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잃은 자를 찾아서!

누가복음 15장에는 세 가지 비유가 나온다.
잃은 양을 찾은 목자, 잃은 동전을 찾은 여인, 잃은 아들을 찾은 아버지의 비유이다. 모두 잃은 것을 찾은 것에 대한 비유이다.
3가지 비유는 공통된 한 가지 주제를 말하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다. 3가지 비유는 단순히 같은 내용을 세 번 반복한 것은 아니다. 잃은 양은 자신의 무지에 의하여 잃어버렸다면, 잃은 동전은 타인의 과오로 인하여 잃어버렸고, 탕자는 자신의 의지에 의하여 잃어버렸다.
1. 잃은 양을 찾아서(4-7절)
양은 자신을 방어할 만한 능력이 전혀 없는 동물이다. 잘 속고, 눈도 안 보이고, 뛰는 속도도 느리고 방향 감각도 없다.
시력이 아주 나쁘다. 인간의 기준으로 하면 -10 디옵터 정도 된다. 1~2m 앞의 것만 겨우 분별한다.
동물들 중 가장 길을 잘 잃어버린다. 숲이 있는지 낭떠러지가 있는지 조차도 구분 못하고 무조건 걸어 들어간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된 길로 가고 있음(사23:6)을 한탄한 적이 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그분만을 따라가야 하는데, 그 중요성을 잠깐 망각하다가 그만 길을 잃어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양은 반드시 목자가 옆에 있어야 생존할 수 있다.
2. 잃은 동전을 찾아서(8-10절)

잃은 동전의 경우는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다. 외부적인 어떤 요소에 의해서 떨어져나간 경우에 해당한다. 자신의 과오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 다른 원인으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잘못된 길로 이끌렸거나 숨겨져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사회의 구조적 모순으로 인해 잃어버릴 수도 있다. 병든 아빠의 엄마가 된 소녀 가장을 알고 있는가?
프랑스 사회학자인 ‘에밀 뒤르켐’은 ‘자살론’에서 “자살은 결코 개인적 행위가 아니라, 개인이 속한 사회적 힘이 자살에 영향을 준다”고 했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점은 소득수준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를 대하는 태도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이 있다. 가진자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말이다. 이들은 돈만 많은 졸부가 아니라 명문가 출신이다.
Waiter의 법칙이 있다. “사업 파트너이든 친구이든 간에 상대방에게는 친절하지만 웨이터에게 무례한 사람은 절대 좋은 사람이 아니니 이러한 사람과는 되도록 엮이지 않는 것이 좋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3. 잃은 아들을 찾아서(11-32절)
탕자는 자의적으로 아버지를 떠났다. 아버지를 떠나면 행복하고 더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탕자는 가지고 간 돈이 다 떨어지고 나서야,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잃은 양과 잃은 동전의 경우는 직접 찾아 갔지만, 아버지는 인내하며 기다려야만했다.
17절에 탕자는 “스스로 돌이켜”라고 했다. 자의적으로 나갔기 때문에 스스로 깨닫지 않고는 돌아오지 않는다. 후회와 회개는 다르다. 후회는 과거지향적인 단어이고, 회개를 미래 지향적인 단어이다.
17절은 후회이지만, 18절은 회개이다.
18절에 탕자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돌아간다. 아버지는 멀리서 아들이 오는 것을 보고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모두가 함께 기뻐했다.
그러나 한사람은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불만을 터트렸다. 형이다. 두 명의 탕자가 있다. 집을 나간 탕자와 집에 있는 탕자이다. 집을 나간 탕자는 회개하고 돌아왔지만 집에 있는 탕자는 자신이 탕자라는 것조차 알지 못하고 있다.
3가지의 비유의 공통점은 잃은 것을 찾았을 때, 개인의 기쁨을 넘어 함께 기쁨을 나누었다.
누가 복된 자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계1:1-3)
계시록 1장 9절과 10절을 보면 요한은 밧모섬에서 ‘주의 날’에 계시를 받았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계1:9-10) 요한 계시록의 저작 연대는 로마의 도미티안 황제 때인 주후 95-96년경이다. 사도 요한이 도미티안 황제(81-96년)의 통치 제15년에 밧모섬에 유배되었고(주후 95년), 도미티안 말기에(주후 96년) 그 섬에서 이 계시를 보았고, 도미티안이 죽고, 에베소로 돌아와 사역하다 96세 경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1. 요한은 누구인가?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수제자였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마 17:1-4). 외골수 성격에 야망을 가졌으며 우뢰와 같이 성격이 급하고 거친 자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막 10:35).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눅 9:53-55).
마지막까지 십자가 곁에 있었던 유일한 제자다.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요 19:26). 주님을 사랑하듯 마리아를 모신 자다.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요 19:27).
2. 계시란 무엇인가?
요한은 밧모섬에서 ’주의 날’에 계시를 받았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계1:9-10)
계시란 감추어진 것을 드러낸다는 의미이다. 히브리어 “갈라”와 헬라어 “아포칼립시스”로 “베일을 벗다”, “드러내다” 그리고 “나타났다”라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계시의 어원은 “감추어진 것을 드러낸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계시란 하나님의 자기 노출이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시는 행위 자체가 자기계시(Self Revelation)이다. 이것을 일반계시 혹은 자연계시라고 한다. 특별계시는 초자연적인 계시로 구속과 연관이 되어 있다. 하나님이 초자연적인 방법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는 것이다. 특별계시의 궁극적인 형태는 예수 그리스도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성경이 특별계시이다. 인간이 스스로 계시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기계시를 할 때 볼 수 있는 수동적인 깨달음이다. 그것이 은혜이고, 은혜임을 아는 자가 감사하며 산다.
3. 누가 복이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복과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정녕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신15:4)고 하셨다. 신약에서,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1:25). 계시록 마지막 22:7절에도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고 하셨다. 말씀을 읽고 입으로 아멘, 말씀을 듣고 마음으로 아멘, 말씀을 지키고 몸으로 아멘 하는 자가 복이 있다.
성경은 잘 사는 법을 가르쳐 주는 책이 아니라 잘 죽는 법을 가르쳐 주는 책이다. 성경은 “주 안에서 죽는 자가 복있도다”고 했다(계 14:13). 이 땅의 복이 영적이며 종말론적인 복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진정한 복이 아니다.
비전과 열정 그리고 온유

내가 원하는 것은 ‘야망'(Ambition)이고,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비전'(Vision)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다는 것은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 됨을 고백하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주인이 바뀐 것이고 중심이 바뀐 것으로, ‘나의 야망’이 아닌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기 위해 사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능동태가 아니라 수동태이다.
1) Vision (비전)
우리의 고민은 ‘나의 야망’과 ‘하나님의 비전’이 충돌될 때 시작된다. 내가 원하는 바와 하나님의 구하는 바가 일치되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한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롬10;1) 바울은 ‘자신의 야망’과 ‘하나님의 비전’이 동일했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의 야망’과 ‘하나님의 비전’이 동일한가? 그렇지 않다면 이 시간 깊이 고민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인생은 단거리가 아니라 장거리로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다.
2) Passion (열정)
비전은 삶의 목적이며 방향이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잠29:18)고 했다. KJV 성경은 “Where there is no vision, the people perish”라고 했다. ‘비전이 없는 민족은 망한다’는 뜻이다. 인생을 망망대해에 떠있는 배로 비유한다. 목적지가 있는 배는 항해하고, 그렇지 않은 배는 표류한다. 항해를 위해서는 동력이 필요하다. 동력은 열정(Passion)이다. 열정은 있지만 방향이 없으면 방종이고, 방향은 있지만 열정이 없으면 구호에 불과하다. 비전을 향해 나아갈 열정은 가지고 있는가?
3) Meekness (온유)
산상수훈 8복 중 세 번째 복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니라”(마5:5)이다. ‘온유'(Meekness)란 ‘프라우테스’라고 하는데, ‘잘 길들여진 야생마의 성품’을 뜻한다. 자기 뜻대로 날 뛰던 ‘야생의 힘’을, 주인의 뜻에 집중할 때 ‘온유’라고 한다. 온유는 자신의 뜻을 꺾고 하나님의 뜻에 집중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다”(민12:3)라고 했다. ‘비전과 열정’이 합해진 단어가 ‘온유’이다.
인생의 비전스쿨을 통하여 ‘나의 야망’과 ‘하나님의 비전’이 일치되기를 바라고, 비전을 구체화할 수 있는 열정을 다시 한 번 회복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라이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