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란트 칼럼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막 1:14-15)
기독교에서 복음(福音, 고대 그리스어: εὐαγγέλιον 유앙겔리온, 라틴어: evangelium 에우앙겔리움)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에게 가져다 준 구원에 관한 ‘좋은 소식’을 한자어로 풀이한 것이다. 성경은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죽음에서 구원받아야 할 존재라고 말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한계로 말하고 있지만 이 세상에서 성경만은 유일하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다.
인간은 뱀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죄를 짓게 되고 죄로 말미암아 죽음을 맞게 되었다.
죽음이 인간에게 있게 된 이유는 아마 유일하게 성경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류 태초의 인간이었던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는 복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권한을 주시고(창 1:28-29) 그들을 에덴동산으로 이끄신다. 그곳에 있는 각종 나무의 실과를 임의로 먹을 수 있으나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경고를 하시면서 먹는 날에는 정녕 죽게 될 것을 알리셨다(창 2:15-17). 죽음의 경고를 받은 인류 태초의 인간 아담은 과연 죽음의 의미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 수는 있을까? 결국 이 진리의 사실을 미루어 유추해 볼 때에 인간은 죽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었다는 사실과, 인간 매뉴얼을 정해 놓으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이 곧 죄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죄의 삯이 곧 사망이 된 것이다(롬 6:23).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명하신 선악과를 자신들이 따먹게 되는 날이 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뱀을 통한 사단의 등장을 예상하지 못했던 그들은 사단의 꾀임을 받게 되고 선악과를 따먹고 만다. 그 때의 장면이 구약성경 창세기에 나와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9-13). 결국 선악과를 따먹는 불순종으로 인해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고, 이들로 인해 새로운 인류의 죄와 사망의 역사가 쓰여지게 된다. 이 대서사시의 주제는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롬 1:29-32)이다. 한마디로 이러한 다양한 죄인의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사단의 위대한 미혹의 시작은 의외로 간단했다. 단지 너도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너를 먼저 사랑하라!’이다. 하나님의 도움없이 너를 위해서라면 목숨 걸고 열심히 살라는 것이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 경건치 않는 삶을 살다가 하나님께 심판받았다고 했는데 그들이 물로 심판받을 당시의 모습은,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마 24:38-39)였다. 그들이 무엇을 깨닫지 못했을까?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창 6:5, 6). 또한 홍수 심판 이후에도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 8:20, 21). 도대체 무슨 악한 생각을 어려서부터 했단 말인가?
그래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게 되었다”(롬 5:12)고 성경은 말한다. 아담과 하와에게 있어서 선악과의 선택은 자신을 위하여 죄를 지을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였다면, 죄 가운데 태어난 아담의 후예들에게 있어서는 죄를 지을 것인지 말 것인지의 문제가 아니라, 죄에 속하여 나를 먼저 사랑하며 살았던 삶을 회개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본질적인 문제가 된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과연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용서를 구하는 회개가 있었다면 아마 인류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세례 요한과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공생애의 첫 외침으로 온 인류에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였다. 자신을 위한 모든 선택을 멈추라는 경고이다. 자신을 위해 예수 믿고, 자신을 위해 교회를 선택하고 구제하고 선교하고 일하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을 멈추라는 것이다. 자신을 위한 에로스의 신앙을 멈추고, 죄인과 과부와 고아와 가난한 자의 친구가 되어 주신 하나님의 아가페의 신앙으로 회복할 것을 목 놓아 외치신 것이다. 이러한 주님의 마음이 느껴지는가? 오늘날 세상의 수많은 교회에서 전하는 복음을 들여다보면, 안타깝게도 예수님께서 전하신 복음과는 많이 다른 것을 보게 된다. 천국 복음의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인, 죄와 사망의 종살이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구원의 진리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단지 예수 믿고 세상의 복을 받으면서 교우들 간에 오손도손 친목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예수 믿고 사는 신앙의 모습이 아니다. 또한 이 시대의 많은 교회들이 전도할 때에 예수 믿고 복 받으라고 말하지만 성경은 이 땅에서 필요로 하는 것을 복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의 유한한 생명을 생명의 수에 칠 가치조차 없다고 했다(사 2:22). 오히려 복된 자는 자신의 죄 된 인생임을 발견하고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 51:14-17)라고 고백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복음의 시작은 ‘회개’에서 부터이다.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 성령행전의 놀라운 사역의 증거가 ‘회개’라고 하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남기신 유언, 곧 그 예언의 말씀을 보면,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눅 24:46-49)고 하신 말씀이 바로 그것이다. 불같은 성령의 역사, 곧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역사가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하여 시작되었다고 하는 내용의 책이 바로 ‘사도행전’이다. 불같은 성령이 충만했을 때에 제자들이 전한 복음은 한마디로, 인류의 죄와 사망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그 죄 값을 대신 갚아 주심으로 사망에서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지셨다고 하는 내용이다. 그래서 이 복음의 사실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게 될 것을 외쳤던 것이다. 이 복음을 믿은 사람들은 모두 동일한 반응이 일어났는데,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렇다! 여러분은 복음을 처음 들었을 때에 마음의 찔림이 있었는가? 회개가 있었는가? 그렇지 않으면 예수 믿고 세상 복 받으라고 들었는가? 회개치 못한 심령 위에 성경의 지식을 쌓게 되면 왕 바리새인과 서기관같이 외식하는 종교인이 되는 것이다. 회개는 일회성이 아니다! 날마다 회개하는 심령으로 말씀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며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어가는 깨어있는 성도의 삶을 사는 것이다.
회개 없는 인생은 ‘사랑과 평안’이 없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떤 영업사원이 판매할 수 있는 큰 건수를 놓쳐서 실망하고 있었다. 그리고 회사에 돌아와 이 일을 한탄하며 직장 상사에게 말했다. “물가로 말을 끌고 갈 수는 있지만, 말에게 물을 먹일 수는 없나 봅니다.” 그러자 상사가 말했다. “젊은 친구, 내 말을 듣게나. 자네의 일은 말에게 물을 먹이는 것이 아니라 말을 목마르게 하는 것이라네.” 그렇다! 전도자로써 복음을 전하는 일도 이와 같다. 죄로 인하여 ‘사랑과 평안’이 사라진 목마른 인생임을 먼저 알려주는 일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은 이미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고 있고, 교회는 나가지 않아도 자신은 그렇게 큰 죄를 지은 적이 없는 모범시민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먹을 것 입을 것이 있으니 그다지 목마른 인생이 아니라는 것이다. 잘못된 생각이다. 사단에게 미혹당한 아담과 하와와 같이 스스로를 속이고 또한 속고 있는 생각이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후 달라졌다. 특히 아담은 자신의 잘못을 그렇게 사랑했던 하나님과 하와 때문이라고 핑계한다. 그 모습이 지금 우리의 모습이다. 여러분 삶 가운데 온전한 사랑과 평안이 있는지를 보아야한다. 지옥의 삶을 이 땅에서부터 산다고 하는 증거는 사랑과 평안이 없는, 회개 없는 삶을 말한다. 이것이 죄인의 삶이다. 성경은 말한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 예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장).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 4:17)!
이용호 목사(시드니 달란트교회, 호주나눔선교회 대표)
