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2022년은 3P로 시작하자
새 술을 담을 새 부대는 준비되었는가? 마가복음 7장 24-30절 (마 15:21-28)에 예수께서 갈릴리 지역을 떠나 잠시 두로 지방으로 아무도 모르게 가셨다. 두로는 고대 페니키아의 지중해를 주름잡는 무역의 중심지로 자주물감 산업과 조선사업, 카르타고를 비롯한 중동 각국과의 해상무역으로 경제적인 번영과 문화의 꽃을 피웠던 역사적인 상업도시였다. 예수께서 두로 지방에 오셨다는 소문이 퍼지자,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께 가서 그의 발에 엎드리며 귀신들린 딸을 고쳐 달라고 했다.
목적 (Purpose)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를 찾은 목적이 분명했다. 귀신 들린 딸을 고치기 위해서이다. 목적 (Purpose)은 인생의 나침반과 같다. 인생이 표류하지 않고 항해하려면 나침반이 필요하다. 죄란 ‘하마르티아’로 ‘목적에서 벗어나다’란 뜻이고, 회개란 ‘메타노이아’로 ‘방향을 바꾸다’라는 뜻으로, 나 중심의 야망 (Ambition)에서 하나님 중심의 비전 (Vision)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지도자란 분명한 비전을 가지고, 그 비전을 구성원들과 공유하여, 그 비전을 위하여 함께 항해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예수를 찾는 목적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분명한 대답을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인생의 망망 바다에서 표류하는 돛단배와 같다.
하버드 대학에는 목적이 사람의 인생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조사한 유명한 자료가 있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목적과 관련된 설문을 했다. 27%의 사람은 목적이 없고, 60%는 목적이 희미하며, 10%는 목적이 있지만 비교적 단기적이라고 응답하였다. 단지 3%의 사람만이 명확하면서도 장기적인 목적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을 25년 동안 끈질기게 연구한 결과 재미있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명확하고 장기적인 목적이 있던 3%의 사람은 25년 후에 사회 각계의 최고 인사가 되었다. 10%의 단기적인 목적을 지녔던 사람들은 대부분 사회의 중상위 층에 머물러 있었다. 그 중 목적이 희미했던 60%는 대부분 사회의 중하위 층에 머물러 있었다. 27%의 목표가 없던 사람들은 모두 최하위 수준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열정 (Passion)
예수께서 아무도 모르게 두로에 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소문을 듣고 그곳까지 쫓아 갔다. 여인은 예수를 찾아가 발아래에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 줄 것을 간구하였다. 그녀는 열정이 있는 여인이다. 아무리 좋은 목적이 있더라도 열정이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목적 (Purpose)이 방향 (Direction)이라면, 열정 (Passion)은 추진력 (Energy)이다. 목적 없는 열정은 방종이고, 열정 없는 목적은 구호에 불과하다. 산상 수훈의 8복 중 세 번째 복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니라”이다. 온유란 ‘프라우테스’라고 하는데 이는 ‘잘 길들여진 야생마의 성품’을 뜻한다. 온유란 ‘소극적 단어’가 아니라 강한 ‘야생의 힘’을 주인의 뜻대로 집중하는 ‘적극적인 단어’이다. 온유 안에는 ‘목적과 열정’이 함께 있다.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민12:3)라고 했다.
지속 (Persistence)
예수께서는 그녀를 개로 비유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다” 우리 말에도 욕을 할 때 개가 많이 등장한다. 영어도 마찬가지다. 대표적으로 ‘Son of Bitch’란 말이 있다. 사람들이 ‘Bitch’를 잘못 이해하여 ‘Beach’라고 생각하여 ‘해변의 자식’이란 의미로 생각했다. 그렇다면 ‘해변의 자식’이 왜 나쁜 것인가? 하지만 ‘Beach’가 아닌, 암캐라는 뜻의 ‘Bitch’ 이다. 서양사람들은 한국인이 개를 먹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88 올림픽을 유치한 나라에서 개고기가 혐오식품으로 단속의 대상이 되자 ‘개장국’이란 대신 ‘보신탕, 영양탕, 사철탕’이란 이름으로 바꾸었다. 가끔 짓궂은 호주 친구들이 농담으로 ‘아직도 한국 사람들은 개를 먹느냐’고 묻는다. 그때마다 웃음으로 넘겨버리지만, 언젠가 꼭 한마디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다. “너희가 보신탕 맛을 알기나 하는 겨!” 사마리아 사람을 개 취급을 하였다고 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개 취급을 당하는 모멸스러운 상황에도 결코 굴하지 않았다. “옳소이다 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오히려 그녀는 겸손하게 예수의 말씀을 인정하며 지속적 (Persistence)으로 구했다.
영국 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 (1874 ~ 1965)은 수상 직에서 퇴임 후 옥스퍼드 대학의 졸업식 축사를 맡게 되었다. 단상에 오른 처칠은 1분여간 침묵했다. 그리고 축사를 시작했다. “포기하지 마세요” (Don’t give up). 시작이 남다른 축사에 학생들은 다음 말을 기대하게 되었다.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설렘의 시간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처칠은 30초의 침묵 후 조금 더 큰소리로 한마디를 던진다.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 (Never give up).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 때 처칠은 마지막 한마디를 우렁차게 외치고 퇴장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포기하지 마십시오!” (Don’t ever and ever give up!). 방향이 옳고, 열정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간다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그것이 설령 죽음일지라도 성공한 삶이다. 포기는 배추 셀 때나 쓰는 단어이지, 우리 사전에는 ‘포기’란 없다.
길갈에서 만납시다
길갈은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첫 발을 내딛은 곳이다. 요단 강 언덕으로부터 약 8km 가량 떨어진 ‘길갈 (Gilgal)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진 (陣) 친 첫 숙영지이자 가나안 정복 전쟁을 위한 교두보였다. 그들은 길갈에서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할례를 행하고, 큰 기쁨과 즐거움으로 유월절을 지켰다. (수 5:1-12)
1. 할례를 거행했다.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에 대한 상징이었다 (창 17:11).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언약의 표시로 이스라엘 백성의 몸에 새겨진 흔적이다. 할례는 “나는 네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내 백성이라!”는 징표이며, 상징이었고, 또한 표시였다. 이것은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명서였다. 할례는 옛 사람이 죽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는 예식이며 증거였으며,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확실한 표시였다. 따라서 할례 받지 않은 자와 부정한 자는 거룩한 성에 들어갈 수 없었다 (사 52:1). 여호수아는 할례를 통해서 정체성을 확립하였다.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누구인가?
2. 유월절을 지켰다.
유월 (Passover)이란 애굽의 노예 생활로부터 탈출한 사건을 기념하는 날로, 유대교의 3절기 중 봄에 지내는 절기이다. 히브리어로 페사흐 또는 파스카라고 말한다. 페사흐라는 단어는 ‘넘어갔다’는 뜻이며 그 이름이 붙게 된 이유는 애굽에서 죽음의 천사가 어린양의 피가 문설주에 묻힌 집은 넘어감으로 그 집안에 있는 사람들은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바로 그 밤을 기념하는 데서 기인한 것이다 (출 12:27). 이 날은 보통 니산월 14번째 날 저녁에 행해진다 (레 23:5). 유월 즉 페사흐라는 단어가 붙여진 이유는 죽음의 천사가 어린양의 피가 발려진 집을 넘어간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며 14일 저녁을 말한다.
3. 군대장관을 만났다.
길갈에서 전열을 정비한 여호수아는 여리고로 전진하였다.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범상치 않은 사람이 칼을 들고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여호수아는 그가 누구 편인지를 알기 원하였다. “너는 우리 편이냐? 우리의 원수 편이냐?” 그 사람은 놀랍게도 ‘나는 당신의 편도 원수의 편도 아닌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왔다’고 했다. 그는 여호수아 편도 아니고 원수의 편도 아니고 하나님의 편이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 인간의 지혜와 전략이 뛰어날 지라도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 하나님 편에 선 사람이 최후의 승리를 할 것이다. 여호수아는 땅에 엎드려 그의 명령을 기다렸다. 그는 이곳은 거룩한 곳이니 신을 벗으라고 했다. 기도는 하나님을 변화시켜 내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변화되어 하나님 편이 되는 것이다. 남북전쟁 중에 링컨 대통령의 부관이 말했다. “각하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때 링컨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닐세, 나는 우리가 하나님 편이 되었으면 좋겠네.”
퀘렌시아 (Querencia)란 말이 있다. 투우사와 싸우다가 지친 소가 숨을 고르며 힘을 모으는 장소이다. 그곳에서 소는 새힘을 얻는다. 소는 두려워 하지 않는다. 길갈은 ‘퀘렌시아’이다. 안식의 장소이고, 회복의 장소이고, 재충전의 장소이다. 2022년 우리 교회가 길갈이 되기를 원한다.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이 길갈이 되기를 원한다. 세상 속에서 지치고 힘들어 포기하려는 사람들이 길갈에 와서 새힘을 얻기를 원한다. 앉은 자는 일어나고, 낙심한 자는 소망을 갖고, 방황하는 자가 길을 찾고, 병든 자가 치유 받는 곳이 되기를 바란다.
자기부인과 자기십자가란?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16:21-24)
오늘 본문의 ‘이때부터’란 이전에 무슨 사건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과 함께 계셨다. 제자들에게 세상의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질문하자 “세례요한, 예레미야, 엘리야,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답했다. 예수께서는 또 물으셨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때 성질 급한 베드로가 답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다” (마16:16) 예수께서는 기뻐하며 베드로를 칭찬하셨다. “이것을 알게 한 것은 너희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이라 네 내 교회를 세우리니 네가 네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노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내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마16:17-19) 신앙은 3인 칭에서 시작했을 지라도, 1인칭으로 고백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이 고백한 예수가 아니라, 내가 고백한 예수가 되어야 한다.
베드로의 고백을 듣고 ‘이때부터”’ 비로서 예수께서는 당신이 죽을 것과 3일 후에 부활할 것을 말씀하셨다. 이에 베드로가 그리하지 말라고 말리자, 예수께서 베드로를 사탄이라 하시며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 (마16:23)고 책망하시고,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16:24)라는 말씀하셨다.
‘자기부인’과 ‘자기십자가’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단어이다. 너무 익숙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고 막연히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누군가 ”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가 무슨 뜻입니까?”라고 물으면 구체적으로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생각’을 하지 않고 ‘사람의 생각’을 한다고 베드로를 책망하셨다. 그렇다면 ‘자기부인과 자기 십자가’는 ‘사람의 생각’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기 부인 (Self Denial)
1) 육의 사람 – 영의 사람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롬8:5-6) 육신의 생각으로 삶의 목적과 동기가 세상이 되어, 세상적인 방법으로 세상의 것을 위해서는 사는 사람이다. 영으로 산다는 것은 하늘의 것을 위하여 하늘의 방법대로 사는 사람을 말한다.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자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갈6:8)
2) 겉사람 – 속사람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고후4:16) 겉사람이란 죽어 흙으로 살아질 수밖에 없는 유한한 인간을 말하고, 속사람이란 예수 믿음으로 중생한 영적 실존을 의미한다. 보이는 겉사람은 계속 낡아지나 보이지 않은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
3) 옛사람 – 새사람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엡4:22-24) 바울은 마치 우리의 거듭난 상태를 의복과 비유를 하여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속사람을 입으라고 했다. 냄새나는 옛 옷을 입은 상태에서 새 옷을 입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세례란 육은 죽고 영으로 사는 것이고, 겉사람은 죽고 속사람으로 사는 것이고,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사는 것이며,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것이다.
자기 십자가 (Self Cross)
1) 고난 (Passion)
십자가는 고난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습관적으로 십자가와 연관 짓는다. 자식이 사고를 치면 ‘자기 십자가’라고 하고, 남편이 바람을 피워도 ‘자기 십자가’라고 하고, 사업이 망해도 ‘자기 십자가’라고 하고, 시험이 떨어져도 ‘자기 십자가’라고 한다. 자신의 잘못이나 무지로 인한 고난을 ‘자기 십자가’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있다.
십자가는 믿음과 연관된 고난이다. 자신의 죄 때문에 받는 고난은 ‘회개’해야 할 일이지, ‘자기 십자가’라고 합리화해서는 안된다. “‘너희 믿음의 시련은 불로 연단하여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벧전1:7) 믿음의 시련이란? 믿음대로 살다가 받는 고난이고, 믿음을 지키려다 받는 고난이며, 믿음을 전파하다 받는 고난이 ‘자기 십자가’이다.
2) 사랑 (Love)
구약에는 613가지의 계명이 있다. 하지 말라는 것 365개, 하라는 것 248개이다. 하지 말라는 것을 하면 ‘적극적인 죄’ (Commission)이고, 하라는 것을 하지 않으면 ‘소극적인 죄’ (Omission)이다. 이것을 요약한 것이 10계명이고, 10계명의 요약은 마태복음 22:36-40절의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다. 위로는 ‘하나님 사랑’, 옆으로는 ‘이웃 사람’이다. ‘사랑’이 ‘지상최대의 계명’ (The Great Commandment)이다. 사랑의 척도는 희생에 있다. 사랑에는 4 종류가 있다. 남녀의 사랑인 에로스, 친구의 사랑인 펠레오, 부모의 사랑인 스톨케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가 있다. 아가페 사랑은 절대적이며 무조건적인 자기희생의 사랑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 예수께서는 ‘고난의 십자가’를 ‘사랑의 십자가’로 승화시켰다.
3) 사명(Mission)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이제 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라고 하셨다. 아버지께서 주신 사명을 다 이루신 것이다. 예수께서 3일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 부탁하신 말씀이 마태복음 28장 18-20절이다. 이를 ‘지상최대의 위임’ (The Great Commission)이라고 한다. 보통 ‘The Great Commission’을 ‘지상최대의 명령’이라고 번역하지만, 정확한 뜻은 ‘위임이고 위탁’이다. Com+mission은 ‘함께’ (Com)와 ‘사명’ (Mission)의 합성어이다. ‘Mission’에는 ‘사명과 선교’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곧 선교이다. 주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맡기시면서,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니라’ (마28:20) 이것이 ‘Commission’의 진정한 의미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선교의 사명을 위임 받았다. 따라서 교회는 ‘선교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 교회가 선교적이 아니면, 선교의 적이 될 수 있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다. 자기 부인에 대해서 3가지를 말씀 드렸고, 자기 십자가에 대해서 3가지를 말씀 드렸다. 오늘의 말씀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사는 것이 그리스도'(빌1:21)라고 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2:20)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라이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