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열매 맺는 비결
포도나무는 유대 지역의 대표적인 유실수로, 감람나무, 무화과나무와 더불어 성경에 자주 등장합니다.
노아가 홍수 이후 처음 지은 농사가 포도농사였고(창 9:20), 가나안 땅을 정탐한 이들이 가져온 것도 포도였습니다(민 13:23).
예수님의 첫 기적도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사건이었고(요 2:1–11), 마지막 만찬에서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를 상징하는 거룩한 표징이 되었습니다(마 26:27–29).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참 포도나무, 하나님을 농부, 우리를 가지로 비유하십니다.
이 비유는 신앙생활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를 단순하면서도 깊이 있게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 붙어 있어야 살고, 열매를 맺어야 참된 제자임이 드러납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는 단순한 연결이 아니라, 생명을 주고받는 유기적인 연합입니다.
우리 신앙의 중심은 바로 이 연합의 실제에 있는 것입니다.

- 가지치기의 은혜 (2절)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농부는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를 잘라내고, 열매 맺는 가지는 더욱 풍성히 열매 맺도록 다듬습니다. 이 작업은 보기엔 가혹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생명을 유지하고 열매를 더 많이 맺게 하는 중요한 작업입니다. 우리가 겪는 시험과 연단, 실패와 눈물은 하나님의 가지치기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열매 맺게 하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불필요한 것을 제거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더 깊은 신뢰와 순종으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깨끗하게 하다’는 영어로는 ‘prunes’이고 헬라어로 ‘καθαίρει’로 ‘가지치다’는 뜻입니다. ‘쓸데없는 가지를 제하여 잘라낸다’란 뜻입니다. ‘정결의식’에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이 가지치기의 과정은 우리의 신앙을 정화시키고, 불필요한 집착과 죄된 습관들을 제거하며, 하나님의 뜻에 더 순종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더욱 겸손해지고, 성숙해지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됩니다. 가지치기의 통증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의지하는 법을 배우며, 믿음의 뿌리를 더 깊이 내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섬세한 손길은 결코 파괴가 아니라 더 많은 열매를 위한 것입니다.
애지가 초등학교 다닐 때 학교에서 연극을 한다고 해서 갔었습니다. 연극의 주제는 등산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생각에 필요한 물건을 잔뜩 배낭에 넣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정상에 올라갔습니다. 정상에 오른 이들은 가지고 온 물건을 하나둘씩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등산과는 전혀 관계없는 물건들을 하나둘씩 꺼내면서 실망감에 빠졌습니다. 인생길을 걷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에 이사하면서 정말 많은 것을 버리거나,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드렸습니다. 저에게는 아무런 필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쓸데없는 욕심으로 내려놓지 못하고 움켜쥐고 살았던 것입니다. 버리기에는 아깝고, 남주기에는 아쉽고 그래서 쓸데없이 공간만 차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지치기는 아픔이 있을 지라도 그것은 은혜입니다. 중요한 본질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사사로운 것들을 끊어내야 합니다. 우리가 여전히 붙잡고 있는 고집, 자존심, 미움이나 탐심의 가지는 없는지 스스로 점검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위해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겠습니까? 오늘 하나님 앞에서 내려놓아야 할 가지는 무엇입니까?

- 붙어 있어야 열매를 맺습니다 (4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가지가 나무에서 떨어지면 결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가지의 생명은 나무에 붙어 있을 때 유지됩니다. 우리의 영적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지 않으면 신앙도, 사랑도, 사명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열매를 만들어내는 능력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우리 안에는 선한 것을 이룰 능력이 없으며, 오직 예수님께 연결될 때 참된 생명이 흘러 들어옵니다.
‘내 안에 거하라’는 말씀은 단순한 종교행위나 의무적인 생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지속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말합니다. 이는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로 주님과 교제하며, 공동체 안에서 예배를 드리는 실제적인 삶의 태도를 포함합니다. 영적 훈련과 실천이 꾸준히 이루어져야 생명력이 유지됩니다. 또한 그 관계는 단지 머물러 있는 상태가 아니라, 역동적인 교제와 순종, 인격적인 친밀함을 포함합니다.
‘거한다’는 헬라어 원어 의미는 ‘머문다, 살다’는 뜻으로, 일시적인 방문이 아닌 삶의 중심이 예수님 안에 있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주일에만 교회에 나오는 신앙이 아닌,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신앙이 진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숨 쉬고, 예수님으로 인해 살아가야 하며, 우리의 모든 행동과 결정이 그분과의 연합 가운데 이루어져야 합니다.

- 열매로 드러나는 제자의 삶 (8절)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예수님은 우리가 ‘열매를 많이 맺는 삶’을 살기를 기대하십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 보면 성령의 9가지 열매가 있습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입니다. ‘성령의 열매’란 열매를 맺는 주체가 내가 아니라 성령이란 뜻입니다. 성령이 내 안에 충만할 때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열매를 통하여 하나님은 영광을 받고, 우리는 주님의 제자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16-18절은 말합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진짜 신앙은 입술이 아니라 열매로 증명됩니다. 얼마나 교회를 오래 다녔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삶이 변했는지가 중요합니다. 열매는 단순히 외적인 결과가 아니라, 내면의 성숙과 변화가 외부로 드러나는 거룩한 표현입니다. 예수 믿기 전과 예수 믿은 후는 분명히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Before와 After가 달라야 하지 않습니까?
얼마전 어느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분은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한 연수만큼 수많은 설교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것을 보면 정말 신기하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설교를 들으면서 수십년 동안 설교를 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설교자를 보면 더 신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신앙은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입니다. 그 관계는 단순히 하나님을 안다는 지식이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그분의 임재 안에 살아가는 삶의 전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는 우리의 내면을 변화시키고, 겉으로 드러나는 삶의 열매로 이어집니다. 신앙은 교리나 전통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입니다.
신앙생활은 사람과의 수평적인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않으면, 아무리 종교적인 행위를 해도 진정한 열매는 맺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 붙어 있는 삶은 사랑과 용서, 이해와 섬김으로 이어지는 대인관계의 회복을 가져옵니다.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고, 우리가 맺는 열매를 통해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수직과 수평이 교차되는 자리는 나와 나의 내적 관계입니다. 내적 관계가 건강한 사람이 하나님의 관계와 인간관계가 건강할 수 있습니다. 건강하다는 것은 자신이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할 때 비로서 변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도 이웃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가지치기의 아픔이 올지라도 낙심하지 않고, 주님의 손길을 신뢰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어야 하고, 우리는 예수님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본질에 집중하고 비본질에 자유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때 비로소 가지는 열매를 맺고, 우리의 삶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참된 제자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열매 맺기를 원하실 뿐 아니라, 풍성히 맺기를 원하십니다. 그 열매를 통해 우리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주님,
오늘도 생명의 포도나무 되신 주님께 붙어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삶에 가지치기의 고통이 올지라도 낙심하지 않고, 주님의 손길을 신뢰하게 하소서.주님 안에 깊이 거하여 날마다 성령의 열매를 맺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내 안의 불필요한 가지들을 주님의 손으로 잘라내시고, 거룩한 열매를 맺게 하옵소서.교회 안에서, 가정에서,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 있는 신앙의 증인이 되게 하소서.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날마다 누리게 하시고, 내가 맺는 열매로 인해 주의 이름이 높임을 받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기억하라 (신명기 8:1-4절), 시드니 응답기도원 19 주년 기념 설교
1.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4.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응답기도원 개원 19주년을 축하드립니다. 응답기도원은 2007년 8월 4일에 그레노리 사슴농장에서 개원하여, 2020년 6월 5일 새로운 기도처로 이전 하였고, 다시 2024년 5월 3일 지금의 이 곳으로 기도의 처소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오래전 영국의 웨슬레의 생가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웨슬리 집에서 예배당으로부터 다양한 많은 방이 있었지만 가장 역사적인 방은 웨슬리의 ‘작은 기도실’입니다. 이 방은 새벽마다 기도함으로 세계적인 감리교회를 만들었다는 뜻으로 ‘능력의 방(Power Room)’이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시드니 응답기도원이 ‘시드니의 영적 발전소’로 ‘능력의 기도원’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시드니를 넘어 열방을 깨우는 ‘성령의 기도원’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기도원의 지난 19년 여정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20년을 준비하는 이 시점에서, 오늘의 본문은 신명기 8장 2–4절로 선택하였습니다. 이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간 훈련받던 시간을 되돌아보게 하며, 그 가운데 역사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 훈련하심, 공급하심을 되새기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신명기입니다. 신명기는 출애굽 40주년 기념, 모세의 3번의 설교이다. 모세는 출애굽을 경험하지 못한 신세대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3번의 설교로 설명했습니다. 신명기의 구조를 분석하면 1-4장은 과거 기억하고, 5- 26장까지는 현재를 교육하고, 27-34장은 미래를 기대하라는 3번의 설교입니다.
신명기는 히브리어로는 “드바림”, 즉 “말씀들”이라는 뜻을 가지며, 영어 이름인 Deuteronomy는 헬라어에서 유래된 “두 번째 율법”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책은 모세가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다시 설명하고 재확인하는 3번의 설교 형식의 말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광야 40년의 여정을 마무리하며, 새로운 세대에게 하나님의 언약과 율법을 되새기고, 순종의 삶을 촉구하는 내용이 중심입니다. 신명기의 가장 중요한 단어는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1.기억하라
2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신명기의 핵심 단어는 ‘기억하라’입니다. ‘기억하라’는 말은 히브리어 ‘자카르’(zakar)입니다. 이 단어의 기본 개념은 ‘기억하다’, ‘주의를 기울이다’ 등의 뜻입니다. 기억은 정체성과 관계가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는 나의 기억에 의존합니다. Still Alice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알츠하이머에 걸려 서서히 기억을 잃어 가는 주인공 알리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알리스가 ‘기록을 통하여 기억’을 보전하려는 처절한 노력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기억을 잃어버리면 자기를 잃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홀로코스트 박물관'(Holocaust History Museum)이 있습니다. 홀로코스트란 뜻은 ‘전부’란 뜻의 ‘홀로’와 ‘태우다’라는 ‘코스트’의 합성어입니다. 박물관의 히브리어 이름은 ‘야드 바쉠’(Yad Va Shem)입니다. 야드 바쉠이란 단어는 기억(Yad) 그리고(va) 이름(Shem)입니다. 2차 대전 중 나치에 의해 가스실에서 산화된 600만 명의 이름을 기억한다는 뜻입니다. 야드바쉠의 목적은 지난날을 기억하고, 오늘에 되살려, 내일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역사란 과거의 사건이 아닙니다. 과거의 사건을 오늘의 사관(史官)이 내일을 위하여 기록한 글입니다. 과거의 사건은 객관적이지만, 현재의 사관은 주관적입니다. 지금도 역사는 살아서 우리에게 말하고 있고, 미래의 방향을 제시하여 주고 있습니다. 역사를 통해서 배우지 못한 민족은 역사의 어리석은 전철을 다시 밟습니다.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E.H. Carr는 “과거와 현재의 끝임없는 대화”라고 했습니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인류의 가장 큰 비극은 지나간 역사를 통하여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데 있다”라고 했습니다.

2.40년의 광야 생활
이스라엘의 3대 절기인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은 시간적으로는 각각 봄, 초여름, 가을에 걸쳐 있으며, 내용적으로는 구속의 역사와 수확의 감사를 잇는 하나의 신앙 여정으로 연결됩니다. 이 절기들은 단순히 독립된 행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삶과 믿음, 공급과 응답, 시작과 완성이라는 흐름 속에서 유기적으로 엮여 있습니다.
유월절은 애굽의 속박에서 해방된 날을 기념하며, 하나님의 구원이 민족의 삶에 씨앗처럼 심어진 순간입니다. 보리 수확의 시작 시기와도 맞물려, 새로운 생명과 자유의 출발을 상징합니다. 이 절기를 통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속을 기억하며, 구원받은 자로서의 삶을 시작합니다.
오순절은 유월절 이후 50일째, 이스라엘은 밀 수확의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며 감사의 신앙을 실천합니다. 이 절기는 단순한 수확 감사제를 넘어서, 신약에서는 성령의 강림과 교회의 탄생으로 연결되어 하나님의 임재와 공동체의 구성이라는 의미로 확장됩니다. 구속받은 자들이 하나님께 열매를 드림으로써 삶으로 응답하는 절기입니다.
초막절은 1년의 농업적 수확이 마무리되는 포도, 올리브, 무화과 등 모든 열매를 저장하며, 하나님의 공급과 보호에 대한 총체적인 감사를 표현합니다. 초막에서 지내며 광야에서의 여정을 기억하고,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삶을 고백합니다. 이는 단순한 감사를 넘어서, 나그네로서의 인생과 하나님의 동행을 확인하는 절정의 시간입니다.
초막절은 광야에서의 40년의 기억하고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계속해서 동행하시며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4절을 보면 “지난 사십 년 동안, 당신들의 몸에 걸친 옷이 해어진 일이 없고, 발이 부르튼 일도 없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의 세 절기는 해방 → 성령 → 동행으로 유기적 연결을 가지고 있습니다.

3.말씀으로(다바르)
3절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민수기는 구약성경의 네 번째 책으로, 히브리어 제목은 “베미드바르”, 즉 “광야에서”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어 이름인 Numbers는 이스라엘 백성의 두 차례 인구 조사에서 유래되었으며, 이 책은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가나안 땅까지 광야를 지나며 겪은 여정과 신앙의 갈등을 기록한 책입니다. 광야는 ‘미드바르’, 말씀은 ‘다바르’, 지성소는 ‘드비르’입니다. 이 세 단어는 단순한 단어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민수기와 신앙 여정 전체를 관통하는 영적 구조를 형성합니다. 광야는 말씀을 듣는 자리이며, 그 말씀은 결국 하나님의 임재로 이어지는 지성소로 향하게 합니다.
3절은 예수님께서 광야에 시험받을 때 인용한 구절입니다. 마태복음 4장 1–11절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 직전에 광야에서 40일 금식하신 후 마귀에게 시험받으신 사건입니다. 각각의 시험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와 유혹을 상징하며, 예수님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응하셨습니다.
첫 번째 시험은 육체적 욕구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마귀는 굶주린 예수님께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유혹했습니다. 이는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욕구를 자극하는 시험이었지만,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말씀으로 응답하시며, 육체보다 말씀의 생명을 우선시하는 신앙의 태도를 보여주셨습니다. (신 8:3)
두 번째 시험은 자아와 명예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로 데려가 뛰어내리라고 하며,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구해주실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능력을 시험하고자 하는 유혹이었지만,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거절하셨습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능력을 증명하려는 도구가 아니라, 신뢰와 순종의 관계임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신 6:16)
세 번째 시험은 권력과 영광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높은 산으로 데려가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주며, 자신에게 경배하면 그것들을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는 말씀으로 단호히 거절하셨습니다. 이는 세상의 권세보다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 예배와 충성을 선택하신 모습입니다. (신 6:13)
이 세 가지 시험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요약되며(요일 2:16), 예수님은 모두 성경 말씀으로 마귀를 물리치셨습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유혹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와 순종임을 보여줍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응답기도원의 지난 19년은 단순한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공급하심, 그리고 훈련하심이 담긴 영적 여정이었습니다. 기억합니다. 응답기도원이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그리고 어디로 향해서 가야하는지. 응답기도원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과 교제하는 지성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곳에서 드리는 모든 기도가 시드니를 넘어 열방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기도
응답기도원의 지난 19년을 인도하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광야의 길에서도 말씀으로 먹이시고, 말씀으로 보호하시며, 말씀으로 이끄신 주님의 손길을 기억합니다. 이제 이 기도원이 시드니의 영적 발전소가 되게 하시고, 기도의 능력으로 열방을 깨우는 능력의 기도원이 되게 하소서. 다가올 20년의 여정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며,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이곳에 드려지는 모든 기도마다 하늘의 응답이 임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세벨을 용납한 두아디라 교회 (Thyatira Church)
두아디라는 자주(Purple Cloth)장사 루디아의 고향이다. 실지로 두아디라에서는 염색 공업이 발달 된 곳이다. 트로이 전쟁사를 썼던 서머나 출신 시인 호메로스는 “두아디라에서는 유명한 자주색 천이 생산됐다”는 기록을 남겼다. 두아디라에는 염색뿐 아니라 직조 피혁 도기 빵 제조업 등 다양한 산업이 발달했다. 이곳에는 산업이 발달되다 보니 공동작업을 같이하게 되었다. 공동 작업을 하면서 이방신들에게 제사를 드렸다. 아직도 우리나라에서도 특별한 행사 때 제사를 드리는 것과 같다. 다신을 섬기고 있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다양한 신에게 제사를 드렸을 것이다. 항해를 하는 사람에게는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에게 제사를 드렸을 것이고, 전쟁에 나가기 전에는 승리의 신, 나이키에게 제사를 드렸을 것이다. 그리고 제사 드린 음식을 나누어 먹었고, 제사의 하이라이트는 신전을 섬기는 여사제들과 성적인 교제를 하는 것이다.
첫째 예수님의 자기 계시
예수님은 말씀하실 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자기계시를 하셨다. 두아디라에 교회에는 ‘눈이 불꽃같고 발이 주석’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셨다. ‘불꽃과 같다’는 말은 모든 것을 보시고 계신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속성중 전지전능하심, 무소부재 하심을 뜻한다. (Almighty, Omnipotence, Omnipresence) 특별히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통하여 자기계시를 하신다.
①여호와(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출3:14)
②엘로이(살피시는 하나님. 창16:13)
③여호와이레(예비하시는 하나님. 창22:14)
④여호와라파(치료하시는 하나님. 출15:26)
⑤엘칸나(질투하시는 하나님. 출34:14)
⑥여호와닛시(승리의 깃발이신 하나님. 출17:15,16)
⑦여호와 치드케누(우리의 의되신 하나님. 렘23:5,6)
⑧여호와 샬롬(화평의 하나님. 삿6:23,24)
⑨엘 엘리온(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단4:34)
⑩여호와 삼마(거기 계신 하나님. 겔48:35)
⑪여호와 라아(목자되신 하나님. 시23:1)
⑫임마누엘(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사7:14)
⑬엘사다이(전능하신 하나님. 창17:1)
⑭엘로힘(권능의 하나님. 창1:1)

둘째 칭찬
‘너희 행위들과 사랑과 믿음과 봉사와 인내를 내라 알고, 너의 나중 행위들이 처음 것들보다 더 많은 것을 안다’. 에베소 교회와는 반대이다. 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책망을 받았다. 그런데 두아디라 교회는 오히려 처음보도 많은 열매를 맺고 있다. 용두사미라는 말이 있다. 시작은 용의 머리인데 끝은 뱀의 꼬리이다. 거창하게 시작 했으나 나중은 별 볼일 없다. 일년의 시작은 대단한 계획을 가지고 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열정도 비전도 점점 약화 되어 간다. 사람의 인품은 만날 때가 아니라 헤어질 때 알 수 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과거 일본 제품과 한국 제품을 비교할 때 끝마무리를 보면 알 수가 있다고 했다. 제품의 보이는 곳은 비슷한데, 안 보이는 곳에서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마지막 손질을 잘하지 않았던 것이다.
반대로 욥기에는 ‘시작은 미약할 지라도 나중은 창대하리라’고 했다. (욥 8:7) 점입가경이란 말도 있다. 갈수록 더 아름답다는 것이다. 알아 갈수록 더 알고 싶어지는 사람이 있다. 만날수록 더 만나고 싶어지는 사람도 있다. 깊이가 없으면 곧 바닥이 들어나기 마련이다. 요한복음의 가나 혼인 잔치의 포도주는 처음보다 더 좋은 술을 제공하여 손님들을 놀라게 했다. 시간과 성숙이 비례할 수 있다면 축복이다. 나이를 먹는 것도 슬픈 일이 아니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가 ‘하나님의 나라’이기에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축복된 일이다.
수요일에 성시화 관계로 홈부쉬에서 목회하는 피터 목사를 만났다. 이분은 레바논 출신으로 복음에 대한 열정이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보통 나이가 들수록 열정이 식어갈 것 같은데, 이분은 더욱더 강해지는 것 같다. 환갑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대중 매체를 통하여 복음을 전하고 있다. 크리스찬 리뷰 발행인에게 ‘페이스 북’을 하라고 권고를 한다. “나이가 먹어서 하기 힘들다”고 하니, “힘들더라도 당신을 위해서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하여 하세요” 라고 했다.

셋째 책망
‘자칭 선지자라는 이세벨’을 용납하였다. 자칭이란 말을 썼다.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데 자기 스스로 선지자라고 하는 것이다. 캄보디아에는 교민 4000명 중 2000명이 선교사라고 한다. 선교사 중에 파송 선교사가 있고 자칭 선교사가 있다. 파송 선교사는 1000명도 되지 않고 나머지는 자칭 선교사라고 부른다. 제사장은 혈통에 의하여 되는 것이지만, 선지자는 반드시 부름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선지자란 보낸 이를 대신하여 말하는 사람인데, 보낸 자가 없으면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는가? 세계사에서는 중세를 암흑시대라고 하고, 성경에서는 사사시대를 암흑기라고 한다. 사사시대의 특징은 사사기 마지막 장 마지막절인 21:25절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하나님을 대신하여 치리할 왕도 없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씀을 전할 선지자도 없으니, 모두가 각자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고 그대로 행했던 것이다. 해로를 이탈한 ‘이스라엘이란 배’가 바다에서 표류하는 기간을 암흑기라고 한다.
이세벨은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자기 생각을 주장한 자이다. 이세벨은 시돈 사람으로 아합에게 시집 올 때 자기 혼자 온 것이 아니라, 자신 섬기는 바알까지 데리고 왔다. 이세벨은 바알을 앞세워 자신의 욕망을 이루려고 했던 것이다. 결혼은 한여자와 한남자의 육신적인 만남이 아니다. 결혼은 두 사람의 ‘세계관’이 만나는 것이다. 세계관이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이제 둘이 하나가 되어 같은 곳을 바라보며, 함께 간다는 결단을 하는 것이다. 만약 서로가 다른 것을 바라본다면, 그 가정은 어디로 가야하는 것일까?
넷째 권면
회개하라, ‘그렇지 않으면 큰 환란 가운데 던질 것이고, 너희 자녀를 죽이리다.’ 주님은 교회의 잘못을 지적하고 나서 ‘회개’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길 만이 살길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신앙생활하면서 회개하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뭐 그렇게 우리가 잘못했기에 자꾸 회개할 것인지!
루터가 말한 ‘코람데오(coram deo)’는 ‘인간은 하나님 앞에선 존재’이다. 특별히 ‘눈이 불꽃’과 같다고 표현한 것은 모든 것을 살피시는 주님을 뜻한다.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은 물론 머리털까지 세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 살았던 것도 은혜고 살아갈 것도 오직 주의 은혜로만 살아가는 것임을 알고, 감사로 주 앞에서 나가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자신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를 힘입어서 사는 존재이다. 그래서 회개하고 겸손해야 한다.
다섯째 상급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자에게는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 ‘새벽 별을 주리라’고 했다. 시편 2편에 나오는 약속의 성취로 메시야가 오셔서 왕 노릇하실 때 성도들도 함께 참여하게 될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고난은 장차 있을 영광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새벽 별은 승리자에게 주어질 그리스도의 생명과 부활을 의미한다.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채스우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