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후에 후회하지 말고, 전에 기억하라
히브리 성경은 ‘타나크’(TaNaKh)라고 하며 24권으로 되어 있다. T는 토라(Torah)로 율법서, N은 네비임(Nevi’im)으로 예언서, K는 케투빔(Ketuvim)으로 성문서이다. 기독교에서는 토라는 율법서라고 하지만, 토라의 원래의 의미는 ‘가르침’이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인지 가르쳐준 책들이다. 네비임은 예언서로 선지자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말씀이고, 성문서는 말씀으로 살아보고, 경험한 인간의 반응이다. 토라와 네비임이 하늘에서 땅을 향한 하나님의 가르침이라면, 케투빔은 땅에서 하늘을 향한 인간의 응답이다. 기독교의 시가서 5편은 성문서의 일부이다. 인간의 찬양, 탄식, 좌절, 분노 등의 수많은 인간의 감정을 성문서에 발견할 수 있다. 시편과 아가서는 ‘노래’이고, 욥기와 잠언 그리고 전도서는 ‘지혜서’이다.
솔로몬은 3권의 책을 썼다. 정확한 저작연도는 알 수 없지만, 내용을 보면 아가서는 청년 때, 잠언은 중년 때, 전도서는 노년 때 쓴 것으로 추정된다. 아가는 청년의 ‘사랑의 열정’, 잠언은 중년의 ‘지혜의 찬양’, 전도서는 노년의 ‘인생의 통찰’에 대한 글이다.
1. 아가 (雅歌, Song of Songs)
우리말 성경의 ‘아가(雅歌)’라는 제목은 우아할 ‘아(雅)’자에 노래 ‘가(歌)’ 쓴다. 아가서는 “노래 중의 노래(Song of Songs)”라는 뜻이며,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노래라는 뜻이다. 아가서는 솔로몬이 쓴 사랑의 노래로서 은유가 풍부하다. 인간이 타락하면 사랑의 노래 대신 책임전가를 한다. 창세기 3장에서 선악과를 먹은 아담에게 하나님이 찾아온다. “아담에 네가 어디 있느냐?”(9) “내가 벗엇음으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10), “누가 너더러 벗었음을 말하고, 누가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으라고 하였느냐”(11) 이때 아담은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가 내게 과일을 주어서 먹었나이다”(12)라고 변명을 했다. 타락한 아담은 자신의 책임을 하와에게 돌리고, 더 나가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한 것이다.
아가서는 왕과 한 시골 소녀 사랑의 이야기를 다룬 노래이다. 풍유적으로 아가서는 하나님의 결혼한 신부로서 이스라엘을 묘사하며(호 2:19-20)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교회를 묘사한다. 남녀의 사랑에서 인간의 가장 높은 성취를 발견하듯이 영적생활도 그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과 그의 교회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그 성취 발견한다. 아가서는 유대인들이 유월절이 읽는 성경이다. 1. 유월절 – 아가서, 2. 오순절 – 룻기, 3. 예루살렘멸망 – 예레미아 애가, 4. 초막절 – 전도서, 5. 부림절 – 에스더서
2. 잠언 (箴言, Proverbs)
잠언의 잠은 바늘 ‘잠’이다. 침으로 막힌 혈을 뚫는 것 같이 인생에 막힌 것을 뚫는 말씀이다. 잠언’이라는 원어(마샬)는 ‘비교, 비유’라는 뜻으로 ‘진리의 간결한 교훈’을 가리킨다. 잠언의 특징적 지혜이다. 지혜는 히브리어로 ‘호크마’, 헬라어로 ‘소피아’로 여성명사이다. 지식의 지는 ‘알지'(知)이고, 지혜의 지는 ‘지혜로울지'(智)이다. 영어로도 지식은 ‘Knowledge’이고 지혜는 ‘Wisdom’이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지식인’이지 ‘지혜자’라고 하지 않는다. ‘지식은 아는 것’이고, ‘지혜는 아는 것을 삶에 적용하는 것’이다. 지혜는 사건의 분별력이고, 사물의 통찰력이다. 지식이 노력해서 얻는 것이라면, 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열왕기하 3장에 아버지 다윗의 대권을 약관의 나이에 이어받은 솔로몬은 1000번의 번제를 드린 후에 하나님이 꿈속에서 나타나 “내가 너에게 무엇을 줄까” 물었을 때에 하나님이 맡기 백성들을 재판할 때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했다. 지혜는 ‘Discernment Heart’이다. 솔로몬의 지혜가 얼마나 소문이 났던지 아프리카의 시바의 여왕이 찾아왔을 정도이다.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네가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도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잠3:15) 지혜를 얻으면 나머지의 것은 지혜를 통해서 얻을 수 있지만, 지혜가 없으면 소유가 재앙이 될 수 있고, 권력이 타락의 원인이 될 수 있다.
3. 전도서 (傳道書, Ecclesiastical)
전도서 기자는 자신을 전도자(코헬렛)라고 밝히는데 이 말은 ‘모으다’, ’회집하다, 소집하다’라는 뜻을 가지는 ‘카할’이란 히브리어의 파생어다. ‘코헬렛’은 영적인 목적을 위하여 백성을 모으는 사람이란 의미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전도서의 주제는 ‘헛되도다’이다. 계속되는 헛되고 무의미하다는 말이 반복됨으로 염세주의적인 글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세히 읽어 보면 모든 것이 헛된 것이 아니라 ‘해 아래 있는 모든 것이 헛되다’라는 전제가 있다. ‘해 아래’란 하나님 없는 인생을 말한다. 하나님 없는 명예, 권세, 돈, 지혜 등 모든 것을 가져보았지만 ‘헛되다’고 고백한 것이다. ‘헛되다’는 ‘Vanity’ 혹은 ‘Meaningless’라고 한다. 인생은 허무하고 의미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 없는 인생은 두 종류의 극단적인 삶을 살 수 있다. 첫 번째는 허무주의적인 삶이다. 이 땅의 허무한 것을 위하여 아무리 노력을 해 보았자, 결국은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끝날 수밖에 없기에 ‘허무주의’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다른 하나는 그와는 정반대로 어차피 한번뿐인 인생 내 마음대로 살겠다는 ‘YOLO’ 정신의 ‘괘락주적인 삶이다.
옛날 로마에서는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장군이 시가행진을 할 때 노예를 시켜 행렬 뒤에서 큰소리로 “Memento mori”를 외치게 했다. 메멘토 모리는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 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를 뜻하는 라틴어이다. 지금의 영광이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지 말라는 뜻이다. 세상의 영광이 영원하지 않는 것 같이, 오늘의 고난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다.
전도서는 세상의 모든 것을 누려 보았던 솔로몬의 마지막 결론이다. 전도서 마지막 장인 12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1,2) 모든 것이 끝난 후에 후회하지 말고, 인생의 겨울이 오기 전에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했다. 전도자는 마지막장 마지막 절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말해 주고 있다.
전도자의 최종 결론은 결국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것에 귀결하면서, 반드시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경고도 잊지 않았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3,14)
세상을 바꾼 전염병

세상을 바꾼 팬데믹(Pandemic)
개역개정 성경에 ‘전염병’에 대해 45개의 구절이 나온다. 개역성경이나 공동번역 등의 성경에서는 ‘염병’이라고 번역했다. 전염병은 염병, 여역, 역병 등으로 불린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전염병의 위험도를 총 6단계로 나누는데, 최고 경고단계인 6단계가 팬데믹(Pandemic)이다. Pan은 All이고, Demic은 Demos로 People이란 뜻이다. 세상 모든 것이 신이라고 주장하는 범신론(Pantheism)이 있다. Pan + Theos의 합성어로 All과 god가 합해져서 만들어진 단어이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팬데믹은 흑사병이고, 최악의 팬데믹은 스페인 독감이며, 아직도 진행 중인 코로나 19가 있다.
1. 흑사병 (Plague)
팬데믹의 원조는 페스트균에 의한 14세기 흑사병이다. 1347년부터 약 3년간 유럽 인구의 1/3에 해당하는 2,500만 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흑사병은 치사율이 거의 100%에 가깝고 피부가 검게 되어 참혹하게 죽었다. 교회가 아무런 대안도 제시하지 못하고 속절없이 당하면서, 성직자의 권위가 급속하게 무너졌다. 노동력이 턱없이 부족하게 되자, 농노도 더 이상 예전의 농노가 아니었다. 페스트로 인해 봉건제가 약화하고 자영농이 힘을 가지게 되었다. 소상공인의 농촌 이전은 전체국가를 팽창시키고 대항해 시대의 물고를 열었다. 페스트는 중세를 붕괴하고 전체주의 국가를 거쳐 근대를 향한 속도를 높이었다.
2. 스페인 독감 (Spanish Influenza)
1918년에 시작해 1920년까지 창궐한 스페인 독감은 현대사에 기록된 최악의 팬데믹이었다. 세계인구 5천 만명이 죽었다. 한국에서는 1918년 무오년에 발병했다고 해서 ‘무오독감’이라 명명하였고 약 140,000명이 죽었다. 호주는 인구의 40% 감염되어, 이중 15,000여 명이 죽었다. 호주는 대처를 아주 잘하였다. 시드니 노스해드에 검역소(Quarantine Station)가 있었다. NSW 주는 배로 입국하는 모든 사람들을 이곳에서 철저하게 검역했다. 하지만 멜본에 사는 확진자 군인이 기차로 시드니에 오면서 스페인 독감이 시드니에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한국의 슈퍼 전파자 31번과 같은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화가 난 NSW 주가 주 경계를 봉쇄하자, 다른 주들도 봉쇄하게 되었다.
2003년 4월 22일 시드니 센트럴 코트에서 북한 봉수호 선원들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봉수호는 마약을 싣고 Victoria 주로 침투를 하다가 해안 경비정에 발각이 되어 NSW 주 뉴캐슬까지 도주하다가 잡혔다. 코트 채플린에게 연락을 받고 갔다. 선원들은 동문서답을 하면서 북한 대사를 불러 달라고 했다. 진전이 없이 시간만 흐르자 판사도 지쳤는지 “사건의 발생지역이 빅토리아 주이니 빅토리아 법정으로 이관한다”고 최종 결론을 내렸다. 현재 코로나 사태도 주와 주 사이에 유사한 현상들이 벌어지고 있다.
3. 코로나 19 (Covid 19)
코로나 바이러스(Corona virus)는 사람을 포함한 동물에 광범위한 호흡계 및 소화계 감염을 일으키는 RNA 바이러스로, 표면을 현미경으로 관찰했을 때 특징적인 왕관 모양의 돌기 때문에 ‘코로나(왕관)’라는 이름이 붙었다. 19는 2019년에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한국과 호주는 선방하여 큰 문제가 없지만, 미국을 비롯한 유럽 등은 이차 감염으로 연결되었다. 현재 백신과 치료제는 소문만 무성하지 언제 나올지 오리무중이다. 사회는 사람들 간의 물리적 거리가 멀어지면서, 심리적 거리도 멀어지고 있다.
하지만 부정적인 요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코로나 사태는 그동안 바쁘게 앞만 보고 달리던 일상의 삶을 잠시 멈추고 지난 온 세월을 돌아보게 하였다. 현실에 쫓겨 살던 시간들을 뒤로 하고, 잠잠히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수 있게 하였다. 그동안 당연하게 여기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깨닫게 하였다. 인간이 대단한 존재인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되었다. 세상의 거품을 빼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출 수 있는 계기도 되었다.
내 이웃이 누구나이까?

오늘의 말씀
우리는 누가복음 10장의 선한 사마리아 비유를 잘 알고 있으나,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신 배경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모른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어떡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 질문했다. 예수님은 율법에는 뭐라고 쓰여 있는가? 돼 질문을 하셨다. 율법사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답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면 된다고 하자, 멀쑥해진 율법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다시 질문을 한다. “내 이웃이 누구이니이까” 이때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다.
1.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29절)
당시 유대인은 시내산 언약을 통해 형성된 하나님의 계약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이 있었다. 율법의 언약을 맺은 사람만이 사랑해야 할 나의 이웃이고,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이방인, 사마리아인, 세리와 창녀, 죄인들은 가까이해서도 안 될 뿐 아니라 나의 이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구세군의 선교선언문에 ‘차별 없이(Without discrimination)’란 단어가 있다. 구세군의 모든 사역은 종교, 인종, 지역 등을 넘어 차별 없이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누가는 ‘사회적 약자’(Minority Group)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누가복음을 썼다. 핵심구절은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이다. 사회적 약자였던 어린아이, 가난한 자, 세리와 죄인, 여인, 사마리아인, 이방인들에 관한 기록이 다른 어떤 복음서보다 많다. 골4:1절 말씀을 보면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란 말이 나온다. 누가의 신분이 이방인으로 유일하게 성경을 기록한 인물이다. 그는 수리아의 안디옥 출신으로 바울의 전도를 듣고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유일하게 누가복음에서만 기록이 되어 있다. 비유에는 세 사람이 등장한다.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사마리아인이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 강도 맞은 자를 피하여 지나갔지만, 사마리아인은 자기 짐승에 그를 태워 주막에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주막 주인에게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올 때 갚아주겠다고 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부정한 것과 가까이 해서는 안된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라면 조금 이해할 수 있겠지만, 모든 제사를 마치고 여리고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제사의 승패는 삶에 있다.
2.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냐? (36절)
율법사는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는 자기 중심의 질문을 했는데, 예수님은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는 강도 만난 사람이 중심이 되어 질문을 했다.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고 대답했다. 이스라엘에는 12지파가 있다. 제사장은 레위지파 사람 중에서 아론의 후예로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가교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야곱은 창세기 32장 얍복강가에서 이스라엘이라고 이름이 바뀌었고, 이스라엘 12지파 형성의 뿌리가 되었다. 야곱은 12아들(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스불론, 단, 납달리, 갓, 아셀, 요셉, 베냐민)이 있었는데 레위 지파가 하나님의 소유가 되면서(민1:47~54, 3:12) 레위지파는 12지파에서 제외되었다. 창세기 49장 7절과 이후 레위 지파가 받은 사명이 다른 지파와 달리 땅을 기업으로 받지 않고 각 지파로 흩어져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레위는 12지파 구분에서 빠지게 됐다. 그리고 요셉 대신 그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각각 이끄는 지파가 형성되어 그 결과 열두 지파가 이루어졌다.(신 27:12~13)
사마리아’는 원래는 북이스라엘의 수도였으나, 앗수르 제국에 의하여 멸망되고 북이스라엘 지역을 ‘사마리아’라고 불렀다. 이들은 앗수르 제국의 혼혈 정책으로 혈통을 지키지 못했다. 그 후 그 지역 출신 사람을 ‘사마리아인’이라고 부르고 유태인들은 사마리아인을 이방인보다도 못한 개 취급하며 상종도 하지 않았다. 율법사가 사마리아인을 자기 이웃으로 받아들인다는 건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일이다. 비유를 마친 예수님께서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율법학자는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고 했다. 차마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하지 못했다.
3. 너도 이와 같이 하라. (37절)
예수님은 이웃의 개념을 확장에 그치지 않고,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다. 사마리아 사람이 이웃일 뿐 아니라, 이웃의 모범이 된 것이다. 참된 이웃이란 그 대상을 가리지 않고 필요시에는 언제라도 자신을 희생해 가면서까지 남을 도울 수 있는 사랑을 지닌 자임을 교훈하고 있다. 마태복음 24장은 종말장이고, 마태복음 25장은 심판장이다. 심판장에는 3개의 비유가 나온다. 열처녀의 비유, 달란트의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 10처녀의 비유를 통하여 갑자기 오실 주님 맞을 기름을 준비하라고 했고, 달란트의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땅에 묻지 말라고, 잘 사용하여 유익을 남기라고 했다. 그리고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해서는 최후의 심판의 기준인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니라” 말씀했다. 왜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주님께 한 것인가? 지극히 작은 자에게 베푸는 사람은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본문 33절에 사마리아인이 ‘불쌍히 여겼다’고 했다. 긍휼이란 단어는 ‘Com+passion’으로 상대방의 아픔과 함께한다는 뜻이다. 잠언 19장 17절에는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라고 했다. 우리가 남을 돕거나 구제할 때에 과시하거나 보상을 받으려고 할 때가 많다. 남을 구제하는 동기는 타인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서 나와야 한다.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보고 긍휼히 여기며, 기꺼이 도와주는 사람은 여호와께 돈을 빌려주는 사람과도 같다.
지난주 시티에서 노숙자 사역을 목사님과 돕는 사람들과 함께 인터뷰를 했다. 목사님은 2013년에 교회를 개척하였다. 선교단체와 같은 교회를 꿈꿨다. 처음에는 원주민 선교를 하려다가 방향을 전환하여 2015년부터 시티에서 노숙자 사역을 시작했다. 개척 교회이기에 인적 물적 자원이 풍부할 리가 없다. 만약 다른 목적으로 이 사역을 시작했다면 사역을 그만두어도 진작 그만두었을 것이다. 진심으로 노숙자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사역하고 있다. 지속성이 진실성이란 말이 있다. 자신에게 특별한 유익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사역할 수 있는 힘은 외적이고 이기적인 동기가 아니라, 내적이고 이타적인 동기에서 나온다.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라이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