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란트 칼럼
부자의 책임 (누가 16:19-31)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지난 날 우리는 이런 인사를 많이 했다. 이러한 인사를 한 이유가 있었다고 한다면, 지난 시절 우리 민족은 외세에 자주 침략을 당하고 6.25전쟁과 가난, 질병, 굶주림과 싸우면서 온갖 고생을 당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싶다. 하루 밤사이에 무슨 일이 있어 날지 모를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가장 정확히 보여 주는 인사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요즘에 와서는 이런 인사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그 대신 언젠가부터 한국사회에서는‘부자 되세요’라는 인사말이 생겨났다. 이러한 ‘부자 되세요’라고 하는 말이 인사말이 될 정도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자 되기를 원한다는 반증이지 않을까 싶다. 한국사람 뿐만 아니라 아마 세계 어느 나라 사람이라도 부자 되고 싶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문제는 부자가 된다고 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부자로써의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엄히 경고하고 있다.
성경은 부자는 가난한 자에 대한 책임과 의무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곧 하나님 사랑이다.
신약성경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어느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가 있다.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파티를 하며 자신을 위해 부자의 삶을 누리며 살았고, 반면 거지 나사로는 그 부자의 대문 앞에 누워 혹시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있으면 먹으려고 애를 썼지만 오히려 개들이 거지 나사로의 헌데를 핥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너무나 대조가 되는 두 사람의 삶이 끝나고 둘 다 죽었는데, 그 삶의 결과는 너무나 의외였다. 거지 나사로는 죽어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고, 부자는 죽어 음부에 떨어져 불꽃 가운데 죽지도 못하고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궁금한 것은 거지 나사로는 무엇을 잘했기에 아브라함의 품에 안길 수 있었는지, 그리고 부자는 무엇을 잘못했기에 음부에 떨어지게 된 것인지 이다. 성경에 자세한 설명은 나와 있지 않지만 정황상 거지 나사로는 굶어 죽으면 죽을지언정 부자 집 담을 넘지 않은 것과 부자는 자신의 대문 앞에서 굶어 죽어가는 거지를 돌아보지 못한 것이 그 이유가 될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중요한 심판의 기준이 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산다는 것은 이와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알리셨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가(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1 3:14-18). 그렇다! 부자의 책임과 의무란 곧 ‘형제사랑’을 말한다. 신약성경 마가복음 12장에 보면, 어느 날 서기관 중의 한 사람이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어떠한 질문에도 대답 잘하시는 것을 보고 묻기를 ‘어떠한 계명이 가장 첫째 되는 계명입니까?’라고 묻는다. 예수님의 대답은 아주 간단명료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 12:29-31)고 하셨다. 두 개의 계명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한 개의 계명을 말씀하신 것이었다. 사도요한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1 4:20-21)고 말한 바 있다.
인류태초의 홍수심판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 사랑을 잃은 인간의 자기애(自己愛) 때문이었다.
구약성경에 보면 어느 시대에 노아라고 하는 사람의 가족을 제외한 모든 인류가 홍수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창세기 7장). 궁금한 사실은 그들이 당시 어떠한 모습으로 살았기에 하나님의 진노를 사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 이유를 창세기 6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 6:1-8). 이 말씀에 의하면 심판 받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타락한 그들의 첫 번째 모습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았다’라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말씀에 순종했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하고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죄를 얻게 된 타락한 인생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이 된 양, 자기애(自己愛) 곧 자신을 위한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이나 사람을 위해서라면 어떤 짓도 할 수 있는 인간으로 변질되고 말았다는 이야기이다. 또 다시 성경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라고 증언하고 있고, 또한 홍수 심판 후 다시 말씀하시기를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창세기 8:21)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 하나님의 형상 곧 그분의 사랑을 닮은 인간의 영적인 모습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것도 어려서부터 인간은 자신을 먼저 사랑하게 된 것이다.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모든 인간의 타락한 마음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어려서부터 악하다고 보신 것이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도하심에서 크게 이탈된 인간의 모습이기에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인간 지으셨음을 한탄까지 하시게 된 것이다. 신약성경 베드로후서에 보면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벧후 2:5, 6)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 멸망당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공통된 모습이 경건치 않는 삶이라고 하셨다. 경건의 삶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점잖고 예의범절이 바르고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 경건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 1:27)고 성경은 정의하고 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이기심과 욕망이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을 향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이기심과 욕심이다. 천국과 지옥은 바로 이 차이인 것이다. 이러한 예화가 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해 신과 이야기 하던 한 남자가 있었다. 신은 지옥을 보여주겠다며 큰 솥이 있는 방으로 남자를 데려갔다. 그 솥 안에는 스프가 맛있는 냄새를 풍기며 끓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 스프를 먹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은 배고픔에 허덕이며 괴로워하고 있을 뿐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숟가락 하나씩을 들고 있었지만, 숟가락의 손잡이가 그들의 팔보다 훨씬 길어 그들의 입까지 닿지 않았다. 그것은 정말 괴로운 일이었다. 이제 천국을 보여주겠다며 남자를 데려간 그 곳은 아까와 똑같은 솥이 있는 방이었다. 솥 안에는 스프가 맛있게 끓고 있었고, 사람들은 아까와 같은 긴 손잡이가 달린 숟가락을 갖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배고픔에 허덕이지 않고 있었다. 사람들은 오히려 밝은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며 행복해 보였다. 이해가 가지 않은 남자는 신에게 물었다. “똑같은 방인데, 왜 천국의 방에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행복해 보이는 것입니까?” 그러자 신이 대답했다. “아주 간단하네. 이들은 서로에게 스프를 먹여 주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지.” 그렇다!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인간의 삶은 바로 이러한 천국 삶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인간 삶의 모습이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죽음을 전제로 한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에게 가르쳐 주고 싶으신 삶의 모습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죽음이 있는 유한한 이 세상에서 딱 한 가지를 배워서 이 땅에서부터 살다가 영원한 하늘나라로 오라고 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함이다. 오늘 본문의 부자는 단지 가난한 소자 하나를 돌보지 못하여 음부에 떨어져 고통 가운데 후회하며 아브라함에게 간절한 청을 올린다.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찌니라.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찌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눅 16:27-31)고 말합니다. 혹 여러분의 집 대문 앞에 거지 나사로와 같은 소자가 없는지 돌아보실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이용호 목사(시드니 달란트교회 시무, 호주나눔선교회 대표)
호주나눔선교회 홈페이지: http://nanumaustral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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