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 (마 5:5-6)
저희들은 매주일 팔복에 대해서 시리즈로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지난 주는 팔복의 두번째 복인 애통하는 자의 복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애통은 장이 끊어지는 아픔이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는 것은 애통이 ‘은혜의 통로’가 되어 우리를 ‘은혜의 보좌’로 데려가기 때문입니다. 위로란 단어는 보혜사 성령과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습니다. 애통의 자리에 성령께서 임하실 때, 관계가 회복되고, 존재가 다시 세워지며, 삶이 새롭게 됩니다.
3번째 복은 온유한 자의 복입니다. 올해가 붉은 말의 해라서 1월 11일 첫번째 설교에 3번째 온유한자의 복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온유'(Meekness)란 ‘프라우테스’라고 하는데, ‘잘 길들여진 야생마의 성품’을 뜻합니다. 자기 뜻대로 날 뛰던 ‘야생의 힘’을, 주인의 뜻에 집중할 때 ‘온유’라고 합니다. 온유는 자신의 뜻을 꺾고 하나님의 뜻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구스 여인을 취하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할 때 하나님은 모세의 편을 들고,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다”(민12:3)라고 했습니다. 힘은 있는데 방향이 없으면 방종이 되고, 방향은 있는데 힘이 없으면 말뿐인 구호입니다. 온유는 그 둘이 하나님 안에서 결합된 모습입니다. ‘열심히 제멋대로 한다’란 말이 있습니다. 자기는 물론이고 그가 속한 공동체도 어렵게 합니다.
오늘은 4번째 복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은 가진 것이 많고 형편이 좋은 사람을 복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의에 갈망을 가진 사람에게 ‘배부를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1.의 (righteousness)
두 종류의 의가 있습니다. 자기의 의와 하나님의 의입니다. 자기 의는 인간이 스스로 세우는 ‘행위적 의’이고,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주시는 ‘관계적 의’입니다. 자기의 의는 사람이 자기 노력, 종교적 열심, 율법 준수를 등을 통해 스스로 의로워지려는 행위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 입니다. 종교를 크게 나누면 자력종교와 타력종교로 나눌 수 있습니다. 불교는 자력종교이고, 기독교는 타력종교입니다.
로마서 10:2-3절은 자기의 의와 하나님의 의 차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열심’과 ‘하나님의 열심’이 다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열심’은 자기 중심으로 자신이 주도하는 열심이고, ‘하나님의 열심’은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이 주도하는 열심입니다.
신앙생활은 자기의 열심으로 ‘자기의 의’를 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들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열심은 인간의 감정과 상황에 따라 흔들릴 수 있지만, 하나님의 열심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인자하심과 영원하심에 근거하기 때문에 변하지 않습니다.
- 칭의 (Justification)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의입니다. 이 의는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순종과 십자가의 피에 근거합니다. 십자가는 공의와 사랑이 만난 곳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공의를 이루셨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죄인인 인간은 스스로 노력해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너는 의롭다’라고 칭할 때 비로소 의인이 됩니다. 이 선언을 신학적으로 ‘칭의’라고 합니다. 칭의는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한 선언이며, 인간은 그 선언을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의롭다고 칭함을 받을 수 있습니까? 믿음으로 가능하다. ‘이신’(以信, 믿음으로)이라는 말이 생겼고, ‘칭의’와 결합하여 ‘이신칭의’(以信稱義)라고 합니다.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된 성경구절은 로마서 1:17절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의는 믿음으로 시작해서 믿음으로 완성됩니다. 복음은 인간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소식이며, 그 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믿음으로만 받아들여지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진정한 의인입니다.
저는 내일 출국합니다. 한국에서 여러가지 일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도착하고 2틀 후에 가나대사를 만납니다. 이분은 한국 선교사 자녀입니다. 한국 이름은 최승업 (Kojo Choi)입니다. 1977년에 태어났는데, 공교롭게도 한국과 가나가 1977년에 수교를 했습니다. 14살 때 부모님을 따라 가나에 갔습니다. 대학을 들어갈 때 쯤에 미국에서 공부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가 가나에서 정착하여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미국의 꿈을 접고 가나에서 정착하여 1999년 가나 국적을 얻었습니다.
가나로 유학온 한국 여학생과 결혼하고 자녀도 6명이나 됩니다. 작년에 갑자기 가나 대통령에게 뜻밖의 제안을 받았습니다. “한국에 가나 대사로 부임해주십시요” 그는 외교관이 아니고 사업가였습니다. 그는 외교관으로 아무런 자격을 갖추지 못해서 가나 정부내에서 논란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정말로 뜻밖의 놀라운 제안이었습니다. 그는 2025년 12월 15일로 한국에 가나 대사로 부임했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가나에서 자라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가나를 대표하는 자리. 그의 존재 자체가 두 나라의 관계를 연결하는 살아 있는 다리가 될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그와 같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자격없는 우리를 은혜로 구원해주신 하나님은 세상과 하늘을 연결하는 다리가 되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 의에 주리고 목마름
예수님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 의로는 결코 배부를 수 없지만, 하나님의 의를 갈망하는 사람은 이미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깨우신 사람입니다.
인간은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로워진 사람은, 의인이기 때문에 의를 갈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의를 찾고, 그 의에 목마르고, 그 의를 붙드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참된 만족과 충만함을 주십니다. 의에 목마른 자가 복이 있는 이유는, 그 갈망이 결국 하나님의 의로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수가성의 야곱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자, 여인은 어떻게 유대인인 당신이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우물을 달라고 하냐고 묻습니다. (9절) 이 말은 들은 예수님은 물을 달라고 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다면 네가 오히려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였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은 우물은 깊고 물을 길을 그릇도 없는데 어디서 물을 얻을 수 있냐고 되묻습니다. 예수님은 이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여인은 그런 물이 있다면 내게 달라고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했습니다. 남편이 없다는 여인에게 네가 옳다고 하면서, 과거의 5남자도 네 남편이 아니고 지금 살고 있는 남자도 네 남편이 아니라고 하자, 여자는 놀라며 19절에 내가 보니 ‘선지자’라며 예배 장소에 대해서 질문을 했습니다. 대답을 듣고 여인은 놀라며, 물동이를 버리고 마을로 가서 메시아를 만났다고 증거합니다(29절).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에 자기의 의로 영혼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자기의 의는 늘 부족하고, 흔들리고, 비교하게 만들고, 결국 우리를 더 목마르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는 인간이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를 갈망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채워 주십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 7:38-39)
결론
이제 우리는 자기의 의로 배 부르려 했던 마음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의로 배부르기를 구해야 합니다. 자기 의는 내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얼마나 바르게 살았는지, 얼마나 헌신했는지를 근거로 스스로 만족하려 하고, 스스로 의롭다고 느끼려 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입혀 주시는 의입니다. 이 의는 우리 안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과 같아서 다시 목마르지 않게 하는 생명의 능력입니다. 오늘 우리는 자기의 의로 자신을 증명하려는 길에서 내려와, 하나님의 의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애통하는 자의 복 (마 5:4)
지난 주에는 팔복의 첫번째 복인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인간은 영혼육이 함께한 총제적인 존재입니다. 심령은 ‘프뉴마’로 영을 뜻하고, 가난은 ‘프토코이’로 절대적인 가난입니다. 심령의 가난함은 단순한 겸손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능과 한계를 인정하는 영적 진실성입니다. 자기 안에 선한 것이 없음을 아는 사람, 은혜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음을 아는 사람, 주님이 모든 것임을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천국의 복을 이땅에서 누리며 살아갑니다.
오늘은 마태복음 5장 4절의 말씀을 의지하여 ‘애통하는 자의 복’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라.” (마 5:4) 이 말씀을 의지하여, 애통이 무엇인지, 왜 애통이 복인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떤 위로를 주시는 지를 살펴보며 은혜를 구하려 합니다.
- 애통 (πενθοῦντες,펜톤테스)
애통이란 헬라어로 ‘펜톤테스’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펜톤테스’는 단순한 슬픔이 아닙니다. 애통은 가슴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통곡, 뼈를 깍고 장이 끊어지는 듯한 슬픔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흔들리고 무너지는 자리에서 터져 나오는 탄식입니다. 이 깊은 애통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고사가 하나 있습니다.
‘단장(斷腸)’은 창자가 끊어진다는 뜻으로, 창자가 마디마디 끊어지는 듯한 극한의 슬픔과 고통을 상징합니다. 이 단어는 중국 동진 시대의 한 일화에서 유래했습니다. 진나라 장수 환온이 군대를 이끌고 양자강의 협곡인 삼협을 지날 때였습니다. 한 병사가 새끼 원숭이 한 마리를 붙잡아 배에 실었습니다. 이를 본 어미 원숭이가 비명을 지르며 백 리가 넘는 길을 울며 배를 쫓아왔습니다. 배가 기슭에 닿자마자 어미 원숭이는 배 위로 뛰어올랐으나, 너무나 애를 태운 나머지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병사들이 원숭이의 배를 갈라보니, 창자가 마디마디 끊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성경에도 비슷한 표현이 있습니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조국의 무너짐과 백성의 고통 앞에서 자기 몸이 망가지는 듯한 표현으로 울부짖습니다.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끊어지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딸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 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 기절함이로다”(애 2:11) ‘예레미야 애가(Lamentations)’의 애가란 ‘통곡의 노래’라는 뜻입니다. 개인의 눈물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멸망을 바라보며 흘린 신앙적 슬픔과 회개의 노래입니다.
6.25 전쟁의 비극을 담은 ‘단장의 미아리고개’란 노래도 있습니다. 전쟁 중 남편이 북으로 끌려갈 때 미아리고개에서 겪은 이별의 슬픔을 자식이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에 비유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애통이 복이 되는 것입니까?
- 은혜의 통로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애통이 복인 이유는 애통이 우리를 ‘은혜의 보좌’로 인도하는 ‘은혜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애통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하고 하나님을 만나게 합니다.
애통은 영적 민감성의 증거입니다. 죄를 죄로 보지 못하는 사람은 애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거룩 앞에서 떨지 못하는 사람은 애통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고통 앞에서 마음이 무뎌진 사람도 애통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애통이 있다는 것은 마음이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빛 앞에 반응하는 심령이 있다는 뜻입니다. 말씀 앞에서 무너질 줄 아는 마음이 있다는 뜻입니다. 애통은 영적으로 죽어 있는 표지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반응하는 살아 있는 심령의 표지입니다.
또한 애통은 회개의 시작점입니다. 회개는 단지 후회가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방향 전환입니다. 그런데 방향 전환은 자기 의가 무너질 때 시작됩니다. 사람이 ‘나는 괜찮다’라고 말하는 동안에는 하나님께 돌아서지 않습니다. 사람이 ‘내가 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동안에는 하나님께 기대지 않습니다. 회개는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애통은 그 회개의 문을 여는 마음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애통은 복입니다. 애통은 하나님을 향해 열리는 마음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애통이 복인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애통이 하나님이 가까이 오시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사람에게만 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하시고, 통회하는 심령을 멸시하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너졌을 때, 통회할 때, 애통할 때 오히려 더 가까이 오십니다. 애통은 하나님이 멀어지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그러므로 애통은 복입니다.
- 위로 (παρακληθήσονται, 파라클레데손타이)
애통하는 자에게 성령께서 친히 곁에서 위로해 주십니다. 위로란 헬라어 ‘파라클레데손타이’는 ‘곁에 와서 붙들어 주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멀리서 말로만 ‘괜찮다’라고 하시는 분이 아니라, 실제로 가까이 오셔서 곁에 서서 붙드시는 분입니다.
더 깊이 보면, 이 단어는 성령을 가리키는 파라클레토스(보혜사)와 같은 어근을 갖고 있습니다. παρά(곁에) + κλητός(부름받은) = ‘곁에 부름받은 자’ 즉, 돕기 위해 가까이 불려온 존재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에게 성령의 위로가 임할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성령의 위로는 관계적 위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성령의 위로는 존재적 위로입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혼자가 아니다’라고 확증하십니다. 성령의 위로는 회복의 위로입니다. 상처를 덮어 감추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새롭게 하시는 치유를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
애통이 은혜의 통로가 되어 우리를 ‘은혜의 보좌’로 데려갑니다. 애통의 자리에 성령께서 임하실 때, 관계가 회복되고, 존재가 다시 세워지며, 삶이 새롭게 됩니다.
결론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우리의 마음이 다시 하나님께 열리기를 원합니다. 자신의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가 깨어짐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함께 아파할 수 있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함께 애통할 때 함께 위로의 복을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채스우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