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사람은 언제 담대해지나?
예수의 열두 사도 중 의심 많은 것으로 알려진 도마는 공관복음에는 그 이름만 적혀 있을 뿐이다. 요한복음에는 그를 가리켜 “디두모라고 하는 도마” (요 11:16 20:24)라고 적고, 그의 행적에 관해 세 군데에서 말하고 있다. 오늘의 본문은 도마가 한 첫 번째 말이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1. 자기를 부인할 때 (요 11:16)
인간은 자기를 부인할 때 담대해지고, 자기에 집착할 때 비겁해 진다. 세상은 자기를 위해서 사는데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이다. 본문의 말씀을 의지하여 ‘주기철 목사는 1935년 9월 평양 장로교회 신학교에서 개최됐던 부흥사경회에서 ’일사각오’란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주기철 목사는 “예수를 버리고 사는 것은 정말 죽는 것이요, 예수를 따라 죽는 것은 정말 사는 것이다.”라고 했다. 주 목사는 일제 강점기 동안에 기독교 신앙의 바탕 위에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민족지도자요, 한국교회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제에 맞서 ‘일사각오’ (一死覺悟)의 신앙으로 살다가 1944년 4월 21일 밤 9시 고문 끝에 감옥에서 순교 당하셨다. 주목사의 한 알의 썩은 밀알이 되어 한국 교회를 살렸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요 12:24-25)
2. 이웃을 사랑할 때 (요일 4:18)
인간은 사랑할 때 담대해진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십자가의 사랑이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온전한 사랑이란 나 중심의 사랑이 아니라 너 중심의 사랑이다. 이기적인 사랑이 아니라 이타적인 사랑이다. 조건을 달거나 판단하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사랑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신 주님의 사랑이다. 주님의 사랑에 가장 가까운 사랑은 부모의 사랑이다. 사랑은 내리 사랑이라고 한다. 부모의 사랑과 자식의 사랑에는 온도차이가 있다.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는 말이 있다. 여자는 자식을 낳고, 어머니로 다시 태어난다. 어머니가 되면서 여자는 강해진다는 말이 단순히 낭만적인 감성에 치우친 이야기가 아니라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 여자는 자식을 지키기 위해 더 강해지고 더 담대해 진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새끼를 지키기 위하여 죽음을 불사하고 자기보다 강한 동물과 사투를 벌이는 짐승들을 본다.
3. 하나님을 믿을 때 (시 18:2)
인간은 하나님을 믿을 때 담대해진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시 18:2) 하나님은 우리를 자기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자기의 이름을 위해서 자기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선한 목자시니 우리가 부족함이 없고, 우리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당치 못할 시험을 주신 적이 없고 시험 당할 때에 또한 피할 길을 예비하신다. 하나님의 길과 우리의 길이 다르고,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다르다. (사 55:8-9) 우리가 원하는데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결코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것까지라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
호렙산의 엘리야 (왕상 19:1-8)
마태복음 17장, 마가복음 9장, 누가복음 9장에 변화산 사건에 대한 기록이 있다. 예수님이 야고보, 요한, 베드로를 데리고 다볼산으로 기도하러 갔을 때 예수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나고 옷이 흰빛을 발하며,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대화했다. 모세는 구약의 율법을 대표하고,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엘리야는 “나의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란 뜻이다. 엘리야의 제자 엘리사는 ‘하나님은 구원’이란 뜻이고, 이사야는 ‘여호와는 구원’이란 뜻이다.
1. 갈멜산의 엘리야
갈멜산 대결에서 아합 왕은 이세벨에게 엘리야가 어떻게 450명의 바알의 선지자와 아세라를 섬기는 400명을 죽였는지 자세히 알려주었다. 소식을 들은 이세벨은 엘리야에게 사람을 보내어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는 말을 전한다. 내일 이맘때까지 엘리야의 생명을 반드시 죽일 것이라는 통보이다. 이세벨은 시돈의 공주이다. 시돈은 바알을 섬기는 나라이다. 이세벨이 시집올 때 바알을 섬기는 선지자와 같이 왔다. 그녀는 이스라엘을 바알을 섬기는 나라로 만들었다. 백성들은 바알과 여호와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왕상 18:21)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 450명을 죽이고 백성들이 여호와를 믿게 되자, 그녀는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2. 브엘세바의 엘리야
이 소식을 전해들은 엘리야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남쪽으로 도망갔다.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까지 이르렀다. 이스라엘 땅을 언급할 때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라고 한다. 단은 북쪽 끝이고 브엘세바는 남쪽 끝으로 그 밑은 광야이다. 한국 영토를 ‘백두에서 한라까지’라고 하는 것과 같다. 엘리야는 자신의 사환을 브엘세바에 머물게 하고, 자신은 하룻길을 광야 쪽으로 들어갔다. 로뎀나무 아래에서 엘리야는 하나님에게 탄원하며,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 이러한 기도 후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던 엘리야를 천사들이 나타나 만지며, 일어나 먹으라고 말하였다. 갈멜산의 그 위대했던 엘리야가 이제는 탈진 증후군에 빠져 죽기를 간구하는 초라한 패잔병으로 전락을 하였다. 갈멜산의 엘리야와 브엘세바의 엘리야는 같은 엘리야이다. 무엇이 엘리야를 아주 다른 두 사람으로 극명하게 갈라놓았는가? 마치 로마서 7장의 바울과 8장의 바울을 보는 것과 같다. 7장의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4절) 죄에 눌려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패배의 애통을 고하였으나, 8장의 바울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1, 2절)라고 승리를 선포하였다.
3. 호렙산의 엘리야
천사가 로뎀나무 밑에서 잠자는 엘리야를 깨워 구운 떡과 물병을 주어 힘을 얻게 한다. 다시 깊은 잠에 빠진 엘리야를 천사가 “또 다시 어루만지며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고 말하자 엘리야의 힘을 갈 길을 재촉하였다. 이 말을 듣고 일어나 엘리야는 다시 음식을 먹고 사십 주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도달하여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 하나님은 동굴 속에 있는 엘리야에게 묻는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9절) “나는 이제까지 주 만군의 하나님만 열정적으로 섬겼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주님과 맺은 언약을 버리고, 주님의 제단을 헐었으며, 주님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서 죽였습니다. 이제 나만 홀로 남아 있는데, 그들은 내 목숨마저도 없애려고 찾고 있습니다.” (10절) 엘리야는 동굴 밖에 서서 다시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하나님은 지금도 역사를 통해서, 자연을 통해서, 사건을 통해서, 사람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의 영적인 안테나를 높이면 어디서나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
“너는 돌이켜, 광야 길로 해서 다마스쿠스로 가거라. 거기에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서 아람의 왕으로 세우고,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네 뒤를 잇게 하라.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000명을 남기리라” 신학에 ‘남은 자의 사상’이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신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역사는 ‘창조적 소수와 지배적 소수’에 의하여 움직인다고 했다. 창조적 소수는 역사를 발전시키지만 지배적 소수는 역사를 후퇴시킨다. 남은 자는 창조적 소수이다.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은 아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하실 일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가운데 브엘세바에서 ‘탈진 증후군’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이제 일어나 호렙산으로 가라. 호렙산에서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바란다. “네가 왜 여기 있냐?”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사명을 회복하여 다시 담대하게 세상으로 향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주례사 (요 2:1-11)
러시아 속담에 ‘바다에 갈 때 한번, 전쟁에 나갈 때 두 번, 결혼을 할 때는 3번 기도한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말에는 결혼은 ‘인륜지대사’ 라고 했습니다. 결혼은 인생에서 가장 큰일이고, 항해나 전쟁보다도 더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위험 뒤에는 혼자 사는 사람이 알지 못하는 놀라운 비밀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성서에 결혼을 정의한 곳이 있다면, 창세기 2:24절에 보면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결혼이란 ‘둘이 한몸’ 되는 것입니다. 두 분이 이곳에 들어 올 때는 너와 나로 들와 왔지만, 이곳을 나갈 때는 하나 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두 분은 하나입니까, 둘입니까?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몸은 하나인데 머리가 둘인 괴물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머리가 두 마리니 둘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고 몸이 하나이니 한마리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결국 랍비에게 가서 묻기로 하였습니다. 지혜로운 랍비는 아래와 같이 대답했습니다. “한쪽 머리를 때릴 때 동시에 소리를 지르면 한 마리이고, 다른 머리는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두 마리이다.”
오늘 본문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일으킨 기적은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있었습니다. 혼인잔치에 예수님과 제자들도 초대를 받았습니다. 잔치가 무르익을 무렵 문제가 생겼습니다. 준비한 포도주가 떨어진 것입니다.
1)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인생에는 언제나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실존하고 있다는 것은 문제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문제를 만날 때, 왜 나만 이런 일이 있느냐고 불평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문제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주 ‘큰 문제’를 우리는 ‘위기’라고 합니다. 위기란 단어인 ‘Crisis’는 헬라어에서 나온 말로, ‘위험과 기회’가 동시에 있다는 의미 입니다. 살면서 ‘위기’의 순간이 오면 두 분은 언제나 ‘기회’를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2)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문제가 있으면 해답도 있습니다. 컴퓨터 ‘바이러스’가 생기면 바이러스를 잡는 ‘백신’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습니다. ‘바이러스’는 다양한 종류가 있지만 백신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혼인 잔치에 예수님은 손님으로 초대는 받았기에, 직접 잔치에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 인 것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는 하지만 손님이었지, 우리의 삶을 주인이 모시지는 않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손님이셨던 예수께서 잔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물을 포도주를 변화가 일어난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를 손님이 아닌 주인으로 모실 때 변화가 일어납니다.
3) 처음보다 나중이 잘 되었습니다
10절을 보면 ‘보통은 처음에는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나중에 나쁜 것을 주는 데 이집은 더욱더 좋은 것을 주는구나’ ‘용두사미’란 말이 있습니다. 머리는 용의 머리인데 꼬리는 뱀의 꼬리입니다. 시작은 아주 거창한데 나중은 정말 별 볼일 없이 끝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만남입니다. 세상의 만남 중에서 ‘결혼식’만큼 성대한 잔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결혼’은 시작에 불과 합니다. 욥기 8:7을 보면 ‘시작은 비록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을 아름답게 기억하겠지만, 두분은 오늘보다 더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4) 제자들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본문 마지막 결론을 보면, 이 사건을 통하여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적보다 중요한 것은 이적을 일으키신 분을 믿는 것입니다. 현상에 보다 중요한 것은 본질 입니다. 현상이 물을 포도주로 만든 것이라면, 본질은 현상을 주관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하여 지배를 받습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두분은 이제 이후로 ‘둘이 하나 되어’ 삶의 주관자이신 그리스도를 믿고 그에게 영광 돌리며, 주께서 두 분을 위해 예비하신 축복을 날마다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라이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