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성경과 성령 그리고 성도
요즘 온라인으로 ‘어 성경’ 공부를 하고 있다. 지난 한주간은 사복음서를 통으로 읽었다. 읽고 은혜 받은 구절을 올려야했다. 나는 요한복음 20:30-31의 말씀을 올렸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에 대한 구절이다. 예수께서 행하신 많은 일들이 있지만 특별히 이것을 기록함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함이다. 본문의 말씀을 의지하여 ‘성경과 성령 그리고 성도’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1. 성경은 예수님을 증언하는 책이다.
성경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책이다. 구약은 오실 예수 신약은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후 제자들과 만나 식사를 하시며 성경이 자신에 대한 기록임을 밝혔다.(눅 24:44-48) 바울도 데살로니가에서 강론할 때, 성경으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거하였다.(행 17:2-3) 빌립도 사마라아에서 이디오피아 내시를 만나 이사야서 53장의 인물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설명하였다.(행 8장) 아볼로도 고린도에서 성경으로서 예수는 그리스도임을 증거하였다.(행 18:28)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은 3의 안식일을 지냈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전했다. 그곳에는 유대인들이 있다.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을 믿고 있다. 바울은 그들이 믿는 성경을 통해서 그들이 십자가에 못밖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언하였던 것이다. 아볼로도 마찬가지다. 에베소에서 목회하던 아볼로는 고린도로 갔다. 그곳에서 유대인들의 도전을 받자 아볼로는 그들이 믿는 성경을 통해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거했던 것이다. 사도행전 6장에 사도들은 7집사를 안수한다. 사도들은 말씀전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 전무하고 나무지의 일은 집사들에게 맡겼다. 7장에 일곱집사 중 한 사람인 스테반이 말씀을 증거하다 돌에 맞아 죽는다. 이 사건으로 예루살렘에 안주하던 그리스도인들이 흩어지기 시작한다. 8장에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난다. 내시라면 우리의 생각하는 환관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그는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재정을 맡은 사람이다. 그가 고향으로 가는 중에 이사야서 53장을 읽었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행8:32-33) 이때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빌립이 그에게 접근하여 어린양이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임을 설명한다. 이디오피아 내시는 세례를 받고 이디오피아 최초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를 통하여 이디오피아가 복음화 되어, 지금은 기독교인 인구가 44% 정도 된다.
2. 성령은 예수님을 증언하는 영이다.
성령은 예수님을 증언하는 영이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요 15:26)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이후 그리스도인들에게 임하셔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생각나게 하심으로 그리스도를 증언하게 하시는 영이다. 요한은 성령을 보혜사라고 했다. 보혜사의 역할은 그리스도인들과 영원히 함께 하시며(요 14:16),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생각나게 하시고(요 14:26), 그리고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일(요 15:26)을 하신다.
요한은 성령을 ‘보혜사’라고 했다. 보혜사(保惠師)는 ‘도울 보, 은혜 혜, 스승 사’자를 써서 ‘은혜로 돕는 스승’이라는 뜻이다. 보혜사로 번역된 헬라 원어는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인데, 주로 법정에서 피고인을 변호하도록 판사로부터 부름을 받은 사람을 가리킨다. 파라클레토스’에 적합한 우리말이 없어서 한문성경 그대로 ‘보혜사’라고 했다. 보혜사는 성경에 5번 나온다. 성경에 처음 보혜사가 나온 곳은 요한복음 14:16이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다른 보혜사는 말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성령 외에 다른 분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한일서 2장 1절에 만일 우리가 죄를 범하여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앞에서 ‘대언자’가 되어 주신다고 했다. 우리말 성경에는 ‘대언자’라고 했지만 헬라어로는 ‘파라클레토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보혜사’이다. 보혜사란 ‘파라클레토스’를 ‘Helper, Counselor, Advocate, Comforter’ 등으로 번역하였다.
3. 성도는 예수님을 증언하는 증인이다.
성도는 예수님을 증언하는 증인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성령은 그리스도의 ‘택하신 증인'(눅 24:48)들에게 권능을 주셔서 그리스도에 대하여 담대하고 정확하게 증언할 수 있도록 역사하신다. 보혜사 성령의 증거가 없으면 증인들의 증언은 능력이 없을 것이다. 증인들의 증언은 자기 의지나 지식이 아니라 철저하게 보혜사 성령의 도우심과 깨닫게 하심이 있어야 가능하다.(요 14:26)
성경은 거룩한 책이고, 성령은 거룩한 영이고, 성도는 거룩한 무리이다. ‘거룩’이란 단어는 인간의 단어가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될 때만 사용될 수 있다. 인간이 노력해서 거룩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영이 우리 안에 거할 때만이 성도가 될 수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롬8:9) 우리의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성령으로 새롭게 될 수 있다.(딛 3:5)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다. 증인이란 단어는 ‘순교자’(Martyr)에서 왔다. 개인의 신앙도 지키기 어려운 상황에서, 증인이 된다는 것은 순교하겠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했다. 순교를 각오하지 않으면 증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란 성도들의 공동체이다. 교회는 헬라어로 에클레시아(ecclesia)로서 ‘ek(밖으로)’와 ‘caleo(부르다)’합성어이다. 교회는 세상에서 특정한 목적을 위하여 부름을 받은 공동체이다. 부르심은 소명이고, 보내심은 사명이다. 교회는 모이기 위해서 모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흩어져서 증인이 되기 위하여 모였다.
보혜사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성령의 감동되어 기록된 성경을 통해서 증언하고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여 공중 앞에서 힘있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이러라, 행 18:28), 성령이 직접 증언하고(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요 15:26), 성령 받은 성도가 증인이 되어 증언한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 1:8)
용두사미의 신앙이 되겠느냐?
용두사미란 말이 있다. 시작은 용의 머리처럼 웅장하나 끝은 뱀의 꼬리처럼 빈약하기 그지없다는 뜻이다. 시작은 좋지만 끝이 나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점입가경이란 말도 있다. 경치나 문장 또는 어떤 일의 상황이 점점 갈수록 재미있게 전개되어 간다는 뜻이다. 성경에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 8:7) 말도 있다.
1.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 (갈 3: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갈 3:3) 갈라디아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성령으로 구원을 받고 믿음 생활을 시작했다. 가만히 들어온 거짓형제(갈 2:4)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이방인일지라도 율법을 준수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다른 복음을 전했다.(갈 1:6) 갈라디아 성도들이 미혹을 받아 율법적인 신앙 형태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갈라디아서는 율법주의자들로 혼란에 빠진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구원에 이른다는 진리를 강조하는 위하여 쓴 서신서이다. 만약 믿음에 율법이 필요하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은 구원의 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
율법주의자는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공로가 되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바울은 ‘율법주의자’가 아니고, 율법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반 율법주의자’도 아니다. 바울은 율법을 몽학선생이라고 했다.(갈 3:24) 예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마5:17)고 하셨다. 사랑은 온 율법을 완성한다고 하셨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갈 5:14),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롬 13:8).
2. 겸손으로 시작했다가 교만으로 마치겠느냐? (삼상 9:21)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니이까 또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삼상 9:21) 처음 사울이 왕으로 기름을 받을 때는 겸손했다. 하나님은 그 겸손한 마음을 보시고 사울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울의 겸손은 교만으로 타락을 하게 된다. 삼상 13장에 블레셋과 전투에 나가기 전에 사무엘을 대신하여 제사를 드렸고, 삼상 15장에 사무엘이 아말렉과 전투를 하고 전리품을 오지 말라고 했는데 사울은 전리품을 가지고 왔습니다. 사무엘이 그에게 말한다.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셨는데 …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 15:17, 23)
이사야 14장의 천사장인 루시퍼의 타락은 교만 때문이었고, 창세기 3장의 인간의 타락도 교만 때문이었고, 창세기 11장의 바벨탑의 사건도 교만 때문이었다. 성경은 교만의 위험성에 대하여 거듭 지적하고 있다. 야고보서 4:6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베드로전서 5:5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잠언 16장 18절 “교만의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전 10:2)고 했다.
3. 하나님의 의로 시작했다가 자기 의로 마치겠느냐? (롬 10: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롬 10:3) ‘하나님의 의’란 의로우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로워 지는 ‘믿음의 의’이고, ‘자기 의’란 노력에 의한 ‘행위의 의’입니다.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은 불교는 ‘자력종교’이고 기독교는 ‘타력종교’이다. 인간은 죄를 져서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다. 죄인은 스스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하나님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그분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게 되었다.
누가복음 18장, 예수께서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9절)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두 사람이 기도하려고 성전에 올라갔는데 하나는 바리새파 사람이었고 또 하나는 세리이다. 바리새파 사람은 따로 서서 ‘하나님,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사기꾼도 아니고 정직하지 못하거나 간음하는 사람도 아니며 또 이 세리와도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며 모든 수입의 십일조를 바치고 있습니다.’ 하고 기도했으나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지만 이 세리가 저 바리새파 사람보다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눅 18:10-14)
은혜란 자격없는 자에게 조건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처음 선물을 받을 때는 감사하다가, 선물이 지속되면 당연하게 여기고, 더 지나면 선물이 권리인줄 착각하고 주지 않으면 화를 낸다. 우리의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이다.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끝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겸손으로 시작했다가 교만으로 끝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의로 시작했다가 자기의 의로 끝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은혜가 은혜임을 깨닫고 은혜의 강가에서 구원의 기쁨과 감사의 찬양을 부르며 사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한다.
“어린 3남매를 둔 한 과부가 생계를 위하여 거리에서 호떡을 만들어 팔게 되었답니다. 혹독한 추위와 어려움 속에서 호떡을 팔던 어느 날 노신사 한분이 와서 “아주머니, 호떡 하나에 얼마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1,000원이요.” 과부는 대답했습니다. 10개만 주세요 하고, 노신사는 지갑에서 10,000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과부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냥 가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호떡 가져 가셔야죠” 말하자, 노신사는 빙그레 웃으며 “아뇨 괜찮습니다. 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드세요” 하고 그냥 가버렸습니다. 그 날은 참 이상한 사람도 다 있구나 하고 그냥 무심코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그 노신사가 또 와서 10,000원을 놓고는 그냥 갔습니다.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10,000원을 놓고 그냥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봄, 여름, 가을 겨울 일년이 다 가고 거리에는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 퍼지며 함박눈이 소복이 쌓이던 어느 날, 그 날도 노신사는 어김없이 찾아와 빙그레 웃으며 10,000원을 놓고 갔습니다. 그 때 황급히 따라 나오는 과부의 얼굴은 중대한 결심을 한 듯 상당히 상기가 되어 있었고, 총총걸음으로 따라가던 과부는 노신사 앞에서 수줍은 듯 하지만 분명히 말했습니다.
“저. 호떡 값이 올랐거든요.”
소통하는 메라비언의 법칙
인간은 3가지 언어로 ‘소통’ 한다. ‘시각언어'(Visual), ‘청각언어'(Vocal), ‘내용언어'(Verbal)이다. 시각언어란 보이는 언어로서 표정이나 태도 등을 의미한다. 청각언어는 들리는 언어로서 음성, 강약, 어투, 어속, 발음 등을 의미한다. 내용언어는 전달하고자 내용이다. 일반적으로 내용언어가 소통에서 가장 중요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메라비언의 법칙’(The Law of Mehrabian)이 있다. 캘리포니아대학교의 ‘앨버트 메라비언'(Albert Mehrabian)이 자신의 저서 ‘Silent Messages’에 발표한 커뮤니케이션 이론이다. 그는 대화하는 사람들을 관찰, 상대방에 대한 호감을 느끼는 순간을 포착하여 누군가와 첫 대면을 했을 때 그 사람에 대한 인상을 결정짓는 요소를 분석했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소통의 결정적 요인은 상대방의 말의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상대방의 호감을 결정하는 것은 ‘시각언어’(Visual) 55%, ‘청각언어’(Vocal) 38% 그리고 ‘내용언어’(Verbal)는 7%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화로만 이야기할 때에는 ‘청각언어’의 중요성이 82%까지 올라갔다.
시각언어 (Visual)
시각언어는 ‘표정과 태도’로 나눌 수 있는데, 표정이 35% 태도가 20%이다. 우리는 시각을 통해서 정보의 70% 이상을 받아들인다. 부드러운 미소, 따뜻한 눈길, 친근한 제스처 등은 소통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사람은 보면서 판단하고, 대화하며 자신의 판단을 합리화 시킨다. 그래서 ‘첫인상이 중요하다’는 말이 있고,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말도 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말도 있다.
1960년 9월 26일 대통령 후보 케네디와 닉슨의 토론이 열렸다. 정치 캠페인 역사상 처음으로 열린 TV 토론이었다. 약 7천 만 명이 시청한 토론은 TV와 라디오로 동시 중계되었는데, 라디오 중계를 들은 기자들이 닉슨의 우위라고 평가한 반면, TV 중계를 본 기자들은 ‘케네디 압승’으로 다음날 지면을 도배했다. 젊고 패기찬 케네디의 이미지가 지쳐 보이는 닉슨과 대비되어 시청자들에게 각인되었던 것이다. 이날 토론회는 케네디가 닉슨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청각언어 (Vocal)
목소리는 인품이다. 같은 말을 하더라도 ‘좋은 음성’, ‘적절한 어투’, ‘알맞은 어속’, ‘정확한 발음’ 등으로 말하면 더욱 신뢰감이 간다. 타고난 음색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마음의 자세에 따라서 음성은 달라진다. 많은 사람들이 목소리 훈련을 통하여, 좋은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좋은 목소리는 좋은 마음에서 나온다. 목소리를 바꾸기 위한 훈련보다, 먼저 마음을 바꿔야 한다. 사람이 긴장하면 톤이 높아지고, 빨라지고, 커지게 된다. 하지만 여유있는 사람은 톤이 낮고 천천히 그리고 논리적으로 이야기한다. 깊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깊은 목소리를 낸다.
요즘은 의학이 발달하여 목소리만 들어도 그 사람의 건강상태를 알 수 있다고 한다. 이화여대 부속병원 문영일 교수는 “사람이 건강한지를 목소리로 어느 정도 구별할 수 있으며, 특히 발성기관과 관련된 질병은 90% 이상 진단할 수 있다”고 했다. 목소리가 맑고, 밝고, 투명한 사람이 소통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이다.
내용언어 (Verbal)
내용언어는 O-B-C로 구성된다. O는 Opening, B는 Body 그리고 C는 Closing이다. 시작(Opening)은 청중과 연결(Connection)하는 시간이다. 상황에 맞는 말로 청중의 관심을 끌어야 한다. 유머를 통해서 마음을 열거나, 질문을 통해 청중의 호기심 자극하거나, 유명인사의 말을 인용하여 공감을 유도하거나 등등의 기법으로 청중과 연결해야 한다. 본론(Body)은 ‘스토리 텔링’으로 구성한다. 인간의 뇌는 이야기에 익숙하다. 핵심 주제를 이야기로 풀어간다면 계속해서 집중할 수 있다. 마무리(Closing)는 ‘감동’으로 끝내며, ‘결단’을 촉구한다.
기억해야 할 한 가지가 사실이 있다. 타인을 설득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설득해야 한다. 자신의 말을 자기도 확신하지 못한다면, 누구를 설득시킬 수 있겠는가? 자신도 쓰지 않는 상품을 타인에게 판다면 사기꾼이 아니겠는가? 시드니 센트럴 역에서 노숙자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는 목사가 있다. 그날은 배가 너무 고파서 남은 음식을 먹었다. 보고 있던 노숙자가 그를 찾아왔다. “오랫동안 당신이 음식을 나누어 주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집에서 먹다 남는 음식을 우리에게 주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당신이 먹는 것을 보니, 내가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당신을 믿을 수 있습니다. 미안했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라이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