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 (요 1:1, 14)
요한복음 1장 1절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는 선언으로 시작됩니다. 말씀은 Logos입니다. 철학에서 Logos는 이성, 심리학에서는 의미,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용됩니다. 요한은 로고스를 예수 그리스도로 동일시하며, 그분이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곧 하나님이셨다고 선언합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은 성육신의 선언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하나님이 인간의 육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늘로 올라갈 수 없기 때문에 그분이 내려오신 것입니다.
마틴 부버는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존재의 본질을 관계 속에서 이해하였습니다. 관계를 표현할 때 Relation과 Relationship이 있습니다. Relation은 물리적으로 연결된 양적인 관계이고, Relationship은 인격적으로 연결된 질적인 관계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말씀하시며, 아담에게 하와를 주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고, 그 형상은 관계적 존재로서의 형상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의 하나님입니다. 인간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 관계적 존재
인간(人間)이라는 한자 자체가 ‘사람 사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사이’라는 말은 ‘관계’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관계적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인간은 관계속에서 태어났고, 관계 속에서 살다가 관계 속에서 죽습니다.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입니까? 관계가 좋은 사람이 좋은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까? 관계가 좋은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IQ, EQ, NQ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능지수인 IQ를 중요시 여겼으나, 이제는 EQ인 ‘감성지수’를 더 중요시 여기고 있습니다. 감성이 깨지면 지능은 더 나쁜 쪽으로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NQ는 Network Quotient의 약자로 ‘관계지수’입니다. ‘행복지수’라고도 합니다.
하버드대학교의 75년간 진행된 성인발달연구(Harvard Study of Adult Development)는 인간의 행복과 건강한 삶의 핵심 요인을 밝히기 위한 세계에서 오래된 종단 연구 중 하나입니다. 1938년에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연구 대상자들의 삶을 수십 년간 추적하며 얻은 통찰은 매우 깊고 실질적입니다. 연구 책임자 로버트 윌딩어(Robert Waldinger) 교수는 사람이 행복하고 건강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계(Relationship)’라고 했습니다. 그는 구체적으로 3가지를 강조하였습니다.
1) 좋은 관계가 행복과 건강의 핵심입니다.
가족, 친구, 공동체와의 ‘사회적 연결’이 긴밀할수록 더 행복하고 오래 삽니다. 반대로, 고독은 건강 악화와 기억력 저하, 수명 단축과 관련됩니다.
구세군에서는 은퇴를 앞둔 사관을 위한 은퇴 준비 교육을 합니다. 은퇴할 때는 4가지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집, 건강, 돈 그리고 공동체(Community)입니다.
지난 화요일에 스트라스필드 기차역에서 은퇴한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목회자 테니스 클럽에 가고 있었습니다. 70 중반인데 아주 건강해 보였습니다. 동료 목사님들과 만난다는 설렘과 기대가 얼굴에 만연하였습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소풍 갈 때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목사님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면서 워즈워드의 ‘무지개’란 시가 떠올랐습니다.
“저 하늘에 무지개를 바라보면
내 가슴은 두근거리네.
나 어려서도 그러했고
어른이 된 지금도 그러하고,
나 늙어서도 그러할지어다.
그렇지 않을진대, 나의 목숨 거두소서 !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바라건대, 내 생애의 하루하루가 자연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이어지기를…”
여러분은 오늘 어떤 마음으로 교회에 오셨습니까? 구원의 감사와 감격은 있었습니까? 말씀에 대한 목마름은 있었습니까? 서로를 향한 감사와 경외심은 있습니까? 옆에 사람을 보시고 이렇게 말해 보세요. “당신을 보니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습니다”
2) 관계는 ‘양’보다 ‘질’이 중요합니다.
친구가 몇 명인지보다, 얼마나 깊고 안정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갈등이 많은 관계는 오히려 신체와 정신 건강에 해롭습니다. 저는 과거에는 음식을 양으로 승부했으나, 이제는 질로 승부하기로 했습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카톡의 수 많은 친구보다 내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가 필요합니다. 그런 친구가 없다면, 군중 속의 고독이고, 풍요 속의 빈곤입니다. 홍수가 났을 때 제일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마실 물입니다.
3) 좋은 관계는 뇌 건강도 지켜줍니다.
좋은 관계는 해마의 활동을 촉진해 기억력과 학습 능력을 강화합니다. 새로운 시냅스 연결이 형성되며 ‘뇌 가소성’ (Neuroplasticity)이 활발해집니다. 의미 있는 관계를 지속적으로 맺는 사람은 인지 기능 저하 속도가 느리고, 치매 발병률도 낮습니다. 반면, 사회적 고립은 뇌 위축과 인지 저하를 가속화합니다. 기분 좋은 뇌가 공부도 잘합니다.

- 관계의 종류
부버는 인간의 삶을 두 가지 차원의 관계로 설명했습니다. 첫째는 나와 너의 관계입니다.
이것은 서로를 인격적으로 바라보고,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존중하며 만나는 참된 관계입니다.
인격과 인격이 마주할 때 거기에는 진정한 생명과 교제가 흐릅니다. 둘째는 나와 그것의 관계입니다. 이는 상대를 인격적 존재로 보지 않고, 도구나 수단, 대상으로만 취급하는 관계입니다.
안타깝게도 현대 사회의 많은 문제는 ‘너’를 ‘그것’으로 대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경쟁과 소외, 차별과 갈등은 모두 관계의 본질을 상실한 결과입니다. 부버의 강조처럼, 인간은 ‘너’를 ‘너’로 만날 때 비로소 참된 인간이 됩니다.
우리는 3 종류의 너와 3가지의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첫째 나와 하나님의 영적 관계, 둘째 나와 이웃의 사회적 관계 그리고 나와 나의 심리적 관계입니다. 나와 하나님의 대신관계는 신앙의 뿌리이고, 나와 이웃의 대인관계는 신앙의 표현이며, 나와 나의 대아관계는 신앙의 정체성입니다. 3가지의 관계를 잘 표현한 것이 십자가입니다. 세로는 수직적인 대신관계이고, 가로는 수평적인 대인관계이며, 세로와 가로가 만나는 자리는 심리적인 대아관계입니다.
이 모든 관계의 중심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은 관계의 본질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 우리는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고, 그 사랑은 자연스럽게 이웃에게 흘러갑니다.
예수님께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말씀과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마 22:36-40)는 명령은 결국 모든 관계의 핵심이 사랑임을 가르쳐 줍니다.

- 관계의 회복
그러나 현실 속에서 우리는 관계의 단절을 경험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것은 죄입니다. 죄의 본질은 관계의 파괴이며, 구속의 본질은 관계의 회복입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사 59:1-2) 그러나 회개할 때 막혀 있던 담이 무너지고, 하나님과의 끊어진 관계가 회복됩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요일 1:9)
회개는 후회가 아닙니다. 후회는 과거지향적인 단어이고 회개는 미래지향적인 단어입니다. 후회는 앉아 있는 것이고, 회개는 행동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 17절에 탕자가 돼지우리에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앉아 있는 것은 후회이고, 18절에 그가 일어나 방향을 돌려 아버지에게 가는 것은 회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내 자신과의 관계가 새로워집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나를 존중하게 됩니다. 이는 곧 자기 수용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할 때 비로소 자신을 받아들일 힘이 생깁니다. 우리가 우리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4장 19절은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자존감이란 영어로 Self-Esteem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안아 주면서 말해 보세요. “나는 내가 나라서 참 좋아”
자신과의 관계가 건강해질 때, 이웃과의 관계 또한 회복됩니다. 대부분의 갈등은 자기 자신과의 불화에서 비롯됩니다. 평상시에 불평 불만이 많은 사람은 자기와의 관계가 좋지 않은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을 수용하지 못하면 타인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없습니다.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는 말씀처럼, 용서는 이웃 관계 회복의 열쇠입니다. 우리는 회개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때, 우리는 자신을 수용하게 되고, 그 수용은 곧 이웃을 향한 사랑과 용서로 이어집니다. 주기도문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는 용서를 받은 그 용서로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 주인이 1만 달란트를 빌린 종에게 탕감을 해 주었습니다. 종이 나가다 100 데나리온을 빌린 사람을 옥에 가둡니다. 동관이 이것을 보고 주인에게 알리자 주인은 대노하며 그를 잡아서 옥에 가둡니다. 주인은 35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우리는 용서 받은 그 용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말씀은 마치겠습니다.
세상에는 독불장군은 없습니다. 인간은 관계적 존재입니다. 관계가 좋은 사람이 좋은 사람이고, 관계가 나쁜 사람이 나쁜 사람입니다. 회개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자기 수용을 통해 자신과의 관계를 회복하며, 용서를 통해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블루마운틴에 울려 퍼진 찬양
어제 (2025년 9월 17일) 블루마운틴은 평소처럼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사람들은 능선 너머로 펼쳐진 절경을 감상하며 사진을 찍고, 바람을 맞으며 자연의 숨결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정상의 한켠에서, 조용한 변화가 시작되었다. 기타를 든 New Thing Worship팀이 자리를 잡고 찬양을 시작한 것이다.
기타의 첫 음이 공기를 가르자, 주변의 소음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바람은 선율을 품고 흘렀고, 나무들은 그 리듬에 맞춰 고개를 흔드는 듯했다. 그들의 목소리는 마이크도 없고 무대도 없었지만, 능선을 넘어 울려 퍼졌다. 그것은 단순한 음악이 아니었다. 그것은 고백이었고, 기도였으며, 예배였다.
그 찬양에 이끌리듯, 피지 출신의 두 사람이 조용히 다가왔다. 그녀들은 말없이 손을 들었고, 몸을 흔들며 찬양에 합류했다. 그녀들의 춤은 언어를 초월한 예배의 몸짓이었다. 그녀들의 발걸음은 찬양의 흐름을 따라 움직였고, 눈빛은 하늘을 향해 열려 있었다. 그 순간, 문화도 언어도 중요하지 않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한국인 가이드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교회를 다니지 않지만 조용히 말했다. “부모님은 온누리교회에 다니세요.” 그 말은 그도 이 찬양의 내용에 공감하고 있다는 고백이었다.
그 옆에는 미국인 관광객이 서 있었다. 그는 찬양이라는 개념조차 몰랐지만, 그 음악과 몸짓, 그리고 그 안에 흐르는 진심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느꼈다. 그의 눈빛은 질문이었고, 동시에 경청이었다.
그리고 어느새, 주변의 많은 관광객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그 찬양의 흐름에 귀를 기울였다. 누군가는 눈을 감았고, 누군가는 손을 모았다. 그들은 서로를 알지 못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한 마음이었다. 국적도, 언어도, 종교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그 찬양의 중심에 있었다.
어제 블루마운틴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성소였다. 예배당도, 강대상도 없었지만, 하나님은 그 가운데 계셨다. 그리고 그 예배는, 누구도 계획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참여한 예배였다. 그것은 즉흥적이었지만, 우연이 아니었다. 그것은 작았지만, 깊었다. 그것은 짧았지만, 영원히 기억될 순간이었다.
어제의 찬양은 끝났지만, 그 울림은 사람들의 마음에 남았다. 어떤 이는 집으로 돌아가 그 순간을 떠올리며 조용히 기도했을 것이고, 어떤 이는 처음으로 찬양이라는 단어를 마음에 새겼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는, 하산하며 그날의 찬양을 흥얼거렸을지도 모른다.

살았다고 하나 죽은 사데교회 (Sardis Church)
의학에는 치료의학과 예방의학이 있습니다. 치료의학은 병이 발생되어서 고치는 것이고, 예방의학은 병이 발생되기 전에 예방하는 의학이다. 우리는 계속하여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영적 진단을 통하여 우리 교회를 비추어 보고 있다. 치료할 것은 치료하고 예방할 것은 예방할 수 있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오늘은 사데교회이다. 사데(Sardis)란 지역은 영어에서 복수로 표현한 것은 있는 것처럼, 중심도시를 중심으로 이근 지역까지를 일컫는 말이다. 지역 자체가 난공불락의 요새이고, 사금이 많이 있어서 최초로 금화를 만든 곳도 이곳이다. 사데는 ‘폴리스 메칼레’ 즉 ‘위대한 도시’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무역이 발달하여 경제적으로 부요한 도시였다.
사데 교회는 너무 풍요한 물질적인 환경에서 신앙생활다보니, 오히려 영적인 무감각을 가지고 오게 되었다. 나병이 무서운 것은 다치거나 피가 나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프다는 것은 아직 살아 있기 때문이다. 김난도 교수가 쓴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이 있다. 하지만 어디 청춘만 아프겠는가? ‘아프니까 인생’이다. 우리가 아파한 다는 것은 아직도 살아 있기 때문이다. 공동묘지에 가면 아무도 아파하지 않는다. 아무런 근심도 걱정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죽었기 때문이다. 양심에 화인 맞은 자는 잘못 자체를 느끼지 못한다. 오늘 주님은 사대교회를 향하여‘네가 살아 있는 이름은 있지만 실상은 죽었다’라고 말씀하셨다.
1절 내 행위를 안다(Know your Deeds)
네 행위를 안다할 때도 행위는 Deeds 라는 복수로 썼다. 사데 교회는 자신들의 풍요한 물질을 통하여 많은 종교적인 행위를 했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교회이다. 그래서 스스로 우리는 살아있는 교회라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실상은 죽어 있었다. 이 부분을 어떤 주석가는 ‘Death in the pew’, 교회 좌석의 죽음으로 해석했다. 많은 교인들이 앉아 있으나 실상은 시체들이 앉아 있다는 것이다. 에스겔 골자기의 마른 뼈들이 모두 모아졌으나 아직 생기가 그곳에 없는 것과 같다. 형식은 있는데 내용은 없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이다. (딤후 3:5) 이들에게 율법은 있는데, 복음이 없다. 이런 자들을 주님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이라 책망하며 ‘회칠한 무덤’(마 23:27)과 같다고 했다.
필립 얀시 쓴 “아, 내 안에 하나님이 없습니다”라는 책이 있다. 내안에 사랑이신 하나님이 없어 미워하며 살았고, 내안에 소망이신 하나님이 없어 절망하고 살았고, 내안에 믿음이신 하나님이 없어 의심과 갈등의 세월 속에서 살았다는 고백과 같은 수필집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그러한 존재임을 깨닫는 순간 모든 것이 바뀌게 되었다.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 것이 은혜이다.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것이 은혜이다.
2절 ‘깨어나라’
주님은 이런 사대 교회를 향하여 ‘너는 일깨워’라고 했다. ‘Wake up’, 깨어나라는 것이다. 영적으로 잠자는 상태에서 깨어나라는 것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지 않고 잠자는 제자들에게 깨어 기도하라고 했다. 기도 한다고 위기가 없어 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기도하고 만난 위기는 기도로 무장했기에 이길 수 있으나, 기도하지 않고 만난 위기는 기도하지 않았기에 도망할 수밖에 없다.
3절에 ‘회개하라’
가롯 유다와 베드로의 차이는 무엇인가? 예수님을 팔았고, 예수님을 부인한 차인가? 아니다 유다는 후회했고, 베드로는 회개했다. 후회는 ‘과거지향적’인 단어이고 회개는 ‘미래지향적’인 단어이다. 기독교인은 후회하며 사는 사람이 아니라 회개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나폴리 총독이 죄수들의 배를 시찰한 일이 있었다. 노를 젓고 있는 죄수들을 한사람씩 여기에 오게된 사연을 물었다. 한결같이 자신은 죄가 없는데 억울한 누명을 썼다고 주장을 했다. 그런데 한사람이 “총독님, 저는 돈이 탐나서 남의 지갑을 훔친 죄인입니다. 그 벌을 지금 달게 받고 있습니다”라고 자백했다. 모든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총독은 부하에게 이렇게 명령했다. “이곳에는 이사람 말고 죄인이 없는데 만약 이곳에 이 사람을 그냥 두면 다른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 것 갔으니 이 사람만 집으로 보내 주거라”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
4절 흰옷 입은 사람들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대교회에도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몇몇이 있다고 했다. 이들이 이기는 자이고 이들은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이다. 흰옷은 예수 그리스도로의 보혈로 깨끗하게 씻음을 받은 상태이다. 멸망한 이스라엘에서도 남은 자가 있었던 것처럼, 죽은 사대교회에서도 흰옷을 입은 자가 있었다.
지난 2001년 9.11 사태 때 사람들은 무너지는 건물을 피하여 도망하는 장면이 있었다. 이상황을 보면서 미국 목사가 눈물로 설교한 것이 유튜부에서 화제이다. “Run for your life” 자신의 생명을 위하여, 잘못된 교회에서 도망하라는 것이다. 복음이 없는 교회에서 도망하라, 기복주의 교회에서 도망하라, 자신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하는 교회에서 도망하라. 멸망하는 소돔 고모라 성에서 도망하는 롯과 같이 교회로부터 도망 하라는 것이다.
‘교회로 피신(Run to Church) 해야 할 사람들이 교회로부터 도망을(Run from Church) 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세상에서 화목하게 지내던 사람들이 교회에서 상처를 받고 있다. 6일 동안 잘 지내는 사람이 주일에 교회에서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제는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고 있다. 교회, 교회,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사신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말이다.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채스우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