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성경과 함께, 성령과 함께” (With the Bible and With the Holy Spirit, 요 5:39, 요 15:26, 딤후 3:16-17)
NSW 주립미술관(Art Gallery of NSW) 특별 전시실에서 ‘중국성경'(CHINESE BIBLE)이 전시되어 방문한 적이 있다. 빨간 책들이 전시실에 쌓여 있었다. 두껍지 않아서 처음에는 ‘쪽복음’인 줄 알았다. 벽에는 웃고 있는 가족그림이 걸려 있었다. 중국의 지하교회 교인들을 연상하게 하였다. 안내원에게 책에 대하여 물었다. 놀랍게도 내가 생각하는 성서가 아니라 중국의 문화대혁명 당시 모택동(마오쩌둥)의 어록집이었다. 문화대혁명은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이념 추구, 정치 투쟁 등으로 일어난 중국 정치·사회·경제·문화 등 다방면에 걸친 운동이다. 모택동은 장제스를 격파하고 중국 대륙에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한 혁명가이자 전략가로 평가하고 있지만, 대약진 운동 실패와 문화대혁명으로 약 4천 5백만 명의 인명 피해를 초래하기도 했다.

모택동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분분하지만, 그의 초대형 초상화는 천안문 위에 걸려 여전히 중국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1. 성경(Bible)이란 무엇인가?
성서란 ‘책'(Book)을 뜻하는 헬라어 비블리아(biblia)에서 온 말이다. 이집트 나일강에서 자라는 풀인 ‘파피루스'(Papyrus)는 ‘종이'(Paper)와 ‘성서'(Bible)의 어원이 되었다. 파피루스(Papyrus)의 ‘내피’(Inner Balk)가 ‘비블로소'(Biblos)이고, 파피루스의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지역이름도 ‘비블로스'(Biblos)였다. 그리스에서는 ‘파피루스’를 ‘비브로스’라고 불렀으며, 비브로스는 그리스어로 책이란 뜻의 ‘성서'(Bible)의 어원이 되었다. ‘서지학'(Bibliography)나 ‘장서가'(Bibliophiles) 등도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다. ‘책’을 뜻하는 ‘비블리아'(Biblia)에 ‘거룩한’이란 뜻의 ‘싸크라'(sacra)를 덧붙여 ‘비블리아 싸크라'(Biblia Sacra)라는 ‘성경'(Holy Bible)이 되었다.
성서를 ‘Testament’ 또는 ‘Covenant’라고 한다. ‘Testament’라는 영어 표현은 라틴어 ‘Testamentum’에서 유래한 것으로 ‘계약’, ‘언약’이란 뜻이다. 성서는 구약과 신약으로 구분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중재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과 체결하신 옛 언약을 ‘Old Testament’ 즉 구약이라 부르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하신 언약을 ‘New Testament’ 즉 신약이라 부른다. 구약은 대부분이 ‘히브리어’로 쓰였고 일부만이 이스라엘이 바벨로니아 제국에게 멸망해 포로로 끌려갔다 돌아온 이후의 고대 근동에 널리 사용된 ‘아람어’로 쓰여졌습니다. 신약은 1세기경 로마제국의 통속어였던 코이네(koine) ‘헬라어’로 기록되었다.
2. 성령(Holy Spirit)은 누구신가?
구약성서의 “하나님 영”(루아흐)이란 말은 바람, 입김, 기운이란 뜻으로 하나님의 영을 받는 사람은 특별한 몇 사람들에게 제한되었다. 하나님의 영을 통하여 세계가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영으로 임재한 사람들을 통하여 세계를 통치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가셨다. 신약성서에서 영은 “프뉴마”(Pneuma)라는 말을 사용했다. “프뉴마”는 프네오(Pneo)에서 나온 말인데 ‘숨쉬다’, ‘바람이 불다’ 라는 뜻이다. 사람의 영과 구별하여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거룩한 영’, ‘예수의 영’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된다. 구약에는 특정한 인물에만 성령이 임했다면, 신약에는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임한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했다.(롬8:9) 성령으로 인하지 않고는 예수를 주라고 고백할 수 없다고 했다.(고전12:3)
사도 요한은 성령을 보혜사(Parakletos)라고 했다. 성경에 ‘파라클레토스’란 단어는 총 5번 나온다. 요한복음에서 4번(요14:16, 14:26, 15:26, 16:7) 나타나고, 요한일서(요일2:1)에서 한번 나타난다. 개역개정 성경에는 요한복음에는 ‘보혜사’로, 요한일서에서는 ‘대언자’로 번역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파라클레토스)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라”(요일 2:1) “파라”는 “옆에”라는 뜻이고 “클레토스”는 “부르다”라는 의미로서, ‘파라클레토스’는 법정용어로 피고측 ‘변호인’이라는 뜻을 갖는다.
성경 번역판마다 용어에 다소 차이가 있다. 한글성경의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에서는 ‘보혜사’로 번역하고 있으며, 공동번역에서는 ‘협조자’로, 가톨릭 성경에서는 ‘보호자’로 번역하고 있다. 영문성경의 KJV에는 Comforter(위로자)로, NIV와 RSV에서는 Counselor (상담자)로, NRSV에서는 Advocate (변호사)로, NASB에서는 Helper (돕는 자)로 번역하고 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은 우리는 돕는 ‘보혜사’이다.
3. 성경과 성령의 관계
성령은 예수를 증거하는 일을 한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 15:26)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 책이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5:39) 구약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 신약은 오신 예수그리스도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 여기서 “하나님의 감동”이란 말은 헬라어로 “떼오프뉴마토스”라는 말을 우리 말로 번역한 것이다. “떼오 프뉴마토스”란 말은 하나님을 의미하는 “떼오(스)”와 성령(영), 또는 호흡을 의미하는 “프뉴마토스”가 합쳐진 말로 ‘성령’이란 뜻이다. 영어성경에는 영감을 “Inspiration”이라고 번역했다. 이 말은 “in”과 “spirit”의 합성어이다. ‘하나님의 영’이 불어넣어졌다는 의미다. 따라서 성경의 원저자는 성령이다.
성경은 1600년 이상, 40여명의 다른 저자가 기록하였지만 마치 한 사람이 쓴 것과 같다. 이러한 성경의 통일성은 원저자는 성령이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개인의 작품도 초기와 중기 그리고 후기의 작품이 다르건만, 시공간을 뛰어 넘어 같은 주제가 반복되는 책이 있다면, 그것은 시공간을 초월하신 하나님의 작품임이 분명하다. 성서는 성령에 의하여 기록되었기에 독자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정확하게 성서를 이해할 수 있다. ‘성서를 읽는다’고 하면 독자가 주체가 되지만, ‘성서를 듣는다’고 하면 성령이 주체가 된다. 따라서 성경을 읽기 전에 성령의 인도함을 받기 위해 먼저 기도해야 한다. “성령이여 말씀하시옵소서, 제가 듣겠나이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라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느니라”(민6:24-26)
예배는 기독교의 핵심이며, 그리스도인의 존재이유이다. 예배란 헬라어로 ‘프로스퀴네오’(worship)라고 한다. ‘존경을 나타내다’ 혹은 ‘최상의 가치를 돌리다’라는 뜻이다. 또한 예배란 ‘여호와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to Meet God) ‘하나님과 교제’(to Meet with God)하는 것이다. 예배는 영이신 하나님께 거듭난 영으로 드리는 것이다. 영적 예배가 아니면,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식을 지키는 것’이다. 예배의 본질은 같지만 각 교단마다 예배의 강조점은 조금씩 다를 수 있다. 구세군 예배의 4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자유함 (Freedom)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요8:32),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 진리이신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우리 안에서 진정한 자유함이 있어야 한다. 구원이란 우리를 억누르는 그 무엇으로부터 자유함를 얻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참 자유함이 있어야 한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3:17) 자유는 방종이 아니다. 목적과 방향있는 자유이다. ‘부터의 자유’는 ‘향하는 자유’로 이어져야 한다.
둘째, 기쁨 (Joy)
우리는 은혜의 하나님을 만남으로 구원의 기쁨을 회복해야 한다. ‘카리스’란 은혜의 어원은 ‘기쁨’이란 뜻인 ‘카라’에서 파생되었다. 은혜가 은혜된 줄 알 때 우리에게 ‘기쁨’이 넘친다. 성령의 9가지 열매 중 두 번째가 희락이고(갈5:22),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고 했다. 또한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시편37:4)고 했다. 윌리암 부스는 “좋은 예배는 병사들을 격려해 주어야 한다. 구세군 안에는 기쁨이 있어야 한다. (There is joy in the Salvation Army)” 고 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와 교제하면, 부활의 기쁨과 능력을 회복할 수 있다.
셋째, 참여 (Participation)
딸아이가 독일 구세군 교회에 참석하고, 이메일을 보낸 적이 있다. ‘구세군다운 예배’였다고 했다. 형식에 억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참여가 있었던 예배였다. 특히 구세군 예배에서 간증은 중요하다. 간증은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통해 역사하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으로 준다’는 말이 있다. 좋은 일이 있을 때, 나눌 사람이 없다면 얼마나 불행하겠는가! 또한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기도 부탁할 사람이 없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우리 교회의 표어는 “성경과 함께, 성령과 함께 주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교회”이다. 우리의 아픔을, 우리의 기쁨을 함께할 수 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넷째, 자비석(Mercy Seat)
자비석(Mercy Seat)은 ‘법궤의 뚜껑’이다. 우리말 성경은 ‘속죄소’라고 번역을 했다. 하나님은 모세를 거기에서 만났다.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출29:42) “그 속죄소는 내가 너와 만날 곳이며”(출30:6) “내가 너희와 만나는 곳인 증거궤 앞에…”(민17:4) 구세군 교회는 건축할 때에 자비석을 만든다. 구세군 예배에서는 설교 후에는 자비석으로 초청을 한다. 자비석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가는 ‘은혜의 보좌’(히4;16)이다. 자비석은 구세군 집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갖는다. 외형적 자리보다는 회개와 헌신과 기도하는 자리로서 하나님과 일대일로 만나는데 더 큰 의의를 갖는다. 자비석은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회개석(Repentance Seat)’이고 믿는 자들에게는 ‘성결의 단(Holiness Alter)’이다.
예배를 중심으로 교회에는 3종류의 사람이 있다. 첫째 ‘예배 드리러’ 오는 사람, 둘째 ‘예배 보러’ 오는 사람, 셋째 ‘예배 받으러’ 오는 사람이다. 교회 오는 목적이 하나님 중심이면 예배 드리는 것이고, 사람 중심이면 예배 보는 것이고, 자기중심이면 예배 받으러 오는 것이다. 작년 시니어 선교회의 초청으로 시드니를 방문했던 ‘바울 선교회’ 대표인 이동휘 목사께서 설교 중 갑자기 교인들에게 질문했다. “여러분, 교회는 왜 오십니까?” 잠시 적막이 흐르다가 어느 한분이 대답했다. “은혜 받기 위해서 옵니다” “아닙니다. 교회는 예배 드리기 위해서 오는 것입니다.” 이어서 그는 예배와 연관된 자신의 간증을 했다. 은퇴 후 집 가까운 작은 교회를 다니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보거나’ ‘예배를 받으려’는 자기를 발견하고 많은 회개를 했다고 한다. 출애굽의 목적도 그들로 하여금 여호와를 섬기게 하기 위한 것이다.(출3:12, 출5:1, 7:16) 예배의 진정한 의미는 받음에 있지 않고 드림에 있다. 주일의 예배가 삶의 예배로 이어질 수 있기를 기도한다.
바울의 밀레도 고별설교
신명기 34:9-12절의 말씀을 의지하여 “끝이 아름다운 사람”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었다. 시작은 좋았지만 끝이 좋지 않은 사람 3사람과 끝이 좋은 1사람의 이야기를 했다. 영으로 시작하여 육으로 끝난 삼손, 겸손으로 시작하여 교만으로 끝난 사울, 지혜로 시작하여 무지로 끝난 솔로몬에 대해서 말씀 드렸다. 그리고 ‘소명’으로 시작하여 ‘사명’으로 마친 모세의 이야기를 했다. 호렙산 떨기나무에서 부르심을 받은 모세는, 사명을 다 마치고 느보산에서 죽었다. 모세는 120세에 죽었지만 눈은 흐리지 않고 기력도 쇠하지 않았다.(신34:7) 삶과 죽음은 사명과 연관이 있다. 살아있다는 것은 아직도 사명이 남아 있다는 것이고, 죽는다는 것은 이제 사명을 마쳤다는 뜻이다. 마치 십자가상에서 “이제 다 이루었다”(요19:30)고 말씀하신 예수님 같이.
소명과 사명
소명은 ‘부르심’이고, 사명은 ‘보내심’이다. 召命이란 ‘부를 소’에 ‘목숨 명’을 써서 소명이다. ‘부름 받은 목숨’이란 뜻이다. 使命이란 ‘심부름 사’에 ‘목숨 명’을 써서 사명이다. 사명이란 ‘심부름하는 목숨’이라는 뜻이다. 소명과 사명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부르심은 은혜와 관계가 있고, 보내심은 은사와 관계가 있다. 은혜란 자격없는 자에게 조건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은혜로 부르셨고, 은사로 사명을 감당케 하신다. 신약 27권 중 바울은 13권을 썼다. 서신서의 첫 구절은 대부분 ‘소명’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롬1:1) 사도가 된 것은 자기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부름 받은 바울은 열방을 위한 선교사로 보냄을 받았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9:15)
은혜의 복음
오늘의 본문은 3차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중,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한 마지막 고별 설교이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기다리는 것은 ‘환영과 환대’가 아니라 ‘결박과 환난’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고 했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좋은 소식’The Good News)이다. 무엇이 ‘좋은 소식’인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소식이다.“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2:36) 복음서에는 ‘예수’란 단어가 많이 나오고, 사도행전과 서신서에는 ‘그리스도’란 단어가 많이 나온다. 예수의 부활을 기점으로 용어가 바뀐 것이다. 예수는 겸손과 고난의 인성에 초점을 맞추었고, 그리스도는 신성에 초점을 맞추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죄를 대속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고 부활 승천하시고,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삶과 죽음
바울은 이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생명도 불사하겠다고 했다. 인생은 살아야 될 이유와 죽어야 될 이유가 동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 앞에 섰을 때 비겁해 지고, 살았던 삶에 대해서도 후회하게 된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한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7-8) 그리스도인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사람들이다. 인생은 삶과 죽음의 협주곡이고,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완성이다.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라이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