 다윗에게도 동일하게 성령께서 임하셨습니다.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삼상 16:13)
이후 다윗의 삶 전체는 성령 중심의 삶으로 펼쳐집니다. 골리앗 앞에서 이스라엘 군대가 두려워 떨 때, 그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믿음의 용기를 보입니다. 광야에서 사울을 두 번이나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지 않겠다”고 하며 복수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시편에서, 그는 깊은 탄식과 눈물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찬양하는 고백을 쏟아냅니다.
이 모든 것은 단지 다윗이 도덕적으로 훌륭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임재가 그의 삶을 이끌어 갔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임재는 단순히 은사를 하나 받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 존재 전체가 하나님 중심으로 재구성되는 영적 전환입니다. 이것이 진짜 “새 사람이 되는 은혜”입니다.

3.성령의 떠남 (삼상 16:14)
문제는 사울이 그 은혜의 자리에 머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반복된 불순종과 완악함으로 인해, 결국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서 떠나는 지점에 이르게 됩니다.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삼상 16:14)
성령이 떠나자, 그의 마음에는 두려움, 질투, 불안, 분노가 가득 차게 됩니다. 다윗을 향한 끝없는 시기와 살해 시도, 제정신을 잃은 듯한 행동들, 영적 분별력을 상실한 결정을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성령의 임재가 사라진 영혼의 상태를 보여줍니다.
사울의 고통은 단순한 심리적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가 떠난 영적 무질서의 결과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왕의 자리, 권력, 체면을 끝까지 놓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떠났는데, 왕의 자리는 지키고 싶어 하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신앙과 교회에게 주는 매우 큰 경고입니다. (성령 없이 목회하라, 성령 없이 신앙 생활하라)
반면, 다윗 역시 죄 없는 완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밧세바 사건은 그의 인생에 지울 수 없는 상처와 그림자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는 죄를 대하는 태도였습니다. 다윗은 시편 51편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 51:11)
그는 성령이 떠난 사울의 인생을 눈으로 본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기 죄보다 더 두려운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성령님이 떠나시는 것이었습니다. “주님, 저는 넘어져도 좋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떠나시는 것만은 견딜 수 없습니다.”
이 차이가 사울과 다윗의 운명을 갈라 놓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베드로와 유다를 떠올립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큰 죄를 지었습니다. 유다는 스승을 은 삼십에 팔아넘겼습니다. 둘 다 무너졌고, 둘 다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이후의 길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유다는 후회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후회만 붙들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베드로는 통곡했습니다. 눈물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며, 다시 주님께 돌아와 회개의 길로 들어섭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고, 초대 교회의 사도로 세움을 받습니다.
후회(後悔)는 과거지향적인 단어입니다. 회개(悔改)는 미래지향적인 단어입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방향을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가는 결단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지나간 과거에 묶여 후회하며 사는 사람이 아니라, 과거를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차이는 죄의 크기가 아니라, 죄 이후의 태도입니다.
사울과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울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듯 보이지만, 끝까지 자기 변명과 체면, 사람들의 시선을 놓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철저히 무너져서라도,
“하나님, 내 안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 라고 울부짖으며 회개했습니다.
성령의 임재와 떠남의 갈림길은 바로 여기, 후회에서 멈출 것인가, 회개로 돌아설 것인가에 있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사무엘상 4장에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슬픈 장면 중 하나가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크게 패배하고,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언약궤가 빼앗기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엘리 제사장은 충격으로 의자에서 넘어져 죽고, 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전사합니다. 비느하스의 아내는 이 비극적인 소식을 듣고 해산 중에 아이를 낳고, 죽어 가면서 아들의 이름을 “이가봇”이라 짓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삼상 4:22) ‘이가봇’은 단지 한 아이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공동체의 영적 상태를 상징하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이유는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 성령께서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이 마가의 다락방에 임하실 때 비로소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교회는 건물이나 조직이 아니라, 성령이 거하시는 공동체, 성령공동체입니다.
성령이 없는 사람은, 교회를 다닐 수는 있지만 참된 의미의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성령이 없는 교회는, 예배당일 수는 있지만 참된 의미의 교회가 아닙니다.
나는 지금 사울처럼, 유다처럼 후회만 하며 머물고 있는가, 아니면 다윗처럼, 베드로처럼 회개하며 성령을 붙들고 있는가?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자리나 체면, 성공이나 실적이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임재입니다.
이 시간, 다윗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기를 원합니다. 같은 마음으로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영광이 떠난 이가봇의 삶이 아니라, 성령의 임재 안에 거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인생을 배우는 세 곳의 학교
인생을 배우는 세 곳의 학교 (고전 15:19-20)
오늘 우리는 인생을 가장 진실하게 가르치는 세 곳의 학교를 함께 방문하고자 합니다. 이 학교에는 교과서도, 칠판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강의실보다 삶의 본질을 깊이 가르치는 곳입니다. 평소에는 누구도 가고 싶지 않은 곳입니다. 병원, 감옥, 그리고 무덤. 오늘 이 세 학교를 방문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병원
종합병원의 복도는 늘 분주합니다. 휠체어의 바퀴 소리, 간호사의 빠른 발걸음, 진료실 앞에서 이름을 기다리는 환자들의 숨결 소리가 들립니다. 그곳은 인간의 연약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평소 아무렇지 않던 숨 쉬는 것, 걷는 것, 밥 먹는 것이 더 이상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지난 월요일, 한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다섯 번째 암 수술을 앞두고 잠시 숨 고르기를 하는 중이셨습니다. 목사님은 암이 전이돼서 6주간 약을 먹고 다시 검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차를 타고 가면서 물었습니다. “병원에 계시면 제일 어려운 게 뭔가요?”, “가장 힘든 것은 고통과 혼자서 움직일 수 없어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할 때입니다.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기던 작고 평범한 것들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글을 쓰시는 분이라서 그런지 유머도 차원이 다릅니다. 동행하는 다른 분들과 함께 식당을 갔습니다. 식당 옆에 속이 썩은 고목나무가 있어서, 목사님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서 질문했습니다. “목사님, 고목 나무가 왜 속이 썩었는지 아세요”, “잘 모르겠는데”, “자기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자꾸 뭔가 해달라고 절을 해서 답답해서 속이 썩었답니다.” 함께 있던 사람들은 웃는데 목사님은 웃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은 왜 웃지 않으세요” 그때서야 파안대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한마디 했습니다. “나 충청도 사람이야”
세상에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는 것, 밥을 먹을 수 있는 것, 누군가와 만나 대화할 수 있는 것, 오늘 함께 모여 예배 드릴 수 있는 것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오늘은 어제 죽었던 사람이 그렇게 살고 싶었던 내일입니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사라졌을 때, 그때야 비로소 그것들의 소중함을 깨닫게 됩니다. 건강도 잃고 나서야 건강의 중요성을 깨닫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고 나서야 뒤늦게 후회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후에 후회하지 말고, 전에 감사합시다. 옆에 사람과 인사합시다. “있을 때 잘합시다” 같이 찬양하겠습니다. “손경민의 은혜”
둘째, 감옥
감옥은 자유가 철저히 제한된 공간입니다. 자유는 자유를 잃을 때 비로소 자유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호주는 교정 제도가 잘 정비되어 있습니다. 구세군 사관은 교도소에서 채플린으로 사역하고 있습니다.
호주에는 약 115곳의 교정 시설이 있으며, 각 주와 준주는 독립적으로 운영됩니다. 호주의 교도소는 보안 등급에 따라 고보안, 중보안, 저보안 교도소로 분리합니다. 올림픽 팍 근처에 있는 실버워터 교도소는 ‘복합교정단지’입니다. 남녀의 미결수와 기결수가 함께 있습니다. 호주 최대 규모의 미결수 수용 시설로, 재판 전 수감자들이 주로 머무는 곳입니다.
시드니 남부에 위치한 롱베이 교도소는 최고 보안 교도소로, 116년의 역사를 지닙니다. 오래전에 한국인 범죄자가 있어서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30대의 지극히 평범한 남성이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복음을 제시하였습니다. 밖에서 전도할 때 죄인이라고 하면 아니라고 하는데, 감옥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죄인 맞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나올 때 그는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말씀을 참 잘하시네요. 꼭 목사님 같아요” 그는 구세군 사관이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구세군 사관을 설명할 때, “다른 교회의 목사님을 구세군에서는 사관님이라고 합니다.”라고 설명합니다. 아마 여러분도 그렇게 설명하는 분이 있을 겁니다. 다음부터는 구세군의 정체성을 가지고 이렇게 설명하시기 바랍니다. “구세군 사관님을 다른 교회에서는 목사님이라고 하는 것 같은데요”
세상에는 감옥 밖에 있지만 감옥 안에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죄책감, 미움, 비교, 욕망 등에 갇힌 사람들입니다. 지난 주 복음은 믿음에서 시작되지만, 믿음은 자유로 이어져, 사랑으로 완성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죄의 사슬로부터 자유, 율법의 멍에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8:32절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진리는 관념이 아니라 실체입니다. 진리는 어두움 속에 빛입니다. 진리는 죽음 속에 생명입니다. 진리는 환란 날에 산성이고, 진리는 우리의 피난처이고 요새이며 구원의 뿔입니다. 그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하기를 축복합니다.

셋째, 묘지
묘지는 조용하지만 강력한 학교입니다. 그곳은 우리에게 인생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가르칩니다. 세상이 아무리 화려해도 마지막은 흙입니다. 오늘 내가 밟는 이 땅이 내일 나의 지붕이 될 수 있습니다. 죽음을 묵상하는 사람만이 오늘을 진실되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미루지 말아야 할 사랑이 있고, 늦추지 말아야 할 용서가 있습니다.
저는 삶이 버거울 때, 마음이 무거울 때, 묘지를 찾습니다. 묘지를 걷다 보면 들려오는 것은 침묵뿐이지만, 그 침묵은 말보다 더 깊은 가르침을 줍니다. 언젠가 나도 이렇게 될 것이라는 사실 앞에서, 욕심도 두려움도 조금씩 내려놓게 됩니다.
라틴어 “메멘토 모리”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이고, “카르페 디엠”은 오늘을 붙들라는 뜻입니다. ‘메멘토 모리’와 ‘카르페 디엠’은 서로 반대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죽음을 기억함으로써 오늘을 온전히 살아갈 수 있다는 깊은 메시지가 있습니다. 죽음을 기억하는 자는 오늘을 더 깊이 사랑하고, 더 진실하게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의 완성입니다. 그리고 그 삶은 부활의 약속 안에서 온전히 완성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19-20)
바울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되고, 우리의 삶도 헛되며, 우리가 감내하는 고난과 희생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존재는 단지 이 세상에서의 도덕적 삶이나 윤리적 삶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부활의 소망을 향한 여정이며, 영원한 생명을 향한 믿음의 걸음입니다. 부활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완성시키는 약속입니다. 고난 속에서도 인내할 수 있는 이유, 희생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근거, 그리고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소망의 뿌리가 바로 부활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우리는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는 세 학교를 다녀왔습니다.
병원은 우리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은혜를 가르치고,
감옥은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의 의미를 다시 깨닫게 하며,
묘지는 우리의 시선을 세상에서 영원으로 열어 주었습니다.
이 세 자리에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병든 자를 고치셨고, 갇힌 자를 자유케 하셨으며,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생명의 주이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채스우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